하마터면 남들처럼 살 뻔했다
 
지은이 : 송혜진
출판사 : 비즈니스북스
출판일 : 2018년 08월




  • 지방 전문대를 졸업했지만 전 세계 기업에서 러브콜을 가장 많이 받는 가구 디자이너로 변신한 문승지, 남들이 쓰고 남은 자투리를 모아 수십억 원의 컬렉션을 만든 크레이티브 디렉터 파스칼 뮈사르, 쓸모없는 고물을 보물로 재탄생시킨 중고나라의 이승우 대표까지! 이 책에는 보잘것없는 스펙과 이방인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세상과 정면승부해 성공을 거둔 23인의 성공 전략이 담겨 있다. 


    하마터면 남들처럼 살 뻔했다


    핑계 따윈 필요 없다_악조건을 자산으로 만든 사람들

    내 청춘에 핑계는 없다, 디자인 이단아가 날리는 열정 펀치

    돈도 ‘빽’도 없던 제주 소년

    소년 문승지는 원래 권투를 했다. 초등학생 때는 씨름 선수였다가 중학교 들어가서 권투를 시작했다.


    수술이 그를 바꿔놓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운동은 계속하기 어렵다고 했다. 꿈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마음 붙일 곳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중학생 문승지는 그때 그렇게 제법 긴 방황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우연히 미술학원 전단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맡았다. 그가 붙여야 하는 전단의 내용은 이랬다. ‘계원예대 2010년 신입생 모집. 내신, 수능 성적이 아닌 면접으로만 입학 심사.’ 문승지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성적을 안 본다니, 그럼 나도 원서 한번 넣어볼까?’


    그렇게 그가 지원한 곳이 감성경험제품디자인과(현 리빙디자인과)였다.


    1년 만에 쫄딱 망한 회사

    하루는 이러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취직하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답은 ‘글쎄’였다. 이번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그럼 사업을 하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대답은 ‘확률은 반반’이었다. 문승지는 이때 속으로 중얼거린다. ‘확률이 그래도 반이나 된다고? 그럼 한번 해봐야 하는 것 아냐?’


    그러나 디자인과 사업은 영 다른 세계였다. 회사는 1년 반 만에 쫄딱 망했고 1억 원 가까운 빚을 졌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살 돈도 모자랐다. 아예 창문조차 없는 지하실로 이사했다. 하루 10~15만 원씩 받는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빚을 갚아나갔다. 끼니는 매일 맨밥에 캔 참치만 먹으면서 때웠다. 그래도 절망적이었다. 문승지는 매일 밤 잠 못 들며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볼 순 없을지 고민했다. 그렇게 밤새 해외 디자인 사이트를 뒤지면서 뿌연 새벽을 맞던 어느 날 밤, 문승지는 우연히 한 디자인 웹진에 적힌 기자들 이메일 주소를 발견했다. 그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들에게 연락해서 내 작품이 외국 잡지에 실린다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을까?’ 문승지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코스에 책을 만들어 보낸 이유

    문승지의 인생은 이때부터 달라진다. 서면 인터뷰 요청 메일이 오고 한 달 뒤엔 39개국 210개 매장을 거느린 글로벌 패션회사 코스에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지금 영국으로 와줄 수 있나요? 당신 가구를 우리 전 세계 매장 윈도에 놓고 싶은데요.’


    문제는 영어였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게 들통 나면 이들이 같이 일을 하려고 할까 겁부터 덜컥 났다. 결국 문승지를 꾀를 내서 이런 답을 보냈다. ‘요즘 제가 일이 많아서 영국에 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디자인 도면을 상세하게 만들어서 보내드릴게요.’


    직접 가지 못하는 대신 이들을 탄복시켜야 했다. 애써 잡은 기회였다. 그냥 놓칠 순 없었다. 문승지는 도면만 만들지 않았다. 도면과 함께 제작, 조립 설명서를 아예 두꺼운 책 한 권으로 만들어 보냈다. 이케아 가구에 들어 있는 조립설명서 책자와도 비슷했다. 결국 코스 측은 문승지의 아이디어와 열정에 감탄했고 그의 작품을 2013년 35개국 45개 도시 매장에 전시했다.


    영어 한 마디 못해도 열정, 성실, 정직으로 성공하다

    브로큰잉글리시로 회사에서 1등이 되다

    나테라인터내셔널은 가족들이 100퍼센트 지분을 갖고 있는 패밀리 기업이다. 빚이 하나도 없는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니레버, 피앤지, 로레알 같은 공룡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지만 밀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영어 한마디 못하는 무급 연구원에 불과했다. 다른 미국 직원들보다 돋보이려면 성실함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앉아 미국인 동료들을 관찰했다. 뜻밖에도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심한 경우엔 시간만 때우고 가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띄었다. 송진국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들과 반대로 일해야겠구나.’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단순히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쌓인 업무를 빨리빨리 제대로 처리했다. 2주쯤 지났을까. 회사에서 그에게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800달러였다. 다시 몇 개월쯤 지났을까. 회사는 연구실 열쇠를 송진국 회장에게 맡겼다. 매일 연구실 문을 열고 닫는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2년쯤 지나자 이번엔 아예 연구실장 직함을 줬다.


    아무리 창피해도 세 번은 가라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송진국 회장은 직접 월마트, K마트 등을 다니며 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때도 여전히 영어는 짧았다. 바이어들은 그의 앞에선 열심히 웃고 박수를 쳐줬으나, 뒤돌아서선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그래도 송진국 회장은 그들을 다시 찾아갔다. 두 번째 세 번째 방문할 땐 그들도 웃음을 거두고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제품을 구입했다.


    송진국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망신당했다고 창피하다고 물러설 거면 애초에 미국에 오지 말았어야 했고, 사업도 시작하지 말았어야죠.”


    보검보다 좋은 식칼이 낫다

    처음 사업 시작할 때 그는 속으로 ‘100만 달러만 벌면 그만 일하고 쉬어야지’ 했다. 막상 100만 달러를 벌고 나니 그땐 또 400만 달러는 벌어야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400만 달러를 벌고 나니 이번엔 ‘그래도 수익 1,000만 달러는 달성해야 은퇴할 수 있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1,000만 달러까지 벌고 나니 이번엔 이런 마음이 생겼다. ‘은퇴하면 뭐해. 새로운 일을 해야지!’


    송진국 회장은 결국 새로운 꿈을 품게 됐다. 명품을 만들겠다는 꿈이다. 샤넬이나 루이비통 같은 값비싼 제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코카콜라나 빅맥, 박카스나 야쿠르트처럼 꾸준히 사랑받는 브랜드 하나쯤 만들고 죽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무협지를 보면 보검을 차지하려고 다들 싸우잖아요. 보검을 지닌 사람은 누군가를 죽이고 또 결국 죽임을 당하죠. 그런데 식칼을 지닌 사람은 그걸로 장사하고 돈 잘 벌 수 있단 말이죠. 저는 좋은 식칼을 만들고 싶어요. 직원들에게 헌신하고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가다 보면 식칼로는 1등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죠.”


    돈만 벌려고 일하지 않는다_회사란 무엇인가

    사람으로 위기를 이겨낸 257년의 기록

    모두들 후퇴할 거라고 했다. 디지털의 파고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물론이고 한창 가파른 성장세를 자랑하기까지 한다. 바로 2018년에 창립 257년을 맞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생산업체 독일 파버카스텔 얘기다.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필기를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게 현실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빈센트 반 고흐, 존 스타인벡 같은 이들이 사랑해온 연필도 어느덧 시대의 구물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문구 시장도 그렇게 후퇴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유로모니터를 비롯한 유럽, 미국의 시장조사 기관들은 오히려 펜을 포함한 필기구 시장이 2014년 162억 달러 규모에서 2020년엔 202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시퍼런스 대표에게 던진 첫 질문도 이것일 수밖에 없었다. “디지털이라는 위기를 어떻게 이겨낸 건가요?” 그는 빙그레 웃으며 오히려 이렇게 되물었다. “연필 회사가 257년이란 시간을 버티면서 그동안 위기를 몇 번이나 겪어왔을 것 같나요?”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지난 257년 동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위기를 넘고 또 넘으며 여기까지 왔어요. 그 위기를 버티게 해준 건 사람이었어요.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는 사람부터 생각했죠. 그게 우리의 전략이라면 전략일 겁니다.”


    절대 안 팔릴 것이라던 물건을 누구보다 열심히 만들 때

    파버카스텔이라는 회사에게는 오랫동안 꿈꿔온 목표가 있는데, 그건 바로 ‘연필에 있어서만큼은 없는 게 없는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이다. 다시 말해 제품을 세분화하고 다양화해온 것은 이 회사의 전략인 동시에 비전이자 원칙이었다는 얘기다. 1978년 무렵부터 아이라이너, 립스틱 등 메이크업용 펜슬까지 만들게 된 것이 바로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예라고 했다.


    전략만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파버카스텔의 꿈과 목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도 낳았다. 이때 이후로 많은 유명 화가나 디자이너들이 파버카스텔이 만든 전문 펜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오스카 코코슈카나 네오 라우흐 같은 유명 화가, 칼 라거펠트 같은 패션 디자이너가 파버카스텔 제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특히 네오 라우흐는 유화만 그리다가 파버카스텔의 수채 연필로 그림을 그리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위기일수록 사람에 투자한다

    파버카스텔 경영자들은 실제로 회사의 가장 큰 위기를 ‘사람’ 덕에 넘겼다고 믿는다. 시퍼런스 대표는 그 예로 2000년대 초 독일 많은 기업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공장을 동유럽으로 옮길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파버카스텔도 이런 흐름 앞에서 무척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다른 회사들처럼 파버카스텔도 공장을 체코로 이전할지 여부를 두고 진지하게 고심했다. 회사의 결론은 ‘독일 생산을 고집하자’였다고 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인건비가 아무리 든다고 해도 ‘독일제’라는 상표를 뗄 순 없다는 것. 파버카스텔은 독일을 대표하는 중소기업이고 이 점을 오랫동안 자랑으로 삼아왔는데, 공장을 체코로 옮기면 더는 자랑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무척 걸렸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더 흥미롭다. ‘독일에 있는 숙련된 직원들을 저버릴 순 없다’는 것이다. 이 직원들이야말로 오늘날의 파버카스텔을 있게 한 원동력이자 곧 파버카스텔 장인 정신의 정체성인데, 이들을 저버린다면 곧 파버카스텔의 미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는 것이다. 시퍼런스 대표는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정말이지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했다. 당시 동유럽으로 공장을 옮겼던 회사들은 나중에 또 다시 공장을 중국으로 옮겼다가 이제 와서 다시 독일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을 오래 운영하려면 단순히 인건비를 줄이는 것보다 제대로 된 직원과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그들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이 시퍼런스 대표의 분석이다.


    빵 하나로 전국에서 찾아오는 명소를 만드는 뚝심

    성심당은 기부하고 나누는 빵집으로도 유명하다. 매달 3,000만 원어치의 빵을 기부하고, 회사 수익의 15퍼센트는 무조건 인센티브로 직원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대전역 앞에서 찐빵을 파는 노점으로 시작해 빵집 세 곳과 식당 여섯 곳을 운영하게 되기까지, 4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기까지, 이들은 어떤 시간을 건너왔을까.


    300개 만들면 100개 나눠주는 이상한 찐빵집

    임길순이 찐빵을 파는 노점을 차리면서 작은 깃발로 된 간판을 걸었다. 깃발엔 성심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뜻이었다. 가게 행색이 초라한 데 비해 간판이 성스러워서 사람들에게 핀잔 꽤나 들었다지만, 임길순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막내아들 임영진은 이에 대해 참으로 특별한 분이었다는 말로 설명했다. 아버지 임길순은 그야말로 메러디스 빅토리아 호에 타자마자 했다는 결심, ‘남은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겠다’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임길순은 찐빵 300개를 만들면 200개만 팔고 100개는 먹을 것이 없는 이웃을 찾아 그들에게 주곤 했다. 장사가 목적이 아니라, 사실상 장사를 통해 먹을 게 없는 사람에게 뭔가 나눠주는 게 목적이었다.


    잿더미가 된 빵집에서 다시 시작하다

    2005년 1월 22일, 성심당은 잿더미로 변했다. 김미진은 그날 밤을 이렇게 기억한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서는데 하늘이 시커먼 그을음에 뒤덮여 온통 먹빛이었어요. 사람들이 ‘불이야!’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고요. 그 소리를 따라 가보니 성심당이 보이더라고요.”


    기적은 다음 날 일어났다. 뜻밖에도 다음 날 성심당 직원들이 잿더미 속에서 뒤져 찾은 집기를 꺼내 닦기 시작했다. 다들 일터를 잃게 됐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에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때는 1월, 춥고 시린 겨울날이었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현장에서 직원들은 잿더미를 뒤져 제빵 기계를 건져내 고쳤다. 그리고 그나마 불타지 않은 4층에서 다시 빵 구울 준비를 했다. 불탄 매장은 칸막이로 가렸다. 누군지 몰라도 ‘잿더미 속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고 써서 붙여 놓았다. 그리고 정확히 엿새 후에 이들은 그 임시 공장에서 밀가루를 빚어 빵을 구웠다. 앙금빵과 카스텔라였다. 다들 그 빵을 꺼내들고 엉엉 울었다.


    위기가 가져다준 선물

    화재의 충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매출은 금세 화재 전보다 30퍼센트가 올랐다. 김미진은 그때 비로소 앞으로 어떤 빵집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전까지 성심당은 남들과 똑같이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 애썼고 세련된 모습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막상 잿더미가 된 가게를 보고 함께 가슴 아파해주는 동네 사람들 앞에서 성심당 식구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 빵집은 굳이 세련될 필요가 없겠구나. 조금 촌스럽고 투박해 보일지언정 집밥처럼 구수하고 푸근함이 넘치는 곳으로 다시 단장해야겠다.’


    한번 콘셉트가 잡히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임영진 대표와 김미진 이사, 직원들은 맨손으로 매장 인테리어를 새롭게 바꿔나갔다. 기존의 대리석 바닥을 걷어내고 나무 마루를 깔았다. 가난한 사람이 들어와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편안한 빵집, 된장찌개처럼 어딘지 모르게 구수한 빵집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은 뜨끈뜨끈한 집밥처럼 따뜻한 갓 구운 빵을 내놓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큰딸 임선은 화재가 또 다른 전화위복이 됐다고 말한다. 그렇게 불이 나서 회사가 크게 어려워지고 나니 직원들 중에서도 회사를 관성적으로 다녔던 사람, 억지로 다녔던 사람, 회사에 해가 됐던 사람, 그런 사람들이 와르르 다 나가고 진짜 회사를 아끼는 사람들만 남게 됐다는 것이다.



    손익만 따지는 계산기를 버려라_확신의 기적

    돈에 현혹되지 않고 묵묵히 가는 디자인의 힘

    연예인과 말 안 섞는 조용한 디자이너

    반도패션(LG패션의 전신), 뱅뱅 같은 회사를 다니다 1988년 서울 신사동 작은 가게에서 솔리드옴므를 론칭했다. 재봉사 두 명 데리고 시작한 가게였다. 하늘하늘한 여성복보다 무덤덤한 남성복을 좋아했던 우영미였다. 솔리드옴므라는 이름도 다른 색깔이 섞이지 않았다는 뜻의 영어 단어 solid에서 따왔다. 이름처럼 무채색 원단을 섬세하게 바느질한 옷을 내놨다. 이문세, 이승철, 신승훈, 이승환, 윤상 같은 발라드 가수가 앞 다퉈 그를 찾기 시작했다.


    백화점에 입점했고 매장은 금세 30여 개로 불어났다. 2002년부터는 ‘우영미’라는 이름을 내걸고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쇼만 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옷을 팔던 것과 달리, 우영미는 파리에 직접 법인을 만들고 유럽 바이어를 대상으로 옷을 팔았다. 2011년에는 우리나라 디자이너 최초로 프랑스 파리 의상조합 정회원이 됐다. 정회원이 되려면 파리에서 꾸준히 활동해야만 하고, 프랑스 패션계 안팎 전문가로부터 검증을 거치는 것은 물론, 여러 브랜드 디자이너에게 추천을 받아야만 한다. 우영미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다 피가 나는 나날이었다.”고 했다.


    첫 쇼는 파리 호텔 방에서 재봉틀을 돌려가며 옷을 준비했다. 쇼 당일엔 다리미 하나 빌릴 데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쁘레따 뽀르떼 관계자는커녕 변변한 에이전트 하나 알지 못했기에 겪은 설움이었다. 몇 년을 그렇게 일해도 파리는 줄곧 냉정했다. 디자이너가 돈을 벌려면 쇼만 해선 안 되고 편집매장에 옷을 걸고 바이어에게 상품을 팔아야 한다. 유명 편집매장을 다 돌았지만 끊임없이 거절당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생소해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3년쯤 매일같이 거절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유명 편집매장 매니저가 우영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래도 좀 다르구나?”


    파리에서 쇼를 하는 디자이너가 한둘이 아니지만, 꾸준히 하는 디자이너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게다가 모르는 나라에서 온 디자이너니 그냥은 못 믿는다는 것이다. 결국 우영미가 몇 년을 꾸준히 버티는지, 그가 내놓는 컬렉션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지 한참을 지켜보고서야 그의 옷을 매장에서 받아준 것이다.


    한번 편집매장에 입점하자 우영미 옷은 곧 바이어들에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회사는 이후 줄곧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2006년 프랑스 봉마르셰 백화점에 입점했고 같은 해 파리 마레 지역에 단독 매장을 냈다.


    100년 가는 브랜드를 만들 때까지

    우영미는 업계에서도 욕심 없고 숫기 없고 타협할 줄 모르고 뻣뻣하기로 유명하다. 그동안 숱한 대기업이 우영미에게 브랜드를 팔라고 접근해왔다. 홈쇼핑 채널은 모두 우영미에게 라이선스를 팔아서 돈을 좀 벌라고도 했다. 우영미는 쇠심줄 고집이었다. “생각 없다”, “돈 안 벌어도 괜찮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옷을 그냥 만들겠다”고만 대답했다.


    한번은 그런 그에게 한 대기업 회장이 찾아와 매장을 보여달라고 했다. 한참 둘러보고 나서 그는 질문을 퍼부었다. ‘이거 만들어서 얼마나 버느냐.’ ‘옷 이렇게 깐깐하게 만들면 뭐 하나.’ ‘홈쇼핑 안하고 라이선스 안 팔고. 돈 벌겠냐.’ 그의 눈에 우영미 옷은 너무 비싸고 너무 공들여 만든 럭셔리였다. 돈이 될 장사 같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톱 디자이너들이 앞 다퉈 홈쇼핑에 뛰어들 때 독야청청 해외 시장만 파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영미는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회장님, 원래 패션이 수지가 안 맞는 일이에요. 대기업이 패션 가지고 수지 내려고 해서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죠. 패션은 축적입니다. 일단은 계속 들이부어야 해요. 돈과 시간과 노력을 쌓고 또 쌓아야 돼요. 그게 몇 십 년은 지나야 비로소 꽃이 핍니다. 저는 그래서 버텼고 앞으로도 버틸 겁니다. 우리도 100년 가는 브랜드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날 그 회장님은 우영미의 옷을 잔뜩 사들고 우영미에게 악수를 청하고 총총 사라졌다.


    무명 옷 25년, 수백만 땀으로 기운 사랑과 운명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오뜨 꾸뛰르

    문광자 옷은 우리나라에서 대단히 희귀한 완벽한 맞춤옷, 즉 오뜨 꾸뛰르다. 아직까지도 때론 드레스를, 때론 슈트를 한 땀 한 땀 손으로 깁는다. 그래서 한 벌에 때론 수백만 원씩 한다. 조선대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국제복장에서 수학한 후 고향 광주에 돌아와 스물 세 살 때부터 옷을 짓기 시작했다. 본래는 광주 YMCA에서 ‘드맹’ 연구소 간판을 걸고 의상실을 오픈했고 1968년 첫 패션쇼를 개최했다. 스물 여섯 살엔 정신과 전문의 이무석 박사(전 전남대 의대 교수)와 결혼했고 아이 셋을 낳았다. 일과 가정을 동시에 꾸려야 했다. 문광자는 고민 끝에 그가 사는 마당 넓은 한옥집에서 일을 지속했다.


    손님들은 이 집을 두고 ‘드맹 안집’이라고 불렀다. 당대 멋쟁이는 죄다 문광자 집으로 몰려들었다. 현재 드맹 대표인 문광자의 딸 이에스더는 당시 유치원생이었다. 섬돌에 놓인 신발을 보며 ‘아, 오늘 누가 또 오셨어요?’라고 묻곤 했다. 손님들이 옷을 맞추고 가봉만 하고 떠나면 문광자는 새벽까지 옷 패턴을 직접 떴다. 옷을 맞출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던 시절, 어떤 이는 시집가면서 결혼식장에서 입을 웨딩드레스와 결혼 후 사계절 입을 옷까지 40벌 넘는 옷을 한꺼번에 맞춰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문광자는 그때마다 손님 얼굴과 몸매, 분위기에 맞춰 매번 다른 옷을 만들었다. 단추 하나, 소맷단 하나도 다른 것을 골랐다.


    묵직한 무명 사랑

    문광자는 1992년부터 무명 옷을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만남은 운명이었다. 무명 천이 처음 손에 닿는 순간 불꽃같은 전율이 일었다고 했다. 거친 듯 묵직했고, 수수한 듯 도도했다. 게다가 제대로 짜낸 무명필은 물에 빨수록 빛이 났고 오래 묵어도 짱짱했다. 빨아 입을수록 아름다웠고 손때가 묻을 때조차도 근사해 보였다.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람, 그런 사람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기분이었어요. 내가 평생 찾아 헤맨 그 무엇을 만난 기분 말이에요.” 그가 문익점 23대손이라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문제는 무명이 그 투박한 겉모습과 달리 대책 없이 값비싼 원단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무명 천을 짜내는 명인이 더는 없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무명 옷을 짓는 건 어느덧 그에겐 소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시집 올 때 친정어머니가 짜준 무명필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은 다 만나고 다녔다. 그렇게 집집마다 다니며 옷장 속에 묵혀 있던 무명 1,000여 필을 겨우 구했다.


    2003년 미국 뉴욕 소호 앤섬갤러리, 2005년 하와이 비숍뮤지엄에서 무명 드레스 전시도 열었다. 2004년, 2014년에는 《무명》이라는 제목의 책도 펴냈다. 문광자는 책에 이렇게 썼다.


    ‘출산의 고통만큼이나 힘들다는 베 짜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미천한 옷감이 무명입니다. 수고로운 노동력에 비해 쓰임새가 거의 없어서 이제는 구하기도 어려운 소재죠. 그러나 무명은 담백하고 고상합니다. 무명의 올곧음은 기계적이지 않아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습니다. 인격에 비유한다면 수수하고 믿음직한 사람에 댈 수 있겠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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