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독,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지은이 : 조윤제 (지은이)
출판사 : 비즈니스북스
출판일 : 2024년 07월




  • 혼자 있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마음과 인생이 흔들리지 않고 안정될 수 있습니다. 고전의 지혜를 바탕으로 혼자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독의 개념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또한, 70여 개 명문장을 통해 혼자만의 시간을 가치 있게 활용하는 법과 부록인 〈신독 필사노트〉를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독,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내가 가장 경외하는 존재는 나 자신이다_신기독야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여백이 있다

    “은미할 때 방비하고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 마음을 지키는 법도다.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해 나감으로써 그 마음을 서로 도와 지키라.”


    주자의 ‘구방심재명’에 실린 글이다. ‘구방심재명’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곳에 새긴 글’이라는 의미로, 주자가 ‘맹자’에서 인용하여 제자 정정사의 재실에 남겨준 글이다. 그 전문은 이렇다.


    “천지에 따라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켜 인이라 한다. 그와 같은 인자함을 이루는 것은 나 자신에게 있으니 그래서 마음은 몸의 주인이 된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은 신명하기에 도무지 측정할 수 없지만, 만 가지 변화를 일으켜 사람의 근본을 세운다. 잠시라도 놓아버리면 천 리 밖으로 달아나니, 참되지 않으면 어찌 가지며 삼가지 않으면 어찌 보존하겠는가? 누가 놓아버렸고 누가 찾았는가? 누가 잃어버렸고 누가 가졌는가? 마음은 팔처럼 굽혀지고 펴지며 손바닥처럼 뒤집어지고 엎어지니, 은미할 때 방비하고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 마음을 지키는 법도다.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해 나감으로써 그 마음을 서로 도와 지키라.”


    짧은 글이지만 그 뜻은 깊다. 사람이 하늘과 땅과 함께 세 가지 소중한 존재인 삼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사람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근본이 되는 그 마음을 지키기는 어렵다. 무궁무진하게 변화하고 쉽게 흔들려 붙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놓쳐 버리고 만다. 이목구비의 욕망과 희로애락의 감정에 빼앗기기 때문이다. 한 번 놓쳐 버린 마음은 쉽게 찾을 길이 없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주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찾고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와 방법을 알려준다. 먼저 마음이 바로 내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몸이 내 것인 것처럼 마음도 역시 내 것이다. 보존하는 것도 ‘나’이고, 놓쳐버리는 것도 ‘나’다. 앞에 실린 “누가 놓아버렸고 누가 찾았는가? 누가 잃어버렸고 누가 가졌는가”라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이치를 말한다. 팔을 마음대로 굽히고 펴는 것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몸을 제대로 지키고 보존하려면 좋은 식사와 적절한 운동 그리고 절제가 필요하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맹자가 ‘공부의 시작과 끝은 오직 마음을 지키는 데 있다’라고 했던 것처럼 마음을 내 것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공부가 필요하다. 주자는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해 나감으로써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공자의 제자 자하가 말했던 공부의 법칙으로, 일상에서의 배움을 뜻한다. 특히 혼자 있을 때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예문에 있는 “은미할 때 방비하고 홀로 있을 때 삼가라”가 바로 그것이다.


    은미할 때는 마음속 작은 징조가 싹을 트기 쉽다. 일상에서 남겼던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온 마음을 잠식해 버린다. 잠식된 마음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이 훌쩍 떠나 버리기도 쉽다. 아무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가 되는 순간은 마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 또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공상과 욕심에 떠밀린 마음을 붙잡고 잠잠히 자신을 돌아볼 때 아무런 가식도, 허식도 없는 본연의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어떻게 지켜야 하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럼으로써 관계에 얽매여 의무감이나 책임감, 중압감에 억눌리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홀로 설 수 있다.



    사람은 고개를 돌릴수록 성장한다_반구저기

    주변이 어지럽다면 내가 어수선하지 않은지 돌아보라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살아간다. 이익이나 재물, 혹은 권세와 같은 세속적인 욕심만이 아니다. 나 자신을 완성하는 수양, 남을 돕기 위한 자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명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해서 모두 얻지는 못하기에 열심히 노력하다가도 낙심하고 포기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 상황에 매몰되지 말고, 그 상황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고전은 권한다. 옛 선비들의 경지인 안빈낙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설사 어려움에 처해도 잠잠히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를 때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맹자는 또 하나의 길을 가르치는데,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반구저기’의 자세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서 가다듬어 나갈 때 어려움을 타개할 길이 열리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예문의 앞뒤에 실린 글이 그것을 말해준다.


    “남을 사랑하는데 친해지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인자함을 돌이켜 보라. 남을 다스리는데 다스려지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돌이켜 보라. 남을 예로 대하는데 화답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태도가 공경스러운지 돌이켜 보라.”


    삶의 모든 순간 뜻한 바를 얻지 못하면 반드시 먼저 자신의 부족함이 없는지를 돌아보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가 잘못되면 나 자신보다는 먼저 다른 데에서 이유를 찾아낸다.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심지어 하늘을 원망하면서 자기 처지를 한탄한다. 맹자는 그에 앞서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권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라면 자신보다는 남을 보기가 쉽다. 눈은 앞을 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야를 거슬러 나 자신을 돌아보려면 특별한 노력과 경지가 필요하다. 맹자는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고말한다. 예문의 뒤에 실린 글이다.


    “자신이 바르면 반드시 천하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시경’에는 ‘영원히 천명과 합치되려고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한다’고 했다.”


    단순히 좋은 일이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천하를 얻을 수 있다! 맹자가 그 근거로 든 것이 바로 ‘시경’에 실린 구절이다. ‘천명을 따르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시경’의 ‘대아’에서 주나라의 창업 기반을 닦은 문왕의 공적을 찬양한 부분이다. 맹자가 특히 좋아해 여기뿐 아니라 ‘공손추 상’에서도 인용했다.


    “‘시경’에서는 ‘영원히 천명과 합치되려고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한다’고 했고, ‘상서’의 ‘태갑’에서는 ‘하늘의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재앙을 부르면 망하고 만다’라고 했다.”


    예문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도 맹자가 강조했던 바는 반드시 ‘스스로’ 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복도 재앙도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도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은 하루 동안 오만 가지의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한다. 그 생각의 많은 부분이 근심과 걱정이다. 일상의 고민에 빠져 스스로를 한탄하며 괴로워할지, 잠잠히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의 평안을 얻고 인생의 먼 이상을 돌아볼지는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는 스스로 복을 구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스스로 복을 부르는 사람은 하늘도 아낌없이 돕는다.



    나를 깨달아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_지자자지

    오늘은 어제의 더께를 비워낸 새로운 날이다

    학문은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의 가장 핵심적인 덕목 가운데 하나다. 공자의 사상을 모은 책 ‘논어’는 학문으로 시작해서 학문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문을 통해 스스로 수양하고, 가진 지식으로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공부에 대해 평생을 두고 쌓아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자는 진정한 배움이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도를 이뤄가는 과정으로 봤다. 마음에 있는 탐욕과 아집을 날마다 덜어냄으로써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상태, 즉 무위를 이루는 것이다. 예문이 실린 ‘도덕경’ 제48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배움은 날마다 더해가는 것이고, 도는 나날이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무위에 이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못하는 것이 없는 무위이무불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천하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 무언가를 해서 얻으려고 한다면 천하를 얻을 수 없다.”


    ‘무위이무불위’는 역설의 철학자인 노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이러한 이치를 체득하기는 어렵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자 사상에서 최고의 가치인 ‘도’를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보면 당연하다. 심지어 노자 자신조차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라 하고, 억지로 ‘대’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노자의 철학에서 ‘도’란 자연을 상징한다. 자연은 만물의 근원이지만 한계가 없기에 만질 수도 없고 그 실체를 명확히 정의하기도 어렵다. 만물을 입혀 주고 길러 주면서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주인 노릇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란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예문에서 노자는 도에 이르는 길을 일러준다. 바로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 배움을 통해 지식과 지혜는 채워 나가고, 도를 닦으면서 탐욕과 아집을 버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머리는 비우고 마음은 여러 가지 욕심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다.


    지식은 세상을 공부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배우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게 한다. 세상 속의 한 존재로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 안에서 바르게 살아갈 힘을 얻게 한다.


    도는 나 자신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소명을 부여받았는가? 이러한 질문을 떠올리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을 아는 것은 위대한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바탕이 된다. 광대한 자연 속에서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스스로 낮추는 ‘겸손’을 체득하고 곁에 있는 모든 주어진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하늘과 땅과 함께 위대한 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날마다 비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지다.



    몸에 새기고 마음을 벼리듯 공부하라_절차탁마

    오늘 시작하고, 내일 길들이고, 모레 되새긴다

    ‘손자병법’에는 훌륭한 장수가 반드시 지녀야 할 다섯 가지가 실려 있다. 바로 지, 신, 인, 용, 엄이다.


    ‘지’는 상황을 읽고 정세를 판단하는 지략이다. 지략은 폭넓은 군사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배워 익힌 지식을 실전에 적용시킬 수 있는 사고력은 물론 경험과 경륜이 뒷받침돼야 한다.


    ‘신’은 자신의 신념과 소신을 확고히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부하들로부터 확고한 신뢰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장수는 솔선수범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만 챙길 줄 아는 상사는 누구에게도 믿음을 얻지 못한다.


    ‘인’은 부하들을 사랑과 배려로 이끄는 것이다. 장수가 사랑과 배려로 군대를 이끌면 중간 간부들은 장수를 진정으로 따르고, 병사들은 목숨을 바쳐 충성한다.


    ‘용’은 용맹스러움을 뜻하지만 단순히 담대한 성정과 맹렬한 투지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용기가 지나쳐서 만용이 돼서도 안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무모함이 돼서도 안 된다. 장수의 용맹은 냉철한 판단과 과감한 결단력을 가리킨다.


    ‘엄’은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이다. 위엄 있는 튼실함과 철저함이 장수에게 갈무리되어 있어야 군대의 기강을 지킬 수 있다. 평소에는 부하를 사랑으로 대해야 하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위엄을 지켜야 한다. 특히 명령의 엄정함과 확고한 위계질서는 조직을 운영하며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요소다.


    지략, 신의, 사랑, 용기, 엄정. 이 다섯 가지는 훌륭한 장수가 지녀야 할 핵심 자질이며, 이를 모두 갖춘 장수가 이끄는 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손자는 말했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여몽은 장수로서 다른 자질은 충분했지만 학식이 모자란 것이 유일한 흠이었다. 오의 황제 손권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여몽에게 자신도 책을 계속 읽고 있다고 하면서 “후한의 광무제는 변방의 전장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위나라의 조조는 늙어서도 배우기를 즐겨 했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황제의 충고에 크게 깨우친 여몽은 전장에서도 책을 늘 가까이하고 정진함으로써 평소에 그를 업신여기던 대도독 노숙을 경탄하게 만든다. 노숙은 군영에서 촉나라의 명장 관우에게 맞서는 대책을 논의할 때 여몽의 다섯 가지 대책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노숙은 여몽에게 “나는 이제껏 자네를 무용과 군사적 지략만 있을 뿐이라 업신여겼는데, 이제는 학식도 뛰어나니 예전의 여몽이 아닐세”라고 말했다. 그 말에 여몽은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이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여몽은 용맹한 무장은 물론 지략을 갖춘 지장까지 되어 노숙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대도독이 되었다.


    훌륭한 장수가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과 능력을 말해주는 고사이지만, 여기서 사흘이라는 시간에 주목해보자. 고사에서 이야기하는 사흘이란 단순히 삼일이라는 기간이 아니라 ‘못 보던 시간’이라는 의미다. 예전의 나와 확실히 결별하고 완전히 변모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모든 관계와 단절하는 시간도 포함된다. 항상 어울리던 익숙한 사람, 하던 일의 타성에 젖어 있으면 새로운 나로 바뀔 수 없다.


    그래서 익숙한 것과 단절된 나만의 시간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 시간에 남다른 노력을 쏟을 수 있다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자신이 될 수 있다. 당연히 잠시 나에게서 떠나있던 사람들의 눈은 놀라움에 크게 뜨인다.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되었구나!”



    자신이 그리워질 때까지 고독하라_오우아

    사귐이란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극심한 가난과 절박한 현실로 인해 이덕무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 역시 같은 형편이라 만나서 교류하기는 쉽지 않았다. 현실이 이렇기에 좋은 친구와의 따뜻한 만남을 이덕무는 항상 그리워했다. 예문은 그 마음을 표현했던 글이다. 그의 문집 ‘선귤당농소’에 실려 있는데, 이렇게 이어진다.


    “그 기회는 어찌 이리 드문가? 일생에 겨우 몇 번 허락될 뿐이다.”


    항상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좋은 벗을 자주 만나면 좋겠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다. 가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이룰 뜻이 있기에 함께할 시간을 만들기가 어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은 더욱 간절했기에, 시와 글을 통해 이덕무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고도 그 간절함이 채워지지 않으면 상상 속의 만남으로 친구와의 회포를 풀었다.


    “단 한 사람의 지기를 얻는다면 나는 십 년간 뽕나무를 심고, 일 년간 누에를 쳐서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색깔을 물들인다면 쉰 날이면 다섯 빛깔이 되겠지.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후 어린 아내에게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과 아름다운 옥으로 액자를 만들리라. 그리고 까마득히 높은 산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 사이에 이를 펼쳐 놓고 말없이 마주보고 앉아 있다가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진심으로 나를 알아주는 지기는 쉽게 만날 수 없다. 이덕무는 평생을 두고도 몇 번 만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설사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가장 소중하고 그리운 존재가 바로 친구다. 십 년의 정성을 들여 그림으로라도 만나기를 원하는 존재가 벗인 것이다. 이덕무는 이런 마음을 글로 표현했다.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가 진정한 친구의 척도는 아니다.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회포를 푸는 사이라고 해서 진정한 친구는 아니다. 함께 공부를 하고, 같은 직장에서 동고동락한다고 해도 역시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같은 장소, 같은 스승에게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길을 가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다. 물론 가끔 만나 회포를 푸는 친구도 필요하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절실한 벗은 진정으로 나를 알아주는 친구, 또 하나의 내가 되어 함께 인생길을 가는 친구다. 그런 친구는 쉽게 만나지 못한다.


    공자는 ‘논어’의 맨 첫머리 글에서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군자의 즐거움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아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글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먼저 공자는 삶의 의지를 다지고 뜻을 이루는 데 친구라는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 간에는 물리적인 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찾아오는 친구가 소중하다. 그때 만남은 최고의 즐거움이 된다. 벅차고 힘든 일상에서 목마를 때 마시는 시원한 샘물처럼 휴식을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언제나 함께할 수는 없다. 이덕무는 이러한 아쉬움을 상상 속의 만남으로 풀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오히려 친구의 소중함을 새기는 시간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구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나면 즐겁지만 헤어지고 나면 공허함만 남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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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