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자신감을 트레이닝한다
 
지은이 : 김가희 (지은이)
출판사 : 서사원
출판일 : 2024년 05월




  • 힘든 역경에 부닥칠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답을 찾고자 노력했던 저자가 목표한 바를 이루어내는 경험을 전합니다!


    나는 매일 자신감을 트레이닝한다


    나는 부자가 될 거야

    단란주점 골목, 우리 집

    어릴 때 나는 단란주점이 있는 골목에 살았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아빠와 살던 경기도 구리시 수택동 작은 집을 떠나 엄마와 나, 여동생은 이사를 갔다. 세 모녀가 살려고 엄마가 얻은 집 주변에는 빨간 불빛이 일렁였다. 유흥업소가 즐비한 동네였다.


    “이런 곳에서 산다고?”


    교복을 입고 집에 갈 때마다 술 취한 사람과 마주쳤다. 답답해서 창문을 열면 만취한 아줌마, 아저씨가 “바람을 폈네 안 폈네”하면서 박 터지게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벽마다 창문은 단란주점 LED 불빛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럼에도 ‘지하에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노숙하지 않아서 괜찮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집으로 오기 전에 엄마는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넥타이에 라벨을 붙였다. 엄마가 하루 종일 앉아서 넥타이 라벨을 붙이면 겨우 만원을 벌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 금액은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나와 동생 밥 차려주는 시간 외에는 한시도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좋아하는 칸쵸가 500원이었다. 엄마가 최소한 20개를 꿰매야 과자 1개를 겨우 사줄 수 있었다.


    친구들이 학원 갈 시간에 나는 집에서 독학을 하거나, 집 근처를 하염없이 배회했다. 그러다 라이터 뽑기에 빠져버렸다. 다들 인형 뽑기는 친숙할 것이다. 집 근처에 술집이 많아서였는지 라이터 뽑기가 유독 많았다.


    엄마가 주신 소중한 1,000원을 뽑기 기계에 넣었다. 못 뽑았으면 그만뒀을 텐데, 1,000원을 넣으면 항상 1개는 뽑았다. 나중에는 실력이 좋아져서 1,000원에 5개를 뽑은 적도 있다. 그렇게 뽑기에 중독되었다. 한 번은 책 산다고 거짓말하고 모은 돈을 기계에 털어 넣은 적도 있었다. 1,000원짜리 싸구려 승리감에 젖어들었던 것 같다. 만약 주인아저씨가 세팅을 바꾸지 않았다면, 뽑기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서 ‘중독’에서 의지만으로 빠져나오는 게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화하려면 환경 자체를 바꿔야 했다. 그 경험을 계기로 TV를 없애기로 결심했다. 1등을 하려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공부해야 하는데, 집에만 오면 TV를 무의식적으로 켰다. 숙제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TV를 보다가 복습시간을 종종 놓쳤다. 커서 ‘바보’가 되겠다 싶어서 엄마에게 말씀드렸다.


    “공부가 안 되는 걸 TV탓 하지 마라, TV가 싫으면, 밖에 나가서 공부해라.”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가 서운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엄마 말이 맞았다. 독립하는 방법이 있었다. 엄마에게 TV가 소소한 위로를 주었을 텐데, 그걸 무참히 빼앗을 필요는 없었다. 내가 새로운 환경을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굳이 환경을 바꿔주지 않는 엄마를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21살 대학생 때 독립하자마자 TV가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TV없는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갔고, 지금도 집에 TV가 없다. 그 결과 줄곧 1등을 했다. TV를 없앴더니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공부하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운동을 했다. 21살에 자기 계발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부모는 자녀에게 가장 큰 환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주지 못한다며 온갖 투정을 부린다. 나 역시 그랬다. 부모님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이 발전에 유리한 환경을 선택하면 된다.


    나는 단란주점과 모텔이 즐비한 곳을 벗어나 TV가 없는 환경을 만들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 1등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성적도 수직상승했다. 주어진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당신에게 언제나 선택권이 있다. 올바른 환경을 선택하면, 그 환경이 나의 미래를 찬란하게 바꾸기 시작한다.



    편부모 가정, 기초생활수급자, 핸디캡이 아닌 인생 스펙이다

    황금 인맥은 부지런한 두 발에서 만들어진다

    등록금을 제외하고, 장학금만 3,000만 원을 받았다. ‘대학내일’ 신문에 내 스토리가 기사화된 적도 있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요?’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절대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노트북이 필요하면 노트북을 받을 수 있는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을 했다. 대학생 활동비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경험을 쌓았다.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었던 건 금두환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분은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거나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가서 만나라’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을 가졌고, 무슨 꿈이 있는지 설명만 해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한국장학재단 앰배서더 활동을 했다. 지역별로 팀이 나누어져 있었다. 나는 강원도에 있는 대학교에 다녀서 강원팀에 속했다. 거기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이도 학년도 다 달랐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냈던 나의 시야가 엄청 넓어졌다. 나에게 물리치료에 관한 지식이 있다면, 친구들에게는 경영학, 언론학, 철학, 경제학, 광고학 등 다양한 전공이 있었다. 함께 힘을 합쳐서 한국장학재단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게 목표였다.


    그 다음으로 내가 찾아간 곳은 ‘강연기획그룹 드림포레스트’였다. 직접 강연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신익태 소장님이 리딩하는 전국구 동아리였다. ‘강의할 수 있어야 진짜 스펙이다’라는 드림포레스트의 슬로건에 흠뻑 매료되었다. 나는 강원도에 있는 전문대생이었지만, 드림포레스트를 통해서 이화여대로 멘토링을 나가기도 했다.


    드림포레스트에서는 크리틱이란 특별한 문화가 있었다. 각자 진행한 프로젝트에 대해서 건설적인 피드백을 나눴다. “누구님의 강의는 오늘 너무 길었어요. 핵심 키워드를 더 강조하면 메시지 전달이 잘 될 것 같습니다.” 등 돌아가면서 강의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다음으로 나는 다이어트 회사에 제안하기를 도전 과제로 삼았다. 대학생 때 물리치료를 공부하며, 특히 운동 치료를 열심히 연구했다. 덕분에 체형교정 다이어트 상담을 할 수 있었고, 필라테스 강사로도 활동했다. 나는 대학생을 위한 다이어트 캠프를 진행하고 싶었다. 다이어트 캠프 사장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제안서를 만들었다. 결국 마케팅 홍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생 20명을 다이어트 캠프에 무료로 2박 3일 체험하게 해주면, 대학생들이 블로그 포스팅을 3개 작성하는 형태를 생각해냈다.


    원하는 게 있다면 ‘가서 만나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강력하게 실행했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황금 인맥이 생겼다.  대학생 때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서 배우고 성장했다. 공부보다 10배 이상 재미있었다. 여러분도 성장하고 싶다면, 황금 인맥을 만들고 싶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 황금 인맥은 내가 만드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가서 만나라.’ 내가 지금도 인맥을 만들기 위해 쓰는 방법이다. 여러분도 꼭 실천하기 바란다.



    운명처럼 여성 생리주기 트레이닝을 만나다

    생리주기 트레이닝? 이게 정답이구나!

    피트니스 대회를 여러 차례 참여하면서 몸에 부작용이 생겼다. 닭고야(닭가슴살, 고구마, 야채 식단의 줄임말) 식단만 오랫동안 고수했더니 입 안이 헐었다. 아무리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 운동하다가 인스타그램에 예쁜 사진 한 장 올리고 싶어서 카메라를 켜면, 몰골이 너무 못생겨 보여서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고 했다.


    피트니스 대회를 준비하며, 태어나서 가장 핏한 몸매를 만들었다. 하지만 얼굴과 건강을 모두 잃어버렸다. 더 예뻐지고, 건강해지려고 몸을 만드는 트레이너가 된 건데, 최선을 다했더니 도리어 반대의 결과를 얻었다. 이 과정을 겪으며, 내가 선택한 다이어트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반적인 다이어트 상식이 나에게 맞지 않는구나. 그럼 나에게 적합한 다이어트 방법은 뭘까?’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하나씩 검토했다. 갑상선 질환, 허리가 긴 체형, 하체비만, 평발, 여자라서 생리를 한다는 것까지. 하나씩 확인해보니 다른 요소들은 전부 고려해서 운동을 했지만, 유독 ‘생리주기’만 고려하지 않았다.


    트레이닝할 때 생리주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겪은 불편한 경험 때문이었다. 트레이너는 직업 특성상, 남자 직원의 비율이 높다. 당시 내 주변에는 생리통으로 일을 쉬는 여자 직원을 정신력이 낮은 사람‘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티를 내지 않고, 끝까지 참다가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생리로 인한 몸 상태를 고려해서 운동하면, 정신력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지적 받을까봐 억지로 생리의 존재를 무시했다. 생리 기간에도 매일 더 강도 있게 운동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여성이 나조차도 생리에 대한 부정적인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


    나는 물리치료 학문을 전공했기 때문에 남녀의 해부학적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남자에 비해 여자는 보편적으로 팔과 다리가 휘어 있어서 여자에게 맞는 운동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리주기 트레이닝은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하는 퍼스널 트레이닝은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었다.


    여성의 생리주기를 고려해서 다이어트를 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연구에 돌입했다. 네이버를 검색해도 정확한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연구 논문도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영어권 논문에는 여성의 생리주기에 따라 운동 실험을 한 연구들이 있었다. 모집단이 작아도 효과가 있다고 검증한 논문들의 결과는 대동소이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생리기 때는 생리통의 정도에 따라 운동 강도를 조절하고, 생리가 끝난 일주일에는 고강도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이 핵심 원리를 내 몸에 적용했다. 그 결과 얼굴과 몸매가 엄청 예뻐졌다. 온몸에 활력이 돌아왔다. 결국 여성들에게는 ‘생리주기 트레이닝’이 답이었다. 내 몸이 또 한 번 멋있게 변하면서 퍼스널 트레이너라는 직업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여성분들에게 생리주기 트레이닝의 핵심 이론을 설파하고 중요성을 납득시켰다. 생리주기 트레이닝을 하고나서 정체기를 오랫동안 겪은 여성 회원들의 살이 다시 쑥쑥 빠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들이 생리통이나 월경전증후군이 심할 때 컨디션에 맞지 않게 매일 고강도 트레이닝을 해서 오버트레이닝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증가했고, 오히려 살이 빠지지 않았다.


    반대로 ‘생리주기 트레이닝’을 적용해 운동 강도를 적절하게 변화시켰더니, 과도한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 없이 살이 잘 빠졌다. 이 일을 계기로 여성 다이어트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생리주기 트레이닝이 여성 다이어트에 정답이라는 사실이다. 살이 안 빠지는 정체기가 고민인 사람, 살을 쉽게 빼고 싶은 사람은 꼭 한 번 생리주기 트레이닝을 경험해보길 바란다. 생리주기 다이어트의 중요성을 알았으니, 실행만 하면 생리통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원하는 만큼 다이어트를 손쉽게 할 수 있다.



    월 90만원 알바생에서 연매출 10억 CEO가 되다

    승승장구, 클레어 피트니스 1호점에서 3호점까지

    20대 길었던 직장 생활을 마치고 30살에 사업의 길로 들어섰다. 나의 꿈인 여성 전문가로 이뤄진 여성운동센터 창업은 ‘클레어 피트니스’를 통해서 현실로 펼쳐졌다.


    클레어 피트니스는 이름 하나하나에 의미와 정성 그리고 회원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클레어 피트니스’는 남편이 지어준 이름이다. 남편은 창의성이 뛰어나서 작명을 잘한다. 여성들을 위한 그룹 운동에는 ‘투게더 레슨’, 1:1 여성 전문 트레이닝에는 ‘프라이빗 레슨’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프라이빗 레슨을 PT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존 PT와 차원이 다른 고객 만족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과 언어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객들이 PT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창업한 센터 반경 1km 안에는 헬스와 필라테스 사업장이 20개나 넘었다. 헬스장 오픈만으로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없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하이퀄리티’ 전략이었다. 우리 피트니스 업계에는 아직도 무자격자 트레이너가 많다. 그래서 고객들이 PT를 받을 때 검증된 선생님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7년 이상 경력을 갖춘 전문가를 팀원으로 뽑았다. 게다가 모든 선생님들이 미국 공인 여성 피트니스 전문가 자격(NASM-WFS)을 갖추었다.


    1호점이 성공한 만큼 동업자들과 함께 결정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뽑고 관리할지, 2호점은 어떻게 오픈할지 등등. 결정할 사안이 많아지고 대화를 자주할수록 의견 일치를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꼈다. 결국 동업 1년 만에 관계를 정리하게 됐다. 클레어 피트니스는 최종적으로 내가 리더로 남았다.


    ‘좋은 회사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남은 직원들과 새롭게 회사의 비전을 세웠다. 미친 듯이 사업에 전념했다. 1호점이 3호점까지 확장되었고 직원 수는 30명 규모가 되었다. 지점장이 생기고 직원들이 승진하기 시작했다. 꿈꿔왔던 리조트로 전 직원 워크숍도 가고, 2021년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클레어 피트니스’는 연매출 10억을 달성했다.


    창업 2년 만에 소상공인이 아닌 소기업을 만들 수 있었다. ‘많은 여성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위대한 기업’ 2021년에 나는 그 꿈을 드디어 이뤘다. 클레어 피트니스는 승승장구했다.



    모든 여성이 건강해지는 날까지, 아름답고 치열하게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대학생 때 매일 아침 운동장을 뛰면서 이 말을 외쳤다. 당시 나는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못하면 빚을 지거나 휴학을 해야 했다. 매일 노력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이번에 1등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있었다.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감보다 불안감이 커진다. 포기하고 싶고, 그러면 나만 손해니까 뭐라도 해야 되는데, 일은 손에 안 잡힌다. 그럴 때마다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불안감을 쫓기 위해 지금까지 꾸준히 해온 필살기가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를 아침마다 외치는 거다. CEO가 된 지금도 똑같다. 오전 시간에 나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산다. 남편과 함께 아차산 등산을 가기도 하고, 건대 캠퍼스 트랙을 뛰기도 한다. 어린이대공원에서 여유롭게 모닝 롤러코스터도 타본다. 햇빛을 맞으며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동네 바보처럼 보일 만큼 힘차게 외친다.


    ‘나는 할 수 있다’


    급하지 않으면 되도록 점심부터 일을 한다. 아침에 실컷 놀다오면 점심부터는 일이 하고 싶어진다. 사업 초반에는 계속 일을 붙잡지 않으면 불안해서 운동도 못했다. 그런데 성숙해지면서 쉼을 허락하게 되었다. 아침에 집중해서 신나게 놀고, 오후에는 뜨겁게 일한다.


    일과 쉼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비결은 무의식에 깊이 새겨진 ‘나는 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지금도 연료가 바닥나지 않도록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한다. 이 간단한 방법이 지금의 김가희를 만들었다. 독자 분들도 꼭 실천해보길 바란다.


    ‘나는 할 수 있다’의 힘을 절실히 깨달은 순간이 있다. 트레이너를 관리하는 리더 역할을 해오면서, 팀빌딩 과정에서 숱한 실패를 경험했다. 몸과 마음은 완전히 망가졌다.


    한두 번 넘어졌을 때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하는 게 쉬웠다. 4번 정도 연거푸 실패하니까 부정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5번째 팀빌딩에 좌절했을 때는 내 생일에도 침울했다. 스스로 무능하다는 생각에 축하도 거부했다. 한동안 전부 내려놓고, 쓰러져서 잠만 자고 싶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문구를 계속 되뇌었다. 침실 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을 때는 누워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몇날 며칠 베개에 누워 아침마다 ‘나는 할 수 있다’를 읊조리면 어느 날, 집 안으로 쏟아지는 햇볕이 너무 예뻐서 문득 나가고 싶어진다.


    예전처럼 활기차게 살고 싶다는 희망이 꿈틀거린다. 드디어 집 밖으로 한 발 내딛을 때, 차가운 공기가 정신을 일깨운다. ‘아 시원하다’ 가만히 걸어본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가고 싶은 만큼 가고  걷고 싶은 만큼 걷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매일 작은 걸음을 반복하다보면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이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내면에 쌓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바뀔 만큼 시간이 걸리지만 몸도 마음도 결국 회복된다.


    오랜 시간이 치료에 필요할 수도 있다. 인생의 어두운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중요한 건 겪이지 않고 뚜벅뚜벅 걷는 거다. 여러분이 ‘나는 할 수 있어’ 한 번 외칠 때마다 돼지 저금통에 동전이 들어가는 것처럼, 긍정의 말이 내면에 쌓인다. 힘들고 지쳐서 누워만 있고 싶은가? ‘나는 할 수 있다’고 조용히 말해보자. 에너지가 넘치는가? 동네를 방방 뛰면서 행진하듯 외쳐보자.


    요즘에 나는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롤러코스터 맨 앞자리에 타면서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친다. 옆자리에 탄 초등학생이 힐끗 쳐다보면 ‘너도 할 수 있다’고 여유롭게 응원한다. 산봉우리에 서서 ‘나는 할 수 있다’ 목 놓아 외친다. 그 소리가 메아리로 주변 사람에게 퍼져나간다. 긍정의 힘을 받아서 누군가는 박수치고, 누군가는 따라서 소리친다. 하산하는 할아버지들은 내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뭔지 모르지만 젊은이 진짜 해낼 수 있을 거 같다’며 응원을 해주신다.


    나는 오늘도 마음 은행에 긍정을 저축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지출을 대비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의 체력을 미리 축적해야 아픈 시기가 오더라도 버틸 수 있다. 여러분도 평소에 ‘나는 할 수 있다’ 긍정을 저축하면서 긍정 부자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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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