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지은이 : 우즈홍(역:박나영)
출판사 : 리드리드출판
출판일 : 2022년 01월




  • 혼자 있으면 외롭고,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1인 가구가 늘면서 혼자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외로움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생활방식과 과도하게 완벽주의를 추구하면서 찾아오는 외로움은 부정적인 내면세계를 만들어 자신과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렵게 한다. 저자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일은 연결에서 탄생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가족관계, 친밀한 관계를 포함해 모든 관계를 이야기하며 관계의 본질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탐색할 수 있게 한다.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내 안의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 VS 사랑

    나르시시즘이 인생을 디자인한다

    나르시시즘은 4단계로 나뉜다. 첫째, 건강한 자기애로 ‘자신감’이다. 활력을 얻고 스스로 성장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둘째는 ‘오만함’이다. 자신감을 넘어선 단계로 독선과 아집을 부른다. 셋째는 자기 유약함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의심병’이다. 항상 자기 몸과 마음이 약하며 병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주관적인 신념이 강해지는 ‘망상’이다. 현실적인 근거를 무시하고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며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여긴다. 정신과에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아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느낌에 기초하고 있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외부, 내부 정보를 모으고 타당한 근거가 마련되면 자연스럽게 나르시시즘으로 발전한다. 이런 자기애는 생각과 행동의 구심력이 되어 말투와 행동, 주장의 표현 강도, 자기 확신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의 인정이나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면 자칫 나르시시즘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오만함에 독선과 아집이 생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떠나고 지탄받는다.


    자기애와 더불어 중요한 것이 통제감이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정보와 자아를 결합하고 이에 맞춰 말과 행동을 자제하고 조심하는 것이다. 이때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자신에게서 분리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아는 문제나 전문적 요소에서는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모르는 분야나 까다롭고 나중에 문제가 될 부분에서는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당연한 이치 같지만 여기에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가 깔려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근거가 충분히 모이면 핵심 자아가 확립된다. 그로 인해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자신을 신뢰하게 되고 자아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기본적인 나르시시즘이 형성되지 않은 경우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라는 내면의 메시지가 자아를 산산조각낼 수 있기에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고 지적에 예민해지는 것이다. 상대의 말 한마디에 수렁에 빠지는 것처럼 자신감을 잃고 의지를 잃으며 의욕을 상실한다. 그로 인해 자아가 지탱해내지 못한다.


    나르시시즘 VS 관계

    나르시시즘은 자아도취가 아니다

    높은 나르시시즘의 수준을 가진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은 매사에 양보한다. 사사건건 따지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신 양자 간 애착 관계의 패턴을 형성한다. 높은 나르시시즘의 수준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일을 저지르고 참는 사람이 뒷수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매사에 자신이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과 주변 상황을 모두 좋게 평가한다. 관계 차원의 선악을 감지하지 않으며 판단을 유보하지 않고 둔감하게 작용시켜 자기기만으로 방어 메커니즘을 만든다.


    억눌린 사람은 단 한 가지 실수에도 반성하고 자아도취형은 자신이 한 가지만 맞고 남은 아홉 가지가 틀려도 그 한 가지 맞는 점을 확대해 해석한다. 이로써 우려되는 점은 억눌린 사람은 매사를 따질 필요가 없으므로 잘못 인정을 하나의 전략으로 이용하지만, 반복되다 보면 진심으로 자신이 정말 잘못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네가 이치에 맞다’라는 생각을 자아도취형에게 심어주지만 정작 양보하고 맞춰준 자신은 나르시시즘이 손상되는 결과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자아도취형은 계속해서 자아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억눌린 사람은 계속해서 억눌려 있게 된다. 그 결과 관계의 차원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갈등이 터진다.


    모든 사람의 말과 행동에는 일리가 있다. 모두 자기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기에 자기주장의 근거가 있고 이치에 맞으며 타당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양쪽 모두 편하게 존재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는 두 마음 간 여백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심리적 공간은 ‘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내 주장의 문제는 무엇일까?’라는 인정과 반문이 동반되면 마련된다.


    나르시시즘 VS 일상

    몰입하지 않으면서 몰입을 가정하지 마라

    몰입의 두려움은 그 일의 ‘결과’에서 나타난다. 몰입했다면 자신이 심혈을 기울였다는 의미이고 노력했다는 증명이다. 그럼에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존감에 손상을 입는다. 자기 능력이 부정된 것만 같다. 심각한 경우 자아의 붕괴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 같은 요소를 방지하고 스스로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나’의 몰입을 통제하는 것이다.


    몰입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예로 사랑을 들 수 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의 신호를 보냈는데 거절당하게 되면 자아의 붕괴가 일어난다. 왜 거절당했는지 곱씹으며 자신의 부족한 점에 집중해 스스로 못난 사람을 만든다. 이후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회피하고 정열적인 사랑의 감정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패가 가져오는 자기부정을 막을 수 있다면 몰입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비범한 성과를 거둔다’는 생각은 오히려 노력할 수 없게 만든다. 노력하지 않고 몰입하지 않으면 이 가설의 영향력이 그나마 살아남기 때문이다. 자신은 비범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데, 다만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회피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두고 싶은 것이다. 진짜로 몰입하고 노력해서 이 가설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결국, 자신이 완벽하다는 환각이 폭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노력을 멈추게 만든다. 이런 심리는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간단명료하다. 세상 혹은 특정 대상이 자신의 소망에 정확하게 호응해주기를 바라는 요구이다. 그 소망이 정확하게 응답되는 순간 자신이 전능하고 완벽하다고 평가받는다고 여긴다. 그 결과 그는 어떤 것에도 몰입할 수 없다.


    지속적인 노력을 유지하려면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긴 어려움을 잘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전능한 나르시시즘에 갇혀 사는 사람은 작은 좌절에도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해 나르시시즘이 무너지는 상황을 초래한다. 자아가 단단한 사람은 특정한 일에 실패했다고 생각할 뿐 자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지속해서 노력하고 몰입 가능한 사람은 지금 당장 이 일을 해내지 못하지만 노력해 언젠간 이와 관계를 맺고 장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컨디션이 좋기를 신에게 기도한다.



    내 안의 외로움

    나 더하기 외로움

    전능한 나르시시즘이 관계의 장애물일까

    자신을 사랑하면 상대를 자기 시스템에 끌어들인다. 이타적 사랑은 자신이 상대방의 시스템에 들어가는 것인데 진정한 사랑은 두 사람이 각자의 시스템에서 걸어 나와 만나는 것이다.


    사랑은 연계이다. 원시적인 외로움에 갇힌 사람은 실연한 사람이다. 사람 간의 연계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계를 끊은 정도가 심각할수록 사람은 자신을 신이라 여기며 외부 세계가 자신의 의지에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과 불쾌감에 빠진다.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이해하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 반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른 분노는 상대방의 생각, 행위 등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든다. 많은 폭력성이 이와 관련 있다.


    자신을 지나치게 억누르는 사람도 자신이 신과 같다는 나르시시즘일 수 있다. 그들도 쉽게 분노를 느끼지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분노를 억누른다. 그러나 통제력을 잃는 순간 그들은 파괴적인 폭력성을 띨 수 있다.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을 판단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내 판단에 얼마만큼의 확신이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판단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안정감과 통제력을 주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의 여지는 언제나 남는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확신은 다른 사람에게 강제한 이미지이며 일종의 침입이다. 따라서 그 판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타인에 대해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정의 내려서는 안 된다. 더구나 우리의 판단은 틀릴 가능성이 더 크다. 선입견과 편견을 불러와 관계의 파국에 불씨가 된다.


    확고함의 이면에는 모호함이 존재한다. 모호함은 사람에게 불안을 주기도 하지만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창의력을 측정하는 기준 중 하나가 모호함을 용인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신의 판단에 대한 강한 확신은 높은 나르시시즘을 의미하기에 자신만의 세계에서 머물게 한다. 자신의 사고와 연계를 맺고 접촉하며 관점을 확고히 다지므로 창의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큰 원칙은 소통과 해명이다. 우리 판단은 언제나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반드시 당사자의 확인을 받아야 진실이 밝혀진다. 상대와 소통해야 이면을 볼 수 있다. 관계에서 부딪히며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현실 테스트 능력’이라 불리는데 이 검사를 거치지 않으면 자기 판단은 망상이 된다.


    관계 더하기 외로움

    관계는 부딪침에서 발생한다

    일본 디자이너 야마모토 요사는 “한 사람의 자아는 관계의 충돌에서 형성된다.”라고 말했다. 대단한 인물들은 사람과 일의 충돌을 훌륭하게 이겨내고 승리한 사람들이다. 심도 있는 충돌은 막대한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면에는 위대한 충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과 충돌하면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어 유대감이 깊어지거나 관계가 끝나는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이때 관계를 끝내는 것이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대상이나 목표로 나아가는 길에서 장애물을 만나 충돌하면 이를 극복하고 원하던 성공을 이룬다. 외적인 강력한 객체와 부딪침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두운 잠재의식과의 충돌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더 많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더욱 강력한 자아를 단련시킬 수 있다.


    친밀관계에서 두 사람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전반적으로 서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발전되면 말다툼 정도는 괜찮다. 의견의 조율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순조롭게 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갈등과 반목을 반복하다가 최종적으로 합일되기도 한다.


    관계의 ‘독’이 무엇인지 표현하고 그것을 감각화해야 독을 없앨 수 있다. 상대가 그 독을 인지할 수 있도록 들려주거나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그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면 관계는 이어지고, 해결되지 못하면 관계는 끝난다. 관계는 사람을 성장시키고 단련시키지만 관계가 유지될 동력이 없으면 두 사람 모두 성장할 기회를 잃는다.


    관계를 통한 생생한 경험은 살아 있는 증거다.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받아도 풍부한 경험을 하지 못한 인생은 창백하고 궁핍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지대로 생명을 펼치고 다른 존재와 진정으로 접촉하는 것만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가족 더하기 외로움

    부모는 자식에게 독립을 권하라

    우리는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에게 의지하면 책임감도 없고 독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런데 자녀의 여러 문제로 인한 독립이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반대로 자녀와 헤어지지 못하는 부모 때문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부모는 자녀의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부모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을 아이에게 강요하거나 대신 달성해주기 바라는 경우가 많다. 많은 아이가 부모의 뜻에 맞춰 미래를 설계하고 살아간다. 이때 부모의 의지 전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하나는 부모가 자녀에게 자기 뜻을 분명하게 명시해 강요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가 명시하진 않았지만 자녀가 부모의 아쉬움을 채워주고자 하는 잠재된 전가 방식이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콘은 “자녀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한다.”라고 말했다. 자녀가 부모를 위해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며 부모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강조한다. 실제로 이전 부모 세대는 집안의 경제 사정이나 사회적 환경으로 개인의 의지를 펼칠 공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삶에서 큰 아쉬움을 남겼다. 그로 인해 자녀 세대는 부모의 ‘의지 릴레이’에 참여하게 되고 대리만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동안 사회는 개인의 의지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이 크게 확장되면서 부모의 의지보다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이나 사회활동을 하면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을 자녀가 해소해주길 은근히 바란다. 부모인 자신들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 또한 이와 같은 심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부모의 선의라고 하더라도 아이에게는 심리적 정서적 압박이 될 것이다.


    사랑 더하기 외로움

    자기 소멸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의 요구라면 주저 없이 자신을 변화시킨다. 특히 사랑하고 있다면 “네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어.”라는 이야기에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을 탈바꿈하려 든다. 그 결과로 상대방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너무 쉽게 변화되면 상대는 오히려 흥미를 잃는다. 다름이 주는 매력이 사라지고 개성이 소멸되어 자신에게 자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결혼 생활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난다.


    부부관계에서 자기중심적인 두 사람이 잘 융합되려면 한 사람이 자기를 소멸시켜 상대의 요구에 전적으로 맞춰야 한다. 그러나 이는 한 사람의 신체, 심리 심지어 외적 커리어까지 점점 소멸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면서 부부 중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사랑에서 “내가 좋다고 했으니 너도 내가 좋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실망하고 너는 나쁜 사람이 된다.”라는 심리는 매우 위험하다.


    이와 반대로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증명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좋아한다는 말을 기대하지 않고 너를 통제하지도 않는다.”, “나에게 안 좋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니 무조건 나를 좋아하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대처는 서로에게 안정감을 준다.


    사랑에 너무 애쓰면 오히려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두 사람 모두 불편을 느끼고, 그중 한 명은 자신의 감정이 억압된다고 느낄 수 있다. 자신을 억누르며 상대에게 애쓰는 노력은 사랑에 인위적인 느낌만 줄 뿐이다.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자기감정이 아니기에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나쁜 점을 감추고 좋은 것만 보여주며 이루어내는 사랑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다.


    상대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 입증받으려 하지 말자. 온전히 좋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때 상대는 그 모습을 사랑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불러온 사랑이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준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본성 자체가 답이고 삶 자체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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