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어떻게 내 삶을 바꾸었나
 
지은이 : 이종훈
출판사 : 북카라반
출판일 : 2019년 02월




  • 고교 2학년 말 성적, 전교 755명 중 750등 야구 포기생. 제51회 사법시험 합격에 이어 판사로 변신하기까지 이종훈 씨의 인생 역전 휴먼 스토리. 


    공부는 어떻게 내 삶을 바꾸었나


    포기는 습관이다

    의지박약아

    나는 어린 시절 야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의지박약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의지력이 약했다. 하기 싫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특히 공부는 나하고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학교에 숙제를 해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혼이 나는 건 다음 날의 문제일 뿐이었다. 부모님이 등록해주신 학원도 빼먹기 일쑤였다.


    어렸을 때 살았던 우리 집은 초등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었다. 창문을 열면 학교 운동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집에 있는 것보다 운동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야구, 축구, 농구 등 온갖 운동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운동은 야구였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야구를 했고, 눈이 오면 아침 일찍 운동장에 나가 눈을 치우고 야구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말랑말랑한 고무공을 주먹으로 치는 야구와 유사한 게임을 하다가 3학년 정도부터는 배트와 글러브를 갖춰서 본격적으로 동네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 몰래 학원을 빼먹고 야구를 하다가 들켜서 매를 맞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의 야구에 미쳐 있었다.


    어렸을 때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새벽 5~6시면 벌떡 일어나서 야구공을 들고 운동장에 나갔다. 당시에는 학교 운동장 개방시간이 있어서 아침 7시 정도가 돼야 운동장을 개방했는데, 운동장 개방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학교 운동장 담을 넘어 들어가서 야구를 했다. 왜 그렇게 야구가 좋았는지 모르겠다. 야구선수를 시작하기 이전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온통 야구뿐이다.


    아버지는 운동을 좋아하셨다. 웬만한 운동은 다 잘하시는 편이고, 관심도 많으셨다. 그래서 이런 나를 나쁘게만 보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야구에 미쳐 있던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야구를 하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야구배트와 글러브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그라운드에서 뛰다 죽을 각오로 야구선수 한번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렇게 해서 나의 야구선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계도 넘어본 사람이 넘는다

    중학교 1학년 여름쯤 되었을까? 우리 팀 감독님이 바뀌었다. 감독님이 바뀌면서 코치님도 함께 바뀌었는데, 이때 중고등학교 시절 야구를 하면서 내게 큰 영향을 주신 유상준 코치님과 만나게 되었다. 코치님은 야구의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을 많이 강조하셨는데, 그때 코치님께 지도를 받으면서 정신적인 부분이 강해질 수 있었다.


    장거리 러닝도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초등학교 때보다는 더 잘 뛰게 되었다. 힘들 때 참아내는 방법을 조금씩 깨우쳐갔다. 그렇게 조금씩 의지력과 근성이 생겼다. 단거리 러닝에서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선천적인 요인에서 생긴다. 하지만 장거리 러닝은 다르다. 끈기와 참을성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장거리 러닝을 잘 뛰는지 못 뛰는지 결정된다.


    포기는 습관이다. 포기하는 사람은 계속 포기한다. 반대로 한 번이라도 한계를 넘어본 사람은 계속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장거리 러닝을 하면서 자신의 한계와 마주친다. 숨이 막히고 다리가 무거워서 도저히 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속도를 늦추면 그 사람은 절대로 실력이 늘지 않는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더 이상 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에 더 힘차게 발을 차올려야 한다. 죽을 것 같지만 절대 죽지 않는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다음 번 장거리 러닝을 뛸 때는 이전보다 더 잘 뛸 수 있게 된다. 종전에 넘었던 한계를 다시 넘는 건 처음만큼 어렵지 않다. 사람은 가보지 않으면 갈 수 없다. 넘어서보지 못한 사람은 계속 넘어설 수 없다.


    코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운동을 마치는 그 순간에는 서 있을 힘도 없을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고 운동장을 떠나라고. 장거리 러닝은 운동 코스 중 가장 마지막에 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러닝을 마치면 그날 운동은 끝이었다. 그래서 뛰면서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넣는다고 생각하며 뛰었다. 더는 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릿속으로 내게 반문했다. “내가 여기서 멈추면,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로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니었다.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쥐어짜듯 뛰었다. 그렇게 한계의 순간을 이겨내는 방법을 깨우쳤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게 되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해내게 된다.


    야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하면서도 야구할 때 배웠던 것들을 그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 운동과 공부, 어찌 보면 전혀 다른 분야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공부는 단거리 러닝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야구를 하면서 배운 끈기가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주전을 꿈꿨던 ‘주전자 선수’

    전교 755명 중 750등

    중학교 야구부는 학교 수업을 모두 듣는 반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보통은 1교시만 마치고 운동을 한다. 모든 수업에 참여하는 중학생 때도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운동부가 공부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업에 들어가서도 딴 짓을 하기 일쑤였고, 시험 기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시험공부를 해본 적은 없다. 수업이 끝나면 운동을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단체훈련을 하고 단체훈련이 일찍 끝나면 몇몇 친구들과 남아서 개인훈련을 했기 때문에 수업 시간은 왠지 쉬는 시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꼴찌를 면할 수가 없었다. 전교 755명 중 750등. 인문계와 실업계로 분리되는 고등학교에서는 일반 학생들보다 성적을 잘 받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시험 시간에는 한 번호로 쭉 찍고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문제를 풀든 한 번호로 찍고 나오든 어차피 점수가 비슷비슷했기 때문이다.


    야구를 하다가 그만두면 일반적으로 학교 공부를 해볼 엄두조차 못 낸다. 중학생 때 비교적 빨리 그만두더라도 공부의 기초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일반 대학이 아니라 체육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내가 야구를 했던 때와는 달리 운동부도 수업에 전부 참여하도록 하고 대회도 주말에만 여는 ‘주말 리그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유소년 야구의 저변이 넓지 않아 소수의 엘리트 야구선수를 육성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특성을 고려하되, 중도에 운동을 그만둔 학생들이 낙오되지 않고 일반 학생들과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잘 마련되어 운영되기를 희망해본다.



    ‘운포자’, 공부를 시작하다

    꿈을 포기하다

    나는 7년간 야구를 했지만 썩 잘하진 못했다. 자존심이 세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야구를 하면서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야구 자체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히려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야구 외적인 이유로 야구가 싫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아직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기도 했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충분히 야구를 잘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단체훈련뿐만 아니라 단체훈련 이후에도 대부분 남아서 개인훈련을 했다. 그렇게 1년 이상을 보냈다. 열심히 했기 때문에 실력도 그만큼 늘긴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좌절감이 컸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고, 고등학교 2학년이 지나면서부터 장래에 대해 막연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단체 운동이 끝나고 혼자 야구부실 뒤 벤치에 멍하니 앉아서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야구를 그만둔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건 내가 생각해볼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영역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10월, 제주도에서 열렸던 전국체전을 마치고 열흘 정도 휴가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방으로 부르셔서 말씀하셨다. “야구를 그만두는 것도 한번 생각해보지 않겠느냐. 하지만 만약 네가 야구를 계속하기를 원한다면 끝까지 지원해주겠다”는 취지셨다. 내가 상처를 받을까봐 굉장히 조심스레 말씀하셨던 거 같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지였지만, 의외로 담담했다. 그때쯤엔 이미 나 역시도 내가 더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딱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던 그런 상태. 그래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선택지였지만 결정이 빨랐다.


    일주일 정도 고민 끝에 야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야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해서 성공할 수 있다거나 무언가 다른 계획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었다. 단지 야구를 계속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어차피 야구로 대학에 진학하거나 프로에 가지 못할 것이라면 야구선수로서의 생명을 1년 더 연장한다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야구를 그만둘 결심을 하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도 들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엄청 컸기 때문이다.


    내가 야구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선천적인 재능이 부족했거나. 하지만 자존심 센 성격 때문인지 혹은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거 이외의 것으로 좌절을 겪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지금도 내가 야구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선천적인 재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재능과 재미라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천직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어린 나이지만 깨닫게 되었다.


    7년 동안 꾼 꿈을 포기함으로써 청소년기를 허비했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7년간 야구선수로 살아온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남들보다 일찍 경험한 실패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했고, 다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책상에 앉으면 잠이 오는 이유

    야구를 그만두고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평생 해보지 않았던 공부를 하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책상에 앉으면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졸음이 쏟아졌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피곤하지는 않은데 잠이 온다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운동을 하다가 그만둔 때라 체력이 오히려 남아돌아서 문제일 정도였는데, 책만 펴고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멍한 상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잠이 왔다.


    시트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내게는 현실이었다. 찬물로 세수도 해보고, 밖에 나가서 찬바람을 쐬어보기도 하고, 운동도 해보고,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세수해도 그때뿐이었고 다시 책상에 앉으면 어김없이 잠이 쏟아졌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좀이 쑤셔서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20분 이상 책상에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20분 단위로 공부를 하다가 쉬고, 다시 20분을 공부하는 방식으로 겨우겨우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서 생기는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공부를 시작한 후 2~3개월 정도 꾸준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자 졸음이 쏟아지는 이상한 현상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고, 책상에 앉으면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공부를 하지 않다가 하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참을성을 가지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못하면 재미가 없고 잘하면 재미가 있다. 재미가 있으면 잘하게 된다. 야구를 할 때도 체력훈련을 하든 타격훈련을 하든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이것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고통스러움을 참고 버틸 수 있다. 밤새도록 방망이를 휘두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다음 날 배팅훈련을 할 때 좋은 타격이 나오면 전날의 고통을 깨끗이 날아가고 기쁨과 즐거움만이 남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밤에 남아서 개인연습을 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재미가 없다. 하지만 결과의 달콤함을 알기 때문에 참고 버틸 수 있다. 힘든 순간을 참고 견뎌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온 보상을 경험해본 사람은 또다시 힘은 순간을 이겨내지만, 항상 그 순간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바람에 달콤한 보상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은 다시금 그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이기는 사람은 계속 이기고, 지는 사람은 계속 지는 현상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계속 공부를 잘하게 되고,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계속 못하게 되는 현상. 이것은 비단 공부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선순환의 연속, 악순환의 연속이라고 부른다. 현재 공부를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악순환의 고리만 한 번 끊어낸다면 공부를 잘하게 되는 선순환의 고리로 들어설 수 있다. 처음이 가장 어렵다. 악순환을 끊어내는 첫 단추는 오직 의지력이다.


    닥치고 암기

    고등학교 2학년 10월에 야구를 그만두고 12월초쯤 처음으로 학교 기말고사를 보게 되었다. 야구를 그만두기 전 전교 석차는 755명 중 750등이었고 반에서는 52명 중 51등이었다. 기말고사를 볼 당시 중학교 1학년 영어, 수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나는 내신을 위해 기말고사를 최대한 잘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과목들은 적어도 한글로 쓰여 있기 때문에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았지만, 문제는 영어와 수학이었다.


    할 수 없이 고등학교 2학년 영어, 수학 참고서를 무조건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런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당장 성적을 조금이라도 잘 받기 위해서는 그 방법뿐이었다. 영어는 일단 한글로 쓰인 해석을 통째로 암기하고, 영어로 된 본문은 영어사전으로 단어를 하나하나 전부 찾았다. 거의 모든 단어가 모르는 단어였기 때문에 한 페이지에 있는 영어 단어를 다 찾는 데만 한두 시간씩 걸렸다. 일단 영어단어를 다 찾은 다음에는 단어를 암기하고, 어느 정도 단어가 눈에 익은 다음부터는 해석을 보면서 영어로 된 본문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다. 그렇게 반복을 해도 중학교 1학년 영어를 공부하던 내 실력으로는 해석이 잘되지 않았다. 그나마 해설 부분을 외운 기억으로 드문드문 해석을 이어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학교시험에서는 대부분 교과서를 중심으로 출제되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 당일에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풀어야 할 문제와 그 지문이 영어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지를 발휘해서 눈치껏 정답을 고르긴 했지만, 영어에서는 기대했던 것만큼 점수를 얻을 수 없었다.


    수학도 문제였다. 나는 당시 중학교 1학년 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과였던 관계로(야구부는 본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이과로 배정되었다) 미적분과 확률, 통계 부분이 시험 범위였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온통 숫자와 그래프로 뒤덮여 있는 교과서를 나를 공황 상태에 빠지게 했다.


    나는 무작정 외우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무작정 외우는 것은 전혀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시간이 지나면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휘발성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암기였다. 어찌 되었건 시험 범위를 무조건 외우기 시작했다.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처음에 읽을 때는 도저히 모를 것 같은 부분도 두세 번 반복해서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책을 읽으면서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나름의 이유를 가져다 붙이면서 암기 분량을 줄이려 노력했다. 이 기간에는 자면서도 꿈에서 낮에 공부했던 내용을 복습하곤 했다. 의욕만큼은 최고였던 시기였다. 



    기적은 내 안에 있다

    첫 타석 포볼, 느낌이 좋다

    그렇게 전쟁과 같았던 나의 첫 번째 시험이 끝났다. 우리 반 52명 중에서 27등. 소위 말하는 암기 과목들은 생각보다 점수를 잘 받았지만, 영어와 수학, 물리 점수가 바닥이었다. 27등.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내가 27등이라니!’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등수였다. 담임선생님이 성적표를 주시면서 “야구부, 너 커닝한 거 아니야?”라고 농담조로 말씀하실 정도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성적표를 받고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노력한 대가로 얻은 첫 결과물이었다. 이것이 ‘공부 못하는 꼴찌’라는 악순환을 끊고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선순환으로 나아가게 된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겨울방학이 되었을 무렵에는 중학교 1학년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언어영역과 사회탐구, 과학탐구영역은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내 하루하루 열심히 공부했고 드디어 고등학교 3학년에 진학하게 되었다. 3학년 때는 다행히 이과보다 공부량이 적은 문과로 전과할 수 있었다. 고3이 되자 학교에서는 본격적으로 수능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체제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 영어, 수학을 배우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영어와 수학은 정상적인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른 과목들은 수업 시간에 충실히 따라가는 것을 목표로 하되 영어, 수학 시간에는 자습을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났을까? 처음으로 수능시험 대비 전국 모의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400점 만점이었는데 230점정도 맞았던 거 같다. 조금 실망도 했지만, 고작 석 달 공부한 것치고는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역시 작년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영어는 참고서를 사서 시험 범위에 있는 해설 부분을 달달 외우고, 단어를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서 단어장에 정리해 암기한 후 영어로 된 본문을 수없이 반복해서 해석했다. 수학은 교과서의 예제와 연습문제 해답 부분을 달달 외웠다.


    그렇게 중간고사 기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50여 명 중에서 14등. 굉장히 고무적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등수였기 때문이다. 곧이어 1학기 기말고사에서는 10등 안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쉽게도 11등에 그쳤다.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기초가 없는 국영수 과목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점수를 올리는 데 한계가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꼴찌에서 10등 근처까지 오는 것보다 10등 언저리에서 단 몇 등을 올리는 것이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야구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노력의 대가가 그대로 실력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공부는 노력의 대가가 비례적으로 성적에 반영되었다. 사람마다 반영되는 정도가 다를 수 있지만, 공부는 반드시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 이것이 성취욕을 자극하고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하였다. 선생님과 부모님에게는 칭찬을 받으니 금상첨화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자퇴, 그리고 검정고시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난 뒤 개학을 하고 나서 처음 본 수능 모의고사에서 280점 정도를 맞았다. 처음에는 전문대학만 갈 수 있어도 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이 계속 오르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내신 성적이었다. 야구를 그만둔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 때부터는 성적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지만, 1~2학년 때 성적이 계속 전교 꼴찌 수준이었기 때문에 내신이 매우 좋지 않앗다.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자퇴를 결심했다.


    수능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처럼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 수능시험을 볼 수 있게 마련된 제도가 있다. 바로 대입검정고시다. 학교를 자퇴한 이듬해 8월, 대입검정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다행히 합격이었다.


    수능시험, 인생의 첫 번째 안타

    수능시험과 사법시험 공부 과정을 돌이켜보면, 난 한곳에 잘 정착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무언가 계속 변화를 추구했다. 공부가 잘 되지 않거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의를 다질 때면 공부 장소를 바꾸곤 했다. 수능시험을 준비할 때도 학원에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혼자 공부햇고,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는 학교 고시반, 신림동 고시촌, 집 근처 독서실, 산속에 있는 고시원 등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수능시험을 본 당일은 사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날 긴장되어 잠이 들지 못했던 것과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때 어둑어둑하던 학교의 모습만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원점수 총점 364점.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


    수능시험을 준비하면서 대학에 가면 어떤 학과가 있는지 잘 몰랐고, 무엇을 전공할지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해볼 계기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결국 학원에서 배치표를 하나 구해 와서 점수대에 맞는 대학과 학과를 골랐다. 인문계에서 가장 많이 간다는 법학과와 경영학과에 원서를 썼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인하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사법시험에 도전하다

    가슴 뛰는 두 번째 일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누구나 그렇듯 정말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춘천에 있는 102 보충대에 입대했는데 보충대에서 신체검사를 받던 중 재검 판정을 받고 퇴소해야 했다. 다시 2학년 1학기 복학 후 인하대학교 병원에서 재검을 받았고, 4급 판정이 나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운동까지 한 내가 4급 판정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축농증이 있긴 했는데 하도 어렸을 때부터 격은 증상이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재검을 받고 보니 왼쪽 코 안에 물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찌 되건 그렇게 재검을 받은 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다시 입대하였고, 2년 4개월 동안 공익요원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훈련소를 퇴소한 후 처음 배치 받은 곳은 구청 산하의 도서시설관리공단이었다. 주차장과 수영장 중에서 수영장에 배치되었다. 처음 배치되어서는 일도 익숙하지 않고 이것저것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무언가를 공부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사법시험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막연히 ‘법무사 시험을 볼까?’ 아니면 ‘변리사 시험을 볼까?’라는 생각을 했다(이 시험들은 사법시험에 버금갈 만큼 어려운 시험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무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어디 물어볼 선배도 없었기 때문에 혼자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사법시험, 법무사시험, 변리사 시험 모두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과목이 민법이었다. ‘일단 민법 공부를 좀 해보면서 차차 결정하자’라는 생각으로 민법 공부를 시작했다.


    공익요원으로 근무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 짬짬이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단기간에 합격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고 공익 근무기간을 유용하게 보내보자는 의도로 시작한 공부여서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둥 마는 둥 민법 공부를 하다가 공익 생활이 거의 끝날 무렵 ‘기왕에 공부를 시작한 거 되든 안되든 사법시험에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림동에 가서 강의 테이프를 사다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법학에 흥미를 붙였고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처음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단순히 법학과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나도 한번 봐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해가면서 차츰 법학이라는 학문에 매료되었다.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바가 많다는 점에서 법조인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직접 도와줄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점이 매력이었다. 이것이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과정과 사법연수원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법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고, 야구 이상으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흥미와 재미가 나로 하여금 법조인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공부하면서 때때로 좌절한 적도 많았지만, 열심히 연구해서 법리를 깨우칠 때마다 느끼는 즐거움이야말로 힘든 과정을 즐겁게 헤쳐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일구이무

    영원한 삼진 아웃은 없다

    야구선수를 할 때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것이 야구를 그만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면 야구를 그만둔 후 공부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공부는 항상 내가 투자한 만큼의 결과물을 내게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성취욕이 강한 나를 자극했다. 내가 투자한 시간에 비례해서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다. 공정하다고 느껴졌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사법연수원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도 ‘공정성’이었다. 사법시험을 보는 데 다른 자격은 필요 없다. 그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묻지 않는다. 고졸이든 전문대졸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로지 모든 응시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된다. 출발점이 같다. 얼마나 공정한가? 이것이 사법시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20대와 20대 초반에 공부를 못했거나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해서 평생 ‘공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가 아니라, 그 누구든 최소한 동일한 출발점에서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 ‘패자부활전’이 존재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과거에 한 노력들을 부정하지는 않되, 과거에 노력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역전의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공부는 9회 말 투아웃이다

    새로운 시작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한 이후 여러 번의 인상 깊은 시점들이 있었다. 바로 사법시험 2차에 최종 합격하던 날, 사법연수원의 입소식과 수료식, 변호사로서 처음 업무를 시작하던 날 등이다. 판사가 가지는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그중에서도 판사로 임관하던 날이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2017년 판사로 임관한 후 일산에 있는 사법연수원에서 4개월간 신임법관 연수를 받았고, 2018년 4월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배치되었다.


    판사는 재판을 통해 어느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고,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기도 한다. 어렵고 무거운 자리다. 이제 또 다른 의미에서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과 가치관의 충돌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균형감각과 공정한 안목을 갖추고, 당사자가 승복할 수 있는 재판을 하기 위해 또 다시 부단히 노력할 것을 다짐해본다.


    * 9회 말 역전 공부법: 합격을 위하여

    막판 정리를 하라

    고시 공부를 하면서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열심히 하는 놈은 머리 좋은 놈을 못 따라가고 머리 좋은 놈은 방금 본 놈(그 내용을 방금 공부한 사람)을 못 따라간다’는 것이다. 재미있으라고 누군가가 지어낸 말이겠지만, 고시계에서 격언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다. 결국 막판 정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시험 보기 바로 직전에 공부한 내용은 무조건 맞힐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시험공부에 한해서는 막판 정리가 공부의 최종 목적지라고 보면 된다. 누차 강조하지만 사람의 기억력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시험에 근접한 시점에서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시험장에서의 단 하루를 위해 오랜 기간 시험 준비를 하며 쏟아 부은 시간과 열정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막판까지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감을 가지라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다. 공부 방법이 잘못되었음에도 다른 사람의 조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불통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공부 방법에 대해 확신을 하고 결과에 자신감을 가지라는 뜻이다. 어떤 시험이든 결과는 불확실하다. 자신이 하는 공부와 그 결과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면 가뜩이나 힘든 수험 생활이 더 힘들어진다.


    집중력 있게 공부하라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만 한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는 건 아니다. 얼마나 집중력 있게 공부를 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책 속에 완전히 빠져들어야 한다. 나는 잡생각이 드는 그 순간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휴식을 취하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매순간 집중력 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다만 휴식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공부의 흐름이 끊어지므로 휴식 시간은 10분을 넘기지 않도록 유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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