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맥주 이야기
 
지은이 : 무라카미 미쓰루 (지은이), 김수경 (옮긴이)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24년 04월




  •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과 시원한 거품으로 사람을 매혹하는 맥주! 마르틴 루터를 도와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끌고, 히틀러와 나치스 정치 폭동의 도구로 전락해 세계사를 뒤흔든 두 얼굴의 맥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계사를 바꾼 맥주 이야기


    World History of BEER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맥주 이야기

    19세기에 아메리카로 수출된 독일 아인베크 맥주병 라벨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까닭

    뤼베크, 브레멘, 함부르크, 쾰른, 도르트문트 등의 북독일 도시들은 한자동맹에 가입하며 왕성한 해외 무역 활동을 펼쳤다. 12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수백 년간의 상황이다. 수공업자들의 조합 길드는 온갖 종류의 상품 생산을 담당했다. 그중에서도 맥주는 가장 중요한 수출 품목 중 하나였다.


    당대에 유럽 맥주 애호가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맥주가 있었다. 아인베크(Einbeck)의 길드가 생산하는 맥주였다. 아인베크 맥주는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1800년대의 상황이다. 한데 흥미롭게도 맥주병 라벨에 유럽에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보크비어와 마르틴 루터의 기묘한 조합이 이루어진 배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권력은 필연적으로 독선을 낳고 부패와 타락을 불러온다. 단언하건대, 역사를 통틀어 여기에서 자유로운 나라도 시대도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심지어 중세 기독교의 정점에 있던 로마 교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세는 ‘신앙의 시대’라고 불리던 시대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교황 다음으로 직위가 높은 가톨릭 대주교도, 말단 교회를 운영하는 성직자들도, 그 행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패를 저질렀다. 그중에서도 최악의 부패를 꼽으라면 단연 ‘면벌부(免罰符)’ 판매였다. 글자 그대로 면벌부란 사람들이 신 앞에 지은 죄를 로마교회가 사해 준다는 증명서다.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돈을 받고 면벌부를 판매하는 당대 교회의 부도덕한 행위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 명목을 내세워 면벌부를 팔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르틴 루터는 본격적으로 교회 세력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는 여담이지만 당대의 독일에서 가톨릭교회가 면벌부를 판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인츠(Mainz)의 대주교가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부호 푸거(Fugger) 가문에게 빌린 막대한 금액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그 유명한 95개 논제를 썼다. 이후 그 ‘논제’는 습자지에 먹물 번지듯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절묘하게도 그즈음 이미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있던 구텐베르크 인쇄기 덕분이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마치 철저히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독일 전역에서 면벌부 판매를 반대하는 물결이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Karl V, 재위 1519~1556)는 마르틴 루터를 제국회의에 소환했다. 그가 내건 95개 논제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보름스 제국회의 (Diet of Worms, Reichstag zu Worms)의 ‘마르틴 루터 심문 사건’이다. 이는 1521년 4월 17일의 일이다.


    제국회의가 열렸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각지에서 모여든 제후들이 차례로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대쪽 같은 성정에 담이 큰 루터도 이때만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손바닥에 자꾸 땀이 배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루터의 비서이며 신교도이던 여성이 도기로 만들어진 1리터들이 맥주잔을 들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잔을 받아 든 루터는 단숨에 벌컥벌컥 맥주를 마신 뒤 의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의 두 뺨에는 홍조가 번져 있었다. 이후 마르틴 루터의 격정적인 연설과 뚝심 있는 행동은 유럽 종교사, 그리고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린 황제 카를 5세,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와의 대결에서 패배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루터를 문책했다. 카를 5세는 직접 대제국을 이룬 시기의 로마 황제를 제외하면 유럽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군주였다.


    “그대의 의견을 끝까지 주장할 것인가?”


    루터가 대답했다.


    “저는 절대로 제 양심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이나 정연한 논리가 제 잘못을 입증해 내지 못하는 한 말입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 다음 루터는 “저는 지금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라는 말로 자기 변론을 끝맺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과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준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용기 있는 태도와 흠잡을 데 없는 자기 변론은 전 유럽을 움직였다. 그렇기는 해도 루터가 가톨릭 교회에 의해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사태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후 그는 작센 선제후의 비호를 받으며 지하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 흐름 속에서 루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제후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풀어 주었다. 카를 5세의 입장에서 이는 명백한 실수였다. 사실 그는 루터를 이단자로 몰아 처형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루터를 감옥에 가두기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카를 5세의 신념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사태를 어떻게든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로부터 9년 뒤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장에서 그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루터파와 타협점을 찾아 신·구교의 통일을 모색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카를 5세는 대화를 통해 복잡한 종교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의도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더욱 완강한 태도에 과격한 행동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자 했다. 급기야 카를 5세는 무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그는 반가톨릭 단체인 ‘슈말칼덴 동맹 (Schmalkaldischer Bund)’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황제 군은 반가톨릭 연합군을 손쉽게 격파하고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1547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카를 5세는 자신이 신뢰하던 측근 작센공 모리츠(Moritz von Sachsen, 재위 1541~1547)의 배신으로 쓰라린 패배를 겪는다. 결국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역사적 선언을 하게 된다. 카를 5세가 마르틴 루터에게 완벽하게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카를 5세에게는 그 일의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일이 있고 난 뒤 그는 당시 스페인의 수도였던 톨레도 부근의 ‘유스테 수도원 (Monasterio de Yuste)’에 속세를 버리기라도 한 듯 은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곳에서 그는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는 1558년 9월 21일의 일이다.


    카를 5세가 루터파와 벌인 전쟁에서 당한 패배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쇠락을 알리는 전주곡인 셈이었다.



    World History of BEER

    히틀러는 왜 비어홀을 정치 집회 장소로 자주 이용하고 그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을까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유명하게 만든 두 역사적 인물, 빌헬름 5세와 아돌프 히틀러

    바이에른 지역에서 생산된 맥주는 북부 독일의 맥주와 비교하면 품질이 크게 떨어졌다. 15~16세기 무렵의 상황이다. 그런 터라 바이에른의 공작과 공작부인, 귀족들은 북부 독일의 유명 양조장을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생산된 맥주를 수입해다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북부 독일은 맥주에 관한 한 평판이 높았다. 특히 아인베크 시의 길드가 생산한 ‘아인 베크 비어’의 경우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아인베크 비어는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에 이르는 유럽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당대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5세는 아인베크 비어를 유난히 사랑했다. 그가 이 맥주를 열정적으로 수입해서 마셔 대는 바람에 궁정 재무 담당자는 늘 골머리를 앓았다. 빌헬름 5세가 바이에른 공국에서,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바이에른 궁정 안에서 아인베크 비어를 직접 양조하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는 바이에른 공국의 도시 란츠후트(Landshut)에 있는 트라우스니츠 성 (Trausnitz Casle) 부속 궁정 양조장에서 아인베크 비어를 양조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미흡하나마 바이에른표 맥주가 완성되었다. 1590년 무렵의 일이다. 빌헬름 5세는 기뻤으나 그 정도 성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아인베크 전용 양조 설비를 갖춘 양조장을 짓는 일에 몰두했다. 그 장소로는 뮌헨 마리엔플라츠(Marienplatz)의 호프브로이하우스가 낙점되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호프브로이하우스의 아인베크 비어의 맛과 품질이 처음부터 좋지는 않았다. 바이에른표 아인베크 비어의 맛과 품질이 크게 향상되고 원조 격인 북부 독일의 맥주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일은 빌헬름 5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가 공작의 지위에 올라 1612년 아인베크에서 양조 기술자를 데려오고, 그로부터 2년여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비로소 실현되었다.


    호프브로이하우스는 히틀러가 대규모 나치스 집회를 연 역사적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 시대에 세계사를 바꾸는 정치 집회가 비어홀, 즉 맥줏집에서 주로 개최된 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는 나치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비어홀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당대의 비어홀은 왜 그토록 자주 정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을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 점을 짚어 보자.


    나치스는 왜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대연회장을 집회 장소로 선택했나

    마리엔플라츠는 뮌헨 번화가의 중심부에 있다. 그리고 그 마리엔플라츠에는 시청사가 들어서 있다. 이 시청사 꼭대기에 시계가 있는데, 하루에 두 번 오르골 음악 소리에 맞추어 인형이 춤을 추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시각은 오전 11시와 오후 3시다. 바로 그 연유로 날마다 이 시각이 되면 시청사 광장은 많은 관광객으로 가득 채워진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시청사 건물 지하에 술과 음식을 파는 시청사 술집 (라츠켈러 (Ratskeller))이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혹시 있을 수도 있는 외적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여 성벽을 지어 도시를 둘러쌌다.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이자 근거지였던 빈을 예로 들어 보자. 이 거대한 도시 역시 견고한 성벽을 쌓았는데 강력한 적 오스만튀르크의 반복된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스만튀르크 군의 집요한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던 빈의 성벽은 어느 순간 쓸모없는 시설물이 되고 말았다. 이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벌어진 상황이다. 이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재위 1848~1916)는 성벽을 부수고 수도 빈 시내를 전면 재개발하기로 한다. 1858년의 일이다. 성벽이 세워져 있던 자리는 도시를 둥글게 감싸는 길, 즉 링슈트라세(Ringstraße)로 재탄생한다.


    성벽, 아니 링슈트라세의 안쪽 도시에는 그 중심부에 시장이 들어서고 시청사와 교회가 세워졌다. 시장과 시청사와 교회는 성벽에 의해 둘러싸인 도시를 이루는 하나의 세트와도 같은 존재였다.


    시청사 앞에는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광장은 시민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소통의 공간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교회는 시민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시의 행정을 담당한 주체는 시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였다. 시청 지하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의원들 간 교류 공간이자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식당에는 양조장이 딸려 있어 이곳에서 양조된 맥주가 의원들의 식사 시간이나 집회 때 제공되었다. 이런 식으로 지하 식당은 집회장소의 기능도 담당했다.


    이후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청사가 개방되면서 지하 식당은 비어홀 · 레스토랑으로 꾸며져 시민 교류의 장으로 변모했다. 이제 유럽 도시의 비어홀은 그 지역 집회 장소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나치스가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대연회장을 집회 장소로 선택한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World History of BEER

    영국 에일에 치명타를 안긴 파스퇴르의 미생물 연구

    영원할 것 같던 영국 에일의 위상을 추락시킨 파스퇴르의 미생물 연구

    버튼온트렌트는 잉글랜드의 공업 도시 버밍엄에서 북동쪽으로 3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이곳에서 개발된 버튼 에일은 1630년대에 이미 북해를 건너고 발트해를 지나 러시아를 비롯한 북반구의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다. 그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버튼에 에일을 양조하는 대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18세기의 상황이다. 그중에서도 1777년에 세워진 기업 ‘바스’와 1746년에 사업을 시작한 ‘올솝’이 가장 유명하다.


    18세기 말 호지슨은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위해 인디아 페일 에일 (IPA)을 개발했다. IPA는 알코올 농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많은 양의 홉을 첨가해 오래 저장해도 변질되지 않는 수출용 담색 맥주였다. 수출용 맥주는 운송 기간이 길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도록’ 양조하고 보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나 그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맥주가 부패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잡균이 침투하여 ‘산패한다’는 의미다. 즉, 맥주에서 신맛이 나서 마시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당대의 맥주 양조업자들은 미생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 시대에는 냉동기가 없었기에 산패를 방지하기 위해 알코올 농도를 높이고 홉을 최대한 많이 넣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랬기에 호지슨이 IPA를 개발할 당시 원맥 즙 농도는 17~22퍼센트 정도로 매우 높았다. 이는 1780년대의 상황이다. 1헥토리터(hectorliter), 즉 100리터당 1.25킬로그램의 홉을 첨가한 다음 다시 0.55킬로그램을 드라이 호핑했다.


    18세기에 영국에서는 맥주와 관련해 ‘sub-acid’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 이는 ‘약간 신맛이 난다’는 의미다. 이런 제품의 속성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브라운 에일의 장점으로서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사실 여기에서 나는 신맛은 맥주가 젖산균, 초산균, 브레타노마이세스속 등 야생 효모에 오염되어 나는 맛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이는 ‘가벼운 산패’ 상태다. 호지슨은 바로 이 ‘신맛’을 장점으로 내세워 신제품 IPA를 판매했다.


    버튼 에일의 바스와 올솝은 인디아 페일 에일을 개발해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1820년대의 상황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제품을 내세워 인도 시장 문을 본격적으로 두드렸다. 우리는 이미 이 싸움에서 버튼 에일이 호지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하게도 버튼 에일의 뛰어난 품질 덕분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비밀은 버튼이 사용하는 황산칼슘이 풍부하게 함유된 용수와 독특한 발효법이 빚어 내는 드라이하면서도 깔끔한 뒷맛에 있었다.


    제임스 와트 (James Watt)의 증기기관차로 대표되는 당대의 눈부신 기술 혁신은 맥주 산업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당대 영국의 맥주 양조 기술은 전 유럽을 압도했다. 이는 당시 기관이 인정한 맥주 양조에 관한 특허권을 살펴보아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1. 아이징글라스 제조법

    철갑상어의 부레를 말린 다음 에일의 청징제 아이징글라스를 만든다(오늘날에도 사용됨)

    2. 비중계

    당과 알코올 농도를 낚시찌를 응용하여 분석하는 기구(오늘날에도 사용됨)

    3. 맥아와 발효 공정의 온도 관리

    냉수를 파이프에서 순환하게 하며 뜨거운 맥아즙을 식힌다. 그런 다음 발효 찌꺼기의 온도를 관리한다.


    이 중에서 특히 3번 ‘온도 관리’ 기술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효모의 지나친 활동을 억제하여 불쾌한 냄새나 나쁜 맛이 나지 않는 부드러운 맥주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영국의 양조 기술은 유럽의 많은 양조가에게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에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에일과 라거의 위상을 뒤바꾸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그 유명한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다. 그는 뮌헨에서 개발된 저온저장 하면 발효법은 영국의 상면 발효법에 비해 ‘산패 방지’의 측면에서 한 차원 뛰어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자신의 책 『맥주 연구(Etudes sur la Biere) 』 (1876)를 통해서다. 그는 또 이 책에서 산패의 원인이 ‘미생물’에 있음도 밝혀냈다.


    파스퇴르는 실험과 연구를 통해 에일의 성공률이 높게 잡아도 80퍼센트 정도라는 점도 확인해 주었다. 이는 예를 들어 100개의 양조장 중 20개 양조장의 맥주는 산패하여 폐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맥주 양조업은 매년 약 20퍼센트의 양조장이 폐업 위기에 몰릴 정도로 녹록지 않은 산업이었다. 그러던 중 하면 발효법이 맥주 양조가들에게 꿈과도 같은 일이었던 성공률 100퍼센트를 달성하게 해 준 셈이다.


    버튼의 대기업들은 담금 과정을 뮌헨의 하면 발효법 양조 절차에 따라 기온이 낮은 겨울로 제한했다. 1860년대의 상황이다.


    그리고 이 기업들은 개발된 지 얼마 안 된 에테르식 냉동기를 신속하게 받아들여 발효 온도를 빈틈없이 관리했다. 이는 1870년대의 상황이다. 이렇듯 버튼의 기업들은 전통적인 양조법에 바이에른주 뮌헨식 하면 발효 기술을 도입하여 품질 향상에 온 힘을 쏟았으나 전통이 체질 개선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버튼은 자신들이 유니온 시스템을 이용해 맛이 강한 에일을 양조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맥주가 담긴 나무통을 일렬로 나란히 정렬해 놓은 다음 얇은 파이프를 통해 발효 찌꺼기를 순환하게 하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독특한 콘셉트의 설비가 이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한데, 이 시스템 · 설비에는 한 가지 무시하지 못할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체적으로 세정 · 살균 작업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무통, 배관의 패인 부분 등에 양조장 고유의 미생물이 서식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였다. 아무튼, 이 미생물들이 각 양조장 고유의 독특한 냄새와 맛을 만들어 냈다. 이로써 알 수 있듯, 그 시대의 에일의 향과 맛은 각 양조장의 환경과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하면 발효법으로 양조한 라거 맥주는 산패해서 폐기하게 될 위험성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연중 언제라도 양조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19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하면 발효법은 맥주 양조가들에게 매력적인 양조법이었다. 여기에 더해 파스퇴르가 발명한 저온살균법은 맥주의 위상을 ‘산패하지 않고 장기 보존할 수 있는 식품’으로 격상시켰다.


    이렇게 되자 고농도 담금으로 양조하여 알코올 농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다량의 홉을 첨가하여 산패를 방지하는 고전적인 에일 양조법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이로써 에일의 기술적 패배는 더욱 확실해졌다. 이는 19세기 말엽의 상황이다.


    이후 영국을 제외한 전 세계 맥주 시장을 목 넘김이 부드러운 필젠 타입의 황금색 라거 맥주가 장악한다.



    World History of BEER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21세기 세계 맥주 시장

    경제 대국의 순위와 맥주 대국의 순위가 점점 같아진다?!

    1960년 무렵부터 1975년까지 약 15년간 맥주 생산 상위 5위권 국가는 다음과 같았다. 1위 미국, 2위 서독, 3위 영국, 4위 소련, 5위 일본. 이 순위는 그 후 10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참고로 1975년 당시 브라질은 상위 12위였고 중국은 42위였다.


    그러던 중 맥주 시장의 판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987년의 일이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시대에 소련의 정치 형태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그 여파로 소련이 상위권 5위에서 곤두박질쳐 10위권 밖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한때 42위였던 중국은 급속한 성장을 이룬 끝에 독일, 영국, 일본을 차례로 제치고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의 맥주 생산국으로 도약했다. 이는 1993년의 상황이다.


    20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세계 맥주 시장은 양극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맥주 시장을 주도하던 선진국들의 소비가 정점에 이르면서 미국을 제외한 대다수 나라에서 소비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전 세계 맥주 총생산량은 매년 몇 퍼센트씩 상승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선진국에서 줄어든 맥주 소비량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소비량이 꾸준히 급증하는 나라가 있다는 의미다. 그곳이 어디일까? 오랫동안 맥주 후진국으로 여겨졌던 (일본을 제외한) 많은 아시아 국가, 러시아, 구 소련권의 동유럽 국가, 중남미 국가들이 바로 그 나라들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뚜렷해진다. 인도의 맥주 소비량은 현재 1인당 1리터에 지나지 않지만, 연간 성장률이 워낙 높은 터라 5년 후면 소비량이 현재의 5배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다. 이런 놀라운 잠재력에 전 세계의 대기업들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사실 인도에는 종교, 계급 등 독특한 규율과 걸림돌이 적지 않지만, 다른 어느 나라보다 성장 잠재력이 높은 국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2008년 기준 아시아 총인구는 약 33억 3,000만 명이다. 이중 중국이 13억 3,000만 명, 인도가 11억 9,000만 명인 데 반해 2050년이 되면 아시아 총인구가 38억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본다. 그 무렵에는 인도가 중국 인구보다 2억 명 정도 많은 약 15억 명에 다다르리라는 예측이다. 2025년쯤 되 면 중국은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 것이다. 그에 반해 인구 구성이 피라미드형인 인도는 음료 산업을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시장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많은 선진국이 서로 경쟁하듯 서둘러 인도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함으로써 도약대를 마련하고 시장 개척에 나서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그 중에서도 인도 내의 사브밀러(SAB Miller)의 왕성한 활동이 가장 눈에 띈다.


    맥주 산업은 세계 경제 동향과 유사한 흐름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예전의 맥주 선진국들은 서서히 쇠퇴하고 브릭스로 대표되는 과거의 개발도상국들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생산량에 관해서만은 소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구분이 갈수록 모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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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