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어원 사전
 
지은이 : 덩컨 매든 (지은이), 고정아 (옮긴이), 레비슨 우드 (서문)
출판사 : 윌북
출판일 : 2024년 06월




  • 마다가스카르는 왜 마다가스카르고, 스페인은 왜 스페인일까? 여행과 어원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난 20년간 전 세계 방방곡곡을 탐험해온 덩컨 매든, 그가 속속들이 수집한 각 나라 이름에 깃든 수많은 이야기를 펼쳐냅니다.


    여행자의 어원 사전


    북아메리카

    캐나다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언어적 아이러니의 멋진 사례를 찾는다면 국토 면적이 세계 2위인 나라로 눈을 돌려 그 이름의 뜻을 알아보는 게 최고다. 면적 9,984,670제곱킬로미터, 인구 3800만 명에 가까운 캐나다를 마을이라 부르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아이러니는 어원에서 비롯된 말장난보다는 재미난 우연에 가깝다. 캐나다의 현재 이름은 16세기 중반에 생겨났는데, 이때 캐나다는 지금처럼 아메리카 대륙 꼭대기에 얼음 왕관처럼 얹혀서 그 뿔을 북극권으로 깊이 뻗어 올린 땅이 아니었다. 이 이름은 어원학에서 드물게도 명명 관련 상황이 명확한 경우다. 1535년에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오늘날의 캐나다를 프랑스령으로 선포하면서 캐나다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먼저 봐야 한다.


    그보다 일 년 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카르티에에게 아시아로 가는 서쪽 항로를 찾아 금과 여타 귀한 물품이 가득하다는 섬과 땅들을 발견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카르티에는 임무에 따라 프랑스를 떠나 서쪽으로 항해했는데, 20일도 지나지 않아 아시아 대신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의 뉴펀들랜드섬에 닿았다.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만을 가볍게 탐험하고, 몇몇 토착 부족과 약간의 교역을 하고, 전형적인 탐험가 방식으로 처음 보는 야생동물들을 잔혹하게 사냥한 뒤(이때 펭귄의 일종인 큰바다쇠오리 수백 마리가 희생되었고 곧 멸종했다) 자신이 아시아에 닿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스페만 해변에 10미터 높이 십자가를 세우고 그 땅을 프랑스 영토로 선언했다.


    그리고 여기서 세인트로렌스 이로쿼이족을 만났다. 그들은 오늘날의 퀘벡과 온타리오주를 흐르는 세인트로렌스 강변에서 회합했다. 그러다 이로쿼이 족장 도나코나가 그들의 의도를 알고 카르티에를 냉대하자, 카르티에는 족장의 두 아들을 프랑스로 납치해가면서 나중에 무사히 데려올 것이며 교역할 물품도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다음 해 카르티에는 세 척의 배에 100명이 넘는 남성을 태우고 세인트로렌스만으로 돌아와 도나코나의 마을에 갔다. 이로쿼이족은 휴런-이로쿼이어 방언으로 자신들이 사는 곳을 ‘카나타(kanata)’라 불렀고, 그것이 캐나다의 이름으로 이어졌다.


    캐나다 민담에 따르면 카르티에가 휴런-이로쿼이어에 능숙하지 않아서 마을과 거주지를 뜻하는 kanata를 원주민의 마을 이름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퀘벡이자 이로쿼이족의 수도였던 그 마을의 실제 이름은 ‘스타다코나’다. 어쨌건 그 이름은 철자가 Canada로 바뀌어 뿌리를 내렸고, 이후 스타다코나뿐만 아니라 세인트로렌스강을 포함해 도나코나가 다스리는 지역 전체를 가리키다가, 곧 세인트로렌스강과 오대호 북쪽 전체로 범위를 넓혔다. 이렇게 해서 뉴프랑스라는 광대한 북아메리카 황야 지대의 한 작은 식민지가 Canada가 되고 그 주민은 Canadien이 되었다.



    유럽

    아이슬란드

    여기 오지 마, 정말 추워

    남아메리카를 뒤로하고 적도를 지나 북쪽으로 약 9500킬로미터 가량을 날아가면,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작은 바윗덩이가 북대서양을 향해 몸을 쑥 내밀고 있는 모습을 맞닥뜨린다.


    아이슬란드는 어느 면으로 보아도 평범하지 않은 나라다. 화산과 유황이 넘쳐나는 풍경에는 얼음과 불뿐 아니라 장대한 폭포, 구릉진 초원, 먹빛 해변, 발광하는 지열 웅덩이도 있다. 국토가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판에 걸쳐 있고, 그로 인해 생겨난 독특한 지리와 지질은 아이슬란드만의 거칠고도 환상적인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이토록 극단적이고 외딴 섬이라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곳에 토착민은 없다. 이들 역사에는 서기 800년 무렵부터 강인한 부족들이 와서 얼마간 살다가 떠나는 일이 거듭되었다. 아일랜드의 파파르(아버지) 수도사들, 스칸디나비아 탐험가, 스웨덴 바이킹이 정착지를 건설했지만 상당수가 가혹한 자연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덕분에 아이슬란드는 복잡한 명명의 역사를 갖게 되었고, 그 과정에 어원과 관련된 몇 가지 멋진 이야기가 남았다.


    그중 가장 오래 지속되는 이야기는 이 땅의 이름이 초기 바이킹 개척자들의 계략이라는 것이다. 교활한 바이킹은 이 화산섬의 푸른 해변에 도착하자 다른 개척자들이 눈독 들일 것을 경계해서 이곳을 ‘아이슬란드(Iceland)’, 즉 ‘얼음 나라’라고 이름 지었다. 여기 관심을 두지 말고 훨씬 더 매력적인 이름의 그린란드(Greenland)로 가라는 뜻이었다. 물론 실제로 얼음은 아이슬란드보다 그린란드에 훨씬 더 많다.


    이런 이야기는 재밌고 또 그럴듯하지만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선에서 진실을 찾으려면 『아이슬란드사가』를 들여다봐야 한다. 사가는 아이슬란드 정체성의 본질을 이루는 중요한 문학 장르로(아이슬란드에서는 열 명 중 한 명이 일생 동안 책을 한 권 출간한다), 바이킹 시대 (또는 아이슬란드 사가시대)를 영웅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로 기록한다.


    「아이슬란드 사가」에 따르면 9세기 초 이 척박한 화산섬에 처음 발을 디딘 스칸디나비아인은 나도두르 아스트발드손으로, 오늘날의 페로제도로 가는 길에 바람에 휩쓸려 이 섬에 닿았다. 그리고 가을에 폭설이 내리는 모습에 놀라 그 지역을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로 ‘스네란드(Sneland)’, 말 그대로 눈의 나라라 이름 짓고는 다시 본래 목적지로 떠났다.


    얼마 후인 서기 860년에 오늘날의 스웨덴 출신인 또 다른 바이킹 가르다르 스바바르손 역시 바람에 휩쓸려 스네란드에 닿았다. 그는 이 미지의 땅 주변을 배로 일주해서 이곳이 섬이라는 것을 최초로 확인한 뒤, 스키알판디 북쪽 만에서 겨울을 나기로 마음먹고 그곳을 ‘후사비크’라 이름 지었다(이곳은 오늘날에도 소도시로 번성하고 있다). 스바바르손은 섬을 찬양하며 우쭐한 마음을 담아 이곳을 ‘가르다르숄무르’, 즉 ‘가르다르의 섬’이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8년 뒤에 새로운 개척자가 왔고, 그가 오늘날 이 나라의 이름을 지은 사람이다. 「개척자들의 책』에 따르면 당시 가르다르숄무르라는 곳을 일부러 찾아간 최초의 스칸디나비아인은 으라프나-플로키 빌게르다르손이다. 플로키는 가족과 가축뿐만 아니라 같은 꿈을 품은 다른 사람들도 함께 데려가 화제의 섬에서 새 인생을 건설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불행을 겪었다. 섬을 찾기 위해 우회하던 중 셰틀랜드제도에 들렀을 때 딸이 익사한 것이다. 이후 페로제도에서는 두 번째 딸이 결혼을 하며 떠났고, 마침내 가르다르숄무르를 찾아 섬 북서부 바르다스트뢴드 지역의 바튼스피외르뒤르에 자리를 잡았다.


    플로키는 첫 봄과 여름을 풍요롭게 보냈지만 그 뒤에 찾아온 길고 가혹한 겨울을 잘 대비하지 못해 가축들을 잃고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해 봄이 오자 해결책을 찾아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 드넓은 이사피외르뒤르 피오르 너머를 내다보다가 거기 아직도 얼음(아마도 그린란드에서 흘러내려 왔을)이 가득한 모습을 보고 그 땅을 ‘이슬란트(island)’라 불렀다. 이는 물론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로 얼음 나라라는 뜻이었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플로키는 전처럼 이슬란트를 찬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돌아온 동료 소롤프는 (역시 그곳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곳을 찬양하며, 그 땅은 너무나 비옥해서 풀잎에서 버터가 뚝뚝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 주장이 널리 퍼지면서 소롤프는 ‘소롤푸르 스미외르’, 그러니까 소롤프 버터로 불리게 되었다. 사람들이 누구 말을 믿었든 이슬란트라는 이름은 노르웨이에 뿌리를 내렸고, 얼마 후인 874년에 최초의 아이슬란드 영구 정착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플로키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여생을 살다 죽었다.


    이탈리아

    거듭되는 소 이야기

    지도에서 이탈리아만큼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 유럽의 엉덩이에 달린 하이힐을 신은 다리, 불쌍한 시칠리아를 튀니지 북부로 차버리려는 듯한 이 비범한 다리는 윤곽선이 정말로 독특하다. 국토가 이렇게 다리 모양으로 길쭉하다 보니 산업이 발달한 북부에서 남부의 농촌 지대까지, 이탈리아는 다양한 지역적 정체성, 문화, 언어, 정치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세계 문화, 언어, 요리에 엄청난 기여를 한 나라지만 현재 국명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와 신화가 가득하다. 이 설들을 다루기 전에 먼저 한 가지를 확실히 해두자. 로마인들은 자신을 이탈리아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탈리아인들도 이탈리아 제국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두 이름은 어원이 크게 다르지만 이야기가 밀접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Italia, 영어로는 Italy) 기원에 대한 모든 주장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아니라 해도 가장 인기 있는 것은 그리스신화 헤라클레스의 노역 이야기와 관련된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가 헤라클레스에게 세상 끝까지 가서 괴물 게리온의 소 떼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게리온의 추격을 피해 돌아왔지만 헤라클레스는 큰 문제에 부딪힌다. 리구리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두 아들 이알레비온과 데르키노스가 그 소 떼를 훔치려 해서 그들을 죽이고 만 것이다. 그런 뒤 헤라클레스는 티레니아를 지나 레기온에 닿았는데, 거기서 풀려난 황소 한 마리가 바다로 뛰어들어 시칠리아로 헤엄쳐 갔다가 이웃한 남쪽 나라로 갔다. 티레니아어로 황소는 ‘이탈로스(italos)’고, 이 이름을 통해 이웃한 남쪽 나라가 이탈리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환상적인 이야기지만 사실과는 딱히 관계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사실이다. 이야기 속 이탈리아가 정말로 그 남쪽 나라와 거기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역사가와 언어학자가 제시하는 다른 여러 설도 출처가 그리스, 움브리아, 오스칸, 에트루리아 어디건 상관없이 기원에 소가 나온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계통의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 지역에 목축업이 중요했고,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로 지명을 붙이는 성향이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가장 가능성 높은 어원은 직역하면 ‘어린 소들의 나라’이라는 뜻의 오스칸어 Viteliu에 있다. 오스칸어는 기원전 500~100년에 남부 이탈리아 구두 발가락 지역에서 비탈리(Vitali)족이 사용한 언어다. 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그리스인은 비탈리족을 ‘이탈로이(Italoi)’라 불렀고 지역에도 같은 이름을 붙였다. 그 시절 그리스인들은 v나 w 발음을 잘 못했기 때문이다. 이어 사람과 문화가 서로 융합되자 식민지 주민들이 그 이름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이탈리아의 사람들을 뜻하는 Italitoes라 부르게 되었다. 이탈로이가 전부터 소의 형상을 숭상했다는 이 사실은 이름이 ‘소의 땅의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왔다는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줄 뿐이다.


    이 무렵 로마는 이 지역을 ‘마그나 그라시아’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제국이 남부 이탈리아로 팽창하면서 이탈로이라는 이름도 같이 퍼졌고, 기원전 1세기가 되면 로마는 이 이름을 라틴어화해 스스로의 영토를 ‘이탈리아’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 제국은 이탈리아반도 전역으로 팽창했고, 여러 로마 작가가 이탈리아의 장벽이라고 미화한 알프스산맥도 거기 포함되었다. 이 시기 이탈리아의 한 부족 연합은 로마와 경쟁해서 이탈리아라는 이름을 새긴 동전까지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인 서기 292년에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섬까지 팽창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아시아

    중국

    문명의 중심이 되고 싶은 중앙 국가

    작은 나라 부탄을 떠나 히말라야산맥 능선을 넘으면 광대한 나라 중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지 티베트고원이 나온다. 티베트고원이라는 엄청난 전망대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5000킬로미터 가량을 더 가면 같은 나라에 속한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기술과 전통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대도시들을 가득 채운 15억 인구의 나라, 바로 중국이다. 오늘날에는 기술 발전이 중국의 세계적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이들의 국가 정체성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와 전통이고, 국명은 거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표준 중국어로 중국의 이름은 ‘중궈’이며 ‘중’은 중앙, ‘궈’는 나라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흔히 Middle Kingdom, 즉 ‘중왕국’으로 잘못 번역되고는 하는데, 이는 포르투갈어에서 비롯되어 19세기에 널리 퍼진 해석이다. 실제 의미와 무관하게 내향적인 중간의 왕국이라는 중국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각을 담고 있다.


    중왕국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000년 무렵인 서주 시대에 비롯되었다. 이것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 알려진 고대 청동 제기 ‘하존’을 보면 주나라가 자신들을 문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연대는 중국이 통일을 이루기 약 800여 년 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때 중궈는 황하 계곡 주변의 중앙 지대만을 가리키는 말로, 왕실 영토를 변방의 ‘야만족’ 영토와 구별하는 데 사용했다.


    그로부터 800년가량 후에 주나라가 세워졌으며 이어 진나라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이름이 왔다.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처럼 중국 역사는 대체로 왕조의 이름을 나라 이름으로 썼기 때문이다. 이런 왕조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중궈라는 이름과 그 변이형들은 실생활과 비공식 문서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중궈라는 이름의 지리적 의미는 차츰 줄어들었고, 중국 문명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리키는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남북조시대에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도 쓰였다. 모든 나라가 스스로를 중궈라 하고, 경쟁국들을 비하적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에도 공식 국명은 언제나 왕조의 이름이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중궈의 의미는 미묘하게 변해 때로는 수도를 때로는 지역 전체나 문화를 가리키기도 했으며 동시에 여러 의미를 띠기도 했다. 하지만 1911년에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지자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이 공식 자칭 국명이 되었다.


    어쩌면 중궈보다 훨씬 더 뿌리가 오래된 ‘차이나(China)’라는 이름은 영어에 들어온 지 400년이 넘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포르투갈어, 말레이어, 페르시아어 변이형을 거쳐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Cina-s(또는 China)에까지 이른다. 그러니까 이 말은 중국어 이름이 아니다. 현대 국명 China는 포르투갈 탐험가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1516년 일기에 처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 말을 페르시아어 Cina에서 가져왔고 이는 1555년에 영어로 옮겨졌다.


    가장 흔한 어원설은 China가 기원전 3세기에 잠시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 설은 실크로드 교역로를 타고 퍼진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13세기에 25년 이상 중국을 여행하고 유럽에 이야기를 전한 마르코 폴로가 특히 큰 역할을 했다. 폴로는 실제로 중국을 Chin이라고도 하고 Cathay라고도 했다. 이때 Chin은 중국 남부의 송나라를, Cathay는 중국 북부를 가리켰다. 그러다 차츰 Cathay와 China의 의미 차이가 흐려져 결국 같은 의미를 띠게 되었다. 차이점이라면 Cathay가 좀 더 시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진나라 유래설은 1655년에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노 마르티니가 처음 제시한 것으로, 이후 많은 언어학자의 지지를 받았지만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아직도 논쟁 중”이라 쓰고 있다. 의문이 지속되는 주요한 이유는 「마하바라타」를 비롯한 힌두 문서가 진나라 건국 전인 기원전 5세기부터 China라는 말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기원전 9세기 이후 존재한 신(Thsin), 징(Jing), 지나(Zina) 같은 왕국들이 기원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중국은 제2차세계대전, 일본 침략, 국공 내전을 겪은 후인 1949년에 수립되었다. 이런 역사적 격변에 따른 정치적 분열 결과, 중국 공산당은 본토에 남고 그에 맞선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으로 옮겨져 오늘날에도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을 공식 국명으로 쓰고 있다. 양 정부 모두 자신들이 정통성 있는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여전히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되고 있지만, UN은 1971년에 중국이 본토와 외지 영토에 지배력이 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일본

    해가 뜨는 나라

    날씨가 좋은 날, 한국의 대형 항구이자 제2의 도시인 부산의 달맞이 고개에 서서 눈에 힘을 주면 수평선 너머에 희미한 육지가 아물아물 보일 때가 있다. 이곳은 일본이다. 하지만 일본 본토는 부산에서 맨눈으로 보일 만큼 가깝지 않다. 부산에서 보이는 섬은 쓰시마섬으로, 양국 사이 등간격에 자리해 대한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일본 남부의 서해안에 자리한 이 섬은 일본 본토를 이루는 큰 섬 다섯 개 주변을 둘러싼 작은 섬 7000개 중 하나다.


    하지만 쓰시마섬뿐 아니라 일본의 어떤 섬에서도 주민들은 Japan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자국을 일본어로 ‘니혼’, 좀 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니뽄’이라고 한다. Japan의 어원과 이것이 이 나라의 타칭명으로 자리 잡은 경위를 이해하려면 먼저 니혼이라는 말의 뿌리로 가서 그 의미와 문자 표현을 알아보아야 한다.


    니뽄은 일본어로 日本이라고 쓴다. 이 문자는 ‘칸지’라는 것으로, 중국 문자가 건너와 일본의 문자언어와 발음에 통합된 것이다. 칸지는 한 글자가 한 단어다. 여기서 ‘지쓰’ 또는 ‘니치’라 발음하는 날, 태양이라는 뜻이고, ‘혼’ 또는 ‘뽄’이라 발음하는 本은 근본, 기원이라는 뜻이다. 즉 둘이 결합하면 태양의 기원이라는 뜻이 된다. 일본이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니 거기서 태양이 떠오르고 하루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여 붙은 이름일 것이다. 오늘날 서양권에 널리 퍼진 해가 뜨는 나라라는 일본의 이미지는 이 의미에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어는 문자가 세 종류다. 히라가나는 일본어의 일상적 문자고, 가타카나는 본래의 일본어에 없는 외래어를 표기하는 문자이며, 칸지는 일본어에서 쓰는 중국 문자, 즉 한자다. 한자는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가 아니라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다.


    Japan이라는 이름은 아시아에서 만난 몇몇 나라의 국명과 마찬가지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통해 서구 세계에 들어왔다. 폴로가 문자역한 이 이름은 日本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들은 발음을 최대한 성실히 옮겨적은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표준 중국어로 日은 ‘ㅈ’과 ‘ㄹ’이 동시에 발음되어 한 음절을 이루고, 本은 ‘펀’처럼 들린다.


    그로부터 거의 300년 정도 뒤인 1577년, 리처드 윌리스는 「서인도제도와 동인도제도 여행기(The History of Travayle in the West and East Indies)』라는 책에서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편지를 인용해 영어 최초로 ‘Giapan섬’을 기록한다. 이 철자는 차츰 Japan으로 바뀌었고 오늘날에는 프랑스어로 Japon, 스코틀랜드게 일어로 Japan, 이탈리아어로 Giappone 등 언어에 따라 다양한 철자가 쓰인다.


    하지만 일본이 처음부터 니혼은 아니었다. 8세기 전에는 ‘와’ 또는 ‘와코쿠’라 불렸다. 이 표현은 처음에 중국이 일본 남쪽 섬 규슈 사람을 가리킬 때 쓴 말이다. 고대 중국 궁정 문서에 처음 언급되는데, 여기에는 서기 57년에 한나라 광무제가 중국에 처음 온 일본 사절에게 황금 인장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장에는 대략 ‘한나라의 가신인 와나라의 나왕’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중국이 와나라나 와코쿠라는 이름을 선택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옛 중국 사전에 倭는 ‘순종하는’ ‘왜소한’이라는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고, 8세기에 발음이 같으면서도 평화, 균형, 조화를 의미하는 글자인 和로 바꾸었다.


    665~703년 사이로 추정되는 이 무렵 일본의 이름은 와코쿠에서 니뽄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 역시 정확히 알 수 없다. 널리 알려진 설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7세기의 중국 사절이 와라는 이름이 싫어 바꾸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8세기에 중국 여제 측천무후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일본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일본인들은 자칭명으로 해가 뜨는 동쪽 나라라는 뜻의 니뽄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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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