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살아오면서 태종 이방원, 사도세자, 장희빈이 나온 사극을 한 편이라도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자주 접해온 역사이기에, 누구나 머릿속으로 조선시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조선시대의 모습은 실제 조선과 얼마나 일치할까?
물론 누구도 어떤 것이 절대적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 해석 중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인지는 판단할 수 있다. 저자는 전작 『유사역사학 비판』,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에서 사이비 역사의 허구를 날카롭게 비판했었다. 그랬던 그가 이번 책 『하룻밤에 읽는 조선시대사』에서 조선사에 씌워진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을 걷어내고,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해석들을 모아 조선시대사를 새롭게 재구성했다.
■ 저자 이문영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로그를 통해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써왔다. 매일경제신문에 「물밑 한국사」, 네이버 연애결혼판에 「그 시절 그 연애」 등을 연재하고 유사역사학 비판서 『유사역사학 비판』, 『만들어진 한국사』와 우리 고대사의 다채로운 수수께끼를 파헤친 책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역사 소설 『숙세가』, 어린이 역사책 『이야기보따리 삼국시대』, 역사 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등을 출간했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이자 동화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 목차
서문 책머리에 … 5
제1장 나라를 만들다
기생 때문에 생긴 일 … 16
이성계라는 장군 … 22
◆ 조와 종은 뭐가 다른가? … 30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 33
개국 초의 권력 다툼 - 왕자의 난 … 40
◆ 고려 왕족 왕씨들의 운명과 점쟁이 … 46
조선 최초의 반란, 조사의의 난 … 49
조선은 노예제 국가였을까? … 54
실질적인 창업 군주 태종 … 60
음란한 여인의 이름을 기록한 자녀안 … 66
쓰시마 정벌의 빛과 그림자 … 71
제2장 평화의 시대
성군의 시대 - 세종 … 80
조선 왕실이 위기를 넘기는 법 - 계유정난 … 90
◆ 사육신의 난 뒤에 남은 슬픈 이야기 … 95
조선은 공신들의 나라였을까? … 99
◆ 세조,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 105
이시애의 난과 남이 장군 … 108
◆ 목은 잘릴 수 있으나 붓은 잘릴 수 없다 … 116
성종, 나라의 틀을 완성하다 … 120
폐비 윤씨의 진실은 무엇일까? … 126
사화의 시대 … 132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 … 138
◆ 백정의 딸을 아내로 맞은 양반 … 144
중종반정 … 149
기묘한 기묘사화 … 154
◆ 이 모든 게 자라 탓? … 159
심사손 살해 사건 … 163
조선판 마르탱 게르의 귀환 - 유유 실종 사건 … 170
외척의 등장 … 179
천인에서 정1품 정경부인까지 … 184
◆ 장애인 부인을 얻은 스승과 제자 … 189
제3장 전란의 시대
붕당의 발생 … 198
◆ 태산이 높다 하되 … 203
이순신은 어떻게 발탁되었는가? … 205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인가? … 210
임진왜란의 전개 … 217
◆ 기문포 해전과 원균 … 230
정유재란의 전개 … 235
기적과 같았던 명량해전 … 240
◆ 조선에 남은 외국인들 … 252
광해군의 시대 … 254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 26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 267
◆ 홍도야 울지 마라 … 286
가도의 역사 … 289
효종과 흑룡강 원정 … 296
제4장 성리학의 나라
예송 논쟁 … 306
숙종과 환국 정치 … 311
내시의 처 … 318
영조의 탕평 정치 … 323
◆ 어린 왕비의 지혜 … 328
정조와 어찰 정치 … 332
◆ 억울함을 호소하라 … 340
제5장 왕조의 황혼
세도 정치하의 조선 … 348
강화도령, 철종 … 356
대원군의 치세 … 361
고종, 나라를 말아먹다 … 369
◆ 프랑스 유학파 홍종우 … 385
이완용, 나라를 팔아먹다 … 391
참고문헌 … 408
도판 출처 … 410
우리가 아는 조선이 진짜 조선일까요?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을 넘어, 합리적인 해석들로 재구성한 조선의 실상과 만나보세요. 조선사에 씌워진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을 걷어냅니다.
하룻밤에 읽는 조선시대사
나라를 만들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위화도 회군 후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최영을 유배에 처한 후 곧 처형했다. 허수아비가 된 우왕은 마지막 저항으로 위화도 회군의 지휘관이었던 이성계와 조민수를 습격했지만 실패하고 폐위되었다. 이때 조민수와 이색이 우왕의 아들 창왕(재위 1388~1389)을 즉위시켰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제거하고 뒤이어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창왕도 폐위한 뒤 공양왕(재위 1389~1392)을 즉위시켰다. 우왕과 창왕도 곧이어 죽여버렸다. 마지막으로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던 오랜 동지 정몽주마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고려였다. 이성계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명의 승인이 나기 전에는 ‘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권지’라는 말은 ‘임시직’이라는 뜻이다. 명에서는 나라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고, 이에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이름을 지어 명나라에 둘 중 하나를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명나라가 채택한 이름은 조선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사람들
조선의 제도를 만든 사람은 정도전, 조준(1346~1405) 등의 성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아직 고려이던 때부터 국가의 체질 변화를 시도해 왔다.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 개혁이었다. 전근대 시대의 경제 개혁이란 토지 제도의 개혁을 의미한다.
개혁이 성공한 이유는 권력자들의 사유 재산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조준이 제안한 것은 모둔 수조지를 폐지하고 재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새롭게 나눠준 토지를 ‘과전’이라고 하고, 이 법을 ‘과전법’이라고 한다. 과전법의 가장 큰 이득은 당장 나라 살림에 필요한 세수 확보가 가능해졌다는 데 있었다. 이성계 일파는 과전법 실시로 관리들의 녹봉 문제 등 당면했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조선은 초반 내내 실제 국가 경영에 동원할 수 있는 백성의 수를 파악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호패법과 같은 것이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정도전은 1394년(태조 3년)에 조선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조선경국전』도 만들었다.『조선경국전』은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다는 것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각 부서의 일을 규정했다.『조선경국전』은 훗날 만들어지는『경국대전』의 모체가 되는 중요한 책이다.
실질적인 창업 군주 태종
태종은 사병 혁파, 관제 정비, 지방 제도 개혁, 명과 여전, 일본과의 관계 정립 등 조선의 향후 국정 운영의 기틀이 된 정책을 모두 정립한 왕이었다. 태조가 건국 후 미처 손대지 못한 새 나라의 수많은 기틀을 다지고 후계자의 안녕을 위해 위협이 될 세력은 모조리 처치한 과감한 군주였다.
왕권을 강화하라
험난한 과정을 거쳐 왕이 된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첫 번째 왕권 강화 작업은 사병 혁파였다. 일부 심복들도 저항했지만 태종은 무사히 사병 혁파를 마무리 지었다.
두 번째 왕권 강화 작업은 관제 정비였다. 1405년(태종 5년)에는 육조, 즉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기능을 강화했다. 1414년(태종 14년)에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여 육조를 국왕 밑에 두는 개혁을 단행했다.
세 번째로 지방 제도를 정비했다. 조선 팔도라고 하는 것이 바로 태종이 만들어낸 것이다. 태종이 만든 팔도 체제는 고종 때인 1896년에 13도로 개편될 때까지 조선을 지배했다.
네 번째로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정립했다. 명나라와는 요동 정벌을 꾀한 정도전을 처형함으로써 관계를 개선했다. 북방의 여진족과의 문제도 있었다. 1406년(태종 6년)에 여진족이 함경도 경원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태종은 즉각 정벌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응징했다. 이 정벌로 북방의 위협이 제거되었다. 남으로는 일본과의 문제가 있었다. 태종은 왜구들의 본거지인 쓰시마를 쳐서 남방의 위협도 제거했다.
태종의 개혁
태종의 개혁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후대에 의미를 남기는 경우도 많았다. 첫 번째로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한 것을 들 수 있다. 호패는 왕족과 양반, 양인, 노비에게까지 모두 발급되었는데 16세 이상 남자에게만 발급되었다. 호패에는 얼굴색이나 수염 같은 외모의 특징과 집 주소, 신분과 같은 것들이 기재되었다.
두 번째로 화폐 발행이 있었다. 불행히도 이 시절은 상업이 화폐 경제를 지탱할 만큼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화폐 제도는 정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은 화폐 경제로 가야 하는 것이 맞는 길이었으므로 태종의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태종 때 경제가 착실히 발전하여 세종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하는 재력이 되었다.
이외에도 태종은 치안 안전을 위한 야간 통행 금지의 시행, 백성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신문고 설치 등의 일을 했다.
후계자를 위한 무자비한 제거
태종은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의 행동을 살피다가 이들이 세자를 앞세워 권력을 탐했다는 죄목을 걸어서 잡아넣어 버렸다. 결국 몇 년이 지났을 때 결국 처남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외척의 발호할 기미를 없애고자 했던 것이다. 세자가 충녕대군, 즉 후일의 세종으로 바뀐 뒤에 태종은 세종의 처가도 박살을 냈다. 이때는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때였는데, 마지막 왕권 안정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평화의 시대
성군의 시대 - 세종
세종의 제도 정비
1418년(태종 18년) 충녕대군은 세자가 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즉위하게 되었다.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이 된 것이다. 태종은 물러났지만 군사와 외교를 담당하는 상왕으로서 권력을 완전히 놓지 않은 상태였다. 신하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사가 둘이나 있는 셈인데, 상왕은 무시무시했고 현 왕은 천재였으니, 기를 펼 수 없었을 것이다.
태종이 만들어놓은 조선의 정치 기구들은 세종 때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 세종은 조정의 일을 비판, 견제할 수 있는 사헌부, 사간원을 정비했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행동을 감시했고, 사간원은 왕의 행동을 감시했다. 여기에 더해 세종은 왕의 자문 기관으로 집현전을 만들었다. 여기에 젊고 영리한 학자들을 배치하여 향후 인재로 양성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셋을 합해 언론 삼사라고 하는데, 이들 기관은 세간의 여론을 듣고 잘못을 고치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언론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세종은 또 왕실의 명령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승정원 조직을 완비했다. 승정원에서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보다도 방대한 기록을 자랑한다. 이렇게 조선은 문서와 제도가 정비된 나라로 발전하게 된다.
세종의 문화 진작
세종은 각종 서적을 편찬하여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었다. 학문을 통해서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 세종의 통치 철학이었다. 왕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왕족들의 교육 기관인 종학을 만들었다. 왕족이면 의무적으로 이곳을 다니며 공부를 해야 했다.
또한 『삼강행실도』를 만들어서 유교 이념에 맞게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했고, 『자치통감훈의』, 『대한연의주석』 등 유학 서적들을 펴내 학문에 도움을 주고자 했으며, 박연을 기용해서 음악을 통한 교화에도 신경을 썼다. 또한 죄수들에 대한 판결을 삼심제로 만들어 억울한 죄인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 이후 태종은 새로운 법령들을 모아 1413(태종 13년) 『속육전』을 냈었다. 세종은 1426년 『신속육전』, 1433(세종15년)『신찬경제속육전』을 펴냈다. 이들 법전은 『경국대전』 편찬의 밑거름이 되었다.
세종의 국방과 외교 정책
세종 대에는 군사적인 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보였다. 흔히 화차와 혼동되는 신기전(로켓 추진식 화살 병기, 화차는 신기전을 발사할 수 있게 하는 장비이다)과 같은 신무기를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화포를 제작하여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최윤덕의 4군 개척,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여진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넓혔다. 오늘날 북한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영토는 세종 때 그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외교적인 면을 보면, 명나라에 사대를 해서 친교를 다졌다. 이 과정에서 공녀를 바쳐야 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전쟁을 피하고 명나라와의 문화적, 경제적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일본과는 쓰시마 정벌 이후 관계가 끊어졌다가 1443(세종 25년) 계해조약을 맺어서 무역을 재개하되 여러 제한을 두어 후환의 여지를 줄였다.
한글(훈민정음)의 창제
세종의 정책 역시 모두 잘되고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백성을 위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국가의 정책을 만들어나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조선은 왕조 국가이고 국왕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세종은 스스로 그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 모색의 절정이 훈민정음 창제였다. 우리나라는 한자를 문자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한자로 쓰는 한문은 우리말과는 어순도 다르고 문법도 맞지 않아 고등 교육을 받을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세종은 소리 나는 대로 쓸 수 있는 표음문자 ‘훈민정음(한글)’을 개발해서 누구나 쉽게 글로 자신의 의사를 남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성종, 나라의 틀을 완성하다
조선의 헌법을 만들다
성종은 2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업적은 조선의 헌법 격인 『경국대전』을 반포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운영 체제가 이 법전 안에 수록되었다. 이후 변화되거나 새롭게 만들어진 법령들을 모아 새로운 법전들이 계속 생겨났지만 그 근본은 어디까지나 『경국대전』에 있었다. 또한 국가 예식을 정리한 『국조오례의』도 펴냈다.
세조가 없앴던 집현전 대신 인재들을 육성하는 자문 기관으로 홍문관을 만들었다. 홍문관은 ‘옥당(玉當)’이라고도 불렸으며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삼사라고 칭해지는 중요한 정부 기관으로 성장했다. 홍문관 대제학은 가장 영예로운 직책으로 여겨졌다.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담은 역사서 『동국통감』, 우리 나라의 시문들 중 좋은 문장을 가려 실은 『동문선』,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음악 서적 『악학궤범』 등을 출간하는 등 많은 문화 사업도 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라 『악학궤범』에는 고려 시대 가요도 한글로 기록하여 남길 수 있었다. 또 악기와 무용스 등을 그려서 남겨놓아 오늘날 우리나라 음악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성종은 과부 재가 금지법을 만드는 등 가부장적인 제도를 성립시키며 풍속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사람의 성정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은 성종 때 벌어진 조선 최대 스캔들의 주인공인 어우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어우동은 양반집 딸로 여러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이 일이 탄로 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법에 따르면 유배형이 맞는 것이었지만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결국 어우동은 1480년(성종 11년)에 사형에 처해졌다.
전란의 시대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인가?
조선이 무능한 탓?
임진왜란 때 조선은 거의 모든 국토가 침략을 받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고 소중한 건물과 기록들이 불타 없어졌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때 제대로 방어해 내지 못한 조선이 무능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인식일까?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방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조선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전쟁이 벌어진 다음에 선조는 백성들을 속여가며 달아나기까지 했으니 이런 책임론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흔히 병자호란의 원인을 조선이 청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말들 하는데(이런 생각도 잘못이다) 조선은 일본의 비위를 건드린 적도 없었다. 그야말로 잠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처음에 너무 세게 맞아버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조선의 지배층들은 병력을 조직하고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의병이다. 의병을 조직한 주체는 양반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은 관직에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의병은 어떤 면에서는 관군이기도 했다. 무관 출신들이 의병 조직에 들어가 싸운 경우도 많았다.
전쟁의 원인은 전쟁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원인을 조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이상한 해석일 수박에 없다.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이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망상에 빠져서 침공을 한 쪽이 나쁜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스페인이 대항해 시대에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침공했는데, 이것을 놓고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조선은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세웠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경제력을 몰랐고,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물량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조선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왕조는 보존되었고 국토 중 어떤 곳도 잃지 않았다.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지만 외국의 지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점을 보면 임진왜란은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전쟁이다.
물론 왕이 백성들을 적의 아가리에 밀어 넣은 상태에서 파천을 해 수없이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다는 점에서 조선 조정의 대응은 대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피해를 줄일 방법은 과연 없었을까?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고 한다면 왜 이렇게 실패했는지를 살피고 이렇게 실패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궁리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왕조의 황혼
강화도령, 철종
강화도령이 왕이 되다
헌종은 스물셋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헌종은 후사도 없이 사망하고 말았다. 헌종은 정조 이후 3대 독자였다. 가까운 왕족도 없는 상황이었다.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던 은언군의 손자로 강화도에 살고 있던 이원범이 다음 왕으로 지목되었다.
이원범은 이때 열아홉의 나이였지만 제왕학을 전혀 익히지 못한 사람이었다. 수렴청정은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왕실의 제일 큰 어른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아서 3년간 행했다.
안동 김씨는 철종의 왕비로 김문근의 딸을 밀어 넣으며 척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이미 국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세자 시절을 거쳐 자기 세력을 조금이라도 키울 수 있었던 다른 왕들의 경우와 달리, 철종은 철저히 고립무원이었으니 정권은 안동 김씨의 손안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임술민란
1892년(철종 13년) 2월, 진주에서 대규모 농민 반란이 시작되었다. 진주뿐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이어졌다. 삼정으로 인한 괴로움을 더 이상 참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은 더 이상 이런 체제로 가서는 희망이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진주민란이 아무 일도 없이 갑작스레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850년(철종 원년)에 환곡을 감당할 수 없다는 농민들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답변은커녕 오히려 처벌이 돌아오자 1859년(철종 10년)에는 농민들이 한양으로 올라와 비변사에 직접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비변사는 환곡 문제를 시정하라고 명했으나, 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철종 13년에 부임한 목사가 환곡을 조사해 보자, 무려 총 환곡의 60%에 해당하는 2만 8천여 석의 환곡이 증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환곡은 왜 증발했을까? 아전과 관리들이 결탁해 빼돌린 것이다. 이렇게 이익은 자기들이 챙겨 먹고 몇 배의 부담을 농민들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몰려오는 서양
1840년 청나라는 영국과 아편 전쟁을 치렀다. 1842년 청은 패배했고 홍콩을 영국에게 내주는 치욕적인 조약(난징 조약)을 맺어야 했다. 영국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1856년 프랑스와 연합해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켜 1860년 청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했다.
동쪽의 일본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미국의 페리 제독은 군함의 무력 시위를 통해 1854년에 일본을 개항시켰다. 이제 서양의 손길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던 조선으로도 뻗쳐오기 시작했다.
고종, 나라를 말아먹다
고종은 실질적인 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서구 열강의 세력이 밀려드는 상황에서 고종은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따라갈 인재가 부족했고 고종은 척신들에 의지하면서 나라는 어지러운 길로 들어섰다.
다시 척신의 시대
대원군은 1873(고종 10년)에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물러났다. 이제 스물두 살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고종의 왕비는 여흥 민씨였다. 대원군의 부인, 즉 고종의 친모도 여흥 민씨였으므로 양대에 걸쳐 척족이 여흥 민씨였다. 이는 외척의 발호를 쉽게 가져올 수 있는 구도였다.
고종 역시 역대의 왕들처럼 자신만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고종은 즉각 쓸 수 있는 카드를 활용했다. 척신을 들인 것이다. 그 결과 민씨들이 조정에 가득 차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
1876년(고종13년)에 일본과 조일 수호 조약(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1853년(철종 4년)에 개항을 했다. 하지만 조선은 신미양요로 미국을 물리치자 자신감 속에 척화비를 건립했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졌다.
1875년(고종 12년) 일본은 강화도로 운요호를 파견하여 조선을 도발했다. 강화도 초지진에서 접근하는 일본의 소형 보트에 포격을 가했는데 이들은 그걸 빌미로 함포 사격을 가하고 강화도를 침공해 약탈했다.
일본의 무력 시위로 조선은 강제 개항되었다. 국제 조약 같은 것을 알 리가 없었기에 어떤 함정이 있는지 모르는 채 조약에 서명을 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웠기에 당하고 만 뼈아픈 조약이었다. 일본은 이 조약으로 치외법권, 무관세, 쌀 수출입 허용 등의 엄청난 혜택을 가져갔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민씨 척족의 폭정은 과거 세도 정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은 더 가혹했다. 군인들에 대한 홀대로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에게 급료가 사실상 지급되지 않고 있다가 1년여 만에 급료라고 준 쌀은 겨와 흙이 섞여 먹을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군인들이 격렬히 항의하자 민씨 척족은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주동자들을 포도청에 감금하는 통에 군인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들은 민씨 척족들의 집을 습격하고 잇따라 살해했다. 결국에는 대궐까지 침입했다. 이들의 목표는 왕비였다. 공관이 습격당하고 자국민이 살해된 일본은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군이 출동하자, 청나라도 군대를 파견했다. 이로써 조선에는 청일 양군이 모두 주둔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 땅에 외국군이 주둔하게 된 것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삼국 간섭으로 서구 열강의 힘을 본 고종은 러시아 쪽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 배후에 왕비가 있음을 알고, 경복궁을 침입해 왕비를 죽이는 참극을 연출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부른다.
이 무렵 고종은 연금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과 친일 내각의 조선군이 한양을 빠져나가면서 고종에 대한 감시도 느슨해졌다. 고종을 이를 일본의 세력에서 벗어날 기회로 여겨,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쳤다. 이 일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는데 ‘아관(俄館)’이란 ‘러시아 공사관’이라는 뜻이다. 일국의 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친 초유의 사태였다.
허울뿐인 제국의 성립
고종은 1년 후 환궁하여 조선이 제국임을 선포했다. 1897년 10월,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연호는 광무(光武)로 결정했다. 조선은 본질적으로 독립 국가였지만 형식적으로는 청나라의 속국이었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이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개혁 정책도 추진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가로 나아갈 동력이 부족했다. 고종은 여전히 백성들을 다스리는 군주의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1905년(광무 9년), 의지하고 있던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이때 이른바 친일파가 대거 탄생했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고종은 세계 각국에 항의하기 위해 1907년(광무 11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일본의 방해로 이들은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고종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강제로 퇴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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