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단 하나의 나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우리에겐 정해진 ‘답’이 아닌, 꾸준하고 성실한 ‘질문’이 필요하다. 대답은 나아가기를 멈추는 소극적 활동이고, 질문은 전에 알던 세계 너머로 건너가고자 하는 적극적 시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죽기 전에 완수해야만 하는 내 소명은 무엇인가.” 나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게 하는, 열 편의 문학에 숨어 있는 인생 문장들을 통해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해 진심을 다해 묻고 다음을 향해 나아가자.
■ 저자 최진석
1959년 음력 정월에 전남 신안의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유년에 함평으로 옮겨 와 그곳에서 줄곧 자랐다. 함평의 손불동국민학교와 향교국민학교, 광주의 월산국민학교, 사레지오중학교, 대동고등학교를 나왔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중국 헤이룽장대학교를 거쳐 베이징대학교에서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퇴임하고,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으로 있다. 건명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경계에 흐르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나는 누구인가』(공저)가 있고, 『중국사상 명강의』 『장자철학』 『노장신론』 『노자의소』(공역)등의 책을 해설하고 우리말로 옮겼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은 2013년 중국에서 번역·출판되었다.
■ 차례
서문
첫 번째 걸음
‘미친놈만이 내 세상의 주인이 된다 _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최진석의 독후감 | “우선 쭈그러진 심장부터 쫙 펴십시오”
두 번째 걸음
나에게 우물은 무엇인가 _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최진석의 독후감 | “내 별을 봐,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어”
세 번째 걸음
부조리한 세상에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 _알베르 카뮈 『페스트』
최진석의 독후감 |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니다”
네 번째 걸음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_헤르만 헤세 『데미안』
최진석의 독후감 | “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
다섯 번째 걸음
‘나’로서 승리하는 삶 _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최진석의 독후감 |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여섯 번째 걸음
모든 존재는 ‘스스로’ 무너진다 _조지 오웰 『동물농장』
최진석의 독후감 |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편안한 잠”
일곱 번째 걸음
깨어 있는 사람만이 여행할 수 있다 _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최진석의 독후감 |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나의 운명”
여덟 번째 걸음
‘내’가 궁금하면 길을 찾지 말고 이야기를 하라 _이솝 『이솝 우화』
최진석의 독후감 | “한 마리이긴 하지. 하지만 사자야”
아홉 번째 걸음
나는 아Q인가 아닌가 _루쉰 『아Q정전』
최진석의 독후감 |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열 번째 걸음
치욕을 또 당하지 않으려면 _유성룡 『징비록』
최진석의 독후감 |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감사의 글
중요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우리에겐 정해진 ‘답’이 아닌, 꾸준하고 성실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나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게 하는, 10편의 문학에 숨어 있는 인생 문장들을 통해 진심을 다해 물어보세요.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부조리한 세상에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 _ 알베르 카뮈 『페스트』
지금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지독한 어떤 것과 싸우는 중이다. COVID-19다. 오래전 유럽에는 페스트가 돌았다.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페스트와 싸웠던 사람들 속에 우리가 있다. 카뮈의 말을 직접 듣는다. “나는 페스트를 통해 우리 모두가 고통스럽게 겪은 그 숨 막힐 듯한 상황과 우리가 살아낸 위협받고 유배당하던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동시에 나는 이 해석을 존재 전반에 대한 개념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한다.” 그 누구도 감염시키지 않을 선량한 사람이란 방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방심하지 않으려면 의지가 있어야 하고, 긴장해야 한다. 제대로 존재하려면 긴장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니다”
카뮈는 다니엘 디포의 문장을 제사로 끌고 와 자신의 소설 『페스트』를 규정한다. “한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감옥살이에 빗대어 표현해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이 문장을 통해 그는 자기 소설의 형식을 규정한다.
그 형식은 바로 이야기의 속성을 가진 문학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 미덕인 은유다. 어떤 것을 그것 자체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전혀 다른 어떤 것에 기대어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습관적 언어에 갇혀 질식해가는 진실을 구출해내기 쉽다. 탁월한 인간은 이런 일을 유난히 잘한다. 은유를 구사해 진실을 더 잘 드러낼수록 철학적인 문인이 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도 모른 채 문학이라는 간판을 달고 이데올로기를 파는 뻔뻔한 글쟁이가 된다. 글을 다루는 사람이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으려면 늘 긴장해야 한다. 기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핵심이자 전부인 이것을 지키는 데에 카뮈는 매우 성실했다. 당연히 제목 『페스트』도 페스트 이상을 말하는 수고를 했다. 그렇다면 『페스트』가 보여주려는 ’페스트‘는 무엇인가.
지금 겪는 코로나나 과거에 겪은 페스트나 모두 강력한 병독으로 인간을 단절시키고 온 세상을 감옥으로 바꿔버린다. 카뮈는 “한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감옥살이에 빗대어 표현해보는” 방식을 사용해 페스트로 다른 페스트까지 넓게 말하려고 한다.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인생이지요.” 우리 인생은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단절된 감옥살이에 쉽게 들어선다.
카뮈는 그 의미에 몰두한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나를 꼭 가둔 채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건너가지 못하게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모두 페스트다. 정해진 마음, 정치적 진영, 종교적 독선, 편견과 고정관념 등등이 또 다른 페스트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런 것들을 넘어 어디론가 건너가는 활동력을 회복해 자유를 누리는 것이 페스트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이다. 인간으로 존재하려는 자들이 갖춰야 하는 자격이다.
카뮈는 『페스트』의 제일 앞부분에 죽어가는 쥐들을 등장시키며 그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는 두 인물을 선명하게 대비한다. 두 인물은 병원을 지키는 수위 미셸과 의사 리유다. 미셸은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지만, 쥐들이 죽어가는 일을 목격하고도 누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둥 줄곧 해왔던 익숙한 방식으로 자기에게 편하게 해석해버린다. 정해진 관념의 지배를 쉽게 받아들이고 거기서 오는 익숙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자들은 예민하지 않고 둔감하다. 미셸이 그랬다.
반면에 리유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건의 진원을 찾으러 변두리 빈민가까지 헤집는다. 어쩔 수 없다. 페스트 속에서 잘 살아남으려면 굳은 의지를 품고 긴장해야 한다. 미셸은 자신을 가두는 정해진 마음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약했고, 의지가 약하다 보니 긴장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출발은 벗어나려는 의지와 투쟁이다.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페스트를 용인하는 자에게 게으른 사람이라는 명찰을 하나 더 달아주고 싶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미셸과 리유가 만드는 거리 사이에 존재한다. 성스러운 얼굴을 하고 관념에 심이 갇힌 사람으로는 파늘루 신부가 있다. 신은 관념의 우두머리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에도 그것대로 유익한 점이 있어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고 여긴다”. 정해진 관념으로 해석하면 병고도 유익한 점이 있다.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에 있는 유익한 점을 말하고, 자본주의자는 자본주의에 있는 유익한 점을 말한다.
게으른 자는 봄을 말하고 긴장하는 자는 돋아나는 새싹을 살핀다. 게으른 자는 봄을 논하느라 새싹을 외면한다. 살피지 않고 외면하는 사이에 빚어지는 엇박자가 길어지면 인생은 발이 묶인 야생마처럼 속절없다.
리유는 페스트에 걸려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아이의 곁을 지키다 “아이들마저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라며 파늘루 신부 앞에서 절규한다. 이는 페스트에 발이 묶인 한 인간이 감옥 문을 열고 자유를 되찾겠다는 투쟁적 선언이다.
보건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투쟁하던 타루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는가?”였다. 이에 대해 리유는 말한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성인은 관념이고 인간이 되겠다는 나는 존재다. 카뮈는 보건대까지 조직해 선을 행하던 타루를 죽이고 리유를 살렸다. 타루처럼 나를 혁명하는 데는 관심 없이 우리를 혁명하는 데에만 열을 내느라 스스로 갇히는 자들도 있다. 우리는 관념이고 나는 존재다. 정해진 사랑을 실천하느라 자신의 사랑을 잃고 발이 묶인 자들도 있다. “그러나 사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는가.” 관념의 우두머리인 신의 대리인으로 지내는 것은 죽음의 길이고, 구체적 존재인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인간으로서 자격을 갖춰나가는 것은 삶의 길이다.
세계는 어둠이자 ‘부조리’다. 보건대를 조직해 헌신한 타루도 죽고,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도 고통 속에서 죽고, 리유의 부인도 죽는다. 선한 일을 해도 ‘조리’의 정점에 있는 신은 그들을 살리지 않는다. 이렇듯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은 “뚜렷이 보려고 애쓸 뿐이다”.
‘나’로서 승리하는 삶 _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고기잡이 노인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기잡이는 아니더라도 긴 시간 자신의 삶이 팍팍하고 이룬 것 하나 없다는 느낌에 허탈한 맴을 매일 도는 사람도 있다. 팔십오일째 되는 날 아침, 바다로 나가기 전에 노인은 “오늘은 자신이 있다”라고 중얼거리며 또 배를 탄다. 팍팍하게 지쳐가는 당신, 아침에 집을 나서며 “오늘은 자신이 있다”고 중얼거릴 수 있는가? “죽을 때 까지 싸울 거야”라는 다짐을 자기 고유한 호흡에 새길 수 있는가? 삶은 투쟁이다. 겉으로만 싸우는 투쟁으로는 진짜처럼 살다 가기 어렵다. 겉으로 아무리 깨져도 심장 가까이 파고들어가 그 안의 무엇을 찾아내고 성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평생 한 가지 일에 자기를 모두 바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말에서는 구도자의 기품이 느껴진다. 진실하게 자기를 모두 바치면 구도자가 된다. 어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출렁이는 바다와 헤밍웨이의 원고지 사이는 부부처럼 가깝다. 헤밍웨이는 원고지를 바다 삼아 낚시하고,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바다를 원고지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고기가 물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나도 어부로 태어났을 뿐이야.”
세상의 이치는 어부도 물고기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진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진실하면 누군가를 필요로 하며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오랜 시간 고기를 잡지 못하던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 항구로 돌아가는 길에 상어 떼들이 그의 업적에 손상을 내려고 달려들자 그는 그들과 싸워 물리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보통의 어부가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다면 우선 스스로에게 망신이다. 그러나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조건과 환경을 탓하지 않듯이 자기도 탓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체면을 구긴 경험을 뒤로하고 마침내 자기의 공을 크게 세운 사람을 만나면, 그 공을 이루게 한 가장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는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한 문장을 발견했다. “내일은 멋진 날이 되겠구나.” 인생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이런 자들은 묵묵히 자기를 향해 걷는 자들이면서, 자기를 책망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이 떠나가더라도 끝까지 혼자 남아 자기를 사랑하고 지킨다. 자기를 비루하게 여기고 쉽게 지치는 사람은 물고기를 못 잡은 채 85일째가 되던 날 바다로 나가면서 “85는 행운의 숫자이지”라고 말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낙관적인 내공 앞에서 부끄러움을 감추기 어렵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어디에나 자기를 위해 마련된 높은 자리가 있다.
이런 낙관적인 자세는 자기를 믿는 자만 가질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주변을 탓하지 않는다.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팔십사 일을 포함해서 사자 꿈을 꾸며 곤한 잠에 빠지기까지 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남이나 환경을 탓하는 불평 한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탓하지 않는 자는 빌리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빌리지. 나중에는 구걸하게 돼.” 나는 제우스가 무엇을 빌려 썼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이 노인네에게서 오히려 존재의 당당함이 더욱 빛난다. “그에 관한 모든 것은 눈을 제외하곤 전부 노쇠했는데 두 눈은 바다 색깔을 띠고 기운찼으며 패배를 모르는 듯했다.” 나는 이런 눈빛을 가졌는가. 나는 이런 눈빛을 가지려고 단련을 하는가.
이런 눈빛을 가지고 당당하게 존재하는 자들에게는 향기가 난다. 공자도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동조자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 향기에 취해 궁극의 신뢰를 보여주는 사람의 출현을 확신한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는 마놀린이 바로 그랬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 않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무게중심이 낮게 자리해 흔들림이 없다. 공을 잘 치려면, 공이 맞는 여기의 순간에 집중해야지 공이 도달할 먼 저기를 미리 보려고 하면 안 된다. 운은 자기에게 진실한 사람에게만 오는 선물이다.
또한 85일 만에 청새치를 잡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행운은 신뢰의 결과이기도 하다. 마놀린은 “믿으이 깊지 않은” 제 아버지보다도 서로 믿는 사이인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 존재의 많은 부분을 열어주었다. 바다로 나가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 소년은 “두 마리의 신선한 작은 참치 또는 날개다랑어를 주었는데, 할아버지는 그것들을 가장 깊은 곳의 낚싯줄 두 개에 추처럼 매달았다.” 할아버지의 자부심을 드러나게 해준 680킬로그램도 넘을 거대한 청새치는 바로 이 소년이 준 미끼를 물었다. 신뢰는 항상 빛나는 결과를 안긴다.
“자네 스스로에게나 당당하고 확신을 갖는 게 낫지 않겠나.” 스스로에게 당당한 자! 이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있을까? 집단이 공유하는 이념이나 믿음으로 당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당당한 자라니! 다른 사람의 인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에게 떳떳한 자다. 어부로 살면서도 그는 “단지 생존을 위해 그리고 먹거리로 팔기 위해 물고기를 죽였던 건 아니었다.” 그는 “자부심을 위해 물고기를 죽였다. 그는 어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스스로 존재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자다.
상어 떼와의 목숨을 건 싸움도 자기가 잡은 청새치를 하나의 전리품으로서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는 어부로서의 자부심을 지켜야 했을 뿐이다. 청새치를 지키는 데 실패하더라도 그는 자기가 어부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소유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당당하다.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청새치가 다 뜯겨 나가고 뼈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어부로서의 자부심만은 잃지 않겠다는 자세다. 이는 작은 이익들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자부심과 존엄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인간 선언이다.
치욕을 또 당하지 않으려면 _ 유성룡 『징비록』
생각하는 능력이 있으면 잘못한 후에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을 써서 반성한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마음을 써서 반성하지 못하므로 잘못을 반복한다. 반성한 후에 남긴 기록물은 귀하다.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환란을 겪었는가보다 환란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는가가 더 중요하다.
치욕을 또 당하지 않으려면, 환란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자기를 잘 살필 일이다. 환란 속에서도 사적 이익에 눈이 먼 벼슬아치들에 싸인 채 제일 높은 자리의 선조가 국가경영의 길을 잃고 정치 공학에만 빠져 있을 때, 우리에게는 그래도 유성룡과 이순신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선조인가 유성룡인가 이순신인가. 나는 누구인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자기를 섬기는 자는 질문을 할 수 있고, 자기를 섬기지 못하고 자기의 외부를 섬기는 자는 이미 있는 남들의 견해만 살피는 대답에 빠진다. 질문하는 자는 우선 자기를 궁금해하는 능력이 있다. 외부에 있는 것을 어루만지기보다는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살아보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머리에 이미 있거나 집단에서 공유하는 정해진 생각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세계를 사실대로 관찰하고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계의 모든 생산은 질문의 결과다. 그래서 질문하는 자, 즉 자기를 향해서 걸을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서는 생산의 주도권을 잡는다. 자기를 향해서 걷지 못하는 자는 세계를 사실대로 관찰하기보다는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경향이 강해서 허망한 정신 승리법에 빠져 산다.
자기를 궁금해할 줄 아는 사람은 인식 능력이 굳지 않고 그 이면까지도 의식을 펼칠 줄 안다. 보통 사람은 평화 속에서 평화를 즐길 뿐 위기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도자라면 깨어 있어야 하는데, 지도자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지면 보통 사람보다도 더 형편없어져서 부패해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성룡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자초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맹목적인 평화주의에 빠져 각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전란이 발발하기 몇 달 전, 임진년(1592) 봄에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 변방에 보내 대비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으나 활, 화살, 창, 칼 따위를 보아도 “대부분 문서상으로만 갖추고 법망을 피하고자 하였을 뿐”이었다. 이때 유성룡이 한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나라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 군사가 나약해져 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적에 대항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당시 신립 같은 지도자들이 겨우 이런 정도의 정신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폭발하였고, 이것이 아마 선조 초기부터 만들어진 붕당정치를 더욱 심화시킨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붕당정치는 요즘 말로 하면, 진영의 정치다.
지도자들이 진영에 갇혀 있으면 우선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진영에서 정한 이념을 확대 재생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국가보다는 진영의 이익을 더 중시해버리는 데까지 빠질 수 있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현실을 진영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보이는 대로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정책이나 태도가 실재적이지 않고 이념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신묘년(1591년) 봄에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의 정황을 살피고 돌아왔는데, “배가 부산에 정박하자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일본 정황을 급하게 보고하였다. 얼마 뒤 임금을 만난 자리에서” “김성일의 대답은 달랐다”. “신은 그러한 정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김성일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탠다. “황윤길이 민심을 동요시키니 옳은 일이 아닙니다.”
김성일은 진영에 갇혀 나라의 차원에서 사고할 수가 없었다. 국론이 통일되지 않고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으면, 이런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유성룡이 후세를 위해 『징비록』을 남긴 이유다.
기업이 망하는 것도 먼저 스스로 망한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먼저 스스로 망한다. 외부의 경쟁자들은 망해가는 이 기류를 타고 들어올 뿐이다. 외부의 경쟁자들은 이런 기류를 먼저 읽고 이야기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에 일본의 국왕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온 “야스히로가 안동 구미를 지날 때 창을 들고 서 있는 사내들을 보더니” “너희들은 창 자루가 매우 짧구나”라고 말하면서 비웃었다. 조선의 예조판서가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야스히로가 후추를 뿌리니 기생과 악공들이 그것을 줍느라 서로 다투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야스히로가 말한다.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이미 기강이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이런 말들을 조짐으로 읽고 대비했어야 했지만, 진영에 갇혀 생각이 끊긴 조선은 어떤 예민함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속수무책이었을 뿐이다.
『징비록』을 남긴 유성룡도 나라를 완전히 뺏기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던 결과를 자신에게서 찾지 못한다. “이러한 일을 겪고도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늘이 도와주신 것이다. 또한 선대 임금의 어질고 후덕한 은택이 백성의 마음에 굳게 맺혀 있어 백성들이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고, 성상께서 명나라를 섬기는 정성이 황제를 감동시켜 천자국이 제후국을 돕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진영의 좁은 시각에 갇혀 스스로 힘을 기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다가 외국의 힘을 빌려 나라를 살려놓으면, 분명히 그 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할 뿐이다. 조선이 긴 시간 명나라와 그런 관계였다. 『징비록』을 읽으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임진왜란 300년 후에 청나라와 일본은 다시 한반도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끝내고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는데, 조약의 제1조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외국의 두 나라가 전쟁을 하고 맺은 강화조약 제1조가 뜬금없이 “조선이 자주독립국을 확인”하는 것이라니,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지고 진영에 갇혀 좁게 사는 것이 일상이 되면 언제라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전란 당시 우리에게는 그래도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은 정해진 생각에 갇히지 않고, 그 벽을 넘어서는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과 좌수사 박홍은 왜선의 규모만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우리 군의 화력과 우수한 선박 운용법은 활용해보지도 않은 채 배와 무기를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총의 사거리가 함포에 비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판옥선에는 함포를 탑재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장점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불패 신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비장한 명언은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의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함포와 판옥선이라는 산업적이고 기술적인 성취가 버티고 있었고, 그 성최를 관찰하는 사고력이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말을 토할 수 있는 내공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평소에 그가 자기를 함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모범이 되는 이런 문장은 자기를 함양하고, 자기를 궁금해하고, 자기를 향해서 걸을 수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온다. 그런 사람이 걷는 비장한 길을 다시 음미해보는 것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모두가 의무로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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