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의 시간
 
지은이 : 제임스 폭스(역:강경이)
출판사 : 윌북
출판일 : 2022년 04월




  • 케임브리지대 미술사학과장이자 근현대 미술 방송 다큐멘터리의 진행자로 널리 알려진 제임스 폭스가 8년 넘는 조사와 연구 끝에 집필한 이 책은, 세상을 구성하는 일곱 가지 색의 정체를 역사와 과학의 렌즈로 들여다보며 설명해줍니다.   


    컬러의 시간


    서론

    ‘색의 의미’에서 의미란 무엇을 뜻할까? 색과 관련된 의미에는 세 종류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색채와 색조가 지닌 정서적이거나 심리적인 의의에서 나온다. 빨강은 활기차고, 갈색은 무기력하고, 맑은 파랑은 어두운 파랑보다 행복하다.


    두 번째는 주관적 반응이 아니라 체계화된 사회적 관습에서 나온다. 빨강은 경고를 뜻하며 하얀색 깃발은 항복하겠다는 표시다. 세 번째이자 역사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의미는 연상으로 생겨난다. 인류는 이 세 번째 유형의 의미를 수천 년 동안 만들어왔다.


    전 세계의 철학자와 신학자, 연금술사, 의전 담당자들이 색을 행성과 요일, 계절, 기후, 방향, 원소, 금속, 보석, 꽃, 약초, 음(音), 알파벳, 사람의 나이와 기질, 신체의 기관과 조직, 구멍, 감정, 덕, 악과 연결하며 미로 같은 연관성의 체계를 창조했다. 논리적인 비유도 있지만,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은 것도 있다.


    물론 다른 모든 것처럼 색에는 본래 의미가 없다. 색의 의미는 색을 보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창조한다. 그래서 하나의 색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하양은 서구에서 오랫동안 빛과 생명, 순수와 동일시됐지만, 아시아의 몇몇 지역에서는 죽음의 색이다. 영어에서 초록은 질투의 색이지만 프랑스어에서는 공포, 태국어에서는 분노, 러시아어에서는 슬픔이나 지루함의 색이다.


    미국 정치에서 빨강은 보수이고 파랑은 진보이지만 유럽에서는 반대다. 색의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파랑이 남성적이고 분홍이 여성적이라고 생각하며 자녀들의 옷을 입힌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반대였다. “분홍은 남자아이, 파랑은 여자아이를 위한 색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칙”이라고 1918년 어느 육아서는 조언한다.


    모든 색은 다의적이다. 확실한 의미를 지녔다고 여겨지는 색도 마찬가지다. 검정은 의미가 가장 일관된다고 할 수 있다. 암흑과 절망, 죄, 죽음과 동일시되며 역사 내내 거의 모든 곳에서 폄하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구제불능이라 여겨지는 검정조차 긍정적으로 연상될 때가 있다. 지난 100년간 검정이 최신 스타일의 동의어처럼 여겨지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유행하는 모든 상품은 ‘새로운 검정(the new black)’이라 불리게 됐다.


    의미라는 것이 모두 그렇듯 색의 의미도 맥락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맥락을 넘어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색 선호도는 전 세계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최근 5대륙 17개국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한 연구에 따르면 파랑은 모든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색이다. 두 번째 유형인 관습적 의미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세계화되는 세상은 색을 이용한 많은 표지와 상징을 공유한다.


    하지만 세 번째 유형의 의미는 어떤가? 색의 ‘연상적 의미’는 정말 세계적일 수 있을까? 색의 은유는 한 공동체의 풍경과 언어, 관습, 믿음에 따라 형성되는 복잡한 건축물이다. 이런 연상적 의미는 이른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언제 어디에 살든 모든 사람이 마주치는, 많지는 않지만 단순하고 일관적인 기준이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일곱 기본색(검정, 빨강, 노랑, 파랑, 하양, 보라, 초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색은 너무나 변화무쌍하므로 이 책이 색에 대한 결정판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색의 보편적 특성을 최대한 존중하려 노력했다. 색은 사람들의 희망과 두려움, 편견, 집착을 반영한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검정 : 어둠 밖으로

    많은 고대 신앙은 빛과 어둠의 이원론을 토대로 한다. 서기 3세기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가 세운 영지주의 종교인 마니교는 세상, 그리고 세상에 거주하는 존재들은 빛과 어둠이 충돌하는 전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마니교는 두 요소가 다시 분리되어 평화가 자리잡는 미래를 열망한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이 대체로 그렇듯 그들도 고집스러운 비관주의자다. 이런 은유와 고대 창조 신화들의 공통점은 어둠을 ‘결핍’으로 본다는 점이다.


    고대 문화에서 검정은 현대과학에서처럼, 빛을 내는 것과 직접 연결되었다. 그러나 고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빛과 분리되어 어둠과 한데 묶였다. 검정과 암흑, 죽음이 확고하게 연결된 때는 기원전 1000년이 되어서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검정을 ‘어둡다’는 뜻도 가진 멜라스(melas)라고 불렀고 죽음과 끊임없이 연결했다. 이들의 하계는 이집트인들이 먼저 상상했던 하계처럼 어두컴컴했지만 긍정적인 의미는 없었다. 성경은 어둠에는 온갖 반감을 표현하지만 검정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다. 성경에서 검정은 여전히 그저 하나의 색일 뿐이다. 도덕적 속성보다는 물리적 속성이다.


    성경에서 수상쩍게 여겨지는 색이 있다면 빨강이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 뒤로 몇 세기 동안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은 교부들이 사악한 빨강을 무도한 검정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 후반에는 검정에 대한 편견이 일상생활로 퍼졌다. 대중은 악마의 색이라 여겨지는 검정에 온갖 두려움을 품었다. 검정에 대한 편견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정확히 집어내기란 쉽지 않지만 언어의 진화에서 몇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록이 잘 남은 영어를 살펴보면, 한때 검정을 뜻하는 영단어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이는 초창기에 검정이 지녔던 상반된 특성을 반영한다. 고대와 중세 영어에는 칙칙한 검정(sweart)과 빛나는 검정(black)을 뜻하는 단어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12,13세기에 sweart는 없어지고 black은 더 이상 빛나는 특성과 연결되지 않았다.


    1933년에 쓴 절묘한 에세이 ‘음예 예찬’에서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어둠의 ‘신비’가 동양 미학의 일부이며 이는 빛에 대한 서양의 잘못된 집착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우리 동양인은 우연히 어디에 있게 되든 그 곳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어둡다고 하여 어떤 불만도 느끼지 않으며, 우리는 어둠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광선이 부족하면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어둠에 빠진 채 어둠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서양인은 자기 운명을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언제나 강하다.”이처럼 어둠을 수긍하는 태도는 불교에서 유래한 생각의 일부였다. 어둠을 받아들인 덕택에 일본은 서양과는 다른 미의 기준을 발달시켰다.



    노랑 : 우상의 황혼

    해가 노랗다는 사실은 잔디는 초록이고 하늘은 파랗다는 것과 함께 색에 대한 자명한 진리에 속한다. 글을 깨치기 전의 아이들도 그쯤은 안다. 그래서 도화지에 노란 광선을 두른 노란 원을 그린다. 그러나 태양은 사실 노랗지 않다. 색깔을 색조와 채도, 휘도에 따라 표시한 도표인 색도도(chromaticity diagram)사에서 태양은 피치핑크색이다. 우세한 가시파장을 판단했을 때는 초록색이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파장의 가시광선을 어마어마한 양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하양의 화신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태양이 노랗다는 오해를 고집하는가? 어쩌면 우리가 태양을 거의 보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안전하게 해를 바라볼 수 있을 때는 해가 뜬 직후나 해가 지기 직전, 하늘에 낮게 떠 있을 때다. 그때는 해가 노란색으로 보이는데, 지구 대기가 햇빛의 파란색 파장을 분산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가 지는 순간에는 노란빛도 흩어진다. 해는 오렌지색이 되었다가 마젠타색이 되어 수평선이나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만다.


    “떠오르는 태양은 인간에게 최초의 경이로움이자 모든 성찰, 모든 사고, 모든 철학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첫 계시이자 모든 믿음, 모든 종교의 시초가 아니었을까?”라고 19세기 문헌학자 막스 뮐러는 물었다. 뮐러는 태양이 인류 문명의 로제타석이라 생각했다. 거의 모든 신화의 토대라는 것이다.


    대체로 노랑은 태양처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는 강황이 인간의 통치 권력을 옹호하는 데 쓰였다. 중국은 고대부터 색의 의미를 매우 정교하게 구분해 사용했다. 일련의 중국 사상가들은 노랑이 빨강처럼 밝고 뜨겁고 활동적이므로 긍정적 의미와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중국인들은 노랑을 전능한 태양과 비옥한 토양, 중국 문명의 토대인 위대한 황허강과 동일시하며, 하늘과 땅을 통합하고 중국을 통치하는 지배자의 상징으로 삼았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의 황제들은 당연히 노란색으로 구분되었다.


    한때 유럽인들도 다른 문화권 사람들만큼이나 노랑을 사랑했다. 노랑을 온기와 금, 사프란, 꿀, 버터, 야생화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중세시대 어느 무렵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노량은 의혹과 반감, 심지어 혐오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무엇보다 종교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노랑을 대하는 새로운 감정을 들여온 것은 분명 기독교였다. 고전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반감, 기쁨과 자긍심을 상징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기독교의 거부감이 낳은 결과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새로운 반감은 또한 노랑의 물리적 특성 탓일 수도 있다. 노랑은 햇볕처럼 따뜻하고 밝지만, 온기가 부족할 때는 날카로운 느낌을 주며 밝기가 부족할 때는 칙칙해 보인다.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하양을 갈망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싸우던 셈이다. 세상은 대체로 노랑을 향해 가기 때문이다. 유기물은 가시스펙트럼의 중간인 노랑 영역대의 빛을 더 많이 반사하는 경향이 있다. 자외선은 많은 유기물 분자의 변화를 촉진하고 흰 물감과 양모, 실크, 면을 차츰 누릇누릇하게 만든다. 다름 아닌 우리 자신도 이런 변화의 희생자이다. 그러므로 유럽인들이 노랑을 비천함, 원치 않은 대상과 끊임없이 동일시한 것이 놀랍지 않다. 12세기부터 노랑은 배신과 질투, 비겁함, 탐욕, 나태의 상징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고, 국외자를 나타내거나 낙인찍은 일에 점점 이용되었다.


    그러나 원색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로버트 보일(Robert Boyle)과 노랑에 대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통찰로 인해 노랑이 복권되었다. 괴테의 노랑은 세상의 긍정적, 활동적인 힘으로, 보는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준다. 더 나아가 노랑을 ‘밝음’ 및 ‘따뜻함’과 동일시하고 ‘빛에 가장 가까운 색’이라 표현함으로써, 괴테는 옛사람들이 그랬듯 이 색을 의식적으로 태양과 다시 연결했다.



    하양 : 유독한 순수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리 주위를 하얀색으로 에워싼다. 하얀색이나 미색 페인트로 집을 칠하고 하얀 리넨과 하얀 그릇으로 집 안을 채운다. 우리 몸에 대한 접근을 흰색에 허락하기도 한다. 하얀색을 피부에 바르고 이에 문지르고 몸이 좋지 않을 때는 몸이 낫기를 바라며 하얀 알약을 삼킨다. 이는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양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이 색이 세상의 결함을 없애고 가장 고질적인 얼룩까지 제거해주며, 우리를 티 하나 없는 상태로 되돌려 놓으리라 믿는다.


    우리의 하얀색 숭배는 신앙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성경은 하양을 도덕적, 영적 정화와 거듭 연결한다. 다윗왕은 밧세바와 간통한 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살해하도록 시키고 나서, 하양을 갈구하는 기도까지 올린다. 하얀 옷은 모든 대륙에서 구원을 상징하고, 사람들이 구원을 청할 때 입는 옷이 되었다. 교황과 수도사, 랍비, 중동의 사막과 일본의 숲을 걸어가는 순례자들도 입교와 희생 속죄 제의의 참가자들도 흰 옷을 입는다. 그리고 서양의 결혼식에서는 신부들의 순결을 표시로 입는다.


    우리는 왜 하양을 순수하다고 생각할까? 그 이유는 ‘부재’에 있다. 순수처럼 하양은 그것이 배제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검은 물체는 그들에게 도달하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반면, 흰 사물은 빛을 튕겨낸다. 순수함이 오염의 부재라면 하양은 색의 부재다. 그러니 우리가 흰색과 무색을 자주 혼동하는 상황이 놀랍지 않다. 우리는 색이 없는 무언가를 희다고 줄곧 말하고, 흰 물체를 ‘비어 있다’고 표현한다. 이런 혼동 때문에 우리는 흰색을 잘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양을 사물의 순수성이 색으로 오염되기 전의 색이며 따라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상태라고 생각한다. 인류 문화에서 하양은 검정과 빨강과 함께 가장 꾸준하게 의미가 부여된 색이다. 인류가 다른 색을 표현하는 말을 갖기 오래전부터 이들은 우리 삶의 모든 면을 지배하는 상징적인 삼총사가 되었다. 검정이 어둠과, 빨강이 인간의 피와 연결됐다면, 하양은 세계 곳곳에서 육체적, 도덕적 순결을 뜻하는 은유가 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법적 지위가 흑백으로 구분되었다. 신세계의 식민지에는 유럽 이주민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함께 살았는데, 식민 정부는 이처럼 다민족으로 구성된 노동 인력이 하나로 단결해 착취에 저항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유럽 출신 노동자와 아프리카 출신 하인 및 노예들을 분리하는 법을 만들었다. 결국 문제는 다시 순수성이었다. 성경의 예언자와 계몽 시대의 고대 전문가, 현대의 미니멀리스트들처럼 인종간 결혼을 금지한 버지니아의 입법자들도 그들의 티 없는 하양이 색의 ‘혐오스러운 혼합’으로 오염될까 두려워했다.


    인종 이론가들은 하양의 의미를 토대로 더욱 근본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 미국의 성직자이자 철학자인 새뮤얼 스탠호프 스미스(Samuel Stanhope Smith)는 “하양은 피부에 색이 없는 상태로 볼 수 있고, 온갖 어두운 색들은 하양이라는 물질에 침투한 다양한 얼룩으로 볼 수 있다.”라고 했다. 여기서도 흰색과 무색의 차이는 무시된다. 물론 백인은 하얗지도, 색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스탠호프 스미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자신의 피부를 실제로 물들이는 분홍과 노랑 베이지와 갈색의 스펙트럼을 보지 못했다. 이들의 집단적 실명은 이후 인종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터였다.


    이처럼 자신들의 피부에 색이 없다고 묘사함으로써 자신들을 다른 모든 민족과 구분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는 ‘백인’과 ‘유색인’이라는 거짓된 구분을 창조했다. 그리고 물론 순수의 색을 본인과 연결함으로써 자신들이 지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고결한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문제로 되돌아온다. 바로 ‘깨끗함’이다.


    하양이 순수했던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해도 분명 이제 더는 아니다. 지난 5세기 동안, 그리고 분명 계몽시대 이후 서양 사상가들은 텅 빈 색깔로 여겨지던 이 색에 너무나 많은 미학적, 과학적, 사회적, 인종적 의미를 채워 넣어 하양을 이데올로기로 변형시켰다. 하양에 대한 집착은 그들 자신과 세상을 정화하려는 욕망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절대적인 하양은 절대 순수처럼 현실에는 있을 수 없다.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다. 그것을 좇는 일은 혼란과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초록 : 실낙원

    세상의 모든 색 중에 식물의 초록색만큼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 없다. 우리는 모두 시인 콜리지가 만든 용어인 ‘초록잎(greenery)’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에 워낙 익숙하다 보니, 식물이 초록색 말고 다른 색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초록은 결코 합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식물이 초록인 이유는 엽록소가 태양광의 파랑과 빨강 파장을 흡수하고 그 사이에 있는 빛은 튕겨내기 때문이다. 나무가 있는 환경에서 진화한 인간은 초록 색채들을 특히 능숙하게 구분한다. 영장류의 눈이 빛의 긴 파장을 감지하는 세 번째 원뿔세포를 발달시키게 된 이유도 바로 그들을 둘러싼 엽록소들 사이에서 길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광수용기 덕택에 우리 선조들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에는 없는 능력을 얻었다. 초록잎 사이에서 잘 익은 빨간 열매를 찾아내고 어린 잎과 늙은 잎, 영양가 있는 잎과 독이 있는 잎 등 서로 다른 잎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초목의 색을 본다.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초록이 우리 발밑에, 머리 위에, 주변 곳곳에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초록 속에서 사냥하고 숨고 수확하고 그것을 소비한다. 초록을 보기 위해 멀리까지 여행도 한다. 초록을 지칭하는 용어가 따로 없는 사회도 많지만, 용어가 따로 있는 사회는 대개 잎과 풀, 식물의 생장을 가리키는 기존 용어를 토대로 만들었다. 일단 씨가 뿌려지자 연상 작용이 뿌리를 내렸다. 초록과 자연의 결합은 단순한 시각적 유사성에 토대를 두었고 갈수록 점점 커지며 복잡해졌다. 이제 초록의 의미를 자연과 분리하기가 어렵게 됐다.


    이슬람 문화는 항상 색으로 충만했다. 아랍어의 시각적 어휘는 대단히 많고 정교하다. 우리의 매혹적인 색 용어 가운데 많은 것이 이 아랍어에서 유래했다. ‘다양한 색채의’라는 구절이 쿠란 곳곳에서 주문처럼 반복된다. 이슬람교에서 색은 다름 아니라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색채 중 초록만큼 중요한 색은 없다. 메카는 관목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뜨거운 황갈색 사막에 둘러싸여 있다. 반면에 쿠란에는 초목이 가득하다. 쿠란에 등장하는 정교한 작물 묘사는 어쩌면 초목이 드물었던 사회의 꿈이었는지 모른다.


    비의 영향을 묘사하는 구절도 많다. 비가 신의 자비를 보여주는 신호라면, 초록은 낙원의 선물이었다. 낙원이란 곧 정원이라는 상상이 워낙 견고히 자리 잡고 있어서 이제 낙원을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기가 힘들 정도다. 중동의 정원은 무함마드가 등장하기 수천 년 전부터 가꾸어졌지만,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에 의해 원예는 중요한 창조 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초기 이슬람 정원은 대체로 실용적이었다. 태양을 피할 그늘을 제공하는 안뜰이거나 1년 내내 열매가 열리는 과수원이었다. 그러나 쿠란의 지식이 퍼지면서 정원사들은 쿠란이 무척 인상적으로 묘사된 낙원을 재현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초록은 이슬람의 상징색이 되었다. 무함마드가 좋아했던 이 색은 사원의 둥근 지붕을 덮고, 신자들의 머리띠를 물들이며, 곳곳의 이슬람 단체를 표시한다.


    중국인들에게는 빨강이 남아시아인들에게는 노랑이 그렇듯, 이슬람 문화에서는 초록이 상서롭게 여겨진다. 친구들은 서로에게 ‘초록빛 한 해’를 기원한다. 시리아에서는 운이 좋은 사람들을 두고 ‘초록 손’을 가졌다고 말한다. 모로코에서 ‘초록 등자’를 단 말을 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행운을 가져온다. 이슬람 교리는 자연을 대하는 이슬람교도들의 태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쿠란은 이슬람교도들에게 환경을 단지 숭배할 뿐 아니라 보호하라고 반복해서 가르친다. “대지에 못된 장난을 치지 마라”라는 쿠란의 이 흥미로운 문구는 이슬람 학문의 황금기였던 8~13세기 사이에 철학자와 과학자들에 의해 포괄적인 환경윤리로 변모하였다.


    이제는 녹색을 보고 환경적 의미를 떠올리지 않기가 어렵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끊임없이 녹색소비를 하고 녹색사고를 하고 녹색생활을 하고 녹색이 되라는 충고를 듣는다. 녹색은 이제 우리 시대의 키워드가 됐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국가’, ‘인종’, ‘민족’처럼 함의가 가득한 말이 단어가 되었고, 윤리적 식사와 유기농산물, 재활용, 재생에너지, 오염, 삼림벌채, 기후변화, 야생생물 보호,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 연결된다. 이 중 어느 것도 말 그대로 녹색은 아니지만, 세계 모든 이가 이러한 녹색의 은유를 이해한다.


    지난 몇 십 년에 걸친 지질학적, 정치적 변화는 초록의 놀라운 회복력을 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잘 보여준다. 자신이 자라나는 세상에서 양분을 흡수하는 식물처럼, 초록은 수천 년 동안 자연의 의미들을 흡수하고 그것들을 유지해왔다. 이런 의미들은 농업과 원예 종교, 그리고 최근에는 환경운동에서 나왔다. 그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번성했지만, 모두 똑같은 근본적인 감정에 뿌리를 둔 듯하다. 새싹이 흙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신석기시대 농부에게든, 사막에 살며  정원 같은 낙원을 꿈꿨던 이슬람교도에게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현대의 환경운동가에게든, 초록은 예나 지금이나 희망의 색이다. 길고 추운 겨울이나 가뭄으로 말라붙은 여름 뒤에 엽록소가 도래하여 새로운 시작을 선포하리라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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