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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람스의 밤과 고흐의 별
저   자 : 김희경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22년 04월




  • 오랫동안 쇼팽과 브람스의 선율에, 고흐와 실레의 그림에 많은 이들이 교감하고 고단한 하루를 위로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이 영원의 가치를 잘 유지하고 더욱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명화와 클래식, 예술가와 우리 삶을 잇는 39가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브람스의 밤과 고흐의 별


    파격은 나의 힘 - 일탈과 혁신 사이를 오가다

    아스토르 피아졸라: 탱고와 클래식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남미에서 시작된 탱고는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고 사랑합니다. 춤뿐만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에선 춤보다 음악이 더욱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영화와 광고에서 자주 접하기도 하고, 탱고 음악 공연을 쉽게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2021년엔 ‘탱고 음악의 대가’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더 많은 공연들이 열리기도 했죠. 피아졸라의 이름이 생소하신 분들도 많겠지만, 그의 음악을 감상하거나 작품 제목을 들으면 익숙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대표 탱고 음악으로 꼽히는 <리베르탱고>, 김연아 선수의 뛰어난 피겨 실력과 함께 접할 수 있었던 <아디오스 노니노>와 <록산느의 탱고>가 모두 피아졸라의 작품입니다. 클래식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망각>와 <탱고의 역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등도 그가 만들었습니다. 탱고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매력의 음악 세계를 펼쳐 보인 것이죠.


    ‘탱고의 영혼’ 반도네온과 만나다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태어났을 때부터 오른쪽 다리가 뒤틀려 있었습니다. 수차례 수술받은 덕분에 많이 좋아졌지만 평생 걸음걸이가 불편했죠. 그러나 이는 그의 음악 인생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습니다. 피아졸라가 쓴 작품 수는 2500여 곡에 달합니다. 그 숫자만으로도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피아졸라는 4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게 됐습니다.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음악을 사랑했고, 아이의 음악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곳에서 피아졸라는 자신의 숙명이 되는 악기를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전당포에서 사준 중고 ‘반도네온’입니다. 반도네온은 ‘탱고의 영혼’이라고 불릴 만큼 탱고 음악에 많이 쓰입니다. 아코디언과도 비슷하지만 음폭이 더 넓고 정교합니다. 그는 이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도 반도네온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덕분에 반도네오니스트로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롭고 용감했던 것 같습니다. 배움과 음악적 교류를 위해 유명인들을 서슴없이 찾아갔습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왔던 <간발의 차이로>라는 곡을 만든 카를로스 가르델도 직접 찾아갔죠. 가르델은 자신을 찾아온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노래 반주 등을 맡겼습니다. 피아졸라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스 루빈스타인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도 불쑥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루빈스타인 밑에서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클래식 공부를 했습니다. 음악을 위해서라면 늘 과감히 용기를 내고 도전했기 때문에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의 음악은 어디에? … 자각으로 탄생한 누에보 탱고”

    하지만 그의 음악 여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지금은 피아졸라의 음악이 탱고 음악의 정석처럼 여겨지지만, 당시엔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전통 탱고 음악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격렬히 비난했습니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누에보 탱고(Nueve Tango)’라고 불렸습니다. ‘누에보’는 ‘새로운’이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입니다. 이전과 다른 차원의 탱고 음악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렇다면 무엇이 새롭다는 걸까요. 그는 탱고 음악과 클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해 탱고 음악을 재탄생시켰습니다.


    사실 피아졸라는 어느 순간부터 탱고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탱고는 원래 서유럽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부둣가 노동자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서로 껴안고 추던 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탱고 음악은 춤을 돋보이게 하는 반주곡의 성격이 강했죠. 춤이 우선시되다보니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피아졸라는 제약이 많은 탱고 음악을 그만두고 클래식으로 재능을 펼치고 싶어 했습니다. 루빈스타인으로부터 음악을 배우며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죠.


    그러다 프랑스에서 만난 작곡가 나디아 블랑제는 피아졸라의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여는 결정적인 조언들을 해줬습니다. 피아졸라가 쓴 악보들을 본 블랑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썼어. 그런데 여긴 스트라빈스키, 여긴 라벨이군. 피아졸라는 어딨지?”


    탱고 음악에서 벗어나 멋진 클래식 음악을 만들 생각만 하다 보니, 자신만의 특색을 찾지 못하고 흉내 내기에 급급했던 겁니다. 오히려 블랑제는 피아졸라가 반도네온으로 연주한 탱고 음악을 들은 후 눈을 반짝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탱고를 절대 그만두지 말라고 합니다.


    실수도 새로운 동작이 된다

    피아졸라는 그의 조언에 따라 탱고 음악을 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기로 합니다. 대중적인 탱고 음악에 클래식의 뛰어난 예술성을 가미한 것이죠. 그의 곡들이 친근하면서도, 한 차원 높은 음악적 미학을 갖추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는 탱고 음악의 진화 과정을 직접 <탱고의 역사>라는 곡에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환락가에 울려 퍼졌던 탱고 음악을 다룬 1악장에서부터 탱고와 현대음악을 결합한 4악장에 이르기까지 한 곡 안에 그 변천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탱고 음악이 남미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로 확산되고, 나아가 오랜 시간 사랑받게 된 것은 이 같은 피아졸라의 영향이 큽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의 주인공 프랭크는 이런 말을 합니다. “탱고엔 실수가 없어요. 실수를 하고 스탭이 엉켜도, 그게 바로 탱고예요.” 실제 탱고엔 실수가 없습니다. 실수가 곧 새로운 동작이 됩니다. 피아졸라의 음악 인생도 이런 탱고 특성과 쏙 빼닮은 것 같습니다. 탱고 음악의 거장이 오히려 그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방황했단 사실, 그러나 이 또한 새로운 탱고 음악을 만드는 또 다른 스탭이 됐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여름처럼 뜨거운 그의 탱고 음악과 춤에 흠뻑 취하고 싶어집니다.



    더 다르게, 더 새롭게 - 변신 끝판왕

    안토니오 비발디: 계절마다 찾아오는 변신의 귀재

    여름의 끝자락이 되면 날씨가 변덕스러워집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빗줄기가 쏟아지는가 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죠. 그렇게 계절이 오가는 변화의 시기가 되면 유독 감성적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음악도 더 자주 찾아 듣게 됩니다. 그럴 때면 주로 어떤 음악이 떠오르나요. 다양한 곡이 있겠지만, 가장 직관적으로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계절을 담은 음악 중 이토록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 또 있을까요. 이 곡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지만 세련된 느낌도 주죠. 그래서인지 <007> 시리즈와 <슈퍼맨 리턴즈>부터 2020년 개봉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까지 영화 음악으로도 자주 활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계>라는 작품의 영향력이 너무 크고 강해서일까요. 비발디는 헨델,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꼽히지만 정작 그에 대해선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계>만의 매력을 비롯해, 이 명곡을 탄생시킨 비발디의 음악 세계 속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계절에 스토리를 입히다

    먼저 <사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봄’은 싱그럽고 상큼한 선율이 인상적입니다. 갓 피어나는 새싹들, 산들바람을 떠올리게 하죠. 이어지는 ‘여름’에선 휘몰아치는 폭풍우 등을 음악으로 표현했는데, 3악장에 이르면 실제 눈앞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사계>의 각 악장에 적힌 소네트(짧은 시)까지 살펴보면 그 그림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여름에 대해선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번개와 격렬한 천둥소리, 달려드는 파리 떼의 공격으로 목동은 피로한 몸을 쉴 수가 없다. 아아, 목동의 두려움은 그럴 만하다. 하늘은 천둥을 울리고 우박을 내리게 하여 익은 열매와 곡식들을 떨어뜨린다.”


    이 소네트의 작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발디가 직접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음악과 시로 사계절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 보이다니 감탄이 나오네요. 게다가 단순히 이미지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목동의 이야기를 더해 스토리텔링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죠. <사계>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생생하게 와닿는 비결이 아닐까요.


    ‘가을’에선 풍요롭고도 여유로운 느낌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가을 소네트에도 이 부분이 실감 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농부들은 춤과 노래로 수확의 즐거움을 기뻐하고 축하했다. 바커스의 술 덕택에사람들은 흥겨움에 빠진다.” 동네 사람들과 유쾌하게 술 한 잔 나누며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겨울’에선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보라 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스토리텔링이 잘 가미돼 있습니다. 겨울 1악장이 추위로 벌벌 떠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2악장에선 그가 난롯가에서 몸을 녹이며 집 밖 풍경을 평화롭게 바라보는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2악장이 겨울을 그렸지만 봄을 묘사한 것처럼 감미롭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이유죠. 겨울 2악장은 가수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이란 곡에 샘플링돼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습니다.


    형식의 변화로 혁신을 이루다

    당시엔 종교음악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비발디는 사제였는데도 종교음악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를 포함해 450여 곡에 달하는 협주곡을 썼습니다. 그중 <조화의 영감> 6번 곡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비발디는 오늘날 협주곡에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협주곡의 틀을 최초로 정립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빠른 1악장 – 느린 2악장 – 빠른 3악장으로 구성한 것인데, 완급 조절을 통해 지루하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죠. 독주와 오케스트라 합주가 번갈아가며 주고받듯 연주하는 ‘리토르넬로’ 형식도 고안했습니다. 대비 효과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이 형식에 대해 바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접목했습니다. 그는 당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오페라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1713년 <이관의 오토 대제>를 시작으로 매년 오페라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작품이 유실되긴 했지만 50여 편에 달하는 오페라를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오페라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비발디에게도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737년 이탈리아 페라라에서 오페라를 제작하고 있던 그에게 추기경이 추방 명령을 내린 것이죠. 추기경은 정확한 이유를 밝히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프라노 안나지로와 스캔들에 휩싸인 것이 문제가 됐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안나지로는 비발디와 20살 넘게 차이가 나는 그의 제자였는데, 사제인 비발디가 그를 만난다는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소문만으로도 문제가 됐습니다. 결국 그는 오페라를 급히 중단하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했지만, 그를 후원해줄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나며 재기는 물거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발디는 끝내 타향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거장의 음악은 거장이 알아보는 법이죠. 바흐는 비발디의 음악을 연구하고 여러 번 편곡했는데, 이로 인해 비발디의 작품들은 재발견되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됐습니다.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하고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던 비발디. 거장의 명곡은 그렇게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며 모든 계절마다 우리의 곁에 흐르고 있습니다.



    사랑 없인 예술도 없다 - 최고의 로맨티시스트

    요하네스 브람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낭만의 대명사가 되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작은 설렘이 느껴집니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1959)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도 제목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자유분방한 연인 로제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39세의 여인 폴, 그리고 14살 연상의 폴을 사랑하는 청년 시몽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폴은 브람스 얘기를 꺼내며 수줍게 다가오는 시몽에게서 조금씩 위로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브람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일 출신의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시몽이 수많은 음악가들 중 굳이 브람스 이야기를 하도록 설정한 걸까요.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은 제목에도 브람스가 들어가고, 심지어 ‘좋아한다’라는 낭만적인 단어가 함께 한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일 3B 음악가로 꼽힌 거장

    이 질문은 소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장르에서 브람스를 내세운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 안소니 퍼킨스 주연의 영화 <이수>(1961)도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영화 OST로도 브람스의 <교향곡 3번> 3악장이 사용돼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선 2020년 SBS 클래식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방영돼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꽤 많을 겁니다.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그의 부인 클라라 슈만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브람스에 대해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의 ‘3B’ 음악가로 꼽힙니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 자체가 브람스가 얼마나 대단하고 심오한 음악 세계를 구축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악기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는데, 함부르크 악단의 연주자였던 아버지 덕분이었죠. 브람스는 재능을 일찌감치 드러냈고, 열 살 땐 공개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10대 후반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죠. 그러다 건강을 해쳐 정규 과정의 학업도 중단하고, 요양까지 가게 됐습니다. 이후엔 다행히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에두아르트 레메니, 요제프 요아힘 등을 잇달아 만나며 음악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세기의 삼각관계, 그리고 낭만

    그리고 그가 스무 살이 되던 1853년,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요아힘의 소개로 슈만과 클라라 부부를 알게 된 것이죠. 이들과의 만남은 브람스의 음악 인생과 삶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슈만은 뛰어난 음악가로 명성이 자자했고, 음악평론지 <음악 신보>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클라라도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죠. 이들은 브람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지원했습니다. 슈만은 그의 스승이 되었으며, <음악 신보>에 브람스에 대한 글을 써 신인이었던 그가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클라라도 브람스에게 많은 영감을 줬죠.


    그리고 브람스는 스승의 아내이자 자신보다 14살 많았던 클라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소설에서 폴이 시몽보다 14살 많은 나이로 설정된 것도 이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기 때문이죠.


    브람스의 마음은 아주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1866년 작곡한 <4개의 가곡집> 가운데 <5월의 밤>이란 노래에선 클라라를 향한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은빛 달빛이 숲 사이로 빛날 때, 잠결의 달빛이 초원 위에 흩날릴 때, 밤꾀꼬리가 노래할 때, 나는 슬픔에 잠겨 천천히 걷네. 나뭇잎 쌓인 곳, 한 쌍의 비둘기의 행복을 노래하네. 난 고개 돌리며 어두운 그들을 찾네.”


    아름다운 봄밤에 거리를 거닐며 느꼈을 브람스의 짙은 고독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는 선을 지키며 묵묵히 슈만과 클라라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슈만이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브람스는 슈만의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며 도왔습니다.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클라라와 친구 관계로 남았죠. 브람스는 이후 다른 여성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끝내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클라라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습니다.


    닿을 듯 닿지 못한 애달픈 마음.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했던 배려와 따뜻함. 그렇기에 브람스는 훗날 낭만의 대명사로 남은 게 아닐까요.



    고통은 잊어요, 행복만 줄게요 - 아름다움과 행복 덕후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사는 것도 힘든데, 그림은 행복해야죠

    화사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춤도 추네요. 이들의 입가에 옅게 번진 미소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꼭 봐야 할 작품으로 꼽히는 <물랭 드라 갈레트의 무도회>입니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대표작이죠. 도시의 자유분방하고 멋진 광경, 이곳에 사는 파리지앵의 여유롭고 활기찬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이 작품을 비롯해 르누아르의 그림 대부분은 아름답고 생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죠. 그런데도 행복이 가득한 그림을 그렸던 것은 르누아르만의 확고한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 그리고 행복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으려 했습니다. 르누아르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죠.


    “그림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인생이나 다른 작품에도 충분히 많다.”


    꿈은 위기 속에 자란다

    르누아르는 가난한 가정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은 물론 생계를 이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덕분에 일찍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재봉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평소 그림을 즐겨 그리는 걸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으로 평생 밥벌이를 할 것을 권했습니다. 르누아르는 13세에 도자기 장인 밑으로 들어가 도자기 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이 이 일을 워낙 좋아했고, 재능도 뛰어나 돈을 꽤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모든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도자기도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도자기에 일일이 그림을 그려 넣는 일자리도 사라졌습니다. 르누아르도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그만둬야 했죠. 그는 대안으로 부채 등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며 가까스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예상치 못한 위기 속에서도 그의 꿈은 자라났습니다. 루브르 미술관 옆 골목에 살던 그는 그곳에 걸린 명작들을 보며 모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식 화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해부학 강의를 듣고, 화실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습니다. 르누아르는 화실에서 미술 인생에 큰 도움이 될 인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등 인상파 화가들을 사귀게 된 것이죠. 원만하고 사교적인 성격의 르누아르는 이들과 적극 어울리며 새로운 화풍에 눈을 떴습니다.


    모네와는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그리며, 서로의 작품을 비교하고 견해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오리 연못>은 모네가 살던 아르장퇴유에 있는 연못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를 통해 르누아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변화를 화폭에 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도 이들과 함께 한동안 인상파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살롱전에서 입상도 하며 주목을 받는 듯했지만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며 르누아르 또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부드럽고 화사하게, 사람과 미소를 담다

    이후 르누아르는 인상파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냈죠. 고전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고전주의와 인상주의 화풍을 절묘하게 결합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상파 화가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작품 대상이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주로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에 반해 르누아르는 사람에 주목했습니다.


    르누아르는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배운 빛의 표현법을 사람을 그리는 데 영리하게 활용했습니다. 빛의 명암을 이용해 사람들의 얼굴과 피부가 더욱 두드러지고 빛날 수 있도록 했죠. 특히 여성과 아이들을 많이 그렸고, 이들의 따뜻함과 생기를 부드러운 색감과 붓 터치로 표현했습니다.


    르누아르의 작품들에선 생생한 역동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르누아르의 춤 연작인 <도시에서의 춤><시골에서의 춤>에 잘 드러납니다. 이리저리 방향을 돌리며 몸을 움직이는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해냈죠. 춤을 추는 작품이 아니어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보면 실제 피아노를 연습하는 소녀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악보를 넘기면서 건반을 치는 소녀, 곁에서 악보를 함께 보며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듯한 소녀의 모습이 실감 나게 표현돼 있죠.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르누아르는 계속 시장에서 외면당했습니다. 그림을 꾸준히 그렸지만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웠죠. 르누아르 스스로 “물감을 살 여유조차 없다”라고 하소연할 정도였습니다.


    마비된 손가락으로 빚어낸 극한의 아름다움

    그런데 40대 전후로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인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샤르팡티에 부인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서히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 아이들>이란 작품은 살롱전에서 큰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후엔 더욱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1889년엔 르누아르의 작품이 ‘프랑스 미술 100년전’의 전시작으로 선정됐으며, 1892년엔 정부로부터 <피아노 치는 소녀들> 등 다양한 그림 작업을 의뢰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명성과 함께 다시 고통도 찾아왔습니다. 자전거에 떨어져 부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심각한 류머티즘 발작에 시달렸습니다. 상태가 계속 악화돼, 잘 걷지도 못하고 손으로 붓을 잡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르누아르는 마비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묶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극심한 고통에도 그의 화풍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작가 본인은 힘들지만, 그림은 여전히 따뜻하고 화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인생의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


    사람들의 미소와 행복을 화폭에 담는 일. 르누아르는 그것을 자신의 과업이자 숙명으로 여기고 어떤 어려움에도 묵묵히 해냈습니다. 그 신념과 열정 덕분에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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