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지은이 : 강신주 외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2년 03월




  •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철학자 강신주, 작은 자본가가 되어버린 서글픈 이웃들에게 철학자의 생각, 철학자의 마음을 전합니다. 타인은 물론, 가족마저 ‘기브 앤 테이크’ 관계가 되어가는 사회에서 인간성을 파괴하는 담론들과 맞서 싸우며 삶과 시대에 대한 성찰을 던집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저잣거리에서 외치는 사랑과 자유

    철학자 강신주 하면 흔히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라는 말이 따라다니잖아요. 선생님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명명이 마음에 드시나요?


    인문학의 핵심 가치는 사랑과 자유를 지향하는 거예요. 자유를 포기하거나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거죠. 사랑과 자유는 결국 같은 거예요.


    사랑과 자유가 왜 같은 것인지 사랑을 해보면 알아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자기가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아는 거죠. 부모님 말을 잘 들었던 사람이 맹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되는지 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구속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데 일정 정도 부자유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거예요. 어쨌든 사랑을 하면, 8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하는 규칙을 어기기 시작해요. 그리고 독립을 하려고 해요.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가능한 거예요. 자유로운 주체로서 상대방을 만나고 싶은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생기면 내가 자유로운 상태인지 자유롭지 못한 상태인지를 알아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생계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1, 2년간 모든 돈을 배낭여행 하는 한두 달에 쏟아붓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 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를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거리의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하시잖아요.


    학교에 있지 않다면 거리에 있는 거니까요. 제가 만든 말은 아니에요. ‘거리의 철학자’라는 말 좋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좋아하는 철학자를 들라면 원효(元曉, 617~686)가 그중 하나예요. 원효도 서라벌 거리의 대중들과 함께 있었잖아요. 거리의 철학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원효 생각이 나서 좋았어요.


    제가 또 좋아하는 철학자 중에 희랍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 ?~BC 320경)가 있어요.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햇볕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서라’고 얘기했던, ‘나는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자신을 밝혔을 때 ‘나는 개다’라고 했던 괴짜 철학자였어요. 디오게네스도 길거리를 구르면서 큰 술통 속에서 기거했어요. 거리의 철학자 하면 이 두 사람이 떠올라요.



    팬데믹 그리고 언택트

    자본의 속도는 인간의 시간을 넘어선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사람들이 두려움이 있고, 바람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코로나가 기존의 팬데믹과 어떤 점이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전염병의 원인은 세계화에 있어요. 흔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하면 대영제국을 떠올리지만, 16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최초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게 영국으로 가고, 미국으로 가고, 이렇게 되는데요. 그 자본주의적 패권이 슬슬 중국으로 갔어요. 전염병은 이런 흐름하고 관계가 있는 거예요. 유사 이래로 전염병은 항상 있어왔어요. 흑사병에서 천연두, 홍역, 콜레라, 스페인독감까지 끊이지 않고 있었는데 마치 처음 일어난 일처럼 말들을 하는 거죠. 제국주의가 득세하는 순간, 전염병은 불가피해요. 수많은 상품과 인력이 오가는 만큼 질병도 오가는 셈이죠.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서 더 심해져요. 노동자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일자리를 찾아 움직이니까요.


    세계화에 따른 정책으로 공격적으로 빠르게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걸 고산병에 비유할 수 있을 거예요. 실질적으로 고도의 문제지만, 위도를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과 똑같잖아요. 위아래가 이후도 다르고 식생대도 달라요. 그런데 패키지여행을 가면 2~3주 안에 돌아와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급하게 속도를 내서 올라가게 되고, 그러면 산소가 부족해서 고산병에 걸려요. 천천히 몸이 적응을 하면서 올라가면 괜찮은데, 그러니까 자본의 속도가 몸의 속도를 추월한다는 것이 문제예요. 상품을 구입하면 입금은 빠르게 되잖아요. 그러면 상품도 빠르게 공급해야 하는데,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을까요? 잉여가치를 줄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가 인간의 몸을 너무 빠른 속도로 끌고 가고 있는 게 문제예요. 


    유사 이래 어떤 세대는 전염병을 겪었고, 어떤 세대는 겪지 않았어요. 지금 40~50대가 전쟁을 겪지 않은 거의 유일한 세대고, 이제 전염병을 한 번 겪은 거예요. 팬데믹은 언제든 다시 올 거예요. 이런 조건 하에서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의료보험 체계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 때 강화됐던 공공의료 체계를 대처(Margaret Thatcher, 1925~2013) 수상 때 다 날렸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영국에서 초기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 치료가 굉장히 힘들었던 거예요. 인류의 과학기술이 발달을 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전 세계적인 문제라고 하면 대비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이득을 추구하는 의약회사가 미리 준비할 리 없잖아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이득이 되는 약만 대량생산하면 되니까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요. 이런 준비들을 하지 않으면서 세계화를 얘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고, 세계화를 주도한 세력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예요.


    20세기까지 탄소를 배출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룬 OECD 국가들이 제3세계 국가에 공장을 옮겨놓고 지금 와서 탄소 배출을 규제해야 한다고 얘기한단 말이에요. 자본과 권력이 포스트 팬데믹을 얘기하고, ‘세계는 변할 것이다’라고 홍보하고, 비대면을 얘기하잖아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기반의 업체들을 키우고, 장비 업체들한테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멀어지겠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오감을 통해서 만나는 거예요. 오감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현실이 아니에요. 인간이 가진 최고의 감각이 촉감이에요. 애완견 동영상 찍어놓고 재생해서 쳐다보면 게 행복인가요? 봐요. 코로나 상황에서 카카오나 네이버가 포스트 코로나,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는 것은 자기네 시장에 들어와서 자기네 콘텐츠를 구입하라는 얘기인 거예요. 사람들이 거기에 휘둘리고 따라가고 있는 거죠. 권력에 대해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문제를 삼아야 되고, 경고를 해야 할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서 잠깐, 스마트폰의 세계, 액정 화면에 압축된 세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시각적으로 세계가 액정 화면으로 응축되는 거예요. 터치 한 번으로 프랑스의 파리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풍광을 볼 수 있죠. 세계화의 논리는 바로 스마트폰으로 구현된 압축된 세계가 없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더군다나 교통수단의 발달로 하루 만에 영국 런던에도 갈 수 있죠. 100여 년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리적 거리가 압축된 셈이에요.


    세계화, 혹은 세계의 압축을 통해 부정되는 것이 바로 몸이에요. 몸은 로컬리티, 지역성을 가지고 있어요. 아르헨티나도 가고 덴마크도 갈 수 있는데, 몸은 긴 적응 기간이 필요하잖아요. 천천히 여유롭게 가면 시차 적응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세계화의 논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삶의 지역성을 고단하게 만들어요.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자본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는 희망을 바로 몸의 긍정이나 지역성의 인정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스마트폰 사회경제학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불가능한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인류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바둑 같은 게임은 인공지능이 당분간 이길 수 없다고 예상했고, 이세돌 기사도 인터뷰에서 자신이 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요. 실제로 붙어보니까 알파고가 이겼어요.


    인간이 기계에게 진 것이 아니에요. 단지 바둑을 진 거예요. 연예에서 진 것도 아니고, 산책에서 진 것도 아니에요. 알파고는 연예도, 산책도, 그리고 농담도 못 하잖아요. 그저 바둑만 둘 뿐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을 기계처럼 부품화하고 분업화해서 전문가로 만들었잖아요. 전문가의 논리에서는 기계를 따라가지 못하죠. 당연한 거예요. 알파고는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모델과 같이 정확하게 계산하고 빠르게 처리하고…….


    바둑을 질 것 같으면 고민하지 않고, 바둑판을 뒤엎으면 돼요. 알파고는 못 하는 거죠. 잠깐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하면서 바둑판을 엎는 일 말이죠. (웃음) 왜 알파고에 진 것이 이슈가 되는지 아세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에요. 우리는 기계만큼 합리적이고 신속하고 정확하지 않구나, 결국 기계만이 전문가가 되고 우리는 아무리 전문가가 될 수 없구나, 결국 기계가 우리를 대신하겠구나, 뭐 이런 절망감을 갖는 거예요.


    인간은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돼요. 하나의 분야만 잘하고 수많은 분야에 미숙하다면 우리는 불구가 되는 거예요. 컴퓨터만 잘 다루고 다른 일, 예를 들어 음악 감상이나 연애, 음식 만들기를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매력 없는 사람인가요. 알파고는 바둑 전문가의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에요. 바둑 전문가하고 싸우고 있는데, 답이 없는 거죠.


    그러면 어차피 기계가 사람을 능가하는데 사람이 바둑 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자동차가 훨씬 빨리 달리는데도 달리기 잘해서 선수가 되면 굉장한 명예와 부를 얻을 수도 있잖아요.


    인간적인 가치가 스타라는 시스템이나 모델 형태로만 남아 있는 거예요. 모든 동네 아이들이 축구를 했던 시절이 아니라 축구를 구경하는 흐름으로 가는 거고요. 대신 자본주의는 가능성만은 줘요. 부르주아사회의 특징은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되는 사람은 없어요. 억울하면 소송을 걸 수는 있지만,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리고 해결도 힘들어요. 오히려 소송의 절차 자체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기도 해요. 가난해서 유명 로펌을 쓰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유리천장에 부딪히는 거죠.


    옛날에는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보이기는 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려고 하면 못 올라가요. 이게 자본주의사회예요. 모든 게 가능해 보이는데, 정작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세계일주도 할 수 있고, 많은 부를 축적할 수도 있고, 요트도 살 수 있어요. 돈과 시간만 있으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요. 그게 모든 문화, 정치, 생활을 지배해요.


    유리천장의 문제는 여성들에게도 적용이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면 된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이걸 받아들이면 부르주아적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 탓을 하는 거죠. 더 열심히 연습했어야 되는데, 하고. 그리고 프레임을 좁혀요. 전문가라는 논리로 보잖아요.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분야는 젬병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회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래서 전문가가 많아지는 사회에서 노숙자가 생겨요. 어떤 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은 해고되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어요. 그러니 노숙자가 되는 거예요.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기능적 절름발이가 되는 거예요.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효율적인 착취를 위해 우리를 유혹해요. 인간적 불구, 즉 전문가가 되면 더 부유해진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체제의 작은 부품이 되려고 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고, 전공을 선택하고, 학위를 받는 거잖아요. 분업의 논리는 굉장히 위험한 논리예요. 이것을 어떻게 없앨까, 하는 것도 우리가 고민해봐야 돼요.



    진보의 전제는 타인에 대한 애정이다

    생계 문제 빠진 인권은 의미 없다

    ‘사회적 타살’이라고 볼 수 있는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되는데요,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나 대안은 없을까요?


    중요한 것은 인권이잖아요. 인권을 생각했을 때 자꾸 망각하는 것이 생계의 문제예요. 생계가 힘들면 인권도 의미가 없어요. 한 사회와 공동체가 개인의 생계를 유지해주는 게 핵심이에요. 역사적으로 인권은 농노나 농민들을 노동자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개념이에요. 공동체의 간섭 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권 개념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경제학적 논리였죠. 미국의 경우에는 흑인 노예들을 노동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인권 개념이 부각돼요. 남북전쟁 이후 수정헌법 제14조에는 ‘어떠한 주도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개인의 삶, 자유, 재산을 뺏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제부터 흑인들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노예에서 풀려나서 저임금 노동자가 되고, 소작농이 되고, 할렘가를 전전하게 됐어요.


    노예제에서는 사람을 소유해서 그 사람의 노동력도 가졌어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그 사람의 노동력을 구매해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노동력을 판다’고 하고, 구직 활동이라고 얘기하고, 너는 자유롭다고 해요. 노동자들은 어떤 자본가에게 자기 노동력을 팔 것인지 결정할 자유밖에 없어요. 그건 자유가 아니죠.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굶어죽는 사회에서 그게 어떻게 자유예요.


    수정헌법 제14조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재산’이라는 개념이에요. 노동력이든 재산이든 개인의 소유물을 빼앗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 흑인 노동자들에게는 유명무실한 주장에 불과하죠.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흑인 노동자에게 빼앗을 무엇이 있겠어요. 빼앗지 않아도 자기를 팔아야 되니 노동시장에 나올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배고파도 자기 몸을 뜯어 먹고 살 수는 없을 테니까요.


    누구도 직접적으로 흑인들을 노동시장에 가도록 강제하지는 않았다, 흑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팔았다, 뭐 이런 주장이 바로 흑인의 인권을 보장했다는 논리예요. 생계의 문제에 직면한 흑인 노동자에게 인권의 논리는 냉혹한 시장의 논리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생계를 유지하는 데 위협을 느끼게 하고 구조적으로 비정규직 일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 사람들에게 인권의 논리를 이야기하는 게 옳을까요? 여성들, 청년들, 사회적 약자에게 생계가 충분히 유지되면 스스로 권리를 지켜요. 최고의 인권은 자기 자신을 팔지 않게 하는 거예요. 생계의 위협 때문에 일자리를 결정하게 하면 안 돼요.


    좋은 사회는 별게 아니라 생계에 걱정이 없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야 돼요. 그런데 생계가 걱정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가 그래요. 이런 사회일수록 인권을 많이 얘기해요.


    노예와 노동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출퇴근 노예가 노동자 아닐까요? 이것이 사실 직장인은 모두 느끼고 있는 현실이죠. 아침에 출근할 때는 마음이 무겁고, 퇴근할 때는 마음이 편하잖아요. 그게 정확한 거예요. 물론 노예제에서보다는 잘살 수도 있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인권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아요, 갑질이지만 어느 정도까지 용인해야 하나, 하는 그런 식의 저항……. 자본가가 법적 절차를 지켜서 노동자를 해고하면 인권이 보호된 건가요? 존댓말을 쓰고 휴가를 보내주면서 최저임금을 주면 인권이 보호된 건가요? 저는 구조적 억압 상태, 구조적 반인권 상태라고 봐요. 인권을 구조적으로 보호하지 못한다면 공동체라고 할 수 없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교재로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최소한 초등학교 때부터 대한민국 헌법을 교과서에 실어서 배웠으면 하고요. 인간의 모든 기본권이 헌법에 나와 있거든요.




    글, 책, 담론들

    다른 사유가 다른 세계를 구성한다

    선생님에게 책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플라톤에게서 ‘파르마콘(pharmafon)’이라는 개념을 찾아내요. ‘약(藥)’이면서 ‘독(毒)’이라는 뜻이에요. 책은 전형적인 파르마콘이죠. 우리의 자유와 사랑을 강화하기도 하고, 아니면 고사시키기도 하니까요.


    시, 소설,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있었지만, 제게 최고의 책은 항상 철학책이었어요. 일상에 매몰된 저를 가장 높은 고도에서, 그래서 가장 아찔한 긴장감에서 내려다보고 낯설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까요.


    시나 소설 혹은 역사책도 그렇지만, 철학책은 우리의 삶, 사회, 그리고 시대를 낯설게 혹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도록 하는 힘이 있어요. 왜, 그런 일 있지 않나요? 한두 달 여행을 갔다 오면 익숙했던 집이나 가족이 낯설어지는 느낌이 들잖아요.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주 멀리 있는 이국적인 지역을 여행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여기서 상대화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내 삶의 형식도 절대적이지 않고, 다른 지역 사람들의 삶의 형식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감각이 생기니까요. 그러니 내 삶의 형식도 반성할 수 있고, 동시에 다른 삶의 형식도 성찰할 수 있는 거예요.


    철학자는 그런 것 같아요.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만들고, 낯선 것도 익숙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철학자는 대개 특정 사회나 특정 시대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죠. 익숙한 삶 혹은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삶을 뒤흔드니까요. 그래서 철학은 사유를 비판하는 특징이 하나 있어요. 생각들을 진단하고, 잘못된 생각을 폭로해야 하는 거예요. 당신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생각을 상대화한다고 할까요.


    철학은 잘못된 사유, 그러니까 일종의 선그라스 같은 것을 벗기는 작업을 해야 돼요. 시력이 1.5인 사람과 0.1인 사람이 보는 풍경이 다르잖아요. 두 풍경 중에 통계적으로 1.5 근처가 많을 때 그 세계를 객관의 세계라고 하는데, 절대적인 객관의 세계가 어디 있어요. 객관은 주관의 객관이고, 주관의 객관의 주관인 거예요. 우리가 보는 거죠. 뱀이 보는 세계와 우리가 보는 세계는 달라요. 그래서 철학은 주관과 객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관이라는 것이 사유고, 내가 느끼는 거잖아요. 내 마음이나 사유가 달라지면 세계는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걸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다른 세계를 구성할 수가 있어요. 모든 사람이 명령도 내리지만,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명령도 듣는 게 민주 사회의 정의잖아요. 자율의 정의가 그거예요. 누가 명령을 내려서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숙고했던 어떤 것들을 얘기하고, 작게는 자기 자신에게 그걸 적용하고, 크게는 숙의를 해서 타인과 약속을 통해서 가는 거죠. 결과가 안 좋으면 회의를 해서 다시 수정을 할 수 있어요. 거꾸로 세계를 만들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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