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예술가들의 밥줄을 끊어놓았으며 예술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러나 종교미술 파괴가 가장 심했던 17세기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 네덜란드에서는 오히려 ‘회화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근대 시민 회화가 활짝 꽃을 피웠다. 교회, 왕실 등 부와 권력을 손에 쥔 후원자의 주문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생산 시스템이 ‘기성품 전시 판매’ 방식으로 바뀐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미술품의 주요 소비층이 성직자, 왕 등 교회와 세속 권력자에서 ‘일반 시민’으로 바뀌었으며, 그림 소재도 성경 내용이나 신화 이야기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종교개혁이 세계 미술사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셈이었다.이 책 ‘부의 미술관’은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부터 ‘회화가 가진 강력한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한 나폴레옹 이야기’, ‘한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알아보고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활용하여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으로 둔갑시킨 폴 뒤랑뤼엘의 탁월한 마케팅 전략’ 등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8편의 욕망의 명화 이야기를 다룬다.
■ 저자 니시오카 후미히코
1952년생. 다마미술대학교 교수이자 판화가. 1992년 간행한 ‘별책 다카라지마 회화 읽는 법(別冊?島 ??の?み方)’, ‘명화 수수께끼 풀이(名?の謎解き)’로 열풍을 일으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다수의 미술서와 미술 프로그램 제작, 기획에 참여했으며, UN 지구 서밋과 아이치 만국박람회 기획에도 참여했다. 지은 책에 ‘피카소는 정말로 대단한가?(ピカソは本?に偉いのか?)’, ‘명화의 암호(名?の暗?)’ 등이 있다.
■ 역자 서수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직장생활에서 접한 일본어에 빠져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해 출판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옮긴 책에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3가지 심리실험 ?뇌과학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1가지 심리실험 -인간관계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8가지 심리실험 ?자기계발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2가지 심리실험 ?욕망과 경제편’, ‘소수는 어떻게 사람을 매혹하는가?’ 등이 있다.
■ 차례
서문_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는 어떻게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켰나?
제1장_ 빵집 광고로 활용된 페르메이르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
제2장_ 천재 중의 천재 다빈치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제3장_ 렘브란트는 왜 자기 그림을 모사하는 ‘가짜 그림’을 양산했나
제4장_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제5장_ ‘신의 길드’와 ‘왕의 아카데미’가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대
제6장_ 미술의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영리하게 활용한 인물, 나폴레옹
제7장_ 폴 뒤랑뤼엘은 어떻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에 가치를 불어넣었나
제8장_ ‘비평을 통한 브랜드화’가 예술의 가치를 좌우하던 시대
후기_ 인간의 욕망은 미술사와 세계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유명 화가들의 그림에 자본주의가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미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곤 합니다. ‘회화가 가진 강력한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한 나폴레옹 이야기’, ‘한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를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으로 바꾼 폴 뒤랑뤼엘의 탁월한 마케팅 전략’ 등 흥미로운 명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부의 미술관
빵집 광고로 활용된 페르메이르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왜 16세기 유럽 예술가의 밥줄을 끊어놓았나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유럽 미술사는 그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이유가 뭘까?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하고 교회를 장식하는 회화와 조각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예술가들이 몸을 사리며 새로운 작품 제작에 앞서 극도로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미술계의 큰손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교회에서 들어오는 주문이 딱 끊기자 예술가들은 글자 그대로 ‘밥줄이 끊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위기라는 씨앗 안에 새로운 기회의 싹이 숨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놀랍게도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회화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 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만 무려 600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회화가 그려졌으니 과연 '열풍'이라 할 만했다. 어떻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미술계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증유의 회화 열풍이 불게 된 것이다.
지금은 회화의 대명사가 된 정물화와 풍경화는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시민이 주도한 회화 시장에서 독립 장르로 탄생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그린 <우유를 따르는 여인(The Milkmaid)> (c. 1660)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1665)는 이러한 새로운 미술 마케팅의 생생한 목격자이자 시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세계 최강 미술 대국으로 만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기성품 전시 판매’ 전략
17세기 말 무렵,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도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미술 작품 제작이 가장 활발한 나라로 거듭났다. 당시 네덜란드를 방문한 프랑스와 영국 여행객은 이토록 많은 그림이 그려지고 곳곳에 장식된 나라를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실제로 상점과 여관, 일반 가정에 이르기까지 벽이란 벽에는 죄다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림이 걸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교회와 왕실이라는 대형 발주처를 잃은 네덜란드 회화시장은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포기해야 했다. 이전에는 어딘가에서 주문이 들어온 이후에 제작에 들어갔다면, 이제 시장의 변화에 발맞추어 ‘기성품 전시 판매’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대응했다. 한데, 이 궁여지책의 전략이 멋지게 먹혀들어 과거의 규모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화가가 주문받지도 않은 작품을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염두에 두고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다. 그 결과 국토 면적이 남한의 약 40퍼센트, 한반도의 20퍼센트도 채 안 되는 작은 나라 네덜란드에서 당시에 그려진 작품 수는 총 600만~650만 점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유형으로 자리 잡은 ‘기성 작품 전시 판매’라는 미술 비즈니스 모델은 작지만 강한 나라 네덜란드에서 탄생했다. 새로운 시장은 새로운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상품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민이라는 새로운 고객층이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하려면 그때까지 교회와 왕실의 프레젠테이션 도구로 활용되던 미술품이 시민의 일상생활 공간을 장식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콘셉트의 상품으로 변신해야 했다.
과거에도 미술 공방이 부업 삼아 미리 제작해놓은 작품을 판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소재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처럼 안정적인 수요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작품으로 한정돼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상은 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으로 판로가 막혀버렸다. 그런 터라 작품을 판매하는 측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시민 고객의 안정적인 수요를 예측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종교성을 배제한 작품을 절박한 심정으로 개발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린 셈이었다.
이렇게 하여 ‘정물화’와 ‘풍경화’가 독립 장르로서 새롭게 탄생했다. 과거에는 조연에 지나지 않았던 일상 소재가 당당히 미술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왜 정물화와 풍경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을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늘날 ‘명화’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정물화와 풍경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형성되고 확립된 장르다. 실제로 그 이전 유럽 미술 작품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이런 유형의 회화는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정물과 풍경을 회화 소재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로부터 불과 한 세기 전 활약했던 르네상스 거장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가 그린 정물화와 풍경화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오늘날 ‘명화’로 인정받는 많은 서양 풍경화에는 풍차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애초에 풍경화가 풍차를 흔히 볼 수 있는 네덜란드에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세기쯤 후 화가의 길을 가고자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진출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풍차를 그렸다. 그는 왜 몽마르트르의 ‘풍차’를 그렸을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유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미 풍경화라고 하면 풍차가 빼놓을 수 없는 소재로 자리매김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참고로 몽마르트르 언덕의 풍차는 밀가루를 쌓는 방앗간 역할을 한 데 반해 네덜란드 풍차는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특수성을 반영해 저지대의 물을 퍼 올려 농지로 보내기 위해 14세기에 고안한 수리 장치였다. 아무튼 교회와 왕실을 장식하던 회화가 일반 시민의 생활공간을 장식하기 시작하자 화면에 훨씬 생동감 넘치는 일상을 담은 소재가 등장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미술의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영리하게 활용한 인물, 나폴레옹
히틀러를 거쳐 현대 광고 기법으로 이어진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미술이 지닌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근대 황제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수도 파리를 고대 로마와 같은 제국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야심만만한 꿈을 오랫동안 꾸었다. 그런 터라 그는 개선문과 오벨리스크 등 로마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기념 건축물을 파리 시내 곳곳에 배치해 근대 제국의 수도 파리의 위엄과 영광을 프랑스 대내외에 과시했다.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리더였던 나폴레옹은 미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는 ‘인스타 셀카 장인’이라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그는 SNS라는 서비스에 꼭 맞는 시각 연출 전략을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에 이미 실현한 시대를 앞서간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은 건축, 회화조각, 인테리어, 보석, 패션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는 고대 유물에서 발굴한 것으로 보이는 고전적인 기념 메달을 만들고 신문 보도를 통제하는 등 광범위하고도 정교한 미디어 관리와 홍보 전략으로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이끄는 나치스 독일은 군복에서 건축까지 고대 로마제국을 철저히 모방해 카리스마 넘치는 디자인으로 통일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히틀러는 나폴레옹 전략을 계승했으며, 현대의 광고 기법은 이러한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을 원형으로 확립되었다.
‘상징 이미지 조작’의 끝판왕,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이 그림의 가장 큰 허구는 나폴레옹이 탄 백마다. 그림 속 백마는 나폴레옹의 애마를 모델로 그렸으나 알프스를 넘을 때 그가 실제로 탄 말은 당나귀와 말의 교배종으로 추위에 강한 노새였다. 참고로 말은 추위와 험한 길에 약해 훗날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 대군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나폴레옹 사후에 그려진 작품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해 험로에 강한 노새를 타는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용모도 실제와 마찬가지로 왜소하고 땅딸막한 체형으로 그려졌다. 이와 달리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외모를 이상화해 그를 키가 훤칠한 미남 청년으로 그렸다.
기마상은 예로부터 권력자의 가장 공식적인 초상화로 여겨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밀라노에 머물던 시절 <최후의 만찬>과 맞먹는 대작으로 밀라노 공의 기마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작 단계에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침공하는 바람에 오늘날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무튼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권력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전통적인 공식에 따르면 역시 노새보다는 말에 올라탄 모습이 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화면 왼쪽 아래 바위에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의 성을 적어 넣었다. 이는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가서 로마군을 격퇴한 고대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과 서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프랑크 왕국을 세운 샤를마뉴 대제라는 전설적 영웅들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 유럽을 지배하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바위에 새김으로써 ‘전설적 영웅’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계획되어 만들어진 근대 황제의 공식 이미지로 몇 점의 모사화를 제작해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유포하는 홍보물 역할을 해왔다. 또한 이 그림이 오늘날 여러 나라의 교과서에 실리면서 영웅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다비드는 왜 황제 나폴레옹을 그린 두 작품 <나폴레옹 1세 대관식>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각도를 다르게 설정했을까?
이러한 관점으로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제까지 몰랐던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구도의 문제다. 즉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옆얼굴로 그려진 데 반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비스듬한 각도로 얼굴을 드러내는 구도로 그려졌다. 이는 절대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화가가 모델의 얼굴 각도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그린 고도의 이미지 연출 전략이다.
다비드는 왜 황제 나폴레옹을 그린 두 그림의 각도를 다르게 설정했을까? 황제 대관식 장면에서는 대관식 장면을 영원히 각인하기 위해 옆얼굴을 선택했고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는 장면에서는 용감무쌍한 나폴레옹을 생생히 묘사하는 데 비스듬한 각도의 얼굴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신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의 정면 얼굴을 본 사람은 누구나 마치 교회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처럼 그림을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얼굴 방향 설정을 과연 화가가 애초 의도했는지는 명확히 증명해주는 자료가 없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적어도 정면상만은 의도적으로 이 구도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당대에는 교회의 성상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 묘사가 일반인의 초상화에서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사진이 없던 시대에 영웅이나 유명인사의 얼굴을 대중에게 알리고 전하는 도구는 그림과 조각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미술작품의 강력한 영향력과 마술에 가까운 효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초상화나 기념행사 기록 외에도 화가를 고용해 자신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주문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유권자들에게 노출되도록 뉴스 영상으로 찍고 보도자료를 내도록 지시하는 유능한 정치인의 노련한 감각이 느껴진다고 할까. 나폴레옹이 주문해 제작된 '뉴스 회화'만도 150점이 넘었다. 그중에서도 초인 나폴레옹 이미지 홍보에 크게 기여한 그림이 있다. 바로 이집트 원정의 거점인 시리아 자파에서 페스트에 걸린 병사를 문병하는 상황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그린 이는 이탈리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의 종군 화가로 동행했던 앙투안 장 그로다. 그가 그린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Bonaparte Visiting the Pesthouse in Jaffa)>(1804)이 발휘한 이미지 전략 효과는 탁월했다. 오늘날 홍보 대행사의 전문가가 기자들에게 뿌리는 보도자료에서나 볼 수 있는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교묘한 솜씨를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서 구현했다고 할까. 이 회화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페스트라는 역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의 살길을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화가가 황제 나폴레옹에게 불사의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이자 콘셉트였다.
화가는 이 그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종교 회화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병자를 기적으로 치유하는 장면을 그린 회화의 구도와 공식을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불세출의 영웅이자 황제인 나폴레옹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구세주’의 이미지를 만들어주고자 한 것이다. 그는 주인공 나폴레옹뿐 아니라 배경 인물도 허투루 배치하지 않고 나폴레옹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치밀하게 활용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 뒤에 서 있는 사관이 그런 효과적인 장치 중 하나인데, 그는 악취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손수건으로 자기 코를 감싸 쥔 모습으로 그려졌다.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야전병원에서 풍겨 나오는 끔찍한 냄새와 참상을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관은 나폴레옹이 환자를 만지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듯한 자세로 그려져 페스트 전염력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구도와 묘사는 세속의 규범을 초월하는 나폴레옹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다.
폴 뒤랑뤼엘은 어떻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에 가치를 불어넣었나
폴 뒤랑뤼엘이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비밀 무기,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
오늘날에는 인상주의 그림의 경쾌한 붓놀림과 밝은 색채가 널리 사랑받지만 당시 사람들은 사진처럼 사실적인 그림을 훨씬 선호했다. 무릇 그림이라고 하면 사물과 사실을 정확히 묘사해야 했고 붓 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들인 완성도를 인정받아야만 비로소 작품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붓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인상주의 그림은 회화의 기본도 모르는 어설픈 초보 예술가들이 끄적인 낙서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미술상의 창고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쓴 악성 재고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연유로 그림이 도무지 팔리지 않아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모네는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였고, 고흐는 평생 불우하게 살다가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폴 뒤랑뤼엘이라는 천재 미술상의 영리한 전략이 성공한 후에야 비로소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인상주의 그림이 거품 시장의 주인공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마치 무대 마술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모자 속에서 살아 있는 토끼를 꺼내듯 천재 미술상은 카브리올 레그 가구와 금테 액자를 활용해 인상주의 화가들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시켰다.
폴 뒤랑뤼엘은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구사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한껏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매장에 화려한 소도구를 적절히 배치해 상품을 돋보이게 만들어 고객의 넋을 빼놓은 다음 빙긋 웃으며 청구서를 들이미는 고도의 마케팅 기법이다. 재미있게도 고객은 분위기에 취해 가격표에 높은 금액이 붙어 있을수록 지갑을 활짝 연다. 고객의 욕망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이런 심리 전략은 오늘날 마케팅 분야의 기본이 된 기법이다.
화랑은 물론이고 보석이나 귀금속매장과 명품매장, 고급 호텔과 유명 레스토랑, 회원제 클럽, 미용실 등 고가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업 시설에서 꾸준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고객이 매장에 들어설 때부터 고객을 유명인처럼 정중하게 모신다. 유명인사 기분을 맛본 고객은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지며 이성이 마비된다. 그리고 황홀해진 고객의 눈앞에 명품으로 포장한 상품을 내미는 것이다. ‘클래식’, 즉 명품 전략에 약한 고객이 의외로 많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왜 폴 뒤랑뤼엘의 마케팅 전략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반대했을까?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은 화려한 금테 액자에 자신들의 그림을 넣는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들 중 일부는 뒤랑뤼엘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반대했다. 그들은 왜 뒤랑뤼엘의 마케팅 전략을 반대했을까? 인상주의 특유의 경쾌한 화풍에 둔중한 금테 프레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작품 소재 관점에서 보면 파리 교회 풍속과 센 강변의 리조트 풍경 등 당대 생활상을 그린 화면에 구시대적 루이 왕조 양식의 액자는 생뚱맞은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간결하고 직선적인 디자인의 액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화가들의 심정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화풍에 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고 최대한 재량권을 주던 뒤랑뤼엘이 액자를 두고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액자와 그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금테 액자에 그림을 넣어 걸었다. 황금색은 카브리올 레그 가구와 함께 루이 왕조를 상징하는 미적 요소였기에 뒤랑뤼엘로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최고의 진정제, ‘금테 액자’
화가들의 볼멘소리에도 폴 뒤랑뤼엘은 인상주의 그림을 팔 때마다 금테 액자를 고집했고 화가의 항의에는 귀를 닫았다. 왜 그랬을까? 그는 철저하게 그림을 구매하는 고객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고객이 보기에 인상주의 그림은 출처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상품이었다. 그러므로 가격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덜컥 사들였다가 가격 폭락 사태라도 벌어지면 난감해진다. 폴 뒤랑뤼엘은 이러한 고객의 불안감을 날카롭게 간파했다.
그는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작품이 가격에 합당한 고급품이며 값을 지불한 후에도 가격이 내려갈 걱정이 없음을 홍보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인상주의 그림을 팔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 맥락에서 금테 액자는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최고의 진정제였다. 왜냐하면 왕조 양식 액자에 넣은 작품에는 은연중 왕실 화가의 명품과도 같은 품격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이 소장해 온 명품의 품격이 느껴지는 황금 후광을 둘러주는 장치가 바로 금테 액자였다.
폴 뒤랑뤼엘은 인상주의 그림의 시장 가치가 확립된 후에야 비로소 고집을 꺾고 화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단순한 디자인 액자에 그림을 넣어 전시했다. 이 시기에는 어떤 액자에 넣어도 인상주의 회화는 꼭 사겠다는 고객이 넘쳐날 정도가 되어 내놓기 바쁘게 팔려나가는 인기 상품이 돼 있었기 때문에 금테 액자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여전히 그림이 제대로 팔리지 않았다면 뒤랑뤼엘은 금테 액자에 인상주의 작품을 넣어 파는 방식을 계속 고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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