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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멘토 모리
저   자 : 이어령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2년 01월




  • 이 책 『메멘토 모리』는 이어령 선생이 강연 및 인터뷰를 통해 세상과 나눈 방대한 대화의 기록인 『이어령 대화록』의 첫 번째 책입니다. 이어령 선생은 우리에게 현재를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어떠한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것일까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 시대의 삶과 죽음, 그리고 문명사회에 대한 성찰을 가늠해봅시다.


    메멘토 모리


    2021년 12월

    이 선생은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고 했다. 그는 “질문은 의문이다. 그러나 물음표에 느낌표가 따르지 않으면 빈 깡통이 된다. 그리스인들은 그 느낌표를 얻기 위해 철학을 했다. 물음표는 지성이고 느낌표는 감성이다. 나는 물음표와 느낌표, 그 문지방 사이를 아직도 헤매고 다닌다”고 말한다.


    이 선생의 사유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현장에서 금방 건져올린 생선처럼 싱싱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학’에서 니은(ㄴ)을 빼면 ‘시학(詩學)’이 된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신의 존재를 시학으로 언어의 기호로 보여주려고 도전하고 모험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물론 온 세계가 큰 재앙 속에 있는 오늘의 상황을 풀어보기 위해 이 선생을 찾아 그 지혜를 빌리고자 했다. 팬데믹으로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병상에서 투병 중인 것을 알면서도 이 선생을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온 지구와 전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종교가 현실적으로 그 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으시는지요?


    “이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날 모든 현대인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러 가지 종교적 가치와 구제를 찾게 되었다고 봅니다.


    첫째로, 인간의 능력으로 쌓아올린 문명과 문화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가를 보았습니다. 쓰나미로 한 도시가 사라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기독교에서 제일 큰 죄악이 ‘휴브리스(hubris)’, 인간의 오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인간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았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생존의 수단 때문에 생명의 귀중함을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각국의 차이를 GDP의 숫자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이제는 코로나의 발생 수와 사망자 수로 바뀌었습니다. 전 인류가 이 세상 모든 가치 가운데 생명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인간은 죽는 존재이면서도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온 셈입니다.


    셋째로, 특히 기독교 국가와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기독교 문명의 본바탕인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꼭 중세 시대 페스트로 인해 기독교의 기반이 흔들리던 때와 같은 그런 위기를 맞이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문제 제기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코로나 패러독스’라고 부릅니다. 그 이름부터가 그렇죠. 코로나는 왕관이고 예수님과 천사들 뒤에 원처럼 비치는 원광입니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성스러이 여기는 것이고, 천사들의 것이지요. 이름부터가 익살맞지 않습니까? 자유의 여신상이 머리에 뭘 쓰고 있습니까? 뾰족뾰족한 것. 그게 코로나입니다. 자유의 여신상 머리 위에 뿔 돋은 것이요. 그게 바로 코로나인 셈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좋고 성스럽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죄악의 팬데믹이 되고 가장 기피의 언어가 되었을까요.


    이 코로나로 인해 전 인류가 현재 대재앙을 겪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대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인구도 불어나고 그 이전보다 번영이 이루어졌습니다. 페스트도 그랬습니다. 이러한 패러독스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런던 인구 3분의 1이 희생당한 1665년의 페스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해 런던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이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비롯해 쟁쟁하고 왕성한 지식인의 활동과 산업혁명, 그리고 ‘팍스 브리태니카’로 영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어요. 런던만이 아닙니다. 페스트라는 재앙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파리 역시도 페스트가 지나간 뒤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발전,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화려한 꽃을 피웁니다. 이것이 바로 팬데믹의 패러독스입니다.


    저는 이 패러독스의 마지막이 기독교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불신받고 쇠퇴해가는 기독교에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인간의 오만과 그로 인한 재앙을 극복했던 그 힘을 되살려내는 희망입니다.”


    -화제를 좁혀보면 인간의 오만과 코로나 패러독스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한 몸에 지녔던 이병철 회장께서 죽음의 문제와 대면하셨을 때 던진 질문이 그것이지요. 그때 던진 질문이 지금 포스트 코로나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우러나오는 궁금증일 것 같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이병철 회장이 가톨릭 신부님께 여쭈었던 질문을 다시 새롭게 요약 정리해서 묻겠습니다. 이번에는 당사자들인 신학자도 교직자도 아닌 한국의 대표 지성에게 여쭈려 합니다.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이시니 어떤 가설이나 개인적 의견이라도 우리에게 전해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하나님이라는 말을 부모님이라고 바꿔봅시다. 우리가 부모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또 하나님이라는 말을 그 흔한 여친이라는 말로 바꿔보세요. 여친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믿고 살아왔지 정말로 나를 낳아주셨는지 나를 사랑하시는지 의심해온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여친도 만나는 동안 한 번도 그 사랑을 의심하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에 관계가 이어진 거예요.


    그런데 부자지간이나 연인 사이에 증명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미 그건 끝난 이야기예요.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정말 저를 낳으셨는지, 저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증명해 보십시오”라고 한다면 “DNA 감정을 해주십시오”라는 말이 되고 지금까지 저를 사랑하신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이미 그 부모 자식 관계는 파탄 난 것입니다. 연인 사이도 똑같아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어느 날 차를 마시면서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증명해”라고 한다면 그 관계는 끝이 난 거예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모 자식 관계가 그렇고 연인 사이가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증명하는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요. 그것이 바로 가족의 사랑이고 남녀의 사랑이고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신앙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개신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요?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가르칩니다. 구교든 신교든 오른쪽 뺨을 맞거든 왼쪽 뺨을 내주라고 하는 종교가 남을 배타해요?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그건 신·구 가릴 것 없이 기독교 정신에서 벗어난 사이비 종교입니다.


    가톨릭이 종교재판을 하고 면죄부를 발행하고 하니까 하나님과 직접 소통을 해야겠다 싶어서 만든 게 개신교입니다. 전유물이 아니에요. 배타가 아닌 개혁이었지요.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거예요.


    신·구의 삼십년, 백년 등 종교전쟁은 기독교인에게 많은 고통과 시련을 낳았고, 결국 볼테르의 『관용론』처럼 화해의 길로 일단락되어갑니다. 정치적으로는 베스트팔렌조약의 주권국가가 그 와중에서 탄생한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새롭게 지향하는 종교 간의 관용과 대화가 공존의 세계를 열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아직도 종교분쟁 지역에서는 해묵은 상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잔존하고 있어요. 교황이 달라이 라마를 만나는 시대에 다시 옛날 신·구 갈등의 배타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 오늘날 신·구 대립이 다시 불거진다면,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말처럼,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 역사의 망령을 경계하자는 뜻으로만 새겼으면 합니다.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영혼은 내 것이 아니에요. 죽고 난 후는 아무도 모르지요.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말은 모두 우리가 사는 현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저는 문학 하는 사람이니까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도 스토리텔링으로 얘기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고 보니까 사후가 기가 막힌 거예요. 으리으리한 집에 하인이 수천 명이 넘고요. 그런데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일주일이 지나니까 너무 심심한 거예요. 그래서 자동차 타고 드라이브나 갈까, 직접 요리나 만들어 먹을까 하는데, 뭐만 하려고 하면 하인들이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만 당신이 직접 하는 것만은 안 된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이따위가 천국이면 차라리 지옥에 가서 살겠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하인들이 하는 말이 “주인님, 여기가 천국인 줄 알았어요? 여기가 바로 지옥이에요.”


    부딪치고 싸우고 피를 흘리면서도 참된 의미를 찾는 곳이 천국이지요. 흔히들 이야기하는 금은보화, 물질로 장식된 그런 곳이 천국이 아니에요. 서로 사랑하고, 자기가 먹을 거 자기가 벌고, 서로 나눠 먹고, 이런 참된 의미가 있는 곳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천국이지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사람이 누굴까요. 모든 걸 성취한 사람이에요. 애들한테 제일 고통스러운 게 무얼까요. 엄마, 나 심심해. 심심한 곳이 바로 지옥이에요.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요?


    당연히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립니다. 오히려 신앙이 없으면 더 잘살기도 하죠. 욥은 하나님을 참 믿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큰 재앙이었습니다. 그는 부귀를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에요.


    현세에서 잘살고자 믿는 것은 기복 종교에요. 부귀와 영화는 탕자의 것, 지상의 것입니다. 복지국가는 정부에서 가난한 사람을 지원해주잖아요. 복지국가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7:7).”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뭘 구합니까. 돈과 부귀와 영화를 달라고 하지요. 이 세상에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것, 생명과 사랑을 주옵소서 하면 반드시 주실 텐데 그걸 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코로나 팬데믹과 예수님의 얼굴

    이어령 선생이 말하는 코로나의 역설(逆說), 죽음의 역설

    -코로나19로 인해 죽음을 마주하게 됐어요. 죽음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일상과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을 추상적이고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겼는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달라졌어요.


    죽음은 그저 우리 안에 갇힌 사자, 철창 안에 갇힌 호랑이에 불과했어요.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죽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일종의 ‘판단 중지’지요. 죽음이 갖는 무서움, 저놈이 날 잡아먹을 수 있다는 공포는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었지요.


    무시무시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자, 호랑이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죠. 적어도 ‘오늘은 아닐 것이야’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겁니다.


    그런데 저 우리의 사자가…….”


    -죽음의 실체를 이제야 대면하게 된 것이지요. 죽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여긴 사자와 호랑이, 즉 죽음이 길거리로 뛰어나온 거지. 죽음의 공포, 굶주린 맹수의 습격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온 마을, 온 도시, 온 도시, 온 인류가 깨닫기 시작한 거야.


    생각해보세요. 으르렁대는 호랑이는 무섭기는 하나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놈이, 그 끔찍한 공포가 거리로 뛰쳐나온 겁니다.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사람이 타인이 아닌 코로나19를 겪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 저 사자가 안 보여.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 덮칠지 몰라요.”


    -죽음의 공포가 일상이 됐어요.


    “우리 안에 있던 죽음, 지금까지 알던 그 사자가 아니야. 두렵지만 그래도 안심하고 봤던 그놈이 골목 어귀에서, 출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 시장 가다라 딱 마주치게 된 겁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죽는다’는 철학자나 성직자의 가르침보다 더 강렬하게, 이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사자를, 저 괴물을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보여주고 만 겁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문화·문명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지요.


    “실존적으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죽음’을 겪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종교 다 그만두고, 진화론 다 그만두고서라도 말이죠. 그런데 이 죽음이 내일 몇 시 몇 분에 나타나는 게 아니고 언제 저놈이 날 잡아먹을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게 공포지요. 예정된 죽음은 공포가 아닐지 몰라요.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죽음, 느닷없는 공포가 정말 무서운 존재지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메멘토 모리

    스승은 “런던 시민이 흑사병을, 죽음을 겪으며 위생 개념이 등장하고, 결국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사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산업 혁명기에 발생한 사회 문제 중에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건강 문제도 있었어. 노동자의 수명이 비위생적인 전염병과 관련돼 있다는 현실을 발견하게 된 거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도 그제야 응시하게 되었어. 또 성직자에 의한 성경의 독점, 진리의 독점이 아니라 가내수공업, 중소상공업이 길드를 통해 협력하는 것과 같이 소수의 선(善)이 아닌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사회개혁, 종교개혁, 나아가 산업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어요,. 흑사병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들인 셈이지.


    지금의 코로나19도 비슷해요. 죽음이라는 것이 바이러스, 질병을 통해 개개인의 마음속에 들어와 경험하게 되고,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죽음이 자기 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죠.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겁니다. 이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볼 일이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그런 죽음이 아니더군요.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지. 우리는 낭만적인 메멘토 모리, 술 먹고 인생을 논하는 메멘토 모리쯤으로 죽음을 생각했잖아요.


    이모털(immortal, 죽지 않는) 한 존재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거지. 하나님 이외의 존재는 다 죽어. 그게 원죄야. 이게 모털(mortal,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인 거지. 생명이라는 것은 다 죽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메멘토 모리를 다시 깨닫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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