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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저   자 : 손원호
출판사 : 부키
출판일 : 2021년 08월

  •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이집트

    실은 술에 꽤 관대한 나라

    이집트인들은 고대부터 술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나일 계곡 주변 야생에서 풍족하게 자라나는 밀, 보리, 사탕수수 덕분에 이집트인들은 일찍이 맥주를 만들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 벽화를 보면 맥주 마시는 장면과 주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기원전 3500년쯤 고대 상이집트의 수도였던 히에라콘폴리스의 유적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과 그 증거물들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양조 시설은 기원전 3400년에 만들어져 하루에 약 1136리터의 맥주를 생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도자기 산업이 성행했으며, 이 지역에서 맥주를 위한 주전자와 컵이 다량 발견되었다고 하니 고대 이집트인들이 얼마나 맥주를 즐겼는지가 그려진다.


    고대 이집트 왕국에서도 술에 계급이 있었다. 맥주는 주로 노동자들을 위한 서민의 음료였고 파라오를 비롯한 엘리트 계층은 와인을 즐겼다. 당시 와인은 지배층이 마시는 사치 음료였던 만큼 많은 노예가 투입되어 섬세한 주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1922년 18왕조 말기의 파라오 투탕카멘(재위 기원전 1361~1352)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황금 마스크를 비롯한 수많은 보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는 36개의 와인 항아리도 있었다.


    이렇게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문명 지역에서 시작된 주조술은 그리스 등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수백 년이 흘렀고, 7세기 아라비아반도를 거친 사막 지대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생겨났다. 당시만 해도 이집트를 포함해 중동에 사는 사람의 대부분이 술을 즐겼고,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이슬람을 창시한 선지자 무함마드의 동료들도 술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삼촌인 함자의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가 일을 보기 위해 잠시 자신의 두 암낙타를 어느 집 앞에 묶어 두었다. 그런데 술에 취한 함자가 묶여 있던 알리의 암낙타를 칼로 베어 버렸다. 분노한 알리는 이 사실을 무함마드에게 알렸고 무함마드는 함자를 질책하기 위해 그가 머무는 곳으로 왔다. 그러나 함자는 시뻘건 눈으로 무함마드에게 이런 술주정을 할 뿐이었다. “너는 우리 아버지의 노예 중 한 명이 아니었더냐?” 무함마드는 함자가 만취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를 떠났고, 그날 이후 무슬림 사이에서 음주는 더욱 금기시되었다. 여전히 신실한 무슬림들은 경전 코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 하디스(Hadith)를 인생의 교본으로 삼아 금주를 한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은 주변 지역으로 급속도로 전파됐다. 고대부터 술을 제조해 왔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지역(현재의 이라크 및 시리아, 터키 일부 지역)도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이후 술을 금하게 되었고, 양조법은 점차 쇠퇴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사람이 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종교적 신념을 저버리기도 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한 이후 프랑스와 영국 중심의 서구 문물이 이집트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1869년 프랑스와 이집트의 공동 자본으로 수에즈운하가 개통됐고 이집트가 외국 기업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면서 외국 자본이 대거 이집트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틈타 벨기에 투자자들이 모여 이집트에 근대 맥주 공장을 세웠다. 1897년 알렉산드리아에 크라운 맥주 공장이, 1898년 카이로에 피라미드 맥주 공장이 설립됐다. 무슬림 형제단, 젊은 이집트당과 같은 이슬람 민족주의 단체는 이를 두고 ‘이집트가 서구의 악덕을 수입한다’고 비난했지만, 두 기업은 이슬람 국가 이집트에서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1937년 독일의 하이네켄사가 두 공장의 지분을 사들였으나 이집트내 민족주의가 고조됨에 따라 1963년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두 회사를 합병해 알아흐람 맥주 회사로 이름을 바꾼 후 국유화했다. 2002년 하이네켄사에 다시 인수된 알아흐람 맥주 회사는 여전히 음주가 금기시되는 이집트에서 사카라를 비롯해 스텔라(벨기에 스텔라와는 다른 종류의 이집트산 맥주), 무알코올 맥주 비렐 등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유통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가 준 축복, 석유로 인한 저주

    정말 물보다 석유가 더 쌀까?

    산유국에 살면 좋은 점이 하나 있다. 휘발유를 넣을 때 가격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한국에서는 주유소 앞에서 고시된 가격을 확인하고, 그나마 저렴한 곳으로 골라 들어가 3~5만 원 정도를 주유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아랍에미리트에서는 언제나 “가득 채워 주세요”를 자신 있게 외친다. 60리터짜리 SUV 차량을 가득 채워도 한화로 3만 원만 내면 충분하다.


    그럼 아랍 산유국의 기름값은 정말 물값보다 쌀까? 정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다. 최근 값싼 식수 상품이 시중에 많이 나오긴 했지만, 에비앙이나 페리에 같은 값비싼 수입 브랜드 물과 비교하면 기름값이 물값보다 싼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값보다 중요한 건 수천 년간 건조한 사막에서 살아 온 아랍인들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물’이라는 진리가 뿌리 깊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의 일일 생산량은 1104만 배럴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매장량은 2975억 배럴로 베네수엘라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한다.


    석유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석유를 통해 벌어들이는 돈은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과 다르다. 노력 없이 저절로 생긴 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국가를 하나의 개체로 본다면 석유 수익은 한마디로 ‘불로소득’인 것이다. 국가로서는 석유 하나로 천문학적인 돈이 저절로 들어오니 굳이 국민이 내는 세금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고, 국민으로서는 내가 번 피 같은 돈을 정부에 갖다 바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마치 돈 많은 아버지가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주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은 돈 없는 아버지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입에 풀칠할 돈이 없으니 자식들은 나가서 열심히 기술을 익히고 돈을 벌었고, 사우디를 비롯한 열사의 땅까지 가서 외화를 벌어 왔다.


    반대로 사우디는 자기 자식들을 집 밖에 내보내 일을 시킬 필요가 없었다. 하다못해 인프라 구축 같은 사우디 내에서 해야 하는 궂은일마저도 해외에서 온 기술자들에게 맡겼다. 사우디의 자식들은 그저 공공기관에 들어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지시만 내리면 되었다.


    사우디 재정 수익의 80퍼센트 이상이 석유 판매 수익이다. 그러나 석유 산업에 관여하는 사우디 노동력은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거대화된 국가는 각종 공공 부문에서 국민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고, 국민은 그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앉아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노동자가 되었다.


    사우디에서 수십 년간 사업을 해 온 한국 에너지 기업의 인사 담당자가 한번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우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에 비하면 근무하는 자세가 태만해요. 물론 똑똑하고 일을 잘하는 친구들도 있지요. 다만 그런 유의 직원이 한국에서는 보편화되어 있지만, 사우디에서는 매우 희소하다는 차이가 있죠. 아마 오랜 세월 그들이 경험했던 사우디 사회의 분위기로 인한 결과가 아닐까요?”


    석유가 축복이 될 기회는 오는가

    2017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는 과거의 국왕들을 모방하지 않고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인다. 2016년에 왕세자가 발표한 ‘사우디 비전 2030’을 보면, 지난 50년간 이루지 못한 경제 다각화를 성공시켜 미래에 사우디 국민이 석유 없이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겠다는 큰 포부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를 조금만 더 빨리 시작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다. 비전 2030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의 원천은 결국 석유 수익인데, 이미 유가는 2014년에 정점을 찍은 후 미국의 셰일오일 공급 과다로 인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수요가 줄어들면서 유가는 더욱 하락하고 있고, 온실가스 감축 등 환경 규제가 심화되면서 세계 각국은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즉 화석연료에서 신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시장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비전 2030은 사우디에게 마지막 남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우디 내에는 유가의 변동에 따라 요동치는 국가의 재정 상황, 사우디인 의무 고용으로 인한 낮은 생산성, 지정학적 불안 요소 등의 리스크도 존재한다. 그래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사우디 정부의 새로운 정책들이 적어도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조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새로운 사우디가 성공적으로 탄생하기를 바라본다.



    이라크

    아라비안나이트의 도시, 바그다드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바그다드

    천일야화는 우리에게는 18세기에 영어로 번역된 <아라비안나이트>로 더욱 친숙하다. 세계의 설화 문학 사상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읽어 보지는 않았더라도 전 세계 사람 대부분이 적어도 ‘아라비안나이트’란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천일야화는 하나의 이야기 안에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는 액자식 구성이다. 고대 페르시안(이란), 아랍, 인도, 그리스, 이집트 등 여러 지역을 거쳐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변형과 추가 작업이 이뤄졌다. 15세기가 돼서야 완성된 이 작품은 작자 미상으로 남아 있다. 실존 인물 중 천일야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단연 이슬람 아바스 왕조 제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다. 이에 따라 천일야화에는 그가 통치했던 도시 바그다드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다수 등장한다.


    중세의 뉴욕, 바그다드

    766년, 지금 약 3.2킬로미터에 달하는 원형의 요새 도시 바그다드가 완성됐다. 도시를 둘러싼 성곽만 해도 외벽, 중간벽, 내벽 삼중으로 구성되어 높이가 34미터나 되었다. 네 개의 묵직한 거대 철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었는데, 철문의 높이가 워낙 높아서 사람이 말을 타고 깃발을 든 채로 드나들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방으로 뚫린 네 개의 문을 통해 바그다드는 전 세계 사람들과 교류하며 ‘세계화’를 실현했다.


    도시의 중앙에는 칼리파의 왕궁이, 그 옆에는 대사원이 있었다. 원형 도시 내에는 주거 공간과 관청도 여러 개 있어 칼리파와 관료를 포함해 약 4000명의 병사가 거주했다. 한편 막대한 세금이 모이는 바그다드에는 상인, 직공 등 서민이 성 외곽에 모여들어 시장과 거주지를 조성함에 따라 활기찬 상업지구가 생겨났다.


    바그다드는 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등 종교를 막론하고 전 세계인을 환영했기에 멀리 인도와 스페인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 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는 원형 도시에만 머물지 않고 계속 확장되어 마침내 인구 150만 명의 바닷길과 비단길로 연결되는 유라시아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바그다드의 찬란함은 당시 좁고 지저분한 도로가 미로처럼 형성되어 있던 런던이나 파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업혁명 이전 세계의 최대 도시였던 바그다드는 한마디로 ‘중세의 뉴욕’이었다.


    폴리매스 학자들의 나라

    2012년 어느 날, 바그다드 시내 만수르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차 밖으로 약 4미터는 될 법한 건축물과 그 위에 청동으로 된 커다란 사람 얼굴이 떡하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누구인지 궁금해 잠깐 차를 세우고 싶었지만, 테러의 표적이 될까 봐 그럴 수가 없었다. 앞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피고 있던 이라크인 경호원 팔라흐에게 물어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팔라흐, 저 동상은 누구의 것이지?” “아부 자파르 알만수르의 동상이야.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도시 바그다드를 처음으로 세운 분.”


    아부 자파르 알만수르(재위 754~775)는 아바스 왕조의 2대 칼리파다. 그의 동상은 1976년 사담 후세인이 세운 것인데, 철권통치로 나라를 다스린 독재자였던 그가 도시 한복판에 동상을 세운 건 아마도 자신을 알만수르와 동일시하고 이를 국민에게 세뇌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졌을 때 알만수르 동상 또한 폭탄 테러로 그와 운명을 같이했다. 2006년 사담 후세인은 사망했지만, 이라크 국민은 알만수르 동상만큼은 다시 살려내고 싶어 했다.


    동상이 무너졌을 때 이라크 국회의원 알자나비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우리 이라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격입니다. 알만수르 동상은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과 같이 우리에게 큰 상징성이 있습니다. 파괴되더라도 다시 지을 것입니다.” 결국 2006년 이라크 신정부는 알만수르의 동상을 복원해 같은 자리에 세웠다. 사담 후세인이 닮고자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범접할 수 없는 인물, 신정부가 과거 이라크의 영광을 간직하기 위해 부활시킨 위대한 인물, 알만수르.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세계 학문을 받아들인 제국의 통치자

    알만수르는 그리스 학문을 포함해 페르시아의 종교(조로아스터교)와 사상, 인도와 유대 민족의 설화 등 타민족의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여 아랍어로 번역하는 방대한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아바스 왕조 아래 존재하는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려는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번역 운동은 200년 넘게 지속되었고 그 덕분에 파키스탄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는 아랍어가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만국 공통어가 됐다. 아마도 현대의 ‘영어’와 비슷한 위상을 지니지 않았을까 싶다.


    학문을 사랑한 지도자가 제국을 다스리던 시기에 수많은 천재 학자들이 배출됐다. 과거에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학자일지라도 왕실, 종교 조직, 대학, 부유한 상인 등의 후원이 없으면 실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알만수르는 눈앞의 국가적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학자들이 잠재된 능력을 한껏 펼칠 수 있도록 제국 내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정책을 추진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이전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처음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당장 성과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후 후손들이 그 정책의 방향이 옳았다고 평가할 때에야 그 지도자는 비로소 칭송받게 된다. 100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 알만수르의 시도는 수많은 학자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

    11세기 이후 유럽은 세속 학문을 향해 걸어 잠갔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중세의 암흑기를 벗어나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미 유럽은 상당수의 그리스 원본을 유실한 상태였으므로 무슬림이 수백 년간 아랍어로 써 내려간 학술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아랍인들이 정리해 놓은 그리스의 지식과 이슬람의 독자적인 학문 수준에 탄복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로마 숫자(ⅠⅡⅢⅣⅤ…)를 사용했었는데,<알고리즘에 대한 입문서>라는 대수학 책을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유럽으로 들어왔다.


    이슬람 문명 아래서 발달한 다채로운 학문이 유럽에 전수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특히 무슬림 의학자들은 페르시아나 그리스로마의 의학 서적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번역 작업을 거치고 의술을 임상에 도입하면서 독자적인 이슬람식 의학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다시 번역되어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유럽의 의학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게 이슬람 학문을 전수받은 유럽인들은 과학 기술 혁명을 통해 세계 문명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세계는 유럽에 ‘문명’이라는 배턴을 건넨 후 퇴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아직도 아랍인들은 이슬람 문명이 현대 유럽 사회에 기여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가 막을 내리고 수백 년이 흘렀다. 지금 바그다드란 도시는 어떻게 되었는가? 뉴스에서 ‘바그다드’를 검색하면 대부분이 테러, 반정부 시위, 경제 악화 등 부정적인 관련어들만 쏟아져 나온다. 현재 한국 외교부에서는 치안상의 이유로 이라크 여행을 금지하고 있어 이제 바그다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리운 도시가 되어 버렸다. 40여 년 전에 세워진 알만수르 동상은 오늘도 여전히 바그다드를 지키고 있다. 오늘날 바그다드 시민에게는 알만수르의 동상이 꼭 필요하다. 그 동상이라도 바라보아야 희망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을 테니까. 나도 그리운 바그다드 땅에 언젠가 제2의 알만수르가 탄생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도니까….



    아랍에미리트연합

    커피 향을 타고 시간을 거스르다

    두바이에도 스타벅스, 카페 네로, 코스타 등 유명한 커피 프랜차이즈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나 그곳에서 아랍 전통복을 입은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반면 규모는 작지만 로스팅한 지 3주도 안 된 신선한 원두를 엄선하여 직접 갈아 만든 에스프레소, 이것 하나에 승부를 건 커피숍에는 현지인들이 붐빈다. 브랜드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허름하고 규모가 작아도 원두의 맛과 바리스타의 실력만 출중하다면 단골이 된다. 아침 시간에 보면 수많은 자동차가 이런 커피숍 안에 주차했다가 떠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전화로 미리 주문한 사람들이 커피숍 앞에 차를 대면 직원이 작은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를 급히 들고 나온다. 창문이 열리면 아랍 남성들이 하는 ‘슈막(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이 얼핏 보인다. 커피의 향과 맛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유별난 커피 사랑은 수백 년간 커피와 함께해 왔던 그들의 역사에 대한 방증이다. 6세기에 악숨 왕국은 홍해 건너편에 있는 아라비아반도의 예멘까지 식민 통치를 하고 있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원종이 자라던 시원지였는데, 식민 통치 기간 중 에티오피아의 커피가 자연스럽게 홍해를 건너 예멘으로 전파되었다.


    커피 재배에 적합한 토질과 기후를 지니고 있던 예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역 일대에서 최고급 커피를 생산하는 산지로 떠올랐고, 이후 예멘을 통해 아라비아반도 전역에 커피가 전파되었다. ‘Coffee’의 어원이 아랍어인 까흐와 Qahwa인 것을 생각하면 커피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커피가 아라비아반도에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인들은 커피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었다. 8세기 말, 이라크 지역의 쿠파 마을에서 수피라는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얀 망토를 몸에 두르고 황야에서 종교적 고행을 했다.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밤새도록 기도하고 몸을 빙글빙글 돌리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고행에 가장 큰 장애물은 잠과 식욕이었다. 그들은 커피를 벗 삼아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마라, 졸음을 떨쳐 내라”를 연신 외쳐대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이슬람 중세 시대에 아부 하미드 무함마드 알가잘리(1058~1111)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30대 초반에 철학, 법학, 논리학, 신학에 관한 기초 학술서를 저술한 천재 학자였다. 그러나 지성주의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명성과 지위를 버리고 39세의 나이에 수피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이슬람 정통주의 신학에 수피신학의 관점들을 접목시키는 위대한 작업을 수행했고 40권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걸작<종교학의 회생>을 집필했다. 당시 커피는 수피 수도승들의 수행 음료였으니 수피로 돌아선 알가잘리도 종교적, 학문적 고행을 할 때 졸음을 참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커피를 즐기지 않았을까?


    하지만 커피가 확산되자 이것의 음용 자체를 금지하려는 세력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커피가 와인과 비슷하게 도취 작용을 일으킬 뿐 아니라 석탄 섭취를 금지하는 코란의 내용과도 상치된다고 주장했다. 볶은 커피콩을 석탄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메카의 총독이었던 카이르 베이는 대표적인 커피 탄압자였는데, 그는 메카의 길거리에서 커피콩을 볶고 판매한 자, 심지어 커피를 마신 자에게도 채찍질을 하며 커피 자체를 죄악시했다. 이러한 탄압의 흐름은 17세기 오스만제국의 13대 술탄 아흐마드 1세(재위 1603~1617)에 이르러서 끊어지게 된다.


    오스만제국의 11대 술탄 셀림 2세(재위 1566~1574) 치세 때는 이스탄불 내에만 커피 하우스가 600여 곳이 넘었다고 한다. 커피의 무대는 수피나 신도들만의 제한된 예배 공간에서 길가에 늘어선 대중을 위한 커피 하우스로 확장되었다. 카이로,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등 중동의 웬만한 대도시에는 커피 하우스가 속속 들어섰고, 종교와 정계 인사뿐 아니라 학자, 문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의 장, 정보를 공유하는 문화 공간이 되었다. 때마침 인문주의에 큰 관심을 쏟던 유럽인들은 동방 여행을 즐기게 되었고 우연히 경험한 까흐베하네 문화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까흐베하네에서 맛본 신비의 음료, 커피에 매료되었다. 이후 17세기를 지나면서 유럽에도 커피와 커피 하우스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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