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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바름이라는 착각
저   자 :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출판사 : 데이포미
출판일 : 2021년 06월

  • 올바름이라는 착각


    조던 피터슨

    내가 조던 피터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해외 유튜버의 영상을 통해서였다. 그는 시사 프로인 <채널 4뉴스>에서 페미니스트 앵커 캐시 뉴먼과 조던 피터슨이 토론하는 장면을 분석해 자신의 채널에 올렸다. 영상의 제목은 ‘논쟁에서 당황하지 않는 방법-조던 피터슨 편’이었다.


    인터뷰에서 다른 이슈 중 내가 가장 공감한 부분은 ‘남녀 임금 격차’에 관한 내용이었다. 앵커는 왜 여성이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보다 돈을 덜 받아야 하는지 호소하면서 통계 수치를 근거로 들었다. 시간당 남녀의 평균 임금은 9퍼센트 차이가 나며 영국 상위 100인의 기업가 중 여성은 단 8명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는 맞닥뜨리는 순간 무척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눈으로 확인되는 수치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던 피터슨은 이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변량 분석(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으로부터 측정된 두 가지 이상의 변수들을 개별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동시에 분석하는 통계적 기법을 말한다)을 통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임금 격차를 분석할 때 고려되어야 하는 변수는 많게는 18가지 이상이다. 직업, 성격, 성실성 등 분석해야 할 항목들이 세분화될수록 결과는 더욱 정확해진다. 직업이라는 변수만 보아도 그렇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취업률이 높은 해양건축과에 진학하거나 많은 임금을 주는 석유 시추 시설에 취업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직종을 택하는 대신 일과 삶의 균형처럼 임금 외의 요소를 더욱 중요시 하는 여성이 비교적 많다.


    불평등의 원인이 오로지 ‘사회구조’에 있다고 믿는 사회구조 신봉론자들은 남녀 임금 격차를 부당한 권력 구조의 결과로 보고 제도와 법률 등을 통하여 상대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던 피터슨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사회구조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발전해 온 것으로, 세상에 완벽한 평등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위계질서’ 때문인데, 이는 모든 동물의 DNA에 뿌리 깊게 박힌 것으로 사회구조보다 훨씬 오래된 체계라고 설명한다.


    조던 피터슨의 이 인터뷰 영상을 보고 10여 년에 걸쳐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던 허무주의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줄곧 사회구조 신봉론자로 살아왔다. 왜 세상은 이렇게도 불평등할까? 왜 내가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남을 짓눌러야 할까? 누군가가 승리하면 왜 누군가는 패배해야 할까? 너무나 슬프고 괴로웠다. 나보다 잘나지 못한 친구들에 대한 동정심과 미안함, 그럼에도 선뜻 내 승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은 위선적인 마음이 나를 오래도록 괴롭혀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경쟁을 악마시해왔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은 ‘평등’이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종의 강박으로 자리 잡아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더 가진 사람을 자연스레 미워하게 되었다. 때로는 남들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 더 가진 사람이기도 했기에 어떻게 하면 더욱 평등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도 나의 성취를 양보해야 할 때면 은근한 후회와 언짢음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인간의 탐욕도 싫었다. 모두가 욕심을 버리면 사회가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스스로를 위한 노력을 기피하게 되었다. 불평등한 시작점에 선 사람을 위한 올바른 장치가 마련되기 전까지, 나는 레이스에 뛰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 즉 사회구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의 구조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노력은 해서 뭐해? 내가 노력해봤자 불평등한 사회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단 말일까? 어차피 금수저 친구를 이길 수 없을 테고, 평생 잘난 사람들 밑에서 일해야 할 텐데... 그렇게 살려고 내 청춘을 희생해야 할까? 노예가 되기 위해 성실함이라는 덕을 쌓아야 할까?’


    이러한 나에게 조던 피터슨의 말은 천둥이 치는 것처럼 거대하고 큰 울림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다 못해 기절할 뻔했다.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지 않다. 평등을 위해 더 나음을 억제하는 것은, 모두가 동일하게 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내가 심장병에 걸린다면 나는 가장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심장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으려 할 것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경쟁력을 지닌 사람에게 치료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악독한 이기심과는 다르다. 치열한 경쟁과 이로 인해 생겨난 위계질서 안에서 의료 시스템은 더욱 발달하고, 더욱 실력 있는 의사들이 생겨나며, 결과적으로 의료 시스템의 전반이 발전한다. 평등을 위해 강압적인 제도를 동원해 경쟁을 없애고 위계질서를 허문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나 의사를 할 수 있고 인구를 할당하고 그에 맞춰 지역 병원을 건설해 누구나 동일하게 서비스 받는 의료 시스템을 만들어낸다고 가정해보자. 결과의 평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은 경쟁과 이기심에 의해서만 발전하거나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타심과 배려심, 남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 역시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아마도 가장 경쟁력 있고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갈 것이다. 아주 착하고 헌신적이지만 의료 기술이 부족한 의사보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조던 피터슨 현상’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글로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상식에 가깝지만,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오늘날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렇듯 혼란스러운 오늘날 사회에 조던 피터슨은 우리로 하여금 새롭지 않지만 줄곧 희석되었던 중요한 가치와 삶의 규칙을 떠올려보게 한다.


    ‘모두의 평등’, ‘모두의 행복’이라는 달콤한 유혹에는 심각한 맹점이 있다. 경쟁을 통해 발전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무조건 나쁘게 본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기심과 경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남보다 우위에 서서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주목받고 싶어 하는 것은 자아실현을 위한 순수한 열망이지, 남을 짓누르고자 하는 압제적 탐욕이 아니다. 부를 악마시하는 풍조는 현대사회에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가진 자들에 대한 분개심이 커져가면서 악의 근원인 진투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고군분투 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유토피아는 없다. 우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원초적 심리 기제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사회구조를 무조건 비난하기보다 총체적인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왜 불평등할까? 기득권층의 음모와 사회구조적 억압이 정말로 남녀 임금 격차와 절대 빈곤층을 탄생케 한 주범일까?


    정답은 반대다. 세상은 과거 어떤 시대보다 월등히 나아졌다. 남자와 여자는 과거 어떤 시대보다 평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고 있으며, 절대적 빈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드라마틱하게 줄어들었다.


    삶의 질의 평균은 계속해서 더욱 높아지고 있다. 대학 진학률은 근래 약 10년 이상 여성이 남성을 훨씬 앞서고 있다. 차별이라 불려왔던 수많은 것들이 법을 통해 철폐되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자꾸 사회가 올바르지 못한 것처럼 보일까? 왜 지금의 젊은이들은 사회를 무작정 비난하며 나르시시스트적 회의감에 빠지는 것일까?



    과도한 동정심

    인간은 배우고 성장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성장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가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을 만큼 혹독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음침한 동굴일 수도, 척박한 자연환경일 수도, 어느 시대보다도 안전한 21세기의 가정일 수도 있다. 수많은 맹수가 도사리는 자연환경에서 우리는 예민하고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맹수가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동족에게 때로는 맹수보다 더욱 잔인하고 포악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의도와는 다르게 발생하는 오해와 마찰, 이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도 무시할 수 없다. 인간관계를 원활히 맺고 잘 유지하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다. 만약 맹수가 도사리는 자연에서, 오해와 마찰과 논쟁이 지속되는 사회에서 과도한 동정심으로 인해 개인이 시행착오를 겪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과도한 동정심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결코 만만치 않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의 기회를 앗아간다는 데에 있다. 타인과 나의 의견의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고 이로 인해 충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충돌을 감수하고서라도 상호작용을 시도하는 이는 대화하는 법을 배우며 논쟁의 기술을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에서 이러한 상호작용 자체를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혐오 표현’으로 규정하고 토론을 금지하고 있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2010년대 이후로 명문 대학을 포함하는 대다수의 미국 대학이 ‘표현의 자유’를 교칙을 동원해 탄압하고 있으며 ‘세이프 스페이스’라는 안전 구역을 설치해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장소를 만들어가고 있다.


    대학가에서 더 이상 코미디언을 초청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동일하다. 농담은 때로 비아냥과 비판, 역설과 모순을 동반한다. 이러한 유머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받아들이고 웃을 수 있다. 하지만 과도한 동정심 안에서 자라난 밀레니얼 세대와 주머 세대는 그러한 발언을 소화할 수 있는 정신적 성숙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캔슬 컬처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 지금은 유명인이 말실수를 하는 순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즉각 생매장당하는 시대가 되었다.


    결국 정치적 올바름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세태는 ‘과도한 동정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개인이 어떠한 이유에서도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어젠다는 한 사람을 평생 연약한 아이로 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훌륭한 부모는 아이를 연약하게 키우지 않는다. 과잉보호하지 않는다. 아이가 실패와 고통을 통해 더욱 성장하고 배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면 과도한 동정심과 공감이 주는 따스함에 오래도록 안주하는 아이는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고 배우는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런 아이가 몸만 어른이 되어 사회의 냉혹함을 맞닥뜨리면 그때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고통을 이겨낼 힘이 없는 ‘어른 아이’는 다시금 제도와 법의 보살핌에 의존하려 하고 이러한 어른 아이가 모여 사회는 점점 더 감정적이고 유약한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어른 유치원’이 되어간다.


    ‘어른 유치원’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더욱 의연해져야 한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유전, 사고로 인한 신경정신적 질병의 경우를 제외하고) 시행착오를 겪지 못한 어른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것을 종종 본다. 공황장애, 우울증 등은 대부분 보살핌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과잉보호를 받아왔기에 작은 상처도 감당해내지 못해 생겨나는 증상이다.


    유명한 정치 논객 벤 샤피로는 이렇게 말했다. “팩트는 당신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에 대해 상처를 받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비록 고통스럽고 깊은 아픔을 주는 사실이라도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고 내 자신의 성숙의 재료로 쓸 수 있다면 개인은 이 과정을 성장의 씨앗으로 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숭고함이라는 가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책임감’입니다.” 2017년에 조던 피터슨이 ‘의미의 지도’ 주제의 11번째 강의에서 했던 말이다. 심슨을 예로 들어 설명한 이 영상은 조회수가 약 800만에 달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이 강의에서 조던 피터슨은 호머 심슨이 비록 멍청하고 잦은 실수를 반복하는 엉뚱한 아저씨이지만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며 갖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호머 심슨의 모습이 바로 남자가 지녀야 할 ‘책임의 무게’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물론 남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책임은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도록 삶에 목표를 준다.


    게다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부모가 되니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 것 같다고,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그러면서 전에 없던 책임감이 생긴다고. 무기력한 삶을 살던 사람도 아이를 본 순간 지키고 보호해야겠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들면서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즉, 사람은 자발적으로 책임을 지고자 할 때 크게 성장한다.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누리고자 하기보다 책임을 자발적으로 짊어질 때 우리는 더 분명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책임을 짊어지는 경험은 개인이 허무주의를 떨칠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사회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하는 데 보탬이 된다.


    위 강의에서 조던 피터슨은 덧붙여 말했다. “짐을 짊어지세요. 최대한 무겁게, 그러면 쓸모없어 보이는 나 자신이라도 이런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을 겁니다.”


    짐을 짊어지는 것,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 인생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모두 우리가 쉽게 접하는 짧은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을 자초하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힘든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라는 것이다.


    물론 인생이 지운 짐의 무게가 너무나 커서 버텨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의 무게가 나의 한계를 넘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삶은 고통이다. 삶이 고통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인생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다. 삶이 고통임을 받아들인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선 나 자신의 짐을 온전히 짊어지고, 그리고 그것을 버틸 수 있을 때 사회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자 할 것이다. 삶이 행복이 아닌 고통임을, 나의 괴로움과 고통이 당연함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내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짊어지는 것에서부터 인생은 변한다.



    추적 군중

    군중에는 고뇌가 없다. 단순하면서도 저열한 동기에 의해 쉽게 움직인다. 끊임없이 와해되고 형성되기를 반복한다. 그러한 군중의 구성원이 되어 파도에 휩쓸리듯 움직일 때, 우리는 개인의 주체성을 완벽히 상실한다. 대의를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희생되는 것은 개인의 시간뿐만이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힘도 서서히 잃어버린다.


    인간은 개인으로 태어나 집단과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집단 안에서 살아가는 개별자와 군중은 다르다. 군중 속에서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 개인의 의견을 펼쳐 보이는 순간 군중 밖으로 배제되거나 공격당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러한 군중에 휩쓸려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이슈에 벌떼처럼 달라붙기 전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만일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당신은 유명인들이 저지르는 자잘한 잘못과 실수를 절대 일으키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이 정말 천성이 쓰레기이고 머리가 나빠서 그러한 일을 꾸미고 저질렀다고 단정해야 옳을까? 우리보다 못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사람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다르면서도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치가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신중해진다. 우리가 세뇌되어 우매한 군중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때 우리는 보다 더 주체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할 수 있다.


    더불어 그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모든 이슈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군중의 광기에 휩쓸려 누군가를 잔인하게 공격하지도, 앞뒤 맥락 없이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집단과 군중을 뛰어넘는 개인의 절대적 가치를 지켜내게 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개인의 가치를 유지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우리는 혐오의 감정으로 똘똘 뭉치기도 하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벌 떼같이 달려들어 너도나도 군중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한다. 집단의 연대 의식이 주는 것에는 분명 중독성이 있다. 축제의 형태를 띤 피 없는 살육의 현장은 사회정의로 포장된다.


    당신은 상대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그것이 사회적 죽음이든 물리적 죽음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희열을 원하는 추적 군중일 뿐이다. 이 사실을 명심하면 어떤 대상에게 무심코 돌을 던지기 전에 한 발짝 물러설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함이 불편한 시대

    유구한 역사와 오래된 전통은 나쁜 것이 아니다. 과거의 모든 것이 틀렸기에 현재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과거의 모든 양분이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간다.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현재와 앞으로의 삶이 달라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불편한 사람들은 과거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부수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보다 ‘불평’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공허와 허무주의의 끝자락에서 이들은 세상에 현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파생된 그 모든 것들을 ‘불편’하게 느끼는 감정에만 매달려 있다. ‘불편함’은 이들의 인생을 뜨겁게 하는 유일한 연료이자, 이들의 자존감을 지탱해주는 오만한 지지대다. 이들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진 권위와 질서보다, 혼란과 혼돈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왔다. 이들은 현존하는 시스템과 가치 체계는 모두 압제적인 과거로부터 연유한다고 본다. 이들에게 기존의 질서는 망가뜨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할 구시대적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어지럽고 혼란스럽지만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혼돈만을 원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인식한 이들이 실제로 피해자가 된 것처럼) 혼돈을 원하는 이들은 이 세상의 질서에서 불편함을 찾아낸다. 현재의 권위자들, 기득권층, 위계질서 및 시스템을 무너뜨리면 모든 질서가 혼란해지는 대신 모두가 평등해진다. 전부 바닥으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알아야 할 뼈아픈 사실이 있다. 모두가 일제히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무너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상 모두가 가장 평등했던 때는 바로 전쟁 직후다. 모든 것이 무너졌기에 모두가 평등하다. 불편한 것도 없다. 지금 당장 먹고사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불편함을 발견해내는 이들은 자신들의 불편한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기반이 다름 아닌 과거의 시스템과 위계질서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스스로의 열등감을 정당화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과거를 탓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대상을 탓하면서 기존 제도, 시스템, 환경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슬픈 운명 속 주인공이 되어간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기에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모든 것들을 폐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부적인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변화의 가장 빠른 방법은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인데 보통은 용기를 내기 어려워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또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학대를 당한 사람이 모두 어두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사회와 제도에 명확한 불합리함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패배자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난관을 겪더라도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적인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도 성공을 거머쥐는 사람들이 지금도 나타난다. 진짜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바로 세울 수 있을 때, 이 사회에 더 많은 것들을 기여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러한 개인이 점차 많아질 때, 사회는 연쇄 작용에 의해 더욱 좋은 곳으로 바뀌어간다. 내가 성장해야 사회가 변화한다. 당신이 원하는 사회는 더 나은 당신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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