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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일 침대맡 미술관
저   자 : 기무라 다이지(역:김윤경)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21년 01월
  • 63일 침대맡 미술관


    루브르미술관에 관해서

    12세기 말, 파리를 지키는 요새로서 탄생

    파리의 발상지 시테섬. 옛날에는 왕궁도 센강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파리에서는 상업지와 대학가가 시테섬 주변을 둘러싼 형태로 발달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스 2세(재위 1180~1223년)가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1190년부터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 결과 5킬로미터에 걸친 성벽이 파리를 지키게 되었다.


    센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도시의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다. 한때 파리는 항구도시였지만 강은 교통과 유통의 요지인 동시에 방어 측면에서는 약점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적이었던 영국이 만약 파리를 공격해 들어온다면, 지리적으로 볼 때 서쪽이 될 거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서쪽 하류 출입구에 방어를 위한 요새를 건축했는데 그것이 바로 루브르였다. 오늘날에는 미의 전당인 루브르도 그 시초는 파리를 지키기 위한 요새였던 것이다.


    14세기, 샤를 5세에 의해 화려한 성관으로

    파리가 발달하면서 루브르의 모습도 차츰 변모했다. 1360년 이후 서쪽에 새로운 성벽이 세워져 루브르는 성벽 내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후 샤를 5세(재위 1364~1380년)가 루브르의 대대적인 개조를 명함으로써 후기 고딕 양식의 화려한 성관(城館: 15세기부터 17세기 초기까지의 서유럽에서 군주나 귀족이 살던 별장-옮긴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7세기, 왕국에서 예술과 과학의 전당으로

    프랑스 왕정은 1682년에 베르사유 궁전에 정착했고, 루브르는 왕궁의 역할을 끝마치게 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이탈리아 회화 수집품이 크게 늘어났으며, 1648년에 창설된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비롯해 각종 아카데미가 루브르를 소재지로 삼았다. 이어 루이 15세 시대에는 로코코 회화가 발달해 장 바티스트 시메오 샤르댕과 같이 풍속화와 정물화에 뛰어난 화가도 등장했다. 프랑스 회화 자체가 크게 발달한 시기도 17세기 이후였다.  


    1747년부터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회원들이 주최하는 전시회가 루브르의 살롱 카레(사각형의 방)에서 개최되었다. 이렇게 해서 루브르는 예술과 과학의 전당이 되었다.



    이탈리아 회화

    성흔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지오토 디 본도네)

    고대 로마 시대의 삼차원 표현을 재생해 르네상스 회화의 막을 열다

    지오토 디 본도네는 중세부터 이어지던 전통을 이탈리아 회화에서 비약적으로 새롭게 바꿔놓은 화가다. 고대 로마 회화에 보이는 삼차원적인 일루전(illusion: 환상, 착각 등을 의미하며 본래는 실재하지 않는 형상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지각하는 작용 및 그 형상-옮긴이)이 재생되어 르네상스 회화의 막이 오른 것이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어로 부활, 재생을 의미하는 단어 리나시타에서 유래한 것으로, 19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학술 용어다.


    지오토 디 본도네는 그때까지 회화에서 주로 사용하던 평면성을 가볍게 무시하고 풍경 속으로 이야기를 끌어들임으로써 삼차원의 세계를 창출하고자 했다. 비스듬히 그려진 건물이라든지, 아랫부분에 자리한 작은 그림들 중 왼쪽과 가운데 있는 그림의 공간 표현에서도 원근법에 대한 관심이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아랫부분의 오른쪽 그림에서 성인에게 설교를 듣는 작은 새들에게는 지오토의 자연주의적인 표현을 엿볼 수 있다.


    인간적인 성인(聖人)의 모습과 달리 그리스도는 상급 천사인 치품 선사(가톨릭에서 천사의 아홉 계급 중 첫 번째-옮긴이)와 같이 초인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교의에 명시된 신과 성인의 차이를 표현하는 동시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뉘우친 뒤 신에게 일생을 바친 성인 프란체스코의 인간성을 표현하고 있다.


    모나리자(레오나르도 다빈치)

    윤곽선 없이 인물을 그리는 경이로운 기술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만년을 프랑스 중부 앙부아즈의 클로뤼세성에서 보낸 ‘다재다능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는 이 작품을 프랑스까지 가져가 끊임없이 수정을 거듭했다. 1518년에 프랑수가 1세가 사들인 이 작품은 왕이 세운 퐁텐블로 궁전에 소장되었다. 그리고 루이 14세 시대부터는 베르사유 궁전이,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루브르가 ‘그녀’가 사는 곳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가 윤곽이나 색깔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표현하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해 윤곽선을 정묘한 음영으로 그리지 않고 표현한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화법이었다. <모나리자>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상화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결코 모델의 미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붓자국을 남기지 않는 절묘한 기법으로 그려진 주인공은 개인의 초상이라는 범주를 넘어선 존재로서 우리에게 신비로운 미소를 보낸다. 이로써 우리는 한층 더 그녀에게 매료되고 만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라파엘로 산치오)

    초상화의 진정한 표본

    눈빛과 표정에 인간성을 훌륭하게 담아내다

    르네상스 전성기의 3대 거장 중 최연소인 라파엘로 산치오는 선배격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라파엘로는 그들의 선진적인 작품을 완전히 소화하고 흡수해 자신의 작품 안에서 완성했다. 그 결과 라파엘로의 우아하고 조화로운 작품이야말로 회화의 고전, 또는 규범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불세출의 초상화이기도 했던 라파엘로는 마음속 깊이 경애하던 레오나르도에 대한 오마주(hommage: 예술이나 문학에서 존경하는 작가나 작품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작품을 창작하거나 장면 또는 대사를 인용하는 것-옮긴이)로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모나리자>를 연상케 하는 자세와 눈빛으로 표현된 이 작품 속 인물은 라파엘로의 귀족 친구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다. 그는 외교관이자 《궁정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문학가이기도 하다. 라파엘로는 눈빛과 표정을 통해 친구의 지성, 교양, 품격, 고상한 성품을 그려냈다. 외모뿐만 아니라 인간성까지도 훌륭히 드러나 있는 이 작품이야말로 초상화의 표본 중의 표본이다.



    프랑스 회화

    목수 성 요셉(조르주 드 라투르)

    20세기에 재평가된 17세기 화가

    로렌 지방의 화가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카라바조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활약한 화가 조르주 드 라투르가 그린 ‘밤의 그림’. 명암법으로 표현한 양초의 불빛에 비친 어린 그리스도의 얼굴, 그리고 성 요셉에게서 보이는 자연주의적 사실성에서 바로크 회화의 선조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가 다른 나라의 화가에게도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다.


    반종교개혁(종교개혁에 대항해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옮긴이)의 시대에 로렌 지방에서는 성 요셉에 대한 신앙이 무르익었다. 다만 작품 전체에 감도는 고요하고 시적인 정취와 심오한 정서는 라투르이기에 표현할 수 있는 세계다.


    하지만 1648년, 파리에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창설되면서 서서히 프랑스 미술계에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어갔다. 그리고 니콜라 푸생에게서 보이는 이지적인 고전주의가 아카데미의 규범이 됨에 따라 양식이 다른, 지방 화가 라투르의 존재는 잊혀갔다.


    이런 라투르가 다시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오늘날에는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의적 인물(풍요)(시몽 부에)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풍요가 위위임을 포즈로 표현

    프랑스를 대표하는 바로크 화가 시몽 부에. 그는 13년 동안 로마에 머물러 지내면서 미술가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그림 제작을 의뢰받았으며, 성 루카 아카데미(1953년에 설립된 로마 예술가 협회-옮긴이)의 학장으로도 선임되었다. 빛나는 업적을 이루고 프랑스에 귀국한 뒤에는 루이 13세의 수석 궁정화가가 되어 활약했다.


    이 작품의 왼쪽에 있는 푸토(Putto)는 ‘풍요’를 의인화한 여신에게 귀금속을 내밀고 있고, 오른쪽의 푸토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풍요의 여신은 오른쪽에 있는 푸토를 다정하게 감싸 안고 있는데, 이는 보석 장식품과 항아리 같은 물질적인 부보다 정신적인 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년’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푸토는 르네상스 이후의 회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날개 달린 아기로, 복수일 때는 푸티(Putti)로 불린다. 종교화에서는 아기 천사로서, 그리고 세속적인 주제의 그림에서는 큐피드와 함께 자주 그려졌다.


    밝은 색채와 풍성하게 주름 잡힌 의상 표현, 그리고 크게 몸을 틀고 있는 자세에서 화려하고 유동적인 볼로냐파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바로크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에서 우러나는 세련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은 시몽 부에의 뛰어난 작풍으로, 루이 13세 시대의 프랑스 궁정에서 선호하던 예술성을 더없이 잘 표현하고 있다.


    실내에 있는 농부의 가족(르냉 형제)

    농민을 천박하게 묘사하지 않는 프랑스 회화만의 특색

    16세기에 베네룩스 지역(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깅, 룩셈부르크와 프랑스 북부 일부를 아우르는 저지대 국가들을 가리킨다-옮긴이)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성상 파괴가 진행되며 교회의 그림 주문이 감소했다. 그 결과 시민계급을 대상으로 한 풍속화가 매우 유행하게 되었다.


    17세기에 베네룩스 지대가 분열해 네덜란드와 플랑드르로 국가가 나뉘었는데, 두 나라에서 풍속화는 인기 있는 장르로 정착했다. 특히 베네룩스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일상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신앙으로서의 인도나 미덕의 모범, 또는 악덕에 대한 경계를 표현했다. 또한 화상(畵商)을 통해 파리에서도 그림 매체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의 도시인 랑 출신 르냉 삼 형제(앙투안, 루이, 마티외-옮긴이)는 파리에 공방을 갖추고 공동으로 그림을 제작했다. 그래서 이 작품도 세 명 중 누구의 작품인지 특정할 수 없다.


    베네룩스의 화가들은 농민을 풍자해서 천박하게 그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르냉 형제는 그러한 방법으로 농민을 그리지 않았다. 이 작품 속 농민 가족에게 감도는 엄숙한 신앙심과 고요한 존재감에는 프랑스 회화에서만 볼 수 있는 기품이 담겨 있다.


    세귀에 총재(샤를 르브룅)

    회화를 이론과 실기로 체계화

    예술의 중심을 로마에서 파리로 옮긴 미술계의 루이 14세

    샤를 르브룅의 열렬한 후원자인 피에르 세귀에 총재를 그린 초상화다. 로마에서는 푸생의 제자였던 르브룅답게 매우 균형 잡히고 안정감 있는 구도다. 르브룅이 이탈리아에 머무를 수 있도록 지원해준 인물도 세귀에였다. 마치 발레를 추듯이 우아한 수행원들의 동작은 세귀에와 르브룅 두 사람의 영광이 가득한 생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르브룅은 루이 14세의 수석 화가가 되어 귀족으로 서임되었고, 1663년은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회장에 취임해 푸생의 회화에 관한 사고를 바탕으로 이론과 실기 양면에서 체계화된 커리큘럼을 마련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 화가라는 직업은 서서히 기술 장인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지식을 갖추고 지적 활동을 하는 엘리트 ‘예술가’로 대우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아카데미를 본보기로 삼았던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마침내 유럽 최고의 아카데미로, 그리고 오늘날 미술학교의 표본으로 차츰 자리 잡아 갔다.


    프랑스 미술계를 중앙집권 체제화한 르브룅은 미술계의 루이 14세라고 할 만한 존재다.



    스페인 회화

    예술적 발전이 뒤쳐진 스페인

    미술사상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던 스페인이 황금기를 맞이한 것은 17세기 들어선 이후다. 16세기 합스부르크가(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왕가의 하나-옮긴이)의 카를로스 1세, 그리고 이어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시절, 그들은 자국의 화가가 아닌 플랑드르나 이탈리아 회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이들 부자는 2대에 걸쳐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전폭적인 후원자가 되어 꾸준히 지원했다. 이러한 배경도 있었던 까닭에 회화 예술의 선진국인 이탈리아의 화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스페인 화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스페인 미술 3대 거장의 등장

    드디어 17세기 스페인 회화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년),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1598~1664년),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의 3대 거장이 등장한 것이다. 이 세 명의 화가는 스페인의 상업 도시로 번성한 세비야에서 활동했다. 세비야항이라는, 신대륙으로 향하는 현관이 있던 데다가 대성당과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는 종교 도시였기에 회화도 활발하게 수출입되어 예술이 발전하기 쉬운 풍토가 조성되었다.


    마르가리타 공주(디에고 벨라스케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수록 효과적인 벨라스케스의 필치

    스페인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다. 마르가리타의 아버지 펠리페 4세의 누나가 루이 13세와 결혼한 안 도트리슈다. 그녀는 루브르궁의 개인실 중 하나를 본가인 합스부르크가 사람들의 초상화로 장식했다. 그 가운데 한 장이 도트리슈 왕비의 조카인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이다.


    스페인 합스부르카가의 초상화는 동시대의 다른 국가 왕족의 초상화와 비교할 때 호화로움이 부족하다. 유럽에서 제일가는 명문 합스부르카가는 그 존재 자체에 위엄이 깃들어 있으므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한 연출은 필요 없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도 그러한 예의를 지켜 이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매우 거친 필치로 되어 있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감상하면 아주 근사한 작품임을 느낄 수 있다. 직접 시험해봐도 좋을 것이다.


    성 보나벤투라의 장례식(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반종교개혁기 스페인의 성인화

    1274년에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교의 신학자이자 신비론자, 그리고 알바노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임명된 성 보나벤투라의 장례식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비야의 프란시스코회가 운영하는 성 보나벤퉅라 학원을 위해 그린 네 장의 연작 중 하나이다. 발치에 추기경의 빨간 모자가 놓여 있는 것은, 교황의 사절이 보나벤투라에게 추기경이 됐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빨간 모자를 보냈을 때 마침 접시를 닦고 있던 보나벤투라가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 모자를 걸어놓아 달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수르바란은 스페인에서 카라바조 양식을 전개한 화가였다. 세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종교개혁 정신에 공감하는 경건한 종교 감정을 카라바조 화풍의 강렬한 명암법으로 한층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거지 소년(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가정환경이 불우했던 화가의 따뜻한 시선

    가난한 자를 과장해서 그리지 않고 품격과 정감을 묘사한 걸작

    세비야에 사는 플랑드르 상인의 주문을 받아 그린 풍속화다. 전통적으로 플랑드르에서는 풍속화가 성행했는데, 이 작품은 플랑드르 회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난한 자를 과장하거나 우스꽝스럽게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가난한 소년에서는 타고난 품격이 있어 그러한 모습과 분위기가 보는 사람에게 더없는 감동과 가슴이 죄어오는 듯한 애틋함을 느끼게 한다.


    강한 명암법이나 사실적인 묘사에는 카라바조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냉철한 리얼리즘이 아니라 따뜻한 정감이 감돈다. 이 그림을 그리던 무렵의 세비야는 페스트의 유행으로 인구가 무척 감소했다. 수많은 살마이 빈곤에 빠지고 이러한 아이들이 한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는 부유한 가정에서 14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무리요는 온순한 어린아이를 섬세하게 그리는 데 뛰어난 화가였다.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던 무리요였기에 그만큼 소년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네덜란드 회화

    프로테스탄트 사회와 시민계급의 대두가 촉구한 회화의 진화

    네덜란드인이 ‘황금의 세기’라고 부르는 17세기에는 회화 예술도 황금기를 맞이했다. 독립한 네덜란드(네덜란드연방공화국, 북부의 7개 주가 독립을 선언해 국제적 승인을 받은 공화국-옮긴이)엥서는 암스테르담을 무역의 중심지로 삼아 새로운 문화가 발전했다. 경제 발전과 함께 미술도 진보한 것이다.


    다만 네덜란드에서 신앙의 자유는 인정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인 칼뱅파가 공식 종교였던 까닭에 종교미술이 공적으로 만들어지는 일은 없어졌다. 그런 데다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회화 시장이 확대되어서 격이 높은 역사화가 아니라 초상화와 풍속화, 풍경화 같은 장르가 발전했다.


    디저트가 있는 식탁(얀 데 헤엠)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정물화의 전통을 융합

    네덜란드의 정물화는 17세기에 독립 장르로서 확립되었다. 얀 데헤엠은 고향인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와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 이 두 도시에서 활약한 정물화가다. 따라서 그가 그린 정물화에는 플랑드르적인 풍요로움과 네덜란드 회화 특유의 상징주의가 융합돼 표현되는 특징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식탁에 수북이 쌓인 과일과 호화로운 식기류가 풍성한 가톨릭적 식생활을 플랑드르풍으로 상징하는 동시에, 네덜란드의 정물화가 지닌 상징주의의 영향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인 측면도 엿볼 수 있다.


    회중시계나 악기 류트, 그리고 뒤쪽 배경의 오른쪽 윗부분에 그려진 서적은 ‘인생의 덧없음’과 ‘지상 모든 것의 공허함’을 상징한다. 금욕적인 메시지가 담긴 정물화 <바니타스(VanitasL: 공허)>에서 즐겨 사용하는 상징물로, 바니타스에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사상이 담겨 있다. 빵과 와인이 미사를 상징하듯이, 이 그림 속의 음식물도 가톨릭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체리는 천국의 과일로 여겨지고 사과는 원죄를, 그리고 포도는 속죄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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