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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의 시간을 그리다
저   자 : 정명섭 외
출판사 : 초록비책공방
출판일 : 2021년 02월

  • 골목의 시간을 그리다


    소공동과 명동

    마굴

    얼마 전 중국 장춘의 만보산에 물길을 내는 문제로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러자 중국인이 조선인을 핍박했다며 대대적인 폭동이 벌어졌다. 총독부가 사실상 손을 놓고 방관하는 가운데 경성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화교들의 상점과 집이 불타고 폭행과 살인이 벌어졌다. 사망자만 100여 명이 넘는 이 사건으로 적지 않은 화교들이 고국인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를 접한 <별세계> 편집장이 류경호와 정수일 기자에게 화교촌 탐방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경성의 화교들은 장곡천정과 맞은편 명치정에 모여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인력거를 타고 장곡천정에 내려서 그곳을 돌아보고 명치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는 건 불가능했다. 겉에서 둘러보기로 했는데도 더미가 된 집들과 부서진 집기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칼을 찬 일본 경찰들과 말을 탄 기마헌병들이 오가는 풍경 때문에 더욱 살벌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더럽다고 투덜거리던 정수일 기자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누군가 일부러 분위기를 조장했고 우리가 거기에 휩쓸린 것 같아.”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던 류경호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큰길을 걷다 보니 조선은행에 다다랐다. 구라파의 성채처럼 생긴 튼튼한 조선은행 주변을 일본 경찰들이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걸 본 류경호와 정수일 기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조선인들이 만보산 사건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조선은행 뒤편 화교촌을 보더니 한마디씩 했다.


    “저기가 바로 마굴이라잖아. 마굴. 아편쟁이가 그득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 여자들을 꾀어다가 매춘을 시킨대.


    제각각 한마디씩 하면서 지나가는 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류경호 기자가 길 건너편에 있는 경성우체국을 가리켰다.


    "저쪽에 중국 영사관이 있으니 거기 가서 관계자를 만나 인터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좋겠어. 그나저나 저긴 일본인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인데 중국인들은 언제부터 있었데?&"


    “일본인들 오기 전에요. 임오년에 군란이 터졌을 때 청국군이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았답니다. 영사관 자리에 상무공서가 세워지고, 위세가 대단했다고 하네요.”


    정명섭 篇

    푸시킨과 아서원

    골목길은 종종 기억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예전에 누구와 이 골목길을 오갔고 어떤 사람과 만났는지를 이야기한다. 크건 작건 골목길에는 기억이 묻어있다.


    이렇게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8번 출구로 나오면 기억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1907년에 문을 연 중국집 아서원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일제강점기의 중국집은 오늘날의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공간이 넓어 집회와 모임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물론 호떡이나 싼 가격의 중국 요리를 파는 곳도 있었지만 가격과 규모가 월등한 아서원 같은 곳은 중화 고등요리점이라는 표현을 써서 따로 구분했다. 산동 출신의 화교가 운영하는 아서원은 북경식 요리를 제공하는 곳으로 명성을 떨쳤고, 특히 1925년 4월 17일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기자들의 단합대회를 명목으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의 소공동은 조선 시대 태종의 딸이 개국공신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머물렀던 곳이다. 그래서 ‘소공주댁’이라고 불린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 장수가 지휘소로 사용했고 명나라군이 들어온 이후에는 이여송이 사용했다. 이때 선조가 명나라 장수를 자주 만나러 가게 되면서 ‘남별궁(南別宮)’이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주차군 사령관과 제1대 조선 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하세가와 미치’라고 불렀는데 한문으로 하면 ‘장곡천정(長谷川町)’이라서 조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다시 조선 시대의 명칭을 따서 ‘소공동’이라고 부른다. 외국인들의 발길이 많이 닿았던 곳이라서인지 지금도 호텔과 백화점들이 빼곡하게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세력을 떨치던 남촌에 속한 지역으로 조선식산은행을 비롯해서 일본인들이 세운 조선철도 호텔과 반도호텔, 조선 사람들이 정자옥이라고 불렀던 조지야 백화점 등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플라자 호텔 주변에는 화교들이 모여 사는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있었다. 1966년 미국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의 방한 무렵, 서울 한복판인 소공동이 화교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처럼 보인다며 재개발 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플라자 호텔을 비롯한 빌딩들이 들어서게 되고, 그렇게 소공동에 있던 아서원과 화교의 흔적은 기억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소공동은 워낙 큰 빌딩들이 많아서 골목이라고 할 만한 게 남아있지 않다. 서둘러 다음 코스인 명동으로 향했다.


    김효찬 篇

    코로나19로 아무도 없는 명동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괴로웠다. 그리고 답사 전 한가롭게 봄처럼 예쁜 골목이나 그리려 했던 걸 부끄러워했다.


    사람들은 예쁜 그림을 좋아하고 나도 고운 색의 꽃 같은 골목을 그리고 싶지만 나는 굳이 거짓 없이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어떤 비장함으로 참아 삼켰다. 슬픈 사람은 슬프게, 파란 그림자는 파랗게 그리는 게 몇 배는 더 어렵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 그리기로 했다. 나는 문 닫은 상가를 예쁘게 그릴 자신이 없다.


    나는 악몽이 현실이 된 상인들의 마음이 전해져 몹시 괴로웠다. 이날 점심쯤 안경점 앞을 지나는데 60대로 보이는 사장님이 쌀쌀한 날씨에도 굳이 밖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고 계셨다. 혼자서 가던 길을 멈추고 몇 개의 안경을 보다가 사정을 말하고서 다시 일행을 찾아 나섰다. 답사를 마치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다시 오겠다는 상인과의 약속은 공허한 것이어서 굳이 오지는 않겠다는 말과 같지만, 나는 답사를 마친 저녁 무렵 명동을 휘돌아 안경점을 다시 방문했다.


    명동은 답사하는 골목 중에 가장 아픈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빨리 일상이 정상을 찾기를, 상인들이 악몽 같은 현실에서 깨어날 수 있기를, 나는 종교도 없이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해방촌

    해방촌의 아이

    호섭이는 가파르다 못해 낭떠러지 같은 계단에 걸터앉았다. 화장실에 가려고 왔는데 누가 안에 있다는 표시로 깃발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함석판으로 만든 문짝에는 페인트로 W.C라는 영어가 적혀있었는데 아랫집에 사는 혜옥이 삼촌인 영호 아저씨가 Water Closet, 그러니까 ‘물이 있는 작은 방’의 줄임말이라고 알려주었다. 똑똑하고 좋은 아저씨 같았지만 혜옥이는 삼촌을 싫어했다. 아버지처럼 일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밥만 축내고 있기 때문이란다. 아빠 철호는 이빨이 아픈데 치료도 못하고 있다며 혜옥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생긴 건 멀쩡한데.”


    호섭이는 몇 번 마주쳤던 영호 아저씨를 떠올리며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해방촌에서 멀쩡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랫집 동식이네는 온 가족이 모여 사제담배를 만들어서 서울역 같은 곳에서 판다. 그 옆집 민철이 아저씨네는 카바이트 같은 걸로 밀주를 담가 팔고, 어릴 때 열차에 치어서 팔이 잘렸다는 구명이 형은 아침마다 갈고리 손을 끼우고 무교동과 장충동을 다니면서 가짜 상이용사 흉내를 내는 걸로 생계를 유지한다. 얼마 전 해방촌에 있는 천주교 성당에서 극빈자를 위해 죽을 나누어주었는데, 그곳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던 가짜 상이용사 패거리 중에 구명이 형이 끼어있는 걸 먼발치에서 보기도 했다.


    혜옥이네도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혜옥이 아빠인 철호 아저씨가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 나간다고는 하지만 가족이 너무 많았다. 화장실 근처라서 그 집을 종종 지나치곤 하는데 가끔 “가자!”라 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혜옥이 말에 의하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머니가 지르는 소리라고 했다.


    “어딜 가고 싶어 하는데?


    호섭이의 물음에 혜옥이는 고개를 저었다. 혜옥이 엄마는 한눈에 봐도 못 먹어서 푸석푸석한 얼굴이었고, 영호 아저씨는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학교를 그만둔 혜옥이 동생 민호가 신문을 팔러 다닌다고 했다. 쉬쉬하지만 철호 아저씨의 여동생 명숙이 누나가 양공주로 일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해방촌에서 혜옥이네 정도의 사연이 없는 집안은 거의 없었다.


    정명섭 篇

    신사에서 해방촌으로

    해방촌의 탄생과 유지는 광복과 분단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는 해방촌이라는 명칭과 거주민의 구성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원래 남산 기슭은 조선 시대 한양의 남쪽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선비들이나 사는 곳이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고 진고개라고 불릴 정도로 길이 질퍽해서 나막신을 신지 않고는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기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인들이 자리 잡은 진고개가 새로운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으로 변모한 것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에는 경성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면서 백화점과 우체국을 비롯한 각종 상점은 물론 통감부와 총독부까지 들어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남산 일대는 일본인들이 만든 조선신궁을 비롯한 종교 시설들이 들어섰다. 해방촌이 세워진 곳 역시 경성호국신사가 세워졌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서 일본 군전사자가 늘어나게 되면서 이들에 대한 추모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광복이 되자 경성호국신사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 자리를 잡는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일본인이 떠난 후 남은 빈 집을 차지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둘 경성호국신사로 몰려와 천막과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특히 평안북도 선천 지역 사람들이 해방촌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아무 연고지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갔다.


    아무도 해방되지 못한 해방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기나긴 태평양 전쟁이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온 광복은 수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나뉘고 양측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분단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일본과 중국으로 나갔던 동포들이 급거 귀국하고, 특히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탄압을 받게 된 북한 주민들이 남하하면서 혼란은 극에 달한다.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에서도 당시 해방촌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고향으로 가자고 부르짖는 정신없는 어머니와 한탕으로 돈 벌 궁리만 하는 철부지 남동생과 양공주로 나서야만 했던 여동생, 학업을 그만두고 신문을 팔아야 하는 아들, 그리고 없는 살림을 지탱하느라 영양실조에 걸린 부인을 둔 남자 주인공 철호는 이빨이 아파도 치과에 가지 못한다. 결국 철호는 스스로 이빨을 뽑고 피를 철철 흘린 채 택시를 탄다. 그는 어디로 가느냐는 기사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기도 어렵다. 그러자 기사는 어디서 오발탄 같은 손님이 탔다고 투덜거린다. 어쩌면 해방촌 자체가 오발탄일지도 모른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반면, 김승호 주연의 <박서방>이라는 영화에서는 해방촌을 고향처럼 그리고 있다. 연탄 아궁이를 수리하는 박서방은 잘 나가는 아들과 딸 덕분에 번듯한 양옥에 초대받아 음식과 차를 대접받는다. 하지만 난생처음 마셔보는 홍차나 바닥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야 한다는 사실 모두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런 박 서방에게 해방촌은 낯선 것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는 공간이다.


    5.16 군사 쿠데타 이전 해방촌 사람들은 사제담배를 무허가로 제조·판매하는 일로 먹고 살았다. 그래서 한때 해방촌의 별명이 ‘제2전매청’이었던 적도 있다. 가짜 상이용사 흉내를 내면서 식당과 성당에서 무전취식과 협박을 하던 이들도 상당수가 해방촌에서 살았다. 군 제대 후 가족들과 먹고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지친 가장이 허리띠로 목을 매 숨진 곳도 해방촌이었고,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가 약 한 첩 못 써보고 세상을 떠난 곳도 해방촌이었다.


    해방촌 걷기

    오늘날의 해방촌은 경리단길처럼 새로운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영어 간판을 단 가게, 북적이는 외국인, 신기한 것을 찾는 방문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에 발맞추어 해방촌을 걷는 여러 코스가 개발되었고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마을 해설사들의 안내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중 녹사평 산책이라는 코스를 걸어보았다. 해방촌을 가로질러 가는 코스이면서 전망이 좋아 남산과 서울 시내가 잘 내려다보인다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오르막길을 걷다 보니 붉은 벽돌로 지은 2~3층짜리 빌라와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골목길들이 나온다. 198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과 마주하는 기분이다. 골목길 중간중간에는 주민들이 키우는 꽃나무 화분들이 보인다. 요즘과 예전 골목길의 차이점을 꼽으라면 그 중 하나는 밖에 내놓은 화분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왕래가 일상적이었던 예전의 골목길에서는 누군가 내어놓은 꽃나무에 옆집 사람이 물을 주고 앞집 사람이 가꾸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각자 살아가기 바쁜 요즘, 골목에 화분을 내놓고 키우는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낯선 방문객의 발걸음에 놀라 날아가는 참새의 날갯짓을 보면서 해방촌을 계속해서 걸었다. 오르막길은 하얀색 기둥이 촘촘히 세워진 해방촌 교회 전도관과 진성슈퍼를 지나면서 잠잠해진다. 진성슈퍼 뒤에는 해방촌 도시재생 지원센터 건물이 있다. 해방촌은 2020년까지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된 곳으로 열악한 주거환경을 바꾸면서 역사적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는 데 주력했다. 얼마만큼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쫓겨난 사람과 밀려난 가게들이 없다는 점은 다행이다. 하지만 이곳도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심히 우려스럽다.


    걷다 보면 해방촌의 골목은 몹시 입체적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경사지에 자리해 있지만 거기서 다시 계단과 경사로가 나타난다. 우습게도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롤러코스터에 비유되는 인간의 삶을 떠올렸다. 해방촌 사람들은 거친 삶을 이미 계단과 경사로에서 느꼈을 것이다. 그나마 좁은 골목길 너머로 서울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으니 이를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신흥시장의 좁고 휘어진 골목을 걷노라면 빛을 가리는 높다란 벽에 불안감이 아닌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층마다 다른 건축 재료를 사용해서 만들고 창문의 형태와 재료 역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얼마나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세월의 무게를 쌓아왔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골목길 곳곳에는 특이한 카페들과 찻집들이 가득하다. 만약 신흥시장 부근에 있는 카페에 들른다면 반드시 지붕, 좀 유식하게 말해서 루프탑으로 가기를 권한다. 남산 기슭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의 지붕이라 전망이 정말 좋다. 예전 군주나 국왕들이 기를 쓰고 높은 곳에 성을 쌓고 그 위에 또 탑을 쌓아서 내려다보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나 할까? 눈에 보이는 경치가 모두 나의 것이었으니 지금도 이곳에서 마신 커피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동묘 벼룩시장

    축구공

    “여기가 우리가 장사할 곳이야.


    잔기침을 내뱉은 외팔이 황 씨의 말에 친구인 박 씨가 한숨을 쉬었다.


    “여기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종삼에서 구두닦이를 하다가 그곳이 없어지고 난 후, 외팔이 황 씨는 주변에서 돈을 꿔서 청계천에서 노점을 했다. 얼마 후 옆의 빈자리에 박 씨의 리어카가 자리를 잡았다. 석촌호수 근처에서 분식을 팔다가 단속이 심해지자 그나마 상황이 나은 청계천 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청계천에서 신발이랑 잡화를 파는 노점상을 하던 두 사람은 고향이 같고 나이도 동갑이라 어느새 친해져 구청에서 단속이 나오면 서로 물건을 챙겨주곤 했다. 특히 같은 손수레 보관소를 쓰면서 더 친해졌다. 서울시장이 청계천을 복원한다고 해서 두 사람을 비롯한 노점상들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노점상들은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결국 비어있는 동대문 운동장이나 성동공고 뒤편의 공터로 이전해야만 했다.


    “젠장, 우리가 무슨 축구공도 아니고, 이리 뻥 저리 뻥이야.”


    겨울 초입이라 쌀쌀한 바람이 두 사람의 손을 점퍼 주머니에 푹 찔러 넣게 했다. 인도에 파란색 천막 비닐을 깔고 옷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파는 노점상에는 털모자와 목도리로 무장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서 옷을 고르는 중이다. 옷 중에는 올여름에 유행했던 ‘Be the Reds’ 셔츠가 눈에 많이 띄었다.


    “잠실이나 강남 아파트 같은 데서 주민들이 버린 옷 중에 쓸 만한 걸 가져오나 봐. 아니면 외국에서 킬로그램 단위로 수입하든가.”


    “우리 때는 없어서 못 입었는데 요즘은 버리는 게 저리 많구먼.”


    어디선가 구수한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오자 박 씨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사거리에 부추전과 막걸리를 파는 노점이 보였다. 그걸 보고 군침을 흘린 박 씨가 옆구리를 찔렀다.


    외팔이 황 씨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박 씨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빈자리에 비집고 들어간 박 씨가 매직으로 쓰인 차림표를 보더니, 번철에 부추전을 부치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주문을 했다.


    느릿하게 대답한 주인아주머니가 한 손으로 부추전을 뒤집으면서 아래쪽에서 막걸리 하나를 꺼내어 능숙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외팔이 황 씨에게 건네다가 한쪽 팔이 없는 걸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명섭 篇

    관우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조선으로 돌아온 명나라 장수들은 주둔지 곳곳에 관우의 사당을 세우면서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조선의 조정에 관왕묘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다. 성리학 중심의 조선에서는 일개 무장의 사당을 세우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다. 거기다 전쟁의 피해가 워낙 커서 궁궐조차 복구하지 못하는 마당에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 것에 대한 부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장수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양측의 신경전은 관왕묘의 위치를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 측에서는 관왕묘를 남대문 밖에 짓고 싶어 했고 조선에서는 동대문 밖에 짓고 싶어 했다. 풍수지리까지 따지는 지루한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은 양쪽 다 짓는 것이었다. 조선이 제시한 동대문 밖 영도교 옆에 지어진 것을 ‘동쪽에 지어진 관왕 묘’라고 해서 ‘동관왕묘’로 부르다가 ‘동묘’라고 줄여 불렀다(마찬가지로 남대문 앞에 지어진 관왕묘는 ‘남관왕묘’ 또는 ‘남묘’라 부른다.)


    우여곡절 끝에 짓기는 했지만 조선이 딱히 애정을 품고 있던 곳은 아니어서 명나라 장수들이 귀국하자 동관왕묘는 사실상 버려지게 된다. 관리가 소홀해진 동관왕묘는 금방 파손되었고 광해군과 인조 대가 되어서야 겨우 수리를 했다.


    사당에서 공원으로

    광복 이후에도 동관왕묘는 관심 밖의 존재였다. 동묘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관우와의 연관성조차 희미해졌다. 국가의 관리를 받지 못한 동묘는 기와가 깨지고 기둥이 갈라지는 등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담장까지 허물어질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수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보존되어왔던 동묘의 담장과 건물들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담장을 새로 쌓으면서 다른 재료를 사용했고 침수가 심해지자 외삼문과 중삼문 기단을 높여버리고 만 것이다.


    현재와는 달리 전근대 시대에는 건물 하나하나마다 짓는 의미와 위상이 달랐다. 그런데 기단을 높이는 바람에 그런 특징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엉터리 보수는 1970년대 불어 닥친 재앙과는 비견될 바가 아니다. 동묘를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담장이 허물어지고 임금이 머물던 장소가 화장실로 변했다. 정전의 마룻바닥도 뜯어내어 전돌을 깔아버렸다. 일련의 공사를 거친 동묘는 1976년 공원으로 탈바꿈되어 세상에 공개된다. 이후 2000년에 6호선이 지나가고 2005년에 1호선이 지나가는 동묘앞역이 생기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아졌다.


    그러자 정작 공원으로 만들었지만 안에 잘 들어가지지 않는 동묘 주변에 슬금슬금 벼룩시장이 만들어졌다. 처음 벼룩시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벼룩처럼 작은 물건들을 파는 시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의 벼룩시장은 벼룩이 들끓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들을 파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청계천에서 밀려나다

    청계천 복원이 발표되면서 그곳에서 장사하던 노점상들은 떠나야만 했다. 서울시에서는 동대문 운동장 안에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며 이주를 권했다. 대부분은 그곳으로 이주했지만 일부는 동묘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다가 2008년 동대문 운동장 역시 재개발에 들어가자 노점상들은 다시 쫓겨나서 옛 숭인여중 자리에 조성된 서울 풍물 시장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손님이 찾아오지 않자 이들 또한 동묘로 흘러들어오게 되면서 시장의 규모가 커졌다.


    어르신들의 홍대

    동묘앞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가면 정말 노인이 많다. 누군가는 이곳을 ‘어르신들의 홍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이곳에서 내리는 노인들을 보면 자신의 본거지에 왔다는 표정을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이 홍대입구역에서 내릴 때의 감정과 여러모로 비슷해 보인다.


    이곳에는 정말 다양한 물건이 있다. 옷 중에서도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군복, 장갑, 버선, 복면이라고 부르는 발라클라바를 비롯해 가짜 티가 심하게 나서 오히려 부담이 없는 진주 목걸이와 각종 장신구들, 오래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냄비와 주방용품들이 옹기종기 모여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에게 동묘는 400년이 넘은 역사적인 건물이지만 이들에게는 장사를 하는 터전에 불과하다. 이들의 장사가 역사적 유물을 훼손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조차 동묘의 운명이 아닐까 싶다. 마지못해 지어지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곳이 장사꾼들의 천국이 된 역설적인 상황이 참으로 흥미롭다. 이곳을 장사하는 골목길로 만들어버린 노점상들 역시 역사의 한 자락으로 남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보물길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골목길을 ‘보물길’이라고 부른다. 사거리에서 오른쪽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주변 풍경이 놀랍도록 달라지는데, 양쪽 거리가 확 좁아지고 상점 위에 친 차양까지 더해져 대낮에도 어둑할 정도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이 좀 더 넓은 지봉로4길 이다. 하지만 보물길로 들어서려면 좁은 왼쪽 길로 가야 한다.


    이곳은 엔틱과 고물 사이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 정말 많다.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아이언맨과 타노스 옆에 해리포터가 활짝 웃고 있고, 오래된 인형과 장신구들도 불쑥 튀어나와 반겨준다. 여러 번 와도 항상 새롭다. 특히 ‘여행스케치’라는 엔틱 상점은 수집가라면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인형과 장신구를 보면서 골목길은 뭔가 예상하지 못한 사물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신비한 공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이 길이야말로 우리가 찾는 진정한 골목길일지도 모르겠다.


    뭐니 뭐니 해도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고기 튀김을 파는 곳이다. 두툼하고 기름진 고기 튀김과 오징어 튀김은 골목길을 걷다가 허기진 배를 알맞게 채워준다. 접이식 테이블에 앉아서 고기 튀김을 먹다 보면 오가는 사람들은 물론 가게 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어울렁더울렁 이런저런 사연이 흘러가는 골목길은 얼마나 정겨운 장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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