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지은이 : 김도균
출판사 : 아카넷
출판일 : 2020년 09월




  • 한국 사회는 ‘정의’와 ‘공정’이 여전히 화두다. 고위 관료 자제의 특혜 문제, 공공의료 확충안에 대한 정부와 의사협회 간의 갈등,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 정규직화(인국공 사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논란 등 ‘공정’을 문제 삼고 ‘정의’를 갈망하는 여론은 저마다 입장을 달리하고 세대 간 갈등 양상으로 비화하기까지 한다. 이 충돌하는 정의와 공정 들을 상식적인 토대 위에서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조정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한국 사회는 적대적 분열에서 벗어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발돋움할 수 없을까?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비원이자 숙원이라고 할 질문을 다시 꺼내들며 정치문화와 헌법 속에서 ‘정의와 공정의 문법’을 탐색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의 근본 개념과 역할

    국가와 법의 첫째 덕목은 정의

    20세기 최고의 정의철학자 존 롤즈(John Rawls)는 『정의론』을 이렇게 시작한다.


    사상체계의 첫째 덕목이 ‘진리’라면, 사회제도의 첫째 덕목은 ‘정의(Justice)'다. 이론이 아무리 정밀하고 분명하다 한들 진리가 아니면 배척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 법과 제도 역시 아무리 효율적이고 잘 정비되었다 한들 정의롭지 않으면 폐기되거나 개선되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 규칙, 법과 제도, 공권력 작용, 국가의 행위를 향하여 정의롭다 혹은 부정의하다고 평가한다. 일상에서 관찰해보면, 정의의 기본 문제는 각자에게 이익과 부담을 분배하고 재화를 나누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가령 ‘물을 정의롭게 마신다’거나 ‘정의롭게 산행에 나선다’와 같은 표현은 흔히 철학적 유머로 통할 것이다. 그러나 물이 귀한 곳에서 물을 공정하게 분배하거나, 누구에게나 산행에 나설 권리와 기회가 고루 돌아갈 경우에는 ‘물’과 ‘산행’에 ‘정의롭다’는 표현이 사용되어도 어색하지 않다. 사용하는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지면 유리한 재화나 지위, 짊어지면 부담이 되는 의무들을 각자에게 어떻게 나누면 옳은가’의 문제는 정의의 기본 문제라고 생각되어왔다. 그렇기에 개개인에게 이익과 부담을 분배하거나 이익과 손해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자 할 때, 우리는 정의를 말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일단 정의의 문제를 ‘이익과 부담을 옳게 분배하거나 이익과 손해 사이의 균형을 바르게 맞추는 일’의 문제라고 요약 해보자.


    사람들은 재화나 기회를 분배하거나 부당하게 발생한 손해를 원상회복하려고 할 때 어떤 정의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저마다 달리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정의가 왜 필요하고 그 역할은 무엇인지, 정의 원칙이라면 최소한 어떤 모습을 갖춰야하는지에 대해서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정의의 내용이나 실체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다르다고 해도 우리가 모두 공통되게 떠올리는 정의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와 의의를 정의의 개념(the concept of justice)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정의의 개념에서 핵심은 우리가 정의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해 인류가 깊이 헤아려온 공통된 이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정의 담론의 네 가지 요소

    분배 정의의 핵심 문제가 혜택과 부담의 공정한 분배라면, 분배 정의의 궁극적 관심사는 분배 대상인 혜택과 부담의 성격과 내용을 명료하고 설득력 있게 해명하는 데 있다. 분배정의를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모든 사회정의 담론에는 네 가지 요소가 반드시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 요소는 ‘무엇을 분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드러나듯이 분배 대상인 재화나 자원이다. 재화나 자원은 반드시 물질적인 것 (돈이나 직장)일 필요는 없고 권리와 의무, 명예와 굴욕, 칭찬과 비난(처벌), 인정과 무시와 같은 비물질적인 것도 포함한다. 무엇을 정의의 대상인 재화로 볼 것인가도 정의 담론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둘째 요소는 재화를 분배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또는 누구에게 재화를 분배할 것인가 하는 ‘분배 대상자’다. ‘누가’ 재화를 분배받을 자격을 갖는지 결정하는 일은 정의 담론을 형성하는 공동체의 범위와 그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을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무엇을’ 분배할 것인가라는 재화의 요소 못지않게 정의 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셋째 요소는 재화를 어떤 기준에 따라 특정 집단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정당한가하는 ‘분배 기준’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이라는 원칙을 정의의 근본 기준으로 삼아왔다. 물론 무엇이 각자의 몫인지를 놓고 많은 기준들이 제시되었다. 각자의 필요, 각자의 실력과 업적, 선택과 교환 등이 분배 기준의 후보자로 거론되는 것들이다. 또한 각자의 몫을 정하는 실질적 기준은 아니지만, ‘일단 기준이 정해졌다면 그 기준을 충족하는 개인들은 평등하게 대우하고 그렇지 못한 개인들은 차등하게 대우하라’는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기준(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도 보편적인 정의 원리로 인정되어왔다.


    사회 정의 담론의 넷째 요소는 ‘누가’ 분배 대상인 재화와 분배 대상자, 분배 기준을 결정하는 정의 담론의 주체인가 하는 ‘주체’ 요소다. 정의 담론의 주체는 국가, 국회, 행정부, 사법부인가, 아니면 정치적·경제적·지적 엘리트들인가? 우리는 헌법 제1조 국민 주권 원리에 입각해서 당연히 사회정의 담론의 주체는 시민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만일 시민이 주체라면, 이때의 시민은 단일한 정체성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질의 시민들인가, 아니면 다종 다양한 정체성과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들인가? 후자라면, 다양하고 상충하는 이해관계와 견해를 제시하는 시민들이 어떤 의사결정 절차를 통해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정의 원리들을 산출할 것인가? 게다가 누가 시민이고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난민이나 이주 노동자는 정의 담론의 주체인가 아닌가? 미래 세대는 정의 담론의 주체인가 아닌가? 이렇게 정의 담론의 주체 문제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문제로, 전 지구적 정의(global justice)의 문제로, 세대 간 정의(intergenerational justice)의 문제로 가닿는다.


    사회정의의 기본 원리들

    개개인은 출신배경과 유전자 차이 등으로 인해 부당하게 취급되고 열등한 지위에 놓이는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인류가 꿈꾸어 온 사회 정의의 최소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릴만한 사람이 누리고 가질만한 사람이 가지도록 하고, 배려할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들이 이러한 정의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적절할까? 그 내용이 무엇이든 정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자의적 차별을 방지해야 하고,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균형 있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자의적 차별’이나 ‘적절한 균형(형평)’과 같은 표현은 형식적이어서 그 내용이 다양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정의 담론의 네 가지 요소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구체화하여 저마다 정의의 내용을 전개하는 이론들을 ‘정의관(conception of justice)’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정의의 핵심 취지와 목표나 정의 담론의 요소들이 정의의 공통된 개념 틀(concept)이라면, 이 개념 틀을 구체화한 해석은 ‘정의관’이다. 정의관(정의론)들은 다양하지만, 이들이 공통으로 수용하는 정의의 기본 원리들이 있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정의의 대원리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라”이다. 이 원리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정의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원리에서 ‘각자의 몫’이라는 요소에 대입 될 수 있는 내용은 다양하다. 이 형식적 요소인 ‘각자의 몫’을 채우는 실질적 기준으로 여러 가지가 제시되어왔다. 그 후보로는 ‘각자에게 균등하게’,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몫에 따라’, ‘각자가 필요로 하는 바에 따라’, ‘각자의 선택과 교환에 따라’, ‘각자에게 법으로 규정된 바에 따라’ 등이 있다. 이들 실질적 기준은 여럿이 동시에 적용될 수 없고, 때로는 서로 충돌한다. 과연 상이한 정의의 실질적 기준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이 있을까?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 ‘각자의 몫’을 정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비교해서 ‘각자의 몫’을 정하는 상대평가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몫과 비교하지 않고 각자 개인의 몫을 정하는 절대평가 방식이다. 학생들의 성적에 적용되는 상대평가와 절대평가를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받는 몫과 처우와 관계없이 각자가 응당 가져갈 몫과 처우를 받는 것이 정의롭다는 정의 판단은 절대평가 방식이다. 만일 내가 노예 취급을 받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노예 취급을 당하는지와 상관없이 내가 노예 취급을 당하는 것 자체가 부정의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항상 다른 사람들이 받는 몫과 처우와 비교해서 각자의 몫과 처우를 결정하는 정의 판단은 상대평가 방식이다.


    절대평가 방식과 상대평가 방식의 구별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나 정책을 두고 정의를 판단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개인은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정의 원리 밑바탕에는 절대평가 방식의 정의 판단이 깔려 있고, 부당한 불평등의 제거나 완화와 같은 평등을 지향하는 정의 원리에는 상대평가 방식의 정의 판단이 작용한다. 뒤에서 살펴보게 될 실질적 정의 원칙들은 상대평가 방식과 절대평가 방식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거나 어느 한 측면이 강하게 드러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본적 필요 원칙은 절대평가의 속성이 두드러지지만 상대평가의 속성도 가지고 있다. 평등 원칙의 경우에는 타인과의 비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상대평가의 속성이 강하긴 하지만, 동등한 인간 존엄성이라는 근원적 평등 차원에서는 절대평가의 속성도 가지고 있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정의의 두 번째 기본 원리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라’는 요청으로 집약된다. 이 원리는 상대평가 방식의 성격을 지니는 정의 원리다. 한 개인이 받을 몫이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이라는 정의의 대원리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서도 각자의 몫을 줄 수 있는 반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원리는 언제나 타인과 비교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정의의 두 번째 기본 원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특정 관점(기준)에 비추어 비교해서 같다면 평등 대우하라는 요청(같은 것은 같게)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해서 상이하다면 그에 비례해서 불평등 대우(차등대우)하라는 요청(다른 것은 다르게)이다. 불평등 대우의 요청은 “비교 기준 측면에서 똑같지(동등하지) 않은 개인들은 그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의 정도에 따라서 비례적으로 차등대우(불평등 분배)할 것”이라는 비례적 대우의 요청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요청 중 어떤 요청이 우선할까? 일반적으로 평등대우의 요청이 불평등 대우의 요청보다 우선 적용되어야 한다고 인정된다. 이것을 이른바 ‘평등대우 우선성 추정(the presumption of equal treatment) 원칙’이라고 하는데, 이 원칙은 “비교 기준 측면에서 사람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는 일단 모든 사람을 동등하다고 추정하고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요청으로 집약된다. 평등대우 우선성 추정 원칙은 ‘일응(一應)의 평등대우 원칙’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일응’이란 용어는 일단 우선 평등하게 대우하지만, 여타의 근거와 고려사항들을 종합하여 판단해서 똑같지(동등하지) 않다면 평등대우의 원칙은 사라지고 불평등 대우(차등대우)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일응의 평등대우 원칙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수락 가능한 근거가 불평등 취급 내지 불평등 분배를 정당화하지 않는 한, 협력체의 구성원은 일단 평등하게 취급되고 또 공동 협력의 산물인 이익과 부담은 일단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은 무엇을 정의라 하는가

    우리 헌법에 담긴 자유와 존엄의 정의관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위한 정의관

    대한민국 현행 헌법은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의 개념과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중에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 곧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말한다. 이 ‘자유롭고 민주적인’이라는 수식어에 자유의 평등이라는 이념과 평등한 주권자로서의 시민이라는 이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자유 민주정은 어떤 식으로 해석되었든 평등의 이념을 상정하는 셈이다. 이때의 평등은 동등한 인간 존엄성이라는 근원적 평등(도덕적 평등)의 이상, 평등한 시민의 이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최대한의 자유를 각자에게 평등하게 보장한다는 이상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물론 개개인이 평등하게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민주주의 사회를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로 이해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자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어떤 자유들이 중요한지, 자유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또는 자유와 평등이 서로 맞선다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등의 중요한 문제들이 해소되어야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는 특정 해석에 의해 고정되지 않고, 해석과 논쟁을 통해 그 내용이 부단히 새롭게 채워지는 개념과 이념(contested concept)이라고 할 수 있다.


    최대한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한다

    자유의 기본 요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못하게 막는 제약 조건이 없는 것’이다. 이때 제약 조건에는 국가를 비롯한 외부로부터의 강제와 같이 적극적인 제약 조건도 있고, 돈을 비롯한 물질적 조건의 결핍과 같이 소극적인 제약 조건도 있다. 또한 지식이나 정보, 기술, 자신감과 자존감처럼 행위자의 내적 역량이 부족해서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사회에서 상호 작용을 하면서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으므로 자유는 제약당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자유들은 매우 중요해서 국가나 타인이 쉽게 제약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보호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자유들을 그런 자유로 분류해야 하고,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 헌법 재판소의 결정례부터 살펴보자, 헌법 재판소는 자유와 권리의 중요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인간 존엄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우리 헌법 구조에서 더욱 중요한 자유 영역과 덜 중요한 자유 영역을 나눌 수 있다면, 이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하고 근본적인 자유는 더욱 강하게 보호되어야하고 이에 대한 제한은 더욱 엄격히 심사되어야 하는 반면에, 인간 존엄성의 실현에 있어서 부차적이고 잉여적인 자유는 공익상의 이유로 더욱 광범위한 제한이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헌법 재판소는 이 일반 기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신체의 자유는 “정신적 자유와 더불어 헌법 이념의 핵심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유로서 모든 기본권 보장의 전제 조건”, “양심의 자유는 우리 헌법이 실현하고자하는 가치의 핵이라고 할 인간의 존엄과 가치와 직결되는 기본권”,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는 인간이 그 존엄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명예의 보호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하는 기초가 되는 권리”이며, 내밀하고 중요한 개인정보 역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의 내적 핵심을 이룬다고 설시한다.


    이처럼 인간 존엄성의 실현과 보장에 필수적인 자유들을 ‘기본적 자유(basic liberties)’라고 한다. 헌법에서 기본권으로 특별히 보장한 자유들, 우리 헌법 제10조에서 제36조에 걸쳐 규정된 자유들이 기본적 자유의 예시다. 이들 기본적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는 제약 조건들은 여타의 자유 제약 조건들보다 우선적으로 제거되거나 방지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국가나 공공기관, 사적 단체나 개인들이 기본적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면 이를 막아야 하고, 물질적 여건이나 개인의 역량 결핍이 기본적 자유의 행사에 장해가 된다면 물질적 여건을 적극 제공하여 개개인이 자유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기본적 역량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정의관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실현하여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자유들이 가능한 광범위하고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지향하고 천명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엄을 지향하는 정의관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위상

    우리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한다. 우리 법질서의 핵심 이념인 동등한 인간 존엄성의 원리를 헌법 제10조에서 천명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헌법 재판소는 헌법 제10조가 가지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헌법 제10조는 (……) 모든 기본권의 종국적 목적이나 기본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 조항은 헌법 이념의 핵심으로서 국가는 헌법에 규정 된 개별적 기본권을 비롯하여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자유와 권리까지도 보장하여야 하고, 이를 통하여 개별 국민이 가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확보하여야 한다는 헌법의 기본 원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헌법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인간 존엄과 평등의 관계를 살펴보면, 인간 존엄의 개념과 이념이 사용되는 것은 인간 이외의 생물들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독특한 가치와 위상에 주목할 때다. 따라서 인간 존엄의 개념과 이념은 사람들 사이의 동등한 가치뿐만 아니라, 여타 생물들과는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가치와 속성과 위상도 포함한다. 인간 존엄과 평등은 그 발생 맥락에서는 구별되지만, 인류 지성사와 법의 발전사에서 보면 인간 존엄에서 만인 평등사상이 나온다는 근대 계몽주의에서 양자는 결합되었다.


    종교 교리의 관점이든 합리주의 철학적 전통의 관점이든 특정한 지역 문화나 사유 방식의 관점이든, 각각의 관점에서 나름의 근거에 입각해 합의할 만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핵심 이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과 견해가 있지만, 인간 존엄의 종교적, 사상적 전통들을 집약하여 철학적 토대로 구축한 철학자로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꼽을 수 있다.


    칸트가 제시하는 인간 존엄의 사상

    칸트는 사람의 사회적 유용성이나 사회적 지위나 출신배경 등에 의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인간 개개인은 다른 개인들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inherent worth)’를 가지며, 그 자체가 목적(Zweck-an-sich)인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의 가치를 ’절대적 가치(absolute value)'라고 명명하고 인간 존엄의 기초로 삼았다. 이와 대조되는 견해를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여타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의 가격인데, 사람의 가격은 그 사람이 지닌 능력(힘)의 쓰임새에 따라 주어진다. 그래서 (가격으로서) 사람의 가치는 절대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수요와 평가에 따라 정해진다.


    칸트는 이런 견해에 반대하며 ‘스스로가 목적인 존재들의 가치(the worth of an end in itself)’, 즉 인간의 가치는 상대방에게 또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존재인지에 대한 평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칸트는 이렇게 자기 자신과 타인의 주관적 평가에 의해 비교되면서 결정되는 가격을 뛰어넘는 본래의 가치를 ‘존엄(dignity, Würde)’이라고 명명했다.


    이 관념은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자신이나 타인을 목표 달성에 필요한 한낱 수단(mere means)으로만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되며, 동시에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목적으로도 존중해야 한다”는 ‘목적 정식(또는 수단화 금지 정식)’으로 구현된다. 이로부터 모든 개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는 기준들에 맞게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요청이 나오며, 이 존중받을 권리에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소극적 의무와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라는 적극적 의무가 대응한다.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인간의 존엄

    이러한 인간 존엄 사상이 우리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헌법 재판소는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능력’이 인간 존엄의 본질적 핵심이라고 파악한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권을 규정하는 헌법 제10조는 “개인의 인격권 · 행복 추구권은 개인의 운명결정권이 전제되는 것이고, 자기 운명결정권에는 성행위의 여부 및 그 상대방을 선택할 수 있는 성적자기결정권이 포함”된다고 설시한다. 다양한 차원의 자기결정권을 인간 존엄에서 도출하는 결정문들을 보더라도, 우리 헌법재판소는 자율성 능력을 인간 존엄의 핵심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구치소 내부의 과밀수용 행위가 위헌임을 확인한 ‘헌재 2016.12.29. 2013헌마142’ 결정문은 이른바 칸트의 ‘목적 정식’을 원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시한다.


    헌법 제10조에서 규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 모든 인간을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인간을 다른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는 바, 이는 특히 국가의 형벌권 행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국가가 형벌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피의자·피고인·수형자를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엄과 가치를 가지는 인간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국가가 형벌권을 행사함에 있어 사람을 국가 행위의 단순한 객체로 취급하거나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형벌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고, 행형(行刑)에 있어 인간 생존에 기본조건이 박탈된 시설에 사람을 수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필요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는 수형자의 기본권에 대한 제한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국가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서 비롯되는 위와 같은 국가형벌권 행사의 한계를 준수하여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수형자가 인간으로서 가지는 존엄과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칸트로 집약되는 인간 존엄 사상은 인권과 헌법에서 규정하는 기본권의 원천과 관련해서, 그리고 국가와 법질서의 정당성 기초와 관련하여 확고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국가권력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기본권을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국가와 국가권력의 정당성 원칙”이라는 견해를 일관되게 견지하는 헌법재판소의 다음 결정문에 잘 나타난다.


    (……)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해야 할 의무와 과제를 안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국가권력의 한계로서 국가에 의한 침해로부터 보호받을 개인의 방어권일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의 과제로서 국민이 제 3자에 의하여 인간 존엄성을 위협받을 때 국가는 이를 보호할 의무를 부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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