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마지막 습관
 
지은이 : 조윤제
출판사 : 청림출판
출판일 : 2020년 11월




  •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말년에 모든 공부를 비우고 《소학》과 《심경》만을 남겼다.  이미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정약용이 두려워한 바는 다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된 채로 늙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하기를 바랐기에 환갑에 이르러서 이제부터야말로 공부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이 《심경》과 함께 《소학》을 마지막에 선택한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날마다 새로워지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매일 저녁마다 죽고 매일 새벽마다 부활하기를 바랐다. 《소학》을 새롭게 풀어낸 이 책에 ‘다산’을 제목에 올린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다산의 삶은 《소학》에서 시작해 《소학》으로 돌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다산의 마지막 습관


    입교(立敎) _ 위학일익(爲學日益) : 배움이란 매일 채워도 끝이 없다

    나 또한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

    幼子 常視毋誑 立必正方 不傾聽

    유자 상시무광 입필정방 불경청


    아이들에게는 항상 속이지 않는 것을 보이며, 바른 방향을 향해 서며, 비스듬한 자세로 듣지 않도록 가르친다.

    _《예기》<곡례>


    자녀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아이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지금 자신은 부족하더라도 장차 아이들은 이러한 자신을 뛰어넘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 바라고, 또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떤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가정에서의 교육이다. 교육은 학교가 아닌 가정에서 시작되고 또 완성된다.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학교에만 맡기지 말고 가정에서부터 상식과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이에게 기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제아무리 좋은 교육을 제공한다고 해도 부모가 실제 삶에서 가르침과 어긋나게 행동한다면 아이는 자신이 배워온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공자는 《논어》<위정>에서 “먼저 실천하고 그다음에 말하라”고 했다. 제자 자공이 ‘군자는 어떠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가르쳤던 말이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가르침도 소용이 없으며, 군자의 진정한 자세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 자식들에게는 항상 속이지 않는 것을 보이며, 바른 방향을 향해 서며, 비스듬한 자세로 듣지 않도록 가르친다.


    《예기》<곡례>에 실려 있는 자녀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다. 세 가지의 가르침인데, 이 구절에서 특기할 것은 가르침의 방법이다. 바로 보이는 것, 행동하는 것, 듣는 것이다.


    먼저 보이는 것이다. 어린 자식들에게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말고, 속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라고 한다. 특히 속이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부모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의 일관성에서 시작된다. 그다음 ‘바른 방향을 향해 서다’도 마찬가지로, 항상 바른 길을 걷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삶에서 바른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은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실천이다. ‘비스듬한 자세로 듣지 않는다’는 말은 받아들일 때의 태도를 알려준다. 많이 듣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른 자세로 듣는 것이다. 들은 것을 무조건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왜곡해서 들어도 안 된다. 그래야 올바른 뜻이 바로 설 수 있다.


    사람은 보고 듣는 것으로 이뤄지는 존재다

    다산은 18년간의 귀양 생활 동안 끊임없이 두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형편이 되는 대로 아들들을 불러 직접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그들에게 보낸 글을 보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식들의 장래에 대해 다산이 얼마나 절실한 마음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과 귀가 총명하지 않느냐? 어째서 자포자기하려는 게냐? 폐족이라 생각해서냐? 폐족은 다만 벼슬하는 데 거리낌이 있을 뿐이다. 폐족으로 성인이 되거나 문장가가 되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식견이 트인 선비가 되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 거리낌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좋은 점이 있다. 과거시험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데다, 가난함과 곤궁함을 통해 오히려 심지를 단련할 수도 있다.


    다산이 자식들에게 가르친 것은 고난에 임하는 자세다. 자신 역시 편지에 쓴 글에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고난에 맞섰다. 그리고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했다.


    아이가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먼저 배우는 사람은 바로 부모다. 조금 자라게 되면 스승이다. 따라서 예문의 글은 자녀를 가르치는 사람, 즉 부모와 스승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자신의 아이가 능력만 출중하거나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은연중에는 세속적인 성공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모습을 바라고 또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말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부도덕하다면 자식이 배우는 것은 부도덕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식의 앞날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부모의 불의와 부도덕을 보이는 것보다 아이에게 더 큰 불행은 없다. 아이가 남을 속이지 않는 사람, 바른 길로 뚝심있게 나아가는 어른, 흐트러지지 않고 예의 바른 시민이 되기 원한다면 먼저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성공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임을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줘 몸과 마음에 새겨줘야 한다.


    사람은 보고 듣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



    명륜(明倫) _ 자승자강(自勝者强) : 예의란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이겨내는 자세다

    가장 가까운 사이부터 진심을 다하라

    出則告 反必面 所遊必有常 所習必有業 恒言不稱老

    출즉고 반필면 소유피유상 소습필유업 항언불칭노


    나갈 때는 반드시 알리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비추며, 다니는 곳은 반드시 일정해야 하고, 익히는 바는 반드시 이룸이 있어야 하고, 평소에 자신이 늙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기》, <곡례>


    나이든 부모님이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보살펴드리는 것은 당연한 자식의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예문의 구절이다. 바로 부모의 마음이 편하도록 살피는 것이다.


    《논어》에는 공자가 효에 대해 제자를 가르친 말이 거듭해서 실려 있다. 먼저 자유가 효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가르쳤다. “요즘 효라는 것은 부모를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개와 말조차도 모두 어미를 먹여 살리는데, 공경할 줄 모른다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단순히 먹고사는 것만 살핀다고 해서 효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하가 묻자 이번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밝은 얼굴로 부모를 대하는 것이 어렵다. 일이 있을 때는 아랫사람이 그 수고로움을 대신하고, 술이나 밥을 윗사람이 먼저 드시게 한다고 해서 그것을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뜻이다. 겉으로 꾸며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항상 밝게 해드리기 위해 스스로부터 밝은 얼굴로 대하는 것이 효도라는 것이다. 바로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날까 그것만 근심한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식이 편안하고 잘될 때 가장 행복하다. 이로써 보면 효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잘 되고 건강한 것이 가장 큰 효도이기 때문이다.


    효도란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다산도 학문의 근본이란 효제(孝弟,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본을 행하지도 않으면서 학문을 한다는 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꾸짖었다. 하지만 다산의 효도는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았고, 세밀하고 실천적이었다. 심지어 조선시대엔 여성들의 영역이었던 부엌일에 대해서도 효도를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챙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부모를 모시는 것과 같은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조차 행하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하는 공부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특히 신분이 높아지고 부유해지면 식사와 같은 사소하면서 귀찮은 지점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진다. 다산은 그것을 안타까워했다. 그에게 효도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조선시대 당시엔 군자로서 금기시하던 부엌에도 관심을 가지는 사소한 정성이다. 그렇게 부모의 봉양을 직접 챙기는 것이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부모의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공부의 목적은 지식을 쌓아 출세하는 데 있지 않다. 만약 가족이 굶주리고 아프다면 어떻게든 그 형편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를 키워준 부모를 봉양할 수 있어야 한다. 배움의 목적은 이처럼 사람답게 사는 데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공부했다면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이 먼저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자식의 행복을 보는 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다.


    우리는 부모가 되고 나서야 너무 늦게 부모의 마음을 깨닫는다.



    경신(敬身) _ 독립불개(獨立不改) :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단단한 몸가짐에서 나온다

    남들만큼 살기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

    飮食之人 則人 賤之矣 爲其養小以失大也

    음식지인 즉인 천지의 위기양소이실대야


    음식을 밝히는 사람을 비천하게 여기는 까닭은 사소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_《맹자》, <고자 상>


    맹자는 사람의 몸을 이루는 데에는 많은 부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부분이 있다고 말해준다. 손가락보다는 팔이나 어깨를 보호해야 하고, 나아가 머리와 같이 어깨보다 더 귀하게 보호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작은 부분을 지키고자 큰 부분을 포기하면 미련한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고자 상>에 실린 문장이다.


    지금 어떤 사람의 무명지가 구부러져 펴지지 않는다고 하자. 아프거나 일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것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이 진나라나 초나라와 같이 먼 곳에 있어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손가락이 남들과 다른 것이 싫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남들과 다른 것은 싫어할 줄 알면서, 마음이 남들과 같지 않은 것은 싫어할 줄 모르니, 이것을 두고 일의 경중을 모른다고 한다.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 자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편안해지고 싶어 선한 본성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경중이 바뀐 일이다. 음식을 밝히는 사람(탐식지인, 貪食之人)은 그러한 상태를 에두른 표현이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를 버린 사람(자포자기자, 自暴自棄者)’이므로 비천하게 여겨지고, 따라서 사람들 또한 그를 멀리하게 된다.


    밤 한 톨 때문에 칼에 찔린 새처럼 길을 잃지 말라

    다산은 《심경밀험》에서 욕망만을 좇는 모습을 가르쳐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갑자기 죄와 허물에 빠져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때 점검해보면 재물이 아니면 여색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갑자기 명성이 추락하고 오명이 세상에 가득할 때 점검해보면 역시 재물이 아니면 여색 때문이다.”


    욕망을 채우고 큰 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결국 허물에 빠져 쌓았던 명성을 잃고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하지만 이익과 욕망의 유혹은 너무 강하다. 그리고 오늘날은 이익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기도 하다. 단지 염두에 둘 것은 본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돈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을 세워야 한다. 우리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다산은 자신이 겪은 한 가지 예를 든다.


    저녁 무렵에 숲속을 거닐다가 우연히 한 아이를 봤다. 그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어대며 참새가 뛰듯이 수없이 뛰어다니며 여러 개의 송곳날에 배가 찔린 듯, 방망이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 참담하고 절박하기가 금방 죽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아이가 나무 아래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어떤 사람이 그걸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톨의 밤 때문에 기뻐하고, 그것을 잃으면 울고 불며 괴로워하는 아이와 같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재물을 얻으면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재물을 잃으면 삶의 의미를 모두 빼앗긴 것처럼 절망하고 좌절한다. 이런 삶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안은 얻기 힘들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이처럼 허덕거리며 살고 있을까?


    사막을 걷는 거북이처럼 허덕이다가, 잠시 멈춰 헤아려 본다. 나는 어디를 향해 걷고 있을까?



    선행(善行) _ 일일청한(一日淸閑) : 하루만이라도 다산처럼 살아본다는 것

    누구나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고 딸이다

    陶淵明 爲彭澤令 不以家累自隨 送人力 給其子 書曰 汝旦夕之費 自給爲難 今遣此力 助汝薪水之勞 此亦人子也 可善遇

    도연명 위팽택령 불이가루자수 송일력 급기자 서왈 여단석지비 자급위난 금유차력 조여신수지로 차역인자야 가선우지


    도연명이 팽택현의 현령이 되었을 때 가족을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써 시종에게 들려 아들에게 보냈다. “네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기 힘들 것 같아서 이 사람을 보낸다. 나무하고 물 긷는 수고를 이 사람이 도울 것이다. 이 사람 또한 남의 자식이니 잘 대우해야 한다.”

    _《송명신언행록》


    “마구간에 불이 났었는데, 공자가 퇴근해서 사정을 듣고는 ‘사람이 다쳤느냐?’라고 물었다. 그리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논어》<향당>에 실려 있는 고사다.


    공자의 사상은 지배계층을 위한 통치철학에 어울린다고 알려져 있다. 백성과 여성에 대해 차별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 바로 위의 고사다. 그 당시 말은 한 집안에서 가장 값비싼 재산이었다. 하지만 공자는 사람의 안위는 물었지만 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면 되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지배계층에 대해서는 엄격한 수양과 절제를 요구했지만, 백성은 사랑과 보살핌의 대상으로 보았다. 사람은 지위나 성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것이 바로 공자의 생각이었다. 공자가 제자 번지에게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던 것이 공자의 핵심철학을 잘 말해준다. 다산은 인에 대해 이렇게 풀이했다.


    “두 사람(이인,二人)이 바로 인(仁)이 된다. 아버지를 효도로 섬기는 것이 인이고, 형을 공손으로 섬기는 것이 인이고, 백성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인이다. (...) 인을 행함이 자기에게서 비롯되니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오는 것이 곧 공문(공자의 문하)의 바른 뜻이다. 성(誠)이란 서(恕)를 성실히 행하는 것이고 경(敬)이란 예로 돌아오는 것이다.”


    사랑은 부모와 형제에서 시작하지만,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베풀어져야 옳다는 것이다. 신분이 낮은 백성도 반드시 사랑으로 섬기는 대상이라는 것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자신을 바르게 하는 극기여야 한다. 자신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앞의 예문은 송나라의 대표적인 은거 시인 도연명이 실천했던 인의 정신을 말해주는 고사다. 도연명은 관직에 있던 마흔한 살 나이에 소인들에게 굽실거려야 하는 생활이 싫어 유명한 <귀거래사>를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약 이십여 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벼슬자리에 있을 때 아들에게 부릴 사람을 보내면서 특별히 ‘잘 대우하라’고 당부했다. 그 사람 역시 다른 이의 소중한 자식이므로 내 자식이 귀하듯이 그도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연명의 가르침이야말로 진정한 자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지 소중한 존재이므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당부는 지식이 아닌 스스로의 삶으로 인륜을 가르쳐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인륜을 지녔다고 해서 어떤 일에서든 반드시 성공하고 출세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가치, ‘사람다운 삶’은 살아갈 수 있다.


    존경은 받는 것이지 빼앗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도량이 있는 사람, 스스로 올바른 도리에 바로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특히 자기가 데리고 있는 사람, 다스리는 사람을 사랑으로 대한다. 항상 올바른 도리와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정작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위선까지는 아니라 해도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그런 마음으로 썼다.


    각 고을의 수령은 백성과 가장 가까이 있는 관직이기에 다른 관직보다 그 임무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덕행과 신망, 위신이 있는 적임자를 선택해 임명해야 한다. 또한 수령은 언제나 청렴과 검소함을 생활신조로 삼아, 명예나 재물을 탐내지 말고 뇌물을 결코 받아서는 안 된다. 나아가 수령은 백성에 대한 봉사 정신을 기본으로 국가의 영을 빠짐없이 두루 알리고, 백성들의 뜻이 어디 있는지 그 소재를 상부에 잘 전달하며, 상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해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수령이라면 백성을 사랑하는 애휼정치(불쌍히 여기고 은혜를 베푸는 정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산의 이 당부는 당시 지방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을 향한 것이지만, 오늘날 모든 지도자에게도 해당한다. 특히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은 더욱 절실히 새겨야 한다. 《신자》에는 “성인이 천하를 통치할 수 있는 바탕은 받는 것에 있지 빼앗는 것에 있지 않다(성인지유천하야 수지야 비취지야, 聖人之有天下也 受之也 非取之也)”라고 실려 있다.


    자신의 부와 지위, 그리고 권력으로 군림하는 것은 존경을 빼앗으려고 하는 행동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존경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데서 나온다.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신뢰와 존경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에게나 예를 다한다면 아무도 당신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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