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교양
 
지은이 : 천영준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21년 02월




  • 왜 인문학과 고전을 공부하는가? 굳이 한마디로 대답하자면, ‘생각의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다. 자신을 지배하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진짜 내 것이 아닌 것들은 몰아낼 수 있어야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나만의 생각과 행위를 이끌어내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는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다. 

    생각은 오로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누구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다. 무분별하게 수용된 이런 이야기들은 머릿속을 잠식해 어느 간 생각하는 방법 자체를 잃어버리게 한다. 평소에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휘둘리는 성향이라면, 진정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어른의 교양을 쌓기를 바란다. 책을 덮고 난 후에는 진짜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른의 교양


    [철학] 어떻게 남과 다르게 깨달을 것인가 : 같은 것을 보고도 본질을 꿰뚫는 판단의 기술

    생산적 의심을 훈련하라, 소크라테스

    우리는 경험한 만큼 세상을 본다. 그리고 나의 경험은 타인의 경험과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 경험이란 그 순간에 느낀 감정, 분위기, 맥락이 모두 섞여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험은 철저히 주관적이다.


    고대 서양철학자들은 경험의 편파성과 주관성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으로 우리의 삶과 세계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도 그중 하나였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요즘 맥락으로 풀자면 ‘너의 경험이 지극히 편파적이니 너도 진짜 너의 모습을 모른다’ 쯤이 될 것이다.


    아테네 사회에서 요즘 말로 정말 다양한 유형의 꼰대가 있었다. 정치에 참여한다고 무한한 자긍심을 갖는 꼰대, 민중의 인기를 한 몸에 안았다고 자부하는 꼰대. 얼굴이 잘생겼으니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꼰대 등 여러 종류였다.


    너도 너를 모른다

    아테네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정말 꼰대스러웠다. 시민들은 오래된 정치, 사회적 관습에 깊게 얽매였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한 바를 제기하기보다는 집단의 눈치를 봤다. 때로는 미신에 기대어 자신의 이해관계를 강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테네는 겉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였지만 실제로는 다수 여론이 지배하는 도시였다. 정치적 이익은 정의와 진실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었다. 사회 통념에 벗어나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고 옳은 인물이더라도 도편추방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국외로 쫓겨나야 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답답한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아테네 시민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저마다 남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살기를 바랐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집단 기억에 의존해 마구 떠들고, 일이 벌어진 후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나 남다른 사고를 할 줄 아는 지성인은 생산적 의심을 할 줄 안다.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책임의식 때문이다.


    대화와 산파술

    생산적 의심을 연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꼰대를 만드는 경험의 장벽을 해체하기 위해 내면을 공고히 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소크라테스의 해법은 ‘대화’다. 서로가 어떤 가정이나 전제도 없이 솔직하게 주장을 교환하며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선생은 학생과 대등한 입장에서 소통하면서도 집중력 있게 대화를 이끌어나가야 한다.


    현실에 대해 의심하는 것 못지않게 스스로 깨닫게 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산파술’이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산파의 도움을 받고 유도 분만을 하는 것처럼, 지혜와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도 적절히 유도되어야 한다.


    오늘날 미국의 로스쿨에서는 협상 과정을 가르칠 때 산파술을 이용하고는 한다. 이를 ‘소크라틱 메소드’라고 한다. 이 작업은 매우 논리적인 만큼 상대의 입장에서는 꺼려지는 방식이다. 상대의 허점을 건드리는 질문과 역질문이 계속되면 대부분의 하수들은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발산한다.


    하지만 산파술은 정말 값진 과정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과 상대의 주장을 오랫동안 비교해보면서 나의 주장에도 어느 정도 약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의 문제, 진정한 사랑, 사회 질서의 본질과 관련된 주제들을 모두 제자들과의 유도 분만식 대화를 통해 풀었다.


    하지만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는 과정은 참여자의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지려면 상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존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것은 ‘티메’라고 불렀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말하는 사람의 자세에 ‘아레테’가 배어 있어야만 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하는 사람들과 함께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노력했다. 아레테에 대해 제자들은 티메로 보답했다. 대화의 과정에 인격적 겸허함과 차분함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그저 그런 철학 교사 내지는 멘토를 흉내 내는 사람 정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작은 것에 집중하라,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활약하던 시대보다 80여 년 뒤에 태어나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유력한 사상가들과 달리 순수 아테네 시민이 아니라 소아시아 출신의 이민자였다. ‘비주류’ 였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지성계의 비주류라는 점을 감수하고 여러 차례 학당을 차리려고 애쓰다가 도시 외곽 지역에 ‘정원’이라는 자그마한 문화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창한 사상이나 수학과 같은 고등 학문이 아니라 ‘살아가는 법’에 대해 가르친다고 홍보했다.


    에피쿠로스 정원에는 귀족 자제들뿐만 아니라 교사, 장인, 심지어 당시로서는 철저히 ‘하부 계층’으로 분류되던 외국인, 여성, 상층 노예가 드나들었다. 미망인들도 자유롭게 토론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뒷말하기 좋아하는 아테네 시민 사회에서는 금방 가짜 뉴스가 퍼졌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던 아테네인들의 음해는 에피쿠로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에피쿠로스는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으레 간과하는 ‘작은 것’들에 집중하는 철학자였다. 가령 치즈 한 덩이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며 즐거움에 잠긴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과 같은 것들 말이다.


    또 극단적 쾌락을 주장한 것처럼 오해한 세간의 이해와 달리 ‘아타락시아’를 강조했다. 아마 문언 그대로 ‘쾌락’이라기보다는 정신적 평정으로부터 오는 잔잔한 기쁨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잔잔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순간에 고마움을 표하고 남들에게도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지향하는 가치였다.


    ‘우정’은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삶을 구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아테네 사회는 말과 정치가 발달한 공간이었다. 자신의 이익과 야망을 대변하기 위해 온갖 논리와 사변을 동원해 주장하고 방어하는 기술이 넘쳐났다. 심지어는 강국 스파르타에 나라를 팔아넘기고, 반대하는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담론까지 생길 정도였다. 궤변이 토론으로 둔갑하는 도시에서 어제의 친구가 경쟁자나 정적으로 돌변하고, 탄압의 대상으로 변질되고는 했다.


    이런 풍조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쾌락』에서 ‘항상 도움을 청하는 친구들은 친구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도움을 바라는 이들은 관계를 항상 대가성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도움을 우정과 결부 짓지 않는 사람’들도 비판했다. 그들은 인간관계의 즐거움, 미래의 희망 같은 것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자체로 매우 본질적이고 본능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보다는 누구와 어떻게 먹고 마시느냐가 중요하다’고 하며 인맥 확장을 위해 부자나 귀족과 다양하게 어울리는 것을 꼬집기도 했다. 오히려 관계의 질과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얼마나 건강한 우정이 유지되고 있는지 진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 사회는 인간을 향한 평가 지표가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은 끊임없이 시기 질투해서 도편추방하고, 못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리그’에 끼워주지 않는 것이 그들만의 상식이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노예에게도 철학자 대우를 했다. 자신의 우정에 많은 조건을 달지 않았다. 작지만 본질적인 인연에 집중하는 삶을 실천했다.


    지금, 여기의 가치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에 집착하는 것으로도 고통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를테면 술, 약물과 같은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달래기 위해 동원하는 수많은 치료 방식, 맹목적인 신앙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바쁜 삶 이면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더 큰 허무를 낳게 마련이다. 행복은 무한한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 이루어지는 많은 행위 가운데에서 얻어지는 작은 감정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일이 없으면 갑자기 우울해진다거나 그 순간을 견딜 길이 없어 먹는 것, 사는 것, 입는 것으로 순간의 허무를 속이려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 우리는 잠깐 멈추어서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닌지. 지금 숨 쉬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잠재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닌지. 불만족과 인지 부조화로 괴로워하기에 ‘지금, 여기’는 너무나 소중하다.



    [예술] 어떻게 남과 다르게 볼 것인가 : 평범함을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관점의 기술

    너의 삶이 곧 예술이다, 호크니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은 비싼 것을 걸치지 않아도 화려하고 멋지게 보인다.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한 모습, 무심한 듯하지만 명쾌하게 내뱉는 한마디, 감추지 않고 어김없이 표출하는 개성. 모두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화가 호크니도 그중 한 명일 것이다. ‘예술은 절대 어렵지 않다’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순간을 컬러풀한 장면으로 구현한다. 또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밝힌 사람이다. 아무리 열린 사회라 하더라도 독특한 성 취향은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법이다. 하지만 호크니는 절대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탐미적인 자신의 성향을 작품에 그대로 드러낸다. 공교롭게도 그의 작품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로 거래된다.


    고립형 천재에서 당당한 예술가로

    호크니는 보수적인 시대에 태어났다. 1937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프로이트, 베이컨과 같은 파격적인 예술가들이 주류를 이루던 1950년대 말에 미술계에 입문했다. 호크니는 10대 시절부터 기성 미술계의 조류를 따르기보다는 자기만의 예술 세계에 더 관심을 가졌다. 현재의 논쟁 수준을 뛰어넘는 미래 지향형 미술을 추구했다.


    한때 영국 정부 예술평의회는 스물한 살의 신입생이었던 호크니의 작품을 구매하려다가 ‘너무 도발적’ 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훗날 그가 전 세계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또 당시 유럽의 예술계에서는 심오한 추상미술이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크니는 ‘내가 인식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다’며 구상미술로 나아갔다.


    1960년대에 들어서 호크니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영국보다는 훨씬 개방적이고 다양성이 보장된 공간이었다. 유명한 ‘수영장 시리즈’는 이 시절에 탄생했다.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상에서 애정을 갖고 보는 연인이나 이웃이거나, 깊게 관찰해보고 싶은 그 무엇인가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림을 그리려면 어떤 상을 표현하는 스케치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호크니는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구현하기 위해 아예 색을 화면에 먼저 입히는 작업을 시도했다. 매우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기법이었다. 그렇게 호크니는 자신이 느낀 바를 캔버스 위에 스토리로 채워나가고자 했다.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고민하다

    미국에서 호크니가 주목한 또 다른 대상은 바로 ‘사진’이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화가들은 사진을 제대로 된 예술로 치지 않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복제하는 기술적 구현 방식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호크니는 사진 또한 예술의 범주로 껴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진은 진짜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왜였을까. 사진은 대상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재량권과 심리가 능동적으로 개입하기 힘든 매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대로 입체적이고 과학적인 장면 포착, 탁월한 기록성은 회화가 따라가기 어려운 사진의 우월함이다. 하지만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역사를 이어온 그림은 무한한 스토리를 담을 수 있는 문화적 에너지를 가진 매체다.


    1980년대부터 호크니는 사진을 부분적 재료로 하되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대상을 복원하는 방식에 몰입했다. 이에 콜라주 기법을 이용해 ‘포토콜라주’라는 창작 방식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호크니는 팝 아트작가나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으로서 미술계의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다. 매우 통속적인 방식으로 화면을 구현하면서도, 철저히 자기만의 기법으로 대상을 강하게 붙들어내는 실력이 그가 사랑받는 이유다.


    평범함을 거부하라, 클림트

    화면을 가득 메운 황금빛 물감, 꿈을 꾸는 듯 눈을 감은 사람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모습들, 클림트의 그림에 드러나는 몽환적인 풍경이다. 클림트의 작품 이미지는 한국의 스마트폰, TV 등의 제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콜라보’ 사례다. 그만큼 매력적인 것이다.


    관능적이면서도 과하게 노골적이지 않은 분위기, 화려한 색채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탓 아닐까 싶다. 남녀가 꿈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듯한 1907~08년작 <연인>, 구약성서에서 악인의 머리를 자른 여자 1901년작 <유디트> 모두 한국에서 잘 알려진 작품들이다.


    그러나 클림트의 그림은 19세기 당시에는 반항이자 혁명이었다. 예술을 현실의 재현 도구 내지는 바람직한 가치의 표현수단쯤으로 여겼던 사회에서, 클림트는 너무 직설적이고 본능적인 작가로 평가되었다. 결국 클림트는 생각을 같이 하는 문인, 건축인 등과 함께 ‘빈분리파’라는 독립 예술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다. 순수와 퇴폐, 현실과 몽환이 공존하는 클림트의 작품은 저항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었다.


    변화의 씨앗을 뿌리다

    클림트의 또 다른 위대함은 자신이 갖고 있는 변화와 혁신의 코드를 후배 세대에게 전파했다는 사실이다. 파격적 성애 묘사로 유명한 실레, 표현주의의 길을 열었던 코코슈카, 예술 가구를 디자인했던 호프만 등이 모두 클림트의 영향을 받았다. 세 사람 모두 당시에는 반항아로 기성 세력에게 많은 비판을 받은 예술가였다. 전통과는 한참 거리가 먼 전위적 표현들 타협하지 않는 뚝심, 끊임없는 개혁의 시도 같은 것들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클림트는 남들이 자신을 정의하기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며 시대를 박차고 나아갔던 예술가였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로부터 격하당해도, 견디기 힘든 갈등을 겪게 되어도 그 또한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긍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살면서 누구나 조금씩은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망을 갖지 않는가. 그러자면 스스로를 논란의 중심으로 몰고 갈 줄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정치] 어떻게 남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 적도 내 편으로 만드는 관계의 기술

    여우와 같이 생각하라, 마키아벨리

    엘리트들 중에는 의외로 의사결정이 무르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많다. 서로 복잡 다양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에 인간관계에 신경을 쓰느라 해야 할 말을 제대로 못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펼치지도 못하는 것이다. 엘리트들의 이중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가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낮에는 여야로 나뉘어 싸우지만, 밤에는 한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인다’고 비판받는다.


    그런데 기성 엘리트들의 기반이 무너지고 새로운 경쟁자들이 등장하는 시기가 오면, 기존의 관계와 상식은 자산이 아니라 덫이 된다. 신출귀몰하는 강자들이 나타나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을 뒤흔드는 난세에는 여우와 같은 생각과 사자와 같은 대담함이 필요하기도 하다. 우물쭈물하면 바보 되기 십상이다.


    현실주의의 대가이자 위험한 현자

    마키아벨리는 정치 엘리트들의 상식과 틀이 산산조각 나는 ‘결정적인 순간들’과 대처법에 대해 조언한 사상가다. 그가 살았던 르네상스 후기의 이탈리아 피렌체는 유럽의 여러 강대국에 위협받는 도시국가였다. 또 내부 정치도 어려워져 있어 명문 메디치가가 쫓겨나고 과도기 형태의 민주공화국이 들어서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라는 공화국 지도자의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소데리니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난날 피렌체의 지도자들보다 훨씬 명쾌하고 카리스마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만을 원했다. 결국 피렌체의 민주공화정은 1512년 스페인군이 무력을 앞세워 메디치 가문을 다시 복권시키면서 좌절되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매우 큰 교훈을 얻었다. ‘권력은 윤리와 별개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 ‘정치에서는 상식과 합리가 철저히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강자의 사고법과 언어를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적과 친구를 상대하는 법에서 매우 능숙하다. 강자들은 가혹함과 인자함을 번갈아 사용해가며 주변인들과 적들이 그의 마음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재주도 갖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체득해야 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대부분은 자기보다 잘나거나 강한 사람이 운이 좋아 그 자리에 올랐다고 여긴다.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운명론적 시각이 전향적인 행동을 방해하기도 한다.


    교활한 감각을 강조하다

    마키아벨리는 비르투 이론과 사례 분석을 통해 당대의 정치 리더들을 격려하면서도 유익한 경고 사인을 보내고 싶어 했다. 가령 밀라노의 용병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매우 훌륭한 비르투의 소유자로 손꼽혔다. 그는 세습 귀족으로서의 정통성이나 고급스런 품행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투 상황에서의 대처 기술, 정면 승부 능력, 부하에게 너그러움을 베풀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힘 등도 매우 탁월했다. 주어진 운명과 환경을 자기 실력으로 바꾸는 면모는 좋은 교과서라 할 만했다.


    비르투는 우리 식으로 재해석하면 ‘능력’과 ‘덕’이 합쳐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여우와 같은 처세를 하면서 얄밉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적절한 덕성과 관용을 더해야 한다. 인생은 약게만 살아지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손해를 보고, 어떤 부분에서는 남과 과감하게 빵 한 덩이를 나눌 줄 알아야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주문한 ‘교활한 감각’은 간사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박덕하게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우같은 판단력은 경쟁 사회에서 매우 절실하다. 하지만 적절히 따뜻한 가슴과 인간적인 품행이 결합될 때에만 개인의 경쟁력으로 환원될 수 있다. 앞으로 힘 있는 자, 그리고 힘을 얻으려는 자들이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읽기를 빈다.


    중재자보다 정직한 이웃이 되어라, 비스마르크

    위대한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에게도 치명적인 결점이 존재한다.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 비스마르크는 외교를 통해 자신의 조국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로 올려놓았다. 그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에서 독일이 전략적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비스마르크 덕분에 통일, 경제성장, 군사적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영국, 프랑스와의 신뢰는 악화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발발한 1차 대전으로 독일은 거대한 실패를 경험한다. ‘완벽한 중재자’란 현실 정치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불가능하다. 차라리 건강한 이웃이 되려고 하는 것이 낫다.


    정직한 중재자? ‘이기적인 중재자

    프랑스와 싸워 이긴 후 독일제국의 안보 정책은 보수적 성향으로 바뀌었다. 굳이 밖으로 영토를 확대해 인접국들과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전쟁으로 얻은 성과를 지키자는 입장이 우세해졌다. 이때 비스마르크가 내건 정책은 ‘정직한 중재자’였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식민지 개척을 하지 않고, 애써 얻은 균형을 깨지도 않으며 오히려 여러 나라 간의 대화와 소통을 돕는 채널로서 활약하겠다는 것이었다. 요즘 표현으로 따지만 ‘균형자론’을 편 것이다.


    그 여파로 독일은 복잡한 동맹과 협상을 중재하는 중매쟁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1881년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삼제 동맹’을 맺어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확인했다.


    하지만 ‘정직한 중재’는 넌센스였다. 여러 협정과 동맹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독일이 일관되게 세운 방침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를 고립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사실상 독일은 중재자가 아니라 이해 당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 간의 관계를 좋게 개선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등 모두 그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당장의 이익 때문에 눈을 감아준 것뿐이었다.


    잘못된 중재가 촉발시킨 1파 대전

    비스마르크의 실패는 그가 정치적으로 은퇴하고 1898년 사망한 후 본격적으로 증명되었다. 독일은 지중해 협정 이후 강한 해군을 양성해 국제적인 군사 국가로 거듭나려 했다. 자연히 해군을 통한 세계 전략을 지향하던 영국과 이해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0년대에는 동맹국 오스트리아가 동쪽으로 영역을 넓히려다가 러시아와 충돌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독일은 과거 러시아와 삼제 동맹을 맺은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비스마르크가 외교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주도했던 중재 외교의 균형이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비스마르크가 그토록 중재자 전략에 집착했던 이유는 독일이 고속 성장의 반대급부로 주변국으로부터 고립당하기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인접국들은 다단계식으로 여러 나라간의 관계를 확장해나갔던 독일의 진정성을 믿지 않았다. 각 나라의 욕망은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접점을 만들지 못하고 결국 세계대전으로 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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