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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저   자 : 이상근 외
출판사 : 지성사
출판일 : 2020년 11월

  • 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돌덩이가 인질이 된 사연, 북관대첩비

    복제한 북관대첩비

    경복궁 고궁박물관 인근에는 보통사람의 키보다 훌쩍 큰 비석이 서 있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이 비석이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지 모른 채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이 비석에는 몇 편의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도 그 이야기를 다 풀어낼 수 없을 만큼 기구한 운명이 숨어 있다.


    현재 경복궁에 있는 비석은 실물과 똑같이 만든 복제품이고, 진품은 본래 자리인 함경북도 길주에 있다. 북한 정부는 북관대첩비를 국보 유적 제193호로 지정하고 본래 지역 2만여 제곱미터를 보호구역으로 조성하여 보존하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과 승전비

    1592년 5월, 조선 침략을 위해 부산포로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해 한양 도성을 점령했다. 왜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까지는 보름이 조금 넘게 걸렸을 뿐이다. 무책임한 임금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갔고 갈팡질팡하던 관군들은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는 왜군이 미처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의병이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조선의 백성들은 너나없이 일어나 의병대를 조직하고 왜군에 맞서 싸웠다. 당시 왜군을 떨게 했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 조헌, 영규, 서산 대사, 사명당 등이 있다.


    조선의 의병은 패전을 밥 먹듯 하던 관군과 달리 왜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의병들의 승전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함경북도 길주에서 벌어진 정문부 의병대의 승리다.


    왜군 부대 중에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이 연전연승하며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단숨에 한양을 빼앗고 한반도의 최북단인 함경도 길주로 내달렸다. 당시에 함경도 지역을 두루 일러 ‘관북’ 또는 ‘북관’이라 했는데 중국에서 함경도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철령관’이라는 관문의 북쪽 지역이라 하여 그리 불렀다 한다.


    가토 부대는 이곳에서 임금의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인질로 잡고 기세가 등등했다. 이에 정문부 장군은 왜군을 피해 도망쳐 숨어 있던 백성들을 설득해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투 경험도 없는 오합지졸인 3,000명의 의병으로 28,000명의 정예병 왜군을 기적처럼 물리침으로써 가토 부대에게는 쓰라린 패배를, 왜군 전체에게는 역사에 남을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주었다.


    왜군의 패전 기록 북관대첩비, 일본군 야스쿠니로 끌고 가다

    정문부 장군과 의병들의 싸움은 역사의 평가를 거쳐 100여 년이 지난 1707년(숙종34), 북평사 최창대가 길주군 (현재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높이 187센티미터, 너비 66센티미터, 두께 13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비석에는 당시 전투 상황 등을 기록한 1500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북관대첩비다.


    그 후 2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1세기 이후 700년 넘게 일본을 지배하던 봉건적 무사정권인 막부는 메이지 유신으로 신흥세력에 그 자리를 내주고 쫓겨나게 된다. 메이지 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신흥세력은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제도를 개혁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이루며 근대를 꾀한다. 일본은 “조선을 정벌하여 외세로부터 독립하자”는 정한론을 앞세운 군국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급기야 조선합병과 대동아공영론의 기치를 내걸며 제국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이어서 한반도에서 치른 러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을사늑약을 맺기에 이른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 소장은 북관대첩비를 발견하고, “우리 조상들이 조선인에게 패전한 기록을 그냥 둘 수 없다”며 그 먼 길을 거쳐 대첩비를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일본군은 북관대첩비를 전리품으로 취급하여 천황에게 바치는 예식을 치르고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로 보냈다.


    끌려간 북관대첩비는 야스쿠니신사 뒤뜰에 방치된 채 모진 수모를 견뎌야 했다. 일제는 대첩비의 기를 누른다며 1톤이 넘는 돌덩이를 비석 위에 올려놓았고 바닥은 콘크리트 더미로 처발라 놓았다. 북관대첩비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태로 그야말로 파괴될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일제는 심지어 비석의 내용이 전부 허위라는 왜곡까지 서슴지 않았다.


    문화유산의 가치와 반환 과정을 모두 보여 준 북관대첩비

    북관대첩비의 사례는 문화유산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일제는 왜구를 토벌한 황산대첩비나 이순신 장군 승전비 등은 대부분 파괴했다. 이와 달리 북관대첩비는 바다 건너까지 굳이 끌고 가 야스쿠니신사에서 방치하고 학대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전승비라는 유물은 없앨 수 있지만 승리의 기억은 조선 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승비를 없애기보다는 전리품으로 끌고 가 그들의 역사 말살과 왜곡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구나 북관대첩비는 관병과의 전투도 아닌 의병과의 전투에서 패한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일본 입장에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수치스러운 사건을 담고 있는 비석이었다. 조선을 빼앗기 위해선 ‘조선의 힘’을 말살해야 했기에 나라의 위기 때마다 들불처럼 일어났던 조선 의병의 역사를 반드시 삭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북관대첩비를 야스쿠니신사에 방치할 때도 “비석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그 내용을 부정하고 왜곡했던 것이다.



    오구라가 가져간 충남 공주 학봉리 조선 분청사기

    고려청자 수집에 혈안이 된 도요토미와 이토

    익히 알려졌듯이 오랜 옛날부터 일본은 조선의 도자기에 미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1592년 조선 침략(임진왜란)의 이유 중 하나가 한국의 훌륭한 도자기 때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도공을 납치하고 도자기와 원료까지 약탈했다는 사실은 나고야성박물관에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인 골동품 상인들은 왕릉이나 고분을 도굴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를 생산하던 가마터 역시 집중적으로 도굴했다. 총독부도 한반도의 가마터를 발굴하고 약탈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당시 조선백자를 주로 생산하던 경기도 광주 도요지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충남 공주 도요지였다.


    공주의 계룡산 도요지는 특히 철화 기법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제작된 철화 도자를 오구라가 수집해 갔다. 현재 도쿄박물관에 있는 분청사기 ‘철화연화어문병’과 ‘철화모란문병’이 그것들이다.(분청사기는 장식기법에 따라 상감(象嵌), 인화(印花), 조화(彫花), 박지(剝地), 철화(鐵花) 귀얄, 분장(粉粧)으로 구분한다.) 공주 학봉리 도요지는 조선총독부가 1927년 처음으로 발굴한 가마터로, 5기의 분청사기 가마와 백자 가마 1기가 발견되었다. 공주에는 학봉리 외에도 신영리(청자), 도신리, 온천리, 안양리(분청사기) 등 60여 개의 가마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계룡산 도요지는 도자기 수집가들의 사냥터나 다름없었다. 당시 전국에서 모인 골동품 상인들은 온전한 분청사기는 물론 깨진 조각까지 거래했을 정도로 이곳에서 제작된 도자기들은 인기가 높았다.


    한국 정부가 국보로 지정한 분청사기는 ‘박지’와 ‘상감’ 기법이 있을 뿐 ‘철화’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최고의 철화분청사기 생산지인 학봉리 도요지에 그 우수하고 찬란했던 도자 문명을 밝혀줄 도자기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번에는 꼭 '오구라 컬렉션'을 환수하자

    오구라는 1920년대부터 수천 점의 문화재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는데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3천여 점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했다. 한국이 해방되자 미처 반출되지 못한 문화재 중 일부는 환수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나 경북대박물관 등지로 흩어졌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자신이 보유한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해 1954년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했다.


    오구라와 그의 수집품들은 그 규모와 내용 면에서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졌으며 1950년대부터 한일 문화재 반환 협상의 주요 쟁점이었다. 1958년 제4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은 약탈되어 일본에 있는 것이 확실한 문화재를 열거하면서 '‘오구라 다케노스케 소장품’을 명시했다. 개인 소장품이라 할지라도 그 가치와 중요성으로 볼 때 본래 있던 자리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오구라 컬렉션에 경남 창녕에서 출토된 금동 유물과 금관총 출토품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33년부터 조선총독부가 고적 보존에 관한 법령을 시행해 문화재를 마음대로 유출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렇듯 귀중한 유물이 어떻게 개인 소유로 넘어가 반출되었느냐는 것이었다. 일본은 ‘개인이 벌인 일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만을 고수했다.


    1960년대엔 한국 대중에게도 오구라 컬렉션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1964년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국에서 수집한 문화재 5천여 점 가운데 8할을 대구에 두고 온 것이 아쉽다고 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당시에 가져가지 못했던 문화재들을 돌려받고 싶다는 망언까지 더해 듣는 이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대구에서는 그가 남긴 문화재 130여 점이 수습되었다.


    오구라 컬렉션의 유물들은 일본인들이 한반도 전 지역에 걸쳐,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집한 한반도 역사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오구라는 일본이 불법으로 조선을 침략한 후 조선으로 건너와 대구에서 남선합동전기라는 회사를 차려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식민지 조선을 착취하여 축척한 재산을 기반으로, 당시 조선총독부의 묵인 아래 닥치는 대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고분을 도굴하는 등 부당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불법적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환수해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일은 우리나라 온 국민의 숙제이자 숙원으로 남아 있다. 이제 본격적인 오구라 컬렉션의 환수를 위해 온 국민의 염원을 모을 때다.



    하나의 유물, 두 나라로 소개된 금은상감동관

    기술 활용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상감기법

    스페인의 오래된 도시 톨레도(Toledo)는 무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인구 8만여 명이 사는 톨레도에는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늘 거리가 붐빈다. ’돈키호테의 풍차‘로도 이야기가 풍성한 톨레도의 거리에는 기념품을 직접 만드는 공방이 즐비하다. 기념품 공방에서는 금이나 은으로 ‘상감의 장인’들이 열심히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관광객에게 ‘상감 입힌 기념품’은 필수 구입품이기도 하다. 그중에 ‘톨레도의 칼날(The Toledo Blade)’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 종류가 다양하고 디자인도 아름다워 며칠 머무는 동안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 우리의 상감기술은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흔히 ‘고려 상감청자’를 떠올리며 도자기 같은 그릇에만 상감기술을 입혔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보다 기술의 활용이 훨씬 다양하고 아름답다.


    우리나라 상감기술의 확립 시기는 대체로 백제의 한성· 웅진기라고 평가한다. 상감 자료는 5~6세기에 걸쳐 약 100년 정도의 한정적인 시기 동안 경기 오산, 충남 천안· 공주· 서산, 전북 완주· 고창, 전남 나주 등 백제권 전역에서 출토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백제 유적 출토 상감 유물 중 대표적인 것으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된 ‘칠지도(七支刀)’를 꼽을 수 있다.


    ‘칠지도’는 제작 시기와 칼에 새긴 글의 내용으로 유명해졌다. 그동안 일본은 칠지도의 일부 내용을 조작하여 신하인 백제가 일본의 왕후에게 선물로 바쳤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최근 X-레이 투시검사 등을 통해 지워진 글의 내용이 확인되었다. 건국대 홍성화 교수의 발표문 「고대 한반도계 대도 명문에 대한 재조명」(<동양예술> 제21호, 한국동양예술학회, 2013년 4월 30일)에 그 내용이 잘 나와 있다.


    발표문에 따르면, 칠지도의 제작은 백제 전지왕 4년인 408년이고 목적은 왕세자인 구이신제19대 구이신왕이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백제가 왜에 하사했던 칼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대표적인 고대 상감 유물로는 공주, 천안, 오산 등 백제 권역은 물론 대가야의 합천 옥전 35호분, 일본의 구마모토현 에다후나 양마고분 출토품, 효고현 미야야마고분 출토품, 야마가타현 다이노코시고분 출토품 등이 있다.


    오구라 컬렉션에도 공주 송산리 6호분 출토 원두대도 등 30건, 51점이 있으며 철기, 삼국, 고려시대에 걸친 상감 유물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의 상감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에 도달하여 주변국인 대가야, 신라, 왜 등에 전파되고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금은상감도관

    같은 유물이 어떻게 제작한 나라와 연도가 다를 수 있을까?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고 오래된 금상감기법의 유물은 ‘금은상감동관’ 또는 ‘상감수렵문동관’으로 소개되고 있다. 평양의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제작 시기는 1~2세기, 길이는 25.4센티미터로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당시 신분이 높은 귀족이 사냥을 할 때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중요한 유물이 어떤 이유로 일본에 갔는지 아직 밝혀진 것은 없지만, 현재는 국립도쿄예술대학 미술관에 있다. 참고로 국립도쿄예술 대학 미술관에는 399건, 447점의 한국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일본 문화청이 한반도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금은상감동관’ 또는 ‘상감수렵문동관’을 중국과 고려에서 제작한 것으로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홈페이지의 내용을 보면 하나는 제작 시기를 고려로, 1941년 중요문화재로 지정했다고 소개하고, 다른 곳에는 중국 후한시대인 1~2세기로 소개하면서 ‘조선 낙랑고분 출토’라는 내용을 덧붙여 놓았다. 이러다 보니 똑같은 하나의 유물이 두 나라의 것으로, 제작 시기도 1천여 년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금은상감동관'’ 또는 ‘상감수렵문동관’의 표기 오류에 대해 2015년 한국의 한 언론사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일본 문화청 장관은 “예전부터 그런 것이지 최근에 낸 것이 아니다”며 “지금까지 줄곧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으므로 특별히 어떤 대응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이렇게 제대로 된 소개는커녕 푸대접을 받고 있고, 문제가 제기된 후에도 이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 일본의 태도는 과연 그들이 우리의 문화유산을 소장할 자격이 있는지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신들의 통곡’으로 가득 찬 뮤지엄

    신들의 통곡으로 가득한 세계의 대형 박물관들

    문화유산의 회복 활동을 하며 십수 년 동안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들을 다녀 보았다. 런던 영국박물관, 파리 루브르박물관, 파리 국립기메아시아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보스턴미술관, 하버드대학박물관, 도쿄국립박물관, 교토국립박물관,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표트르대제 인류학민족학박물관 등 세계 곳곳의 100여 박물관들을 탐방했다. 그런데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성장한 대부분의 대형 박물관을 방문할 때면 마치 ‘신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박물관이 신들의 통곡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 박물관들에는 이집트 고대 석상, 중국 둔황석굴,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페르시아 신들의 주검 등 약탈 문화재가 즐비했다. 그중에는 목이 잘리거나 팔 다리가 없거나 얼굴만 남은 조각품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곳들은 마치 박물관의 이름을 가장해 온갖 신들의 시신을 팔고 사는 시장 같았다.


    이런 야만적인 행위는 지난 수세기 동안 거침없이 이어져 왔다. 박물관들은 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야만의 광풍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전시했다. 신전에 있어야 할 신들은 정복자가 획득한 전리품이 되었고, 돈을 벌기 위한 장사꾼의 상품이 되었다. 심지어 사제라는 자들도 팔자 콧수염을 점잖게 비벼대며 고대인의 신들을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신전의 소중한 부위를 뜯고 자르고 뽑은 것들을 가져와 진열해 놓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들은 신들의 형상을 그리 조각조각 부숴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넘어 그 먼 곳까지 옮겨 왔을까.


    보스턴미술관에 있는 ‘고려 사리함’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세 분의 부처와 인도 왕자 출신 지공선사, 그리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라고 노래했던 나옹선사의 사리가 합장된 특별한 사리함이다. 이 사리함은 일본인이 개성의 화장사 또는 양주의 회암사에서 불법으로 도굴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턴미술관은 이를 1939년 일본인에게서 매입했다. 큰 사리함은 금은으로 만들었고, 높이 22.5센티미터에 라마탑 모양이 특징이다. 나옹의 후학이 조선 개국에 일조한 무학대사이니 이 사리함은 고려뿐만 아니라 조선의 불교도 상징하는, 일종의 가문의 공동묘지와도 같은 의미를 지닌 소중한 유물이다.


    보스턴미술관은 한국 불교계의 반환 요청에 ‘사리’는 인체의 성분으로 박물관 거래 금지 품목이니 한국에 돌려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사리함(관)을 빼고 사리(시신)만 받을 수 없다고 하자 반환할 수 없다고 돌아선 뒤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관도 없이 시신만 받으라는 이야기인데 참으로 야만적이고 무지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려인삼은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세계에 고려를 알린 고려인삼

    개성은 고려의 왕도였다. 그러나 세계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것은 고려의 수도 개성보다 고려의 인삼이었다. 개성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무역상들의 교역 중심지였다. 이곳에 중국과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이 고려의 인삼을 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오직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고려인삼의 효능을 세계인들은 이미 그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다. 이들의 왕래로 고려(KOREA)는 세계에 알려졌고 지금의 ‘코리아’가 되었다. 이처럼 세계에 고려를 알린 인삼에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고려인삼은 ‘독립자금’

    세계인들에게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은 고려인삼은 예부터 귀하게 여겨졌고 가격 또한 비쌌다. 고려인삼은 17세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된다.


    이런 우리의 고려인삼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때론 일제에 의해 강제 수탈되기도 했지만 필요한 경우엔 그 모습과 용도를 바꿔 독립자금으로 변통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지나고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을 기약하는 시점에서 고려인삼의 역사적 가치를 다시금 새겨 볼 필요가 있다.


    김광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의 논문 「일제시기 상해 고려인삼 상인들의 활동」을 보면 고려인삼은 오늘날의 달러($)와 같은 국제통용 화폐로서의 기능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인삼은 상해를 거쳐 중국과 싱가포르, 홍콩, 나아가 동남아, 북미, 중남미 등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상해에는 많은 인삼 상점이 있었는데 이유선의 지성공사, 한진교의 해송양행, 김시 문의 금문공사, 조성섭의 원창공사, 김홍서의 삼성공사 등이 대표적이다.


    해송양행은 인삼 판매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한 애국 기업이었다. 해송양행은 1919년 김규식이 파리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프랑스로 갈 때 거액의 여비를 제공했고, 1920년 안창호가 홍콩, 북경 등지로 미의원단을 만나러 갈 때도 비용을 제공했다. 원창공사는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역임한 조상섭 지사가 설립한 기업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인삼 무역으로 조달해 왔다. 윤봉길 의사와 여운형 선생도 인삼 장사를 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고 하니 당시 인삼은 독립투사에게 무기와 다름없었다.


    고려인삼이 국가적으로 본격 관리된 것은 1899년 대한제국 궁내부 ‘삼정과(蔘政課)’ 설치 이후이다.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추진하던 고종 황제는 필요한 재정을 인삼 사업으로 조달하려고 했다.


    그 후 삼정과의 사업권은 일제에 빼앗겼다. 인기가 높은 홍삼 사업은 삼정물산(미쓰이물산)으로 넘어가고 독립운동가들은 비전매품인 백삼만 팔 수 있게 되었다. 조국에서 생산되는 고려홍삼으로 일본 기업은 큰돈을 벌었고, 정작 이 땅의 주인인 독립운동가들은 행상으로 근근이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해야 했으니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3· 1 만세운동이 100년이 지난 지금 고려인삼의 가치와 역사 또한 되돌아보고 챙겨야 한다. 그리고 토종씨앗과 식물 등 여러 분야에서 생물주권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인삼의 종주권을 지키기 위한 남북 공동의 연구도 추진해 볼 만하다.



    소유권 없는 반쪽 귀환 ‘외규장각 의궤’, 또 다른 시작

    145년 만에 귀환했지만, 미완의 환수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난 해는 1886년이다. 당시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 왕실의 보물들이 대거 약탈당하고 불에 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인 『조선왕실의궤』이다. 이 의궤는 분산 보관된 여느 것과 달리 어람용으로 그 가치가 남다르다.


    박병선 선생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것은 1975년이다. 약탈한 프랑스 정부는 박병선 선생이 발견하기 전까지 의궤를 중국 서책으로 취급하며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의궤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자 파리 국립도서관 측은 박선생을 내쫓았다. 문화재 약탈국가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세계 문자 연구가인 제프리 샘슨 박사는 “한국은 언어학자에게 아주 중요하고 특별한 나라이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의 나라이며,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더구나 조선 왕실의 중요한 행사와 건축 등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다룬 기록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온 국민은 의궤를 반환받자는 캠페인을 지지했고 정부도 협상을 시작했다.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수빈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돌려주며 한국고속철도 도입에 프랑스 고속철도 ‘테제베’를 끼워 팔았다.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가 강탈해 간 문화재임이 명백했던 탓에 프랑스 정부도 계속해서 반환을 미룰 수가 없었다.


    결국 2011년 외규장각 의궤는 대여 방식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145년 만의 귀환이다. 의궤는 제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국보급이지만 소유권이 프랑스에 있어 지정도 못 하고 전시하려면 프랑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언제라도 프랑스가 돌려달라면 돌려줘야 한다. 반면, 그해 일본 왕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있던 의궤를 포함한 왕실 도서 1,205권은 완전히 우리에게 반환되었다.


    프랑스 정부, 과거 약탈 문화재 반환 시작

    최근 국제사회는 문화재 반환 문제에서 중요한 원칙을 세우고 있다. 1998년 나치의 약탈 문화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때 정한 원칙 중에 하나가 문화재의 출처 등 내력(provenance)을 소장자가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유물을 돌려달라는 사람들이 유물이 불법적인 방식으로 반출되었다는 증거를 입중해야 했으나 이제는 반대로 박물관이 소장품에 대한 합법적 소유권을 증명해야 한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는 소장품의 원소재지 지역 주민과 협력해야 한다는 조항을 윤리강령에 명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문화유산을 역사적이고 정신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과거 문화유산을 희귀 보물이나 전리품으로 간주하며 경제적 가치로만 여기는 태도를 배격한다.


    프랑스에는 한국 문화재가 약 3천 점 있다. 이 중에는 ‘직지’와 고천문 유물, 고문서들도 있다. 한국 정부는 명백히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의 완전한 소유권 양도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불법적으로 반출된 한국 문화재 반환에 힘써야 한다. 이에 프랑스 정부도 반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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