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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위로
저   자 : 윤재은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20년 09월

  • 철학의 위로


    소크라테스ㆍ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의 위로

    정의로운 국가_ 소크라테스의 정의와 국가

    법치국가에서 규칙과 제도는 구성원으로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다. 만약 공동체에서 질서와 규칙이 없다면 국가는 혼란을 초래하게 되고, 결국 분열되거나 파괴될 수밖에 없다. 이제 질서와 규칙이 존재하는 국가는 정의가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의란 구성원들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올바른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정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에 따라 개념과 판단이 달라지면서 정의의 개념은 모호하게 바뀌게 된다. 정의의 본질적 개념은 주관적 판단에 따라 흔들릴 수 없는 명확한 개념이지만, 만약 정의가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면 정의의 개념은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정의의 개념을 잘못 해석하고 집단과 개인의 이익에 따라 정의의 개념을 달리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될 수 없다. 국가를 운영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의 범위 내에서 정의로운 판단에 의해 국가를 운영해야만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의의 개념이 도시국가로 발전하면서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된다. 정의에 대한 이중적 해석은 정의의 개념을 논쟁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국가의 정의는 자연상태에서 보여준 정의의 본질을 벗어나 상대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하나의 절대적 개념이 상대적 개념으로 변하면서 정의는 집단과 개인의 이익을 위한 논리적 해석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정의의 개념은 인간의 이중적 해석으로 인해 모호한 상태가 된다.


    정의의 개념이 자연상태를 벗어나 문화적 상태에 들어서면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정의의 개념이 국가 속으로 들어오면 정의는 공동체의 구성원에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정의가 정립된 국가의 구성원은 질서와 규칙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가진다. 정의가 정립된 국가의 구성원들은 국가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규칙과 질서가 국가를 유지하는 힘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BC399)는 국가의 탄생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집단의식으로 보았다. 인간이 국가를 통해 집단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의·식·주였다.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은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었을 때 행복을 느끼며 국가에 충성할 수 있다. 국가의 공동체에서 개인의 만족은 구성원의 안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러한 체계가 국가의 정의이다.


    소크라테스가 보았을 때 정의의 본질적 개념에서 하나의 진리란 하나의 의미를 담고 그 의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의가 본질을 벗어나 해석자의 자의성에 의존한다면 정의는 상대적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본질적 의미에서 정의란 모든 사람에게 이로우며, 불의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정의의 개념이 누구에게는 이롭고 누구에게는 이롭지 않은 것이라면, 정의의 개념은 본질로 정립될 수 없다. 본질에 대한 정의의 개념이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개념으로 정립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개념은 잘못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정의의 개념이 수많은 의미로 해석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 본질적 정의의 의미는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국가를 운영하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정의의 개념을 정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들의 주관적 판단이거나 이익에 의존하여 내려진 판단들이다. 하나의 정의가 서로 다른 주장에 의해 논쟁으로 발전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될 수 없다. 하나의 본질에 서로 다른 의견은 부분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주관적 주장일 뿐이다. 주관적 판단은 정의의 개념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만을 반영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만약 정의가 개인과 집단의 이익만을 우선한다면 국가의 정의는 본질적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의 팽배 속에 정의의 개념이 퇴색되어 버린 듯하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의혹의 테두리 속에 맴도는 정의의 개념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되면 언제나 두 개의 의견이 상충하고 서로의 주장만 난무한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때론 진실이 다수의 주장에 의해 묻혀 버리거나 서로의 이익에 의해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실에 두 개의 진실이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주장이 진실이면 다른 하나의 주장은 거짓임에 틀림없다. 정의의 본질이 살아 있는 국가에서 정의는 힘 있는 사람의 편이 아니고 언제나 변치 않는 진실 속에 자리한다.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한 진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다. 하나의 사실이 두 개의 주장 속에 논쟁을 일으킬 때 그 진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어떠한 사실을 주장하는 두 가지 유형을 보면 하나는 자신이 변치 않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 어떠한 목적 때문에 거짓을 진실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진실의 논쟁에 있어 이러한 두 종류의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적으로 개인과 집단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일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 바로 세 번째 사람이다. 거짓을 알면서도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은 양심에 따라 죄책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넘어 무지함을 정의로 착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으로 정의로운 국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종류의 사람들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회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절제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의 질서_ 욕망은 삶의 의지 속에서 싹트는 에너지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은 생명체가 갖는 기본욕구이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생존을 위해 욕망을 드러낸다. 욕망의 드러남은 삶에 대한 끊임없는 파동에서 나온다. 삶에 있어 욕망이 없다면 죽은 고목과 같다. 욕망은 언제나 유동적이며, 쉼 없는 분출을 통해 화산처럼 솟아오른다. 인간의 삶도 솟구치는 화산처럼 욕망의 분출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러한 욕망의 본질에는 두 가지 속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본질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 욕망이다.


    본질적 욕망은 디오니소스적이다. 디오니소스적 욕망은 삶의 본질을 자유에서 찾는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본질은 욕망 속에 내포되어 있다. 시간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 삶을 추구한다. 본질적 삶은 욕망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현재의 시간은 존재 의미를 통해 욕망을 이끌며, 디오니소스적 자유를 갈망한다.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삶은 현재의 시간적 연장을 통해 삶을 지속시킨다. 시간은 현재를 본질적 욕망으로 이끄는 영원성의 힘이다. 욕망이 용솟음치는 세계의 중심에서 본질적 욕망은 끝없는 사유를 통해 디오니소스적 자유를 추구한다.


    이성적 욕망은 아폴론적이다. 이성적 욕망은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참다움에서 시작된다. 참다움이란 선을 추구하며 인간의 삶을 이성적 욕망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 욕망은 순수이성을 통해 나타나며, 사유적 측면에서 아폴론적 욕망에 속한다. 이성적 욕망은 동물적 욕망을 억제하고 순수로써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넘어 욕망을 지워 버린다. 인간 정신을 통제하는 강력한 이성의 힘은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욕망의 불꽃을 대지의 깊은 곳으로 묻어 버린다. 욕망에 대한 삶의 시간은 어떠한 규칙과 통제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온다. 하지만 이성적 욕망은 본능적 욕망을 억누르고 정화 시킨다


    플라톤은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말과 마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마부가 마차를 몰고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욕망의 말과 이성의 말이 있다. 이성의 말은 아폴론적이며, 마부의 여정을 바른길로 이끈다. 욕망의 말은 디오니소스적이며 지루한 여정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성의 말은 마부를 지루하고 졸리게 만든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마부는 욕망의 말을 향해 고삐를 당긴다. 욕망의 말은 이성의 말에 붙잡혀 있던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며 빠르게 돌진한다. 지루함과 난폭함의 갈림길에서 마부는 이성의 말과 욕망의 말을 적절하게 조정해야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 이러한 마부의 여정은 인간의 삶과 같다. 인간의 삶에 있어 본질과 이성은 끊임없이 욕망의 충동을 자극한다. 이렇게 자극된 욕망은 어떤 때는 이성적이고 어떤 때는 본능적이다. 두 가지의 욕망 중 어떤 욕망이 선하고 악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두 가지의 욕망을 하나의 정신 속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부의 현명함처럼 이성과 욕망을 적절하게 관리하여야 한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지혜와 용기에 근거한다. 지혜는 욕망의 에너지를 바른 길로 인도한다. 올바른 욕망이 향하는 길은 언제나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그 방향은 자유이다. 만약 욕망이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욕망은 허상에 불과하다. 자유를 향한 의지의 방향성은 욕망의 방향성이다. 올바른 욕망은 자유를 통해 긍정의 사회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사회는 인간의 행복이 보장된 사회로 이상적 욕망이 만들어 낸 절대 자유의 사회이다. 절대 자유는 자신의 삶을 어떤 규칙과 틀로부터 벗어나 본질적 삶을 추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자연의 본질로부터 벗어나 물질적으로 변해간다. 인간이 보여준 물질적 욕망은 삶의 의미를 소진시켜 버린다. 물질에 가려진 본질적 욕망은 타락의 그림자에 머물며 욕망의 에너지를 잃어간다. 자본과 물질 속에서 사물의 그림자로 숨어버린 본질적 욕망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려 한다.


    삶에 있어 비움은 순수욕망으로의 복귀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넘어 성취와 명예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는 것은 부질없는 욕망을 비워 내는 것이다. 욕망의 비워냄은 자유를 향한 삶의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본질적 욕망과 이성적 욕망을 채워 넣을 수 있다. 본질적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가식의 꼬리표를 떼어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가식의 꼬리표를 저 깊은 바다의 심연 속으로 내던져 버릴 때가 되었다. 우리는 순수욕망의 본질적 귀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본질적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순수욕망으로의 복귀가 이루어져야 한다. 본질적 삶은 단순히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을 넘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유한한 시간과의 약속이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욕망에 대한 자기 성찰은 욕망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이끈다.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솟구치는 끝없는 욕망의 에너지를 삶의 에너지로 전환할 때 인간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철학의 위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_ 변치 않는 진리는 주장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과학의 발전은 이성을 중시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성은 서양 중심 사회에서 인간의 보편적 개념에 대한 사유이다. 계몽주의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는 합리적 이성을 통해 새로운 원리의 학문을 정립하였다. 그의 학문적 접근 방식은 방법적 회의이다. 그는 명확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명증적이며, 직관적인 접근방법을 학문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합리적 접근 방식은 모든 명제를 명확성으로부터 연역하는 기하학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역의 방법은 다른 명제로부터 논증되지 않은 확실한 명제를 철학의 제1 원리(Le premier principe)로 삼으려는 시도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사고에 있어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것은 판단에 대한 확신의 부재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의심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은 진리의 범주에서 벗어나며, 인간은 불완전한 경험을 통해 서로 다른 결론을 얻게 된다. 불완전한 감각으로 얻게 된 모든 지식은 세계의 존재 문제를 관념적 지식의 한계로 보는 미시적 관점의 인식 체계에서 나온다. 그는 학문에 있어 진리의 길은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본질적 문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학문적 접근 방식은 명증성을 통한 보편적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이다.


    그의 합리적 이성을 통한 방법적 회의는 기존 관념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된다. 그는 모든 사실에 대한 회의를 통해, 의심하는 존재의 나를 의심할 수 없는 실체라고 보았다. 이처럼 회의하는 존재의 실체적 의구심은 모든 관념에 대한 방법적 회의로부터 시작되며, 회의의 끝에는 의심하는 나만이 존재한다. 여기서 의심에 대한 방법적 회의는 지워짐이다. 그의 사유체계에서 지워짐이란 의심의 원인을 제거하고 의심할 수 없는 실체적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제기된 명증성의 문제는 어떤 것도 실재할 수 없다는 무(無)의 상태에서 시작되며, 의심하는 순간의 나만이 존재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실체에 대한 회의는 의심하는 자아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방법적 회의는 의심하는 자아를 발견하는 원인이 되고, 의심하는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가 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사유체계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는 철학의 제1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지식이 갖는 모순에 대해 방법적 회의를 제시하였다. 지식이란 인간이 태어나서 얻어지는 여러 가지 관념들로 형성된다. 관념은 시간의 터널을 통해 수많은 형태로 왜곡되고 변형된다. 관념의 보편성이 왜곡되면, 자신들만의 방식과 절차를 통해 사실적 실체를 외면하고 가상적 실체에 현혹되어 판단에 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이 갖는 지식의 유한성에서 지식이란 매우 한정적이며 단편적이다. 유한한 삶의 시간 속에서 한 인간이 얻고 배우는 것은 그가 경험하고 상상하는 관념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관념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만으로 빠져 버리게 만든다. 고정관념은 인간 스스로의 지식을 통해 자신의 관념 속에 갇혀 버린다. 사유의 편견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관념의 울타리이다. 관념은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을 구속하고 세계를 혼동으로 몰아 넣는 오류를 범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지식이 갖는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합리적 이성을 통해 미성숙 상태로부터 계몽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학문적 편견에 대한 회의를 버리고 합리적 이성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가 세계를 향해 내던진 지식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회의의 방법론이다. 방법적 회의에서 실체가 없는 안개는 현상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지식은 안개처럼 경험의 총체에 불과할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나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나는 진리의 범주에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 욕망을 분출한다. 이러한 욕망은 미성숙 상태로부터 벗어나 본질적 세계를 바라본다. 신의 세계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본질적 세계를 지향한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직관을 통한 계몽의 길을 걸어간다.


    하루를 시계 바늘처럼 살아가는 인간은 삶의 본질이 무엇이며,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신 앞에서 유한하며,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이라면 자신의 발자취를 과거의 시간 속에서 더듬어보고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숨죽이는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데카르트가 보여준 방법적 회의는 자신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오만을 반성하며 진리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그는 지식에 대한 회의를 통해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회의는 자만으로 가득한 현대인들에게 고정된 생각과 관념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인간으로 태어나 삶의 불꽃을 불태우는 모닥불처럼 진리의 시계는 삶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진리의 등불을 밝혀주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의 등불은 하나의 주장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며, 무지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질문함으로써 삶의 본질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Ethica)_ 자연의 속성은 신의 본성을 대변하는 실체이다

    자연의 속성들은 스스로의 표현을 통해 신의 속성을 담고 있다. 신과 자연, 자연과 신은 하나의 실체이며 같은 것이다. 세계의 모든 속성들은 신의 창조로부터 생겨났지만 신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은 자연 속에 자신의 의지를 부여했다. 자연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초월적 신은 물질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만약 신이 물질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신의 자리를 포기한 피조물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피어나고 소멸되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만물은 신의 의지를 표현한다. 자연의 순환적 성질에 따라 생성과 소멸의 현상은 인간의 삶과 같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생성을 통해 소멸되고, 소멸 후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 이처럼 자연은 생성-소멸-생성의 과정을 겪으며 자연의 생명성이 연장된다. 신과 자연, 실체와 속성의 언덕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가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형이상학적 실체 개념을 『에티카(Ethica)』를 통해 합리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체계를 윤리학의 기본으로 삼고 자연의 실체에 대해 탐구했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실체를 자기 원인의 결과로 보았다. 자기 원인은 자연의 속성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한다. 자기 원인은 신의 본질이 자연에 내재 되어 나타나며, 신의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신의 본성으로 태어난 자연의 속성들은 스스로 실체가 되고, 실체의 속성들은 표현을 통해 신의 실체를 인정하게 된다. 자연에 대한 무한한 생명성은 실체에 대한 인식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스피노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나의 실체는 무한한 신적 실체로서 자연과 동일한 것이다. 그는 신과 자연을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보았다. 그의 사상에서 신과 자연은 하나의 동일체로서 무한한 실체이며, 신의 실체는 자연 속에 담겨 있다.


    자연의 속성에서 생명은 가장 고귀한 속성 중 하나이다. 생명이란? 살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생명이 있을 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삶dp 있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생명은 모든 것이며 존재의 원인이다. 생명이 없는 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이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종말을 뜻하는 것이다. 종말이란 세상의 모든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그것을 바라보는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존재의 종말은 세계의 종말이며, 신의 종말을 뜻한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실체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실체가 필연적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존재 방법의 하나로 자연을 신의 속성으로 생각했다. 신은 자연의 속성을 유지함으로써 신의 존재 자체를 유지한다.


    세상에 있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생명은 곧 자연이며, 자연은 곧 신이기 때문이다. 신은 존재의 내면에 포함되어 있고, 존재의 속성들은 신을 향한다. 이처럼 신을 향하는 본질적 성향은 자연적이다. 세계의 근원인 자연을 통해 신을 그리워하고 의지하는 마음은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에서 나온다. 자연을 통한 삶의 회귀본능은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는 길이며,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길이다.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생명의 소중함보다는 물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다다르면 물질은 물질일 뿐 생명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생명이 물질보다 못하게 취급되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인간으로서 현재라는 순간은 삶의 전부이다. 현재의 시간이 없다면 영원한 삶도 없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순간, 숨 쉬는 순간, 그 순간의 호흡을 느끼는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은 삶에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시간이 삶의 전부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자연은 우리의 스승이며 동반자이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자연은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위대함은 신으로부터 나온다. 신은 자연의 생명성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담아낸다. 자연은 신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자연이 담고 있는 다양한 속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자연, 무한한 빛으로 발산되는 색의 자연, 음악처럼 아름다운 선율의 자연, 생명의 환희를 알리는 탄생의 자연, 계절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사계의 차연 등 무수히 많은 자연의 표현은 신의 의지로 태어나 신의 속성을 담고 있다.


    인상과 관념_ 관념의 한계를 넘어 구름처럼 살고 싶다

    관념은 인상의 반영이며 본질이다. 관념은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반성은 사물의 추상적 실체에서 벗어나 인상을 통해 관념화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인상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감각으로부터 얻게 되는 인상이고, 다른 하나는 반성으로부터 생겨나는 인상이다. 감각을 통한 인상의 발생은 지각의 결과를 가져온다. 사과를 보면 마음속에 사과의 신맛이 느껴지고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은 인상을 통한 사과의 신맛이 관념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인상의 경험은 사과의 신맛을 통해 침샘을 자극하고 관념화시킨다. 이처럼 우리의 정신은 신맛의 관념을 통해 사과의 개념을 정립시킨다.


    반성은 감각을 통해 얻게 된 인상이나 관념이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여 전면에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의식이 인상과 관념으로부터 또 다른 인상을 받게 되면 인상은 이전 관념과 합쳐져서 또 다른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이 반성이다. 흄은 이러한 반성의 인상을 예술의 아름다움에 비유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 관념은 반성으로부터 생겨난 인상이다. 반성적 인상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예술 작품을 통해 얻게 되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감각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예술을 바라보는 인간의 내면에 나타나는 감정이다. 인간의 내면은 비극적 예술의 대상을 통한 반전을 보여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햄릿이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비극은 추한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인간은 반성의 눈물을 흘리며 마음의 정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반성은 인간을 추함으로부터 선함으로 이끄는 정신을 만들어 낸다. 둘째, 사랑이나 미움의 감정이 정념을 통해 나타나는 감정이다. 반성적 인상이 갖는 정념은 인상에 속하는 정서의 일종이다. 반성적 인상은 차분한 상태와 격렬한 상태로 구분되며, 이러한 구분에 따라 정념은 반성의 인상을 만들어 낸다. 흄은 차분한 반성적 인상을 정서라고 말하고 격렬한 반성적 인상을 정념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정신은 인상과 관념으로 나뉜다. 우리의 정신 속에 인상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각들과 정념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감정들이 심상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관념이란 인간이 갖는 사유나 이성적 추론 안에 내재되어 나타나는 희미한 이미지이다. 인상은 언제나 관념들보다 먼저 대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관념은 형성된다. 장미에 대한 관념의 형성은 장미에 대한 인상이 체험되어진 후 발생하게 된다. 장미의 관념이 먼저 생겨나고 장미를 인식하게 하는 구조는 생겨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의 구조는 인상과 관념을 통해 우리의 심상에 나타난다.


    관념의 세 가지 성질은 유사성, 근접성, 원인과 결과로 나뉜다. 관념의 성질이 이와 같은 유사성과 근접성에 있는 것은 보편적 관념이 보편자의 속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관념은 보편자의 속성을 통해 보편자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관해 판단할 수 있는 관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관념의 형성은 보편자의 속성과 닮은꼴 때문이다. 단순 관념으로 심상에 남아 있는 관념이 연합을 통해 관념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을 복합 관념이라 한다. 복합 관념은 연합을 통해 관계되고, 단순 관념의 유사성, 근접성, 인과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관념의 연결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관념의 연결에 시간이 존재한다. 인상의 원인이 되는 사건과 결과는 인과율에 따라 결과로 관념 속에 자리 잡는다.


    흄은 지식의 근원이 되는 학문의 난해함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인간 오성의 본성을 면밀히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판단이 되는 지식의 난해함을 해결하는 길은 불완전한 이성의 판단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흄의 인상과 관념은 지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경험론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각과 관계를 갖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지각은 마음에 현존하는 것에서 유래하며 인상과 관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실재할 수 없다. 지각을 벗어난 어떤 존재도 상상할 수 없다. 만약 지각을 통하지 않고 상상한다는 것은 추상적이며, 어떠한 관념도 갖지 않는 공상에 불과하다. 지각은 감각기관들에 현존하는 심상을 통해 실재의 대상에 접근하고 우리는 그것을 인상을 통해 관념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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