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가루전쟁
 
지은이 : 도현신
출판사 : 이다북스
출판일 : 2020년 70월




  • 음식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생존활동과 직결된다. 인류는 사는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효율적으로 즐기는 방법을 연구해왔고, 이러한 노력은 그 지역이나 나라만의 문화를 형성하고 세력을 키우는 기반이었다. 때로는 이들 음식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분쟁을 넘어 세계 역사를 바꾼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 문명이 일어서고 융성하며 쇠퇴하는 과정에는 음식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이들의 역사에는 세계사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이에 《가루전쟁》(이다북스 간)은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고 즐기는 설탕, 소금, 후추, 밀, 커피, 초콜릿 등 6가지 가루들의 이면에 숨겨진 세계 역사를 펼쳐보고, 이를 통해 세계 역사와 세계 지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본다.



    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가루전쟁


    달콤함에 숨은 역사, 설탕

    흑인 노예들의 역사가 서리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인들은 대서양 서쪽의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해나갔다. 그러면서 점차 늘어난 설탕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대서양의 마데이라제도, 카리브해의 아이티섬과 남미의 브라질을 비롯해 아메리카 지역에 사탕수수 재배 농장을 세웠다. 이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흑인 노예들이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붙잡아 노예로 부렸으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옮기는 전염병에 약해 많이 죽은데다가 그들의 고향과 가까운 탓에 걸핏하면 도망치는 식으로 저항했다. 이에 유럽인들은 전염병에 잘 견디면서 도망칠 우려가 없는 먼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붙잡아 와서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대략 1500년에서 1880년까지 최대 4천만 명의 흑인들이 노예선에 탄 채로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갔다. 그들 대부분은 아이티를 중심으로 한 카리브해의 여러 섬에 세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총리 에릭 윌리엄스는 흑인 노예들과 설탕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설탕이 없었다면 흑인 노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흑인을 노예로 사고파는 노예무역은 설탕이 일으켰고, 이 노예무역에서 유럽 국가들이 벌어들인 수익이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설탕을 만들고 팔아 돈을 벌려는 유럽인들의 욕망이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오늘날 미국, 브라질, 아이티, 쿠바, 도미니카 같은 아메리카 지역의 나라들에 살고 있는 흑인들의 대부분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백인의 농장에서 일하던 노예의 후손이다. 설탕 생산과 노예무역이 아메리카의 인종 분포도를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중반 이후 대서양 너머에 세운 사탕수수 농장들이 워낙 많아 설탕 가격이 낮아졌다. 1572년 프랑스의 학자 오르텔스는 《세계 무대의 축도》에 “약으로 팔렸던 설탕이 지금은 음식에 들어가는 첨가물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전 시대에 설탕 가격을 묘사한 기록들에 비하면 굉장히 달라진 현상이다.


    하지만 설탕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흑인 노예들을 부려 얻은 설탕을 팔아 가장 많은 돈을 번 나라는 아이티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였다. 아이티의 설탕 사업에서 나오는 수익은 아무리 줄어들었을 때도 최소한 프랑스 정부 1년 예산의 25퍼센트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17세기와 18세기 무렵, 아이티는 설탕을 팔아 벌어들인 수익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다만 오해가 없기 바란다. 이 설탕 판매로 거둔 수익은 아이티에 살고 있던 3만 명의 프랑스인 지주와 프랑스 정부에만 돌아갔으며, 나머지 48만 명의 흑인 노예들은 가난에 찌든 채 살아야 했다. 프랑스의 수익을 올려주는 설탕은 프랑스인 농장주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으며 일해야 했던 흑인 노예들의 피와 눈물로 만든 산물이었다.



    하얀색의 작은 황금, 소금

    우리 역사와 함께한 소금들

    소금에 관한 자료가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시기는 단연 조선시대로, 《조선왕족실록》에는 소금에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언급된다.


    1394년 8월 22일 <태조실록>에서는 왜구가 10여 척의 배를 타고 전라남도 영광군에 침입했는데, 소금을 굽는 인부 30여 명이 그들과 힘껏 싸워 왜구 3명의 목을 잘라 죽이자, 왜구들이 도망쳤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왜구가 조선의 소금을 노리고 쳐들어왔다는 내용은 그 후에도 실록에 보이는데, 1408년 2월 3일자 <태종실록>에는 전라남도 신안군의 암태도에 9척의 배에 탄 왜구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하자, 소금을 굽는 인부인 김나진과 갈금을 비롯해 20여 명이 왜구들과 싸워 3명을 죽이고 왜구가 납치해간 조선 백성 2명을 구출해오자 왜구들이 달아났다고 적혀 있다.


    조선의 소금을 탐낸 것은 북방의 여진족도 마찬가지였다. 1406년 2월 18일자 <태종실록>을 보자. 함경북도 경원에서 여진족들이 조선을 상대로 그들이 가진 소와 말을 조선의 소금과 서로 교환하는 무역을 하다가, 무역이 중단되자 여진족들이 분노해 경원에 쳐들어왔으며, 당시 병마사 박영이 지휘하는 조선군에 패하고 달아났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무역이 중단된 이유는 당시 명나라에서 여진족들을 상대로 건주위(만주 남쪽 여진족 거주 지역)를 설치하는 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자, 조선 측에서 여진족들이 명나라의 세력권으로 포섭될 테니 무역을 한들 소용없다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여진족들의 침탈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위협이었다. 같은 해 5월 10일자 <태종실록>에는 동북면 도순문사 박신이 태종에게 “함경도 경성과 경원 지역에 여진족들을 상대로 한 무역소를 설치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소금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여진족들이 조선의 소금을 얻지 못하자 쳐들어왔다는 대목은 그들 스스로 소금을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진족들이 바닷가에 살지 않았거나 그들의 영토에 암염이 묻힌 지점이 없어 부득이하게 조선이 공급해주는 소금에만 의존했고, 갑자기 소금이 끊어지자 이를 구하기 위해 조선에 쳐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소금이 몸에 나쁜 조미료라서 가급적 소금을 첨가하지 않는 담백한 식단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소금은 반드시 필요하다. 설탕은 먹지 않아도 생존에는 지장 없지만 소금을 먹지 않으면 빈혈에 시달리는 등 생명에 큰 지장이 생긴다. 세종은 평소에 소금을 거의 넣지 않은 싱거운 음식을 먹다가 오히려 병이 생겼고, 말년에는 특별히 소금만 넣어 끓인 국을 마시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고대 유럽의 켈트족들처럼 조선시대에도 소금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785년 4월 14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홍국영의 사촌동생 홍복영은 자신의 사촌형인 홍국영이 정조에게서 버림받고 귀양 간 일을 계기로 집안이 누리던 권세를 잃자, 이에 불만을 품고 풍수지리설에 심취한 문양해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참가자들을 모으기 위해 자신이 가진 소금 포대 1천 개를 팔아 쌀을 사들이자 그 양이 너무나 많아 경상도 지역의 시장에서 쌀값이 폭등했다고 한다.


    소금을 담은 포대를 1천 개나 가졌던 것을 보면 홍복영이 비록 권세는 잃었을지언정 그가 가진 부는 굉장했던 모양이다. 물론 홍복영과 문양해가 일으키려던 반란은 정보가 새어나가 실패했고, 둘은 사형에 처해졌다.



    세계사 속의 쟁탈전, 밀

    밀 때문에 나선 러시아원정

    근대 유럽의 역사에서 밀과 관련된 무역 때문에 전쟁까지 벌어진 경우도 있었는데,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이 그것이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21일,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다. 이 대륙봉쇄령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유럽의 모든 나라는 영국에 어떤 상품도 팔거나 어떤 영국 상품도 사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이런 대륙봉쇄령을 발표한 것은 영국 때문이었다. 대륙봉쇄령을 발동할 무렵 유럽에서 나폴레옹에 맞설 적수는 영국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군사력으로 제압하기가 불가능했다. 나폴레옹은 고심 끝에 영국을 경제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해 자신이 지배하던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 대륙봉쇄령을 명령했다. 만일 대륙봉쇄령을 어기면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프랑스군을 이끌고 그 나라로 쳐들어가 응징할 것이라는 엄포까지 덧붙였다.


    나폴레옹이 잊어버린 사실이 있었다. 대륙을 봉쇄한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 정부는 오히려 강력한 해군을 동원해 유럽 각국의 항구를 봉쇄하는 한편, 북미 대륙과 인도를 상대로 한 무역으로 대륙봉쇄령 때문에 입은 손해를 보충했으며, 이런 식으로 나폴레옹에 맞섰다. 영국이 이렇게 나오자 유럽 국가들은 영국과 무역이 끊겨 가난에 시달린다며 나폴레옹에게 불만을 품었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으로 경제적인 타격을 입은 유럽 나라들에 어떠한 보상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에게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한 나라가 나타났다. 러시아였다. 대륙봉쇄령이 있기 전에 러시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밀 같은 곡물들을 대부분 영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선언하자 러시아는 명령에 따랐는데,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영국이 나폴레옹에게 무릎 꿇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러시아 경제는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따라 영국으로의 밀 수출을 금지하자, 이에 따른 손해의 보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이 러시아의 밀을 영국 대신 사주는 식의 도움조차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국내에서는 더 이상 자국 경제를 망치고 있는 나폴레옹과의 동맹을 이어가봐야 소용없으며, 차라리 영국에 밀 수출을 다시 시작해 경제적 이득이라도 챙기자는 반발 여론이 강해졌다. 이에 경제적 피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에 계속 곡물을 팔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어긴 러시아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여겨, 프랑스와 다른 동맹국들의 군대로 이루어진 6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러시아를 굴복시키려는 원정을 나섰다.


    1812년, 유럽 각국에서 차출한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간 나폴레옹은 그러나 러시아의 광대한 국토와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다 철수했다. 나폴레옹이 이끌고 간 병력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도망쳤거나, 러시아에 항복했거나, 아니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나폴레옹이 야심차게 추진한 러시아원정의 실패 소식이 알려졌다. 유럽 각국은 나폴레옹이 약해졌으니 이제 그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나폴레옹과 맞서 싸웠고, 결국 라이프니치전투와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쫓겨나 몰락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영국으로 수출되는 러시아의 밀을 막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가 나폴레옹이 망했으니, 밀로 인해 유럽과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국수와 만두, 인스턴트라면까지

    중국은 옛날부터 방대한 영토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자 덕분에 다양한 식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중에서는 밀과 그 밀을 빻은 밀가루로 만든 요리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수와 만두다.


    밀가루 반죽을 길게 뽑아 소나 돼지의 뼈를 고아 우려낸 국물에 담가서 먹는 국수는 중국 서한왕조의 일곱 번째 황제인 한무제 때부터 등장했다. 전설에 따르면 한무제의 생일 잔칫날에, 기다란 국수의 면발처럼 한무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의 식탁에 올라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밀가루를 얇게 반죽한 피(껍질)에 고기와 채소를 잘게 썰어 뭉친 소를 넣고 쪄서 먹는 만두는 중국 동한왕조 때 활동했던 의원인 장중경에게서 비롯했다. 그는 겨울이 되면 백성들이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겨 뜨거운 물에 끓인 물만두를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먹게 하면서 추위를 이겨내도록 배려했는데, 여기서 만두가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밀이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대략 고려시대, 중국 북송 왕조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한반도는 밀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여서,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밀가루의 양은 매우 적었다. 1950년에 벌어진 한국전쟁 무렵, 미국에서 무상으로 밀가루를 대규모로 원조해주기 전까지 한반도에서 밀가루는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오는 매우 비싼 식재료였고, 밀가루로 만드는 음식들 역시 부유한 권세가 아니면 생일이나 잔칫날에 맛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상에서 즐겨 먹는 수제비도 조선 왕실에서나 먹은 고급 음식이었다.


    고려 말의 속요 <쌍화점>에 “샹화점에 샹화를 사러 갔다”라는 말이 언급되는데, 샹화는 만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를 보아 고려 말에 이미 한반도에서 만두가 팔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밀가루 음식으로 국수가 자주 등장했다. 단, 국수 역시 생일이나 잔칫날 같은 특별한 기념일에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요리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국수를 만드는 밀가루 대부분이 중국에서 수입한 비싼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지방관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에서 국수를 빼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국수를 장만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이우에서였다.(《중종실록》1539년 10월 8일)


    일본은 어떨까? 오랫동안 일본 사람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문화였기 때문에 밀가루 음식에 거부감이 많았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미국에서 무상으로 원조한 밀가루가 대량으로 일본에 들어왔으나 쌀이 주식이던 그들은 밀가루 음식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단팥빵이 나온 것도 그들이 밀가루로 만든 빵을 잘 먹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빵에 달콤한 맛을 내면서 옛날부터 일본인들이 좋아했던 팥을 넣어 만든 것이었다.


    이런 사정은 일본 사람들처럼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문화를 지닌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했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라거나 “밀가루 음식은 금방 배가 꺼지기 때문에 배가 고프다”라는 인식이 있는 것만 봐도 우리 사회에서 밀가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밀가루를 잘 먹지 않던 일본 사람들의 입맛을 정반대로 바꿔 놓은 음식이 1961년에 나왔으니, 인스턴트라면이었다. 우리가 흔히 먹는 인스턴트라면을 창시한 사람은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로, 그는 일본 사람들이 메밀로 만든 국수인 소바를 즐겨 먹는다는 점에 착안해 닭 뼈를 우려낸 육수에 밀가루를 튀기고 말린 면발을 넣고 끓여 만든 인스턴트라면을 출시했다. 이 제품으로 일본 사람들은 비로소 밀가루 음식에 대한 거부감을 버렸고, 아울러 그가 만든 라면회사 닛산식품은 전 세계로 인스턴트라면을 수출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의 인스턴트라면은 2년 후인 1963년 우리나라에서도 출시되었고, 이후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하면서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라면의 인기로 우리나라에서도 밀가루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비로소 사라졌다.  



    전 세계가 열광했던 검은 마약, 커피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된 혁명

    오늘날 수많은 음모론들은 각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들의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활발한 생명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인터넷이나 컴퓨터가 없던 때는 이런 일들이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속성은 그대로다. 다만 이전에는 인터넷 게시판 대신 사람들이 직접 만나는 자리에서 음모론이 퍼졌는데, 그런 현장 중 하나가 카페였다.


    카페가 정치적 음모와 처음 관련되었다고 인식된 시기는 커피 마시는 풍습이 처음 퍼진 이슬람권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오스만제국의 술판 무라트3세(재위 1574년~1595년)였다. 그는 이스탄불(현재 터키 서부의 도시)에 설치된 카페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하루 종일 커피를 마시며 정치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저자들이 혹시 폭동이나 반란 같은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닌가?” 의심해 이스탄불의 모든 카페를 강제로 폐쇄시켰다.


    무라트3세가 사망한 이후 이스탄불의 커피하우스들은 다시 문을 열었으나, 1648년에 즉위한 술판 메흐메트4세 시절에 커피는 다시 탄압을 받았다. 탄압의 선봉에 나선 사람은 무능한 메흐메트4세를 대신해 실권을 쥐로 나랏일을 맡은 재상 메메드 파샤였다. 그는 카페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자 카페들을 탄압했다. 메메드 파샤의 탄압은 무라트3세보다 잔혹했는데, 무라트 3세는 적어도 사람은 죽이지 않았으나 메메드 파샤는 카페들을 모두 부수고 카페 주인과 그 카페를 방문한 이들도 모두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17세기에 들어 커피가 유럽에 널리 퍼졌고, 유럽 각지에서도 오스만 제국에서처럼 커피를 사서 마시고 손님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카페가 곳곳에 들어섰다. 그러자 카페가 들어선 나라의 통치자들도 자연히 오스만제국과 똑같은 걱정에 시달렸다.


    특히 유럽에서 정치와 사상의 선두를 달리던 프랑스의 카페가 활기를 띠었다. 1721년에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만 300여 곳의 카페가 들어섰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때는 2천 곳으로 늘어났다. 아울러 파리와 그 주변에 들어선 카페들에는 철학자나 성직자 같은 고위 지식인을 포함해 부르주아와 예술가, 소설가는 물론 프랑스가 다른 나라에 파견한 스파이 혹은 다른 나라가 프랑스에 파견한 스파이들까지 합해 수많은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이 하루 종일 틀어박혀 모든 소식과 각종 정치적 현안에 대해 서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수많은 직업을 가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각종 이 ㄴ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의 게시판들에 정치적 현안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올리면서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울러 프랑스의 카페는 온갖 뜬소문과 음모론이 퍼지는 공장이기도 했다. 이런 유언비어는 대부분 정부에 반항적인 사람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흘리는 것들이었고, 따라서 정부에서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한 예로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그의 저서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내가 왕이라면 카페를 폐쇄할 것이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에 취하면서 거짓된 음모론을 받아들이면 나라의 앞날이 위험해진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음모를 믿느니 차라리 술집에 들어가 술에 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술에 취하면 자기 혼자만 다치지만 카페의 커피를 마시며 음모론을 받아들이면 나라에 큰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라며 음모론을 경계했다.


    몽테스키외의 발언은 쓸데없는 우려가 아니었다. 실제로 1789년에 일어나 프랑스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혁명의 뿌리는 카페에서 나누던 사람들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적인 사건은 시민들이 왕의 군대가 지키고 있던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해 수비대를 죽이고 감옥을 무너뜨린 것으로, 이 사건의 발단은 하루 전인 1789년 7월 13일 파리 시내에 있는 카페 포이에서 파미유 데물랭이 바스티유감옥 습격 계획을 세우면서였다. 아울러 프랑스혁명 기간 와중에도 카페들은 각종 음모론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선동시키는 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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