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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라면 정조처럼
저   자 : 김준혁
출판사 : 더봄
출판일 : 2020년 06월

  • 리더라면 정조처럼


    공부하는 군주

    엄청난 독서를 통해 지식을 넓히다

    지식이 많다는 것은 비단 리더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장점이 된다. 리더라면 남들에 비해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식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얻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끊임없이 독서를 하고 새로운 정보를 얻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조는 천성적으로 책을 통해 지식을 얻기를 좋아한 것도 있지만 스스로 노력도 엄청나게 했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영조가 감탄할 정도였다. 아들인 사도세자가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 반해 손자가 독서에 집중하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정조 행장>에 보면 정조가 어린 시절 얼마나 엄청나게 책을 읽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5`6세 된 정조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는지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잘 알고 있었다. 부부는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대견스럽게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아들이 너무 공부를 하다가 병이 날까 걱정을 했다. 그래서 해가 지면 책을 읽지 않고 잠을 자게 하려고 저녁에 촛불을 켜지 못하게 했다. 정조는 너무나 책을 읽고 싶어 방문을 이불로 가려 촛불 빛이 새나가지 못하게 하고 책을 읽었다. 흡사 세종이 어린 시절 너무 책을 읽어 태종과 원경왕후가 아들의 방에 있는 책을 모두 빼냈는데, 그 중 책 한 권이 병풍 뒤에 있어 세종이 그 책을 백번도 더 읽었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가히 독서왕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하다.


    조선의 국왕이 된 후에도 정조의 책 읽기는 지속되었다. 신하들은 정조가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여 더 이상 책을 보지 말라고 건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정조는 환관이나 궁녀들과 노닥거리기보다는 사대부들과 더불어 경전을 논의하고 함께 책읽기를 즐겼다.


    정조는 글을 읽을 때 미리 계획을 세워두고 읽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정을 보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읽고자 했던 글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처럼 독서에 대해 매우 근면한 태도를 취했다. 미리 계획해놓은 책 분량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강박증일 수도 있겠지만 신하들과 국가의 통치를 위해 군주가 더욱 많은 지식을 얻어야 한다는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사서삼경 중 경전 공부에 충실했고, 동궁으로 있는 동안에는 역사공부에 치중했다. 정조의 말대로 역사교육은 역대 제왕들의 국가 운영과 정책 그리고 뛰어난 신하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의 정책 추진에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기업 신입사원 논술고사에 한국사를 주제로 시험이 치러지는 것도 이제 기업들이 역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독서에 있어서는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밀하고 치밀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을 보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정밀하고 치밀하게 읽다 보면 절로 환히 깨닫는 곳이 있고, 평상적인 내용 중에 자연히 오묘한 부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책보다도 한 권을 깊이 있게 읽어 그 안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세상의 진리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뜻은 배움으로 인하여 확립되고, 이치는 학문으로 인하여 밝아진다. 독서의 공부에 힘입지 않고도 뜻이 확립되고 이치에 밝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세상의 이치를 알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실용적인 독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오늘날 이 땅의 리더들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있을까? 지금은 책을 읽는 시대가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 지식을 얻는 시대로 변했다. 이것이 시대의 대세이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튜브를 통해 영상으로 만나는 지식과 깊은 밤 홀로 앉아 종이책을 읽으며 깨닫는 지식은 비교할 수 없다. 세상을 이끌어나가고 싶은 리더들은 반드시 정조처럼 역사공부를 기본으로 실용적인 책을 선택하고 정밀하게 책을 읽고 자신이 읽은 것을 기록하여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바란다. 그리고 그 지식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기 바란다.



    시대의 변화를 읽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탕평의 시대를 열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0일, 경희궁 숭정전에서 정조가 조선의 22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 순간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부르르 떨었다. 그 자리에 있는 인물들치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무관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즉위 이전부터 죽음의 위기를 수시로 겪으며 살았다. 동궁 시절 자신의 전각에서 책을 볼 때면 동궁을 죽이겠다는 익명의 편지가 책상에 놓였고, 궁녀와 내시들의 끊임없는 감시가 있었다. ‘역적 지자 불위군왕(逆賊之子 不爲君王)’, 역적인 사도세자의 아들은 국왕이 될 수 없다는 8자 흉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엄청난 고통에 휩싸였고 장차 왕위를 이을 동궁으로서의 권위가 무시되었다.


    그러한 14년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그는 조선의 국왕이 된 것이다. 이로써 반대편을 모조리 사형시키거나 유배 보낼 국왕으로서의 힘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원한을 가볍게 풀어내지 않았다. 자신을 반대한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을 하고자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탕평정치는 실제로 영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탕평정치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조를 죽이기 위한 이인좌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이인좌와 함께 담양부사 심유현과 태인현감 박필현도 내란에 참여했다. 이들은 왜 그렇게 영조를 제거하려고 내란을 일으켰을까? 그것은 바로 정치적 탄압 때문이었다.


    경종은 매우 허약한 체질이었다고 <인현왕후전>에 나오듯이 실제 성기능을 할 수 없었던 국왕이었다. 그러다 보니 왕위를 이을 왕세자를 만들어낼 수 없었기에 노론 신하들이 경종을 협박하여 숙종의 둘째 아들인 영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하고 4년 뒤 경종의 죽음 이후 조선의 21대 국왕이 되게 했다. 결국 영조를 국왕으로 만든 공로로 노론 세력들이 조정의 권력을 잡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다툼에서 패배한 소론은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자 이인좌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소론 세력들이 영남의 남인과 연대하여 권력을 되찾기 위한 내란을 일으켰고, 그 명분으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닌 노론의 핵심 인물인 김춘택의 아들이고, 영조가 왕세제 때 경종에게 간장게장을 진상하여 이를 먹고 죽게 했다고 선전하고 돌아다녔다.


    영조는 생각지도 못했던 내란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력을 집중하여 이들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내란을 마무리하고 스스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처음 즉위했을 때 모든 세력들을 아우르는 정책을 펼쳤으면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내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영조는 어느 한 당파가 정권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치세력들이 고루 정치에 참여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고 행복하게 하는 탕평정책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했다. 이것이 바로 영조의 탕평정책 추진의 배경이자 과정인 것이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을 계승하며 보다 발전된 탕평정책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친인척들을 배제하고 현인을 적극 등용했다. 당파별로 나누어주던 관직을 당파를 배제하고 필요한 인재들로만 채웠다.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격하고 화합을 통해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를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정조를 위대한 국왕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한편으로 정조는 개혁정치가로서 요ㆍ순을 재해석하면서 일련의 인사 개혁조치를 취했다. 예컨대 그는 당쟁의 근원이 되었던 이조전랑과 한림의 특권을 약화시키는 대신 국왕이 통제할 수 있는 이조ㆍ병조의 판서와 참판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는 또한 임금과 백성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는 중간세력의 발호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부분의 국정을 직접 관장하여 일일이 확인하는 친정과 근면의 정치를 계속했다.


    현대 정치에서도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표현이 있듯이 소수의 독점계층이 주요 권력 기구를 장악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 운영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추구가 과거 붕당정치 시기 정조시대에도 여실히 나타나 있으며, 그러한 정조의 의지는 우리 시대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리더들은 과거에 비록 허물이 있는 사람이어도 철저하게 반성한 사람들이라면 포용하고 자신과 혹은 조직과 관련 있는 이들만이 아니라 정조처럼 통크게 조직 전체에서 좋은 인재를 찾아내고 그를 활용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큰 기반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의 기반을 마련하다

    우리식 민주주의 제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나라에 정착된 민주주의 제도가 서구에서 들어온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가 무조건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여 정착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경제발전이 추진된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문화가 낡고 고루한 것이라는 평가 속에 상당수의 전통 문화를 없애버린 것은 엄청난 잘못이었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항변도 못한 상태에서 우리의 전통 공동체 문화가 사라져버렸다.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면서 함께 없어진 것은 바로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사라지고 오로지 서구의 문화만이 올바르고 훌륭한 것이라는 문화적 사대주의가 생긴 것이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는 동학혁명 과정에서 민주주의 제도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지방자체제도의 원형이 바로 집강소의 설치와 운영이었다.


    조정에서 국왕에 의해 임명된 수령들에 의해 통치되던 현실에서 백성들이 직접 고을의 지도자를 뽑아 집강으로 명명하여 그들에 의해 운영되는 제도는 현재의 지자체 제도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모습을 보자면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는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동학의 집강소보다 더욱 앞서서 민주주의적 기반을 마련하고 운영되었던 것이 바로 수원 화성의 북쪽 들녘인 ‘대유둔(大有屯)’에서 마련된 운용 제도였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행차를 위해 왕실 소유의 내탕금 10만 냥을 내놓았고, 혜경궁의 회갑을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기구인 ‘정리소(整理所)’에서는 경비를 아껴 2만 냥을 남겼다. 정조는 이중 1만 냥을 제주도민들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 구입비로 사용하고, 나머지 1만 냥은 화성의 북쪽에 저수지를 만들고 백성을 위한 국영농장을 만들기로 했다. 저수지의 이름을 만석거(萬石渠)라고 하고 국영농장의 이름을 대유둔, 혹은 대유평(大有坪)이라고 했다.


    특이한 것은 실제 대유둔을 운용하는 주체인 ‘마름’의 선발이었다. 앞서 ‘둔도감’과 ‘도감’은 양반과 장교 중에서 화성유수가 임명하는데, ‘마름’은 선발 방식이 전혀 달랐다. 정조는 화성의 대유둔 마름을 화성유수가 임의대로 임명하게 하지 않고, 대유둔에서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직접 의견을 모아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뽑게 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선진적인 민주주의 제도의 운영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이들에 대한 임금 체계다. 정조는 이들에 대한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지급하고자 했다. 그래서 양반인 둔도감에게는 매달 쌀 1가마를 지급하게 하고, 장교인 도감에게도 매달 쌀 1가마를 지급하게 했다. 그런데 마름에게는 매달 쌀 2가마를 지급하게 했다. 백성들에 의해 추천된 현명한 사람을 더욱 존중하고 그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일을 하게 하여 국영농장인 대유둔이 더욱 발전하여 쌀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더불어 백성들 간의 화목을 도모하여 진정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실질적으로 역할을 하는 일꾼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그가 진심으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경제민주화이다.


    정조시대 수원의 대유둔으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 정신과 기반은 동학으로까지 이어져 집강소 설치라는 엄청난 민주주의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면서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와 시민에 대한 존중을 갖는 제도를 만들어내고 운영을 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 (溫故知新)이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강건한 군주

    끊임없이 함양하고 성찰하여 분노를 통제하다

    정조와 같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깊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정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 한(恨)이 가슴 깊숙이 배어 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고생했다. 그래서 정조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화가 심각하게 올라오는 기질이 있었다. 이것이 정조의 가장 큰 병통이었다.


    특히 정조는 신하들의 옳지 못한 태도를 보면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정조 역시 자신의 이러한 부분을 정확히 알았고, 이것이 제왕의 본색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에 집중했다. 바로 함양 공부다.


    “함양 공부(涵養工夫)가 가장 어렵다. 함양은 바로 정양할 때의 공부이고 성찰(省察)은 바로 행동할 때의 공부이다. 그러나 본체가 확립된 뒤에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학자의 공부는 당연히 함양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함양만 중요한 줄 알고 성찰에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기에 덕성을 존중하고 학문을 하는 것 중 어느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된다.”


    정조는 어쩌다가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화를 가라앉히고 사리를 살필 방도를 생각하여 하룻밤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일을 처리했다. 신하들이 가져온 장계나 정책 등에서 정조의 눈에 차지 않는 것이 허다했을 것이다. 그럴 때 정조는 화를 내지 않고 일단 신하들을 돌려보낸 뒤 하루가 지난 뒤 다시 그 문제를 논의했다. 이러한 것은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지만 충분히 훈련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정조는 일을 함에 있어 자중하려는 노력을 했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급하게 하지 않고 늘 차분하게 평가하고 업무를 진행하려고 했다. 정조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크거나 작거나 간에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큰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작은 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하면서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절대로 자신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늘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들과의 관계를 좋게 하려고 노력했다. 정조는 경연 시간에 절대 어려운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는 만약 정조가 어려운 질문을 하면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신하들이 있을 텐데 그러면 그들이 무안해할 것 같아 의도적으로 어렵지 않은 질문을 해서 모두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면서 정조는 신하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하게 하지도 않았다. 정조는 이 문장을 자신의 침실 벽에다 써 놓고 늘 가슴에 새겼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 하려고 하지 말라.’


    정말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리더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진경문화시대를 열다

    창조적 사고를 지니고 첨단 기계를 사용하다

    정조는 뛰어난 창조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창조적 사고만이 아니라 디자인에 대한 탁월한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정조로 인하여 정조시대 문화가 진일보했고, 그가 만든 유산인 수원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는 아름다움만이 아닌 창조적 사고를 통해 수원으로 행차하기 위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배다리를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수원 화성을 안전하고 빠르게 축성하기 위해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의 축성도구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도구들이 모두 정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런 도구를 만들라고 구성하고 제안한 인물은 바로 정조였다. 그만큼 놀라운 창조적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다.


    실제로 배다리 축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그 넓은 한강의 어디에 배다리를 만들 것인가부터 정해야 했다. 처음 고려되었던 곳은 오늘날 동호대교 자리였다. 이곳은 물살의 흐름도 적고 수심도 그리 깊지 않았지만 강폭이 너무 넓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한강의 전체 지역을 둘러본 후 최종적으로 노량진을 선택했다. 정조는 노량진으로 선정했다는 비변사의 결정을 듣고 깊이 고민했다. 비변사에서 계획한 대로 공사를 진행하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생각을 공유한 정약용은 노량진 일대의 폭과 수심을 살펴 배의 높이를 12척으로 확정했다.


    높이와 폭을 산정하고 그 위에 깔 판자를 준비했다. 배와 배를 나무로 연결하고 판자를 깔고 그 위에 흙을 깔고 잔디를 심었다. 마지막으로 안전을 위하여 배다리 옆으로 난간을 만들어 강물로 떨어지는 이들이 없도록 했다. 이로써 배다리가 완성되었고 이후 정조의 현륭원 행차가 있을 때면 이들 배들은 임시로 징발되어 배다리로 쓰이다가 행차가 끝나면 군사훈련과 상업선으로 이용되었다.


    정조는 한강의 배다리 설치 때와 마찬가지로 화성 축성의 기본 설계 역시 실학이라 불리었던 과학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있던 정약용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약용에게 사람을 보내 화성 축성의 기본 설계를 지시했고 설계에 필요한 책을 내려주었다.


    정조는 수레도 직접 고안하고 개발했다. 정조는 화성의 공사에 큰 돌을 써서 쌓는데 한 수레를 60마리의 소가 끌어도 운반하기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깊이 고민한 끝에 새로운 수레를 하나 만들었다. 기술자들이 해야 할 일을 정조가 이치를 궁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개발한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만든 수레 제작법을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여 활용하라고 했다. 도대체 못하는 것이 없는 임금이다.


    정조와 정약용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거중기는 현재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재현하여 놓았는데 300kg의 돌도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의 힘을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다. 이처럼 거중기는 중국이나 서양의 앞선 문물을 충분히 활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거중기로 인하여 화성을 축성하는 데 무려 4만 냥이라는 거금이 절약되었다. 이러한 시간과 비용 절감뿐만이 아니라 거중기로 인하여 축성 공사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요즘처럼 과학문명이 발달해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대형 공사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조시대 화성 축성에서는 단 한 명도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과학과 창조의 정신이 낳은 결과물인 것이다. 또한 신도시 화성의 우수성이 이와 같은 과학과 창조정신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리더들은 바로 이와 같은 창조적 도전 정신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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