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지은이 : 오치 도시유키(역:서수지)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20년 05월




  • ‘몸길이 30센티미터 정도의 흔하디흔한 생선 청어의 산란 장소와 회유 경로 변화가 어떻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유럽의 세력 판도를 드라마틱하게 바꿔놓을 수 있었을까?’ 이는『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의 중요한 핵심 논지 중 하나다. 위의 질문에 관한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의 주제가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나온다. “성욕을 억제하기 위한 식량이자 도구로 중세 기독교가 사용한 물고기 청어가 오히려 더 큰 경제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유럽사와 세계사를 송두리째 바꾼 흥미롭고도 아이러니한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꾼 작지만 위대한 물고기, 청어 이야기

    작은 어촌마을 암스테르담을 세계적 도시로 거듭나게 한 ‘소금에 절인 청어’

    자위더르해(Zuiderzee)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암스테르담은 13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듯 보잘것없는 어촌마을이던 암스테르담이 오늘날 네덜란드의 수도이자 전 세계인이 주목하고 즐겨 찾는 주요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당시 자위더르해는 호수였다. 그러던 것이 1287년 무렵 북해에서부터 밀어닥친 쓰나미와 높은 파도로 인해 호수 면적이 끝도 없이 넓어지며 북해와 이어져 바다가 되었다. 눈앞에 바다가 생긴 마을은 교통 요충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바다와 이어진 데다 자위더르해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내륙부로 가는 교통편도 갖추고 있었다. 14세기에 이르러 한자동맹의 활발한 무역 활동이 암스테르담에는 더 큰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게다가 15세기에는 네덜란드 청어 어업 육성정책 덕분에 프랑스, 플랑드르, 브리튼섬으로 수출하는 ‘소금에 절인 청어’ 주요 공급 기지로 떠오르면서 한자동맹 도시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초에는 한자동맹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독일과 발트해 연상 시장까지 장악했다. 이매뉴얼 윌러스틴은 『근대 세계 체계』라는 책에서 네덜란드를 ‘헤게모니 국가’로 정의했다.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 역사를 통해 헤게모니 국가로 거듭난 나라는 네덜란드, 잉글랜드, 미국 세 국가밖에 없다.


    특정 중심국가의 생산 효율이 지나치게 높거나 그 국가의 생산물이 다른 중심국가에서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상태에 있는 국가를 ‘헤게모니 국가’라고 부른다. 윌러스틴은 세계시장을 자유로운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그 국가가 가장 큰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된 상태라고 정의한다.


    한 나라가 ‘헤게모니 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과 공업에서 생산 효율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해야 하고 세계무역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헤게모니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계, 즉 ‘농업=공업에서 압도적 생산 효율성을 확립한 분야’가 이매뉴얼 윌러스틴이 지적한 대로 ‘청어 어업’이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유통은 물론이고 금융 분야에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난 뒤에도 암스테르담이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린 데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다. 



    청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다

    네덜란드와 청어 어장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잉글랜드

    당시 유럽 국가에서 종교는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잉글랜드와 스페인 간 전쟁이나 스페인에 대항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밑바탕에는 첨예한 종교적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교 국가인 잉글랜드가 역시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에 힘을 보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어업 선진국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네덜란드를 향한 질투와 네덜란드 어민들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어업 부흥을 목표로 내세운 엘리자베스 1세와 윌리엄 세실 경이 네덜란드를 굳이 자극하려 하지 않은 점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고 난 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가 처음부터 네덜란드 어민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은 의외로 적다. 아무튼 복잡한 상황에서 네덜란드 어민을 향한 그의 적대감과 분노는 점점 커졌다. 제임스 1세이자 제임스 6세인 국왕은 스코틀랜드 연안에서 자유롭게 청어잡이 하는 상황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더해 한 가지 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바로 세수(稅收)의 불평등 문제였다. 당시 스코틀랜드 어민은 청어를 잡을 때마다 세금을 냈던 데 반해 잉글랜드 어민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스코틀랜드 어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런던의 어업 상인협회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세수 증가를 보장해주는 법안을 왕에게 제안했다.


    제임스 1세 시대에 이르러 선왕인 엘리자베스 1세 시대와 어업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네덜란드인은 얌체 같은 족속이다. 생선을 훔쳐 도망가는 도둑고양이처럼 우리 스코틀랜드 어민의 입에서 물고기를 낚아채 간다.


    이는 1669년에 작성된 스코틀랜드 공문서에 나오는 문구다. 이러한 상황은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네덜란드 어업이 눈덩이처럼 점점 거대해져 가는 무서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무리 네덜란드가 잉글랜드의 중요한 동맹국이라 해도 자국의 이익이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제임스 1세는 “앞으로 잉글랜드인이나 스코틀랜드인이 아니면 국적이나 신분과 관계없이 반드시 조업권을 취득해야 한다. 외국인으로서 조업권을 취득하지 않은 자가 우리나라 연안과 해역에서 조업하는 일을 이제 더는 허용하지 않겠다”라고 포고했다. 이에 네덜란드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사이에 밀고 당기는 치열한 교섭이 1624년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세 차례의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으로 번진 ‘청어잡이’ 불화

    찰스 L.커팅의 책 『물고기: 가공과 보존』에 따르면 1679년 시점에 네덜란드에는 4,000여 척의 어선과 20만 여 명의 어부가 있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이어진 어업 진흥책에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어민과 어업 상인은 17세기 안에 압도적 우위를 점한 네덜란드를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번영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18세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네덜란드 어업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을 꼽아보라면 ‘끊임없는 전쟁’을 들 수 있다. 네덜란드는 1652년 제1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된 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이 종료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 대부분을 잉글랜드나 프랑스, 혹은 두 나라 모두와 전쟁을 치르며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됭케르크 해적은 잠시도 잠잠할 새 없이 약탈과 살육을 반복했다. 바다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해양 강국 네덜란드라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어업에 관한 권리를 한 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던 네덜란드의 외교 방침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같은 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이 훨씬 현명하지 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말이다.



    신항로 개척시대를 열어준 주인공,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

    말린 대구 ‘스톡피시’가 없었다면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바이킹의 아메리카대륙 발견도 없었다

    말린 대구 스톡피시는 노르웨이 북서부 지방에서 맨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톡피시는 아이슬란드나 스칸디나비아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섣불리 따라 하기 힘든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으로 스톡피시를 만들려면 한랭한 기후와 온화한 기후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금을 사용하지 않고 장시간 볕에 말려 망치로 수십 수백 번 두드린 다음 하루 넘게 물에 불려야 겨우 요리할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스톡피시는 뛰어난 보존성이 장점이다. 심지어 소금에 절인 청어와 비교해도 보존 기간이 훨씬 길다. 통상 소금에 절인 청어의 유통기한이 1년 정도인 데 반해 스톡피시의 경우 보존 상태가 좋으면 5년도 넘게 보관할 수 있다. 게다가 수분을 빼고 바짝 말린 덕분에 무게가 가볍고 부피도 적다. 이런 장점 덕분에 스톡피시는 먼 바다로 항해할 때 비상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나 뛰어난 상품을 이재에 밝은 상인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상인들 눈에 스톡피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였다. 노르웨이의 로포텐 제도의 스톡피시는 노르웨이 남서부 베르겐에서 곡물과 거래되었다. 그리고 10~13세기 무렵에는 독일 상인들이 베르겐을 찾아와 거래했다. 1350년 무렵 한자동맹은 베르겐에 사무소를 설치했다. 비슷한 시기인 14세기 중반에 한자동맹은 스톡피시 무역을 독점했다. 이 독점이 노르웨이 왕국과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스톡피시 덕분에 국제무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고 시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신항로 개척시대를 가능케 한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

    스톡피쉬의 뒤를 이어 바야흐로 ‘소금에 절인 대구’가 등장한다. 스톡피시는 햇볕에 널어 말리기 위한 장소가 있어야 하고 소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주 한정된 지역의 연안 어업에서만 생산할 수 있다.


    원양 어선에서 조업을 마친 대구잡이 어선이 모항(母港)으로 들어온다. 어부들은 볕에 널어 말릴 공간을 확보할 때까지 대구를 소금에 절여두어야 했다. 지리적인 차이는 어업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대구잡이 역사에 관한 한 지리적인 요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소금’이다.


    프랑스는 비스케이만에 대규모 염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프랑스 어선은 먼 바다로 나갈 때마다 아낌없이 소금을 사용해 푹 절인 대구를 싣고 모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제대로 소금에 절인 대구를 사람들은 ‘그린 피시’라고 불렀다. 여기서 ‘그린’이라는 단어는 흔히 말하는 ‘초록색’이 아니라 볕에 말리지 않은 ‘날생선’을 의미한다. 프랑스에는 살이 부드러운 ‘그린 피시’를 거래하는 큰 시장이 있었다.


    한편 잉글랜드는 갓 잡아 올린 대구에 최소한의 소금간만 해서 항구로 돌아와 볕에 말리는 보존 방법을 선택했다. 기후가 맞지 않아 국내에 대규모 염전이 없어 소금을 넉넉하게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나온 방법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감칠맛이 도는 새로운 말린 대구 상품이 탄생해 큰 인기를 끌었다.


    신항로 개척시대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 아마도 대다수 사람이 ‘황금’이나 ‘보물’, ‘향신료’ 등의 화려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그러나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가 없었더라면 신항로 개척시대가 그 정도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으리라 추정하는 연구자가 많다. 마치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스톡피시가 바이킹의 뛰어난 항해 능력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었듯 말이다.



    식민지 미국이 잉글랜드에서 독립하고 강대국이 된 원동력, 대구

    잉글랜드의 서인도제도 사탕수수 재배가 ‘소금에 절인 대구’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린 이유

    17세기 중반에 두 패권국가는 뉴펀들랜드 인근 해역과 서인도제도라는 엇비슷한 지역에 포석을 놓고 판세를 뒤집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다. 사뮈엘 드 샹플랭이 세인트로렌스강 유역에 터를 잡고 식민지를 건설한 1608년 이래로 꿋꿋하게 버텨온 퀘벡 식민지였다. 그 후 1644년 루이 14세의 재무 총감으로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퀘벡 식민지에서 대대적으로 식민지 활동을 개시했다.


    한편 잉글랜드 진영에서는 청교도 혁명으로 잉글랜드 어선의 세력이 눈에 띄게 쇠퇴했다. 그리고 1662년에는 뉴펀들랜드의 애벌론반도 플라센티아에 프랑스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1630년 이후 프랑스는 서인도제도로 진출해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설탕 생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콜베르는 대대적인 육성책을 펴서 설탕 생산에 힘을 실어주었다.


    1641년 프랑스와 앙숙인 잉글랜드는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 무렵 본토에서 초콜릿 음료와 홍차가 크게 유행하며 설탕 소비가 급증한 탓이었다. 카리브해에서의 사탕수수 재배로 큰 재미를 본 잉글랜드는 이를 계기로 잉글랜드령 서인도제도에서도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사탕수수 농장에서 부릴 노예와 노예의 식량으로 쓸 소금에 절인 대구 수요가 덩달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즉 ‘대구’와 ‘설탕’과 ‘노예’라는 똑같은 상품을 두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라는 두 나라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 경쟁에서 잉글랜드의 패권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지역이 바로 뉴잉글랜드였다. 프랑스와의 경쟁 과정에 축적한 막대한 부를 밑천으로 삼아 잉글랜드의 미국 식민지는 독립을 위한 기반을 착실히 닦아 나갔다.



    청어와 대구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를 어떻게 지배했나

    단식일의 변화: 육식을 금하는 날에서 적극적으로 생선을 먹는 날로

    기독교의 단식은 애초 식욕이라는 간접적 쾌락을 이김으로써 육체를 극복하고 성욕의 원천인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성욕을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단식일에 생선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고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생선을 먹는 날로 변화해갔다. 그러더니 급기야 ‘피시 데이’, 즉 ‘생선을 먹는 날’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피시 데이’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기간이라 하여 ‘금욕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옮긴이)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몇 가지 가설이 거론되는데 일테면 이런 것이다. 고대 비너스 여신을 믿는 신자는 매주 금요일에 여신에게 물고기를 바쳤으며 생선을 요리해 먹는 문화가 있었다. 한데 로마 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 로마 가톨릭이 그 문화를 수용하면서 생선을 먹는 문화가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당시의 일은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탓에 상당 부분 추측과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순수한 저녁식사’라는 의미를 가진 유대인의 ‘세나 푸라’가 기독교로 계승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아니, 어쩌면 굳이 비너스와 ‘세나 푸라’를 끄집어낼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사건을 단식의 근거로 들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는 과일과 허브를 먹었고 생선은 낙원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야 차츰 먹기 시작했다.


    ‘청어’와 ‘대구’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 경제 시스템을 좌우할 수 있었던 이유

    18세기 이전에 서민들은 싱싱한 날고기를 연중 사계절을 통틀어 여름에만 먹을 수 있었다. 여름이라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서민에게 고기는 일상적으로 구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사치스러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겨울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아 가축을 먹이는 데 필요한 여물을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사실상 축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가을이 오면 번식을 위한 가축을 제외한 거의 모든 가축을 도살한 뒤 고기를 소금에 절여 보관했다.


    비단 고기만이 아니었다. 부활절이 지날 무렵까지 버터와 치즈, 달걀도 충분한 양을 얻지 못했다. 사순절 단식은 갈무리해둔 식량이 떨어져 고통받기 시작하는 때와 시기적으로 정확히 겹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기에 고기를 먹지 않는 관습은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4세기 초 동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는 특정한 날에 생선을 먹도록 명을 내렸다. 아마도 양에 제약이 있는 육류 소비를 억제하려는 경제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단식일이 지닌 경제적 의미와 가치는 단지 육류 소비의 절약에만 머물지 않았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단식일은 ‘고기를 먹을 수 없는 날’이라는 약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보다는 기독교 세계에서 모든 신자가 ‘생선을 먹는 날’이다. 그로 인해 1년의 절반 정도 기간 엄청난 양의 생선 수요가 발생한다. 이렇듯 단식일이 ‘고기를 먹지 않는 날’에서 ‘생선을 적극적으로 먹는 날’로 탈바꿈함에 따라 생선은 기독교 세계 경제 시스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기독교 세계의 역사를 좌우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이 단식일을 ‘생선 먹는 날’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는 몇 가지 필수조건이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우선 아무리 생선을 먹고 싶어도 생선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유통과 보존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과 달리 대량 운송 기관도 냉장고도 없던 시대에 생선을 먹어야 한다는 종교적 관습을 지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많은 양의 생선을 한꺼번에 잡기 위해서는 고도의 어업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또 여기에 더해 그렇게 잡은 대량의 생선을 장기간 보존하는 기술도 필요했다. 물론 장기간이라고는 하지만 요즘처럼 편의점이나 마트 같은 소매 형태 판매가 발달한 세상은 아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게다가 유럽의 내륙부에 사는 주민까지 포함해 모든 기독교 신자에게 생선을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효과적인 물류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순절은 한 달이 넘는 기간이므로 1~2주밖에 보관하지 못하는 생선이라면 무용지물이다. 마지막으로 대량의 상품을 운송하는 능력이 확립되어야 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하면 자칫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청어와 대구 모두 대량의 어획이 이루어졌다. 14세기에 무려 1년간이나 보존할 수 있는 ‘소금에 절인 청어’라는 상품이 등장했다. ‘스톡피시라는 이름의 상품도 탄생했는데 이는 대구로 만든 것이었다. 스톡피시는 소금에 절인 청어보다도 훨씬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상품이 개발된 시기는 10세기 이전이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자동맹‘이다 처음에 이 동맹은 ’소금에 절인 청어‘의 판로를 독점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고 영향력을 확대했는데 나중에 ’스톡피시‘로 전략 상품을 바꾸었다. 그 과정에 한자동맹은 코그선이라는 이름의 중세시대 최초 대형 운송선을 동원하기도 했다. 청어는 한자동맹뿐 아니라 이후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에 질세라 대구도 북미 대륙 개발과 미국 독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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