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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저   자 : 악셀 하케(역:장윤경)
출판사 : 쌤앤파커스
출판일 : 2020년 05월

  •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품위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이쯤에서 품위와 연관된 개념들을 조금 더 살펴볼까 한다. 품위라고 하면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일상생활과 연계해 예절·매너·에티켓 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를테면 수프나 국을 먹을 때 소리를 내지 않는다거나, 여성이 출입할 때 문을 잡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규칙은 사회생활에서 꼭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겨지며, 혹시라도 거스르면 큰 실례가 된다. 매너 혹은 에티켓이라 불리는 태도는 아돌프 크니게(Adolph Knigge)라는 독일인과 관련이 있다. 독일에서는 매너 하면 크니게를 떠올릴 정도다. 식사 예절을 비롯해 옷차림이나 사람과의 만남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 크니게 덕분에 서구인들은 칼과 포크 그리고 냅킨을 잡을 때에도 일관된 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악수나 손등 키스, 넥타이 매는 방법에도 나름의 규칙이 정해져 이른바 서양식 에티켓이 널리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루는 품위는 에티켓이나 매너와 다르다. 크니게는 1788년에 펴낸 초판본(이후 판본에는 처음의 내용이 수차례 수정되고 가공되었다)에 『인간관계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였다.


    크니게는 이 책을 교육 목적으로 저술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는 시민 계급이 크게 성장하여 기존과는 다른 새롭고 권위 있는 계층으로 자리 잡던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의 시민 계급은 귀족에 버금가는 면모를 갖추기 위해 언행을 재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독문학자이자 수사학자인 게르트 위딩은 크니게가 “예의범절을 갖춘, 도덕적으로 완벽한 시민이 실로 모범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해석한다. 위딩의 분석에 따르면 “시민 개개인을 관리하고 육성하여 우아한 계층으로 거듭나도록 만드는 것”이 크니게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책에서 크니게는 무뚝뚝하고 거친 태도를 경계하며 “부드러움과 유약함, 조심스러움” 등을 강조한다. 또한 부유한 시민 계급의 “상스러운 오만함, 자유분방한 인간관계, 달변, 수다스런 대화, 경박함” 등은 교육을 통해 우아함과 고상함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권한다. 가세가 기운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크니게는 가정적이고 ‘시민다운’ 삶이 주는 기쁨을 행복이라 여기며 높이 샀다. 위딩은 크니게의 책이 서구 에티켓의 초석을 놓았다고 본다. 인간관계와 처세술을 다룬 그의 책은 훗날 서구 사회 예의범절의 입문서가 되어 일상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크니게의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따로 있다. 그는 이상적인 생활 태도가 명령에 의해 억지로 강요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통해 저절로 생겨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책에서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다양한 인간들의 성품을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남자는 주변 사람들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했다. 그렇게 크니게는 상대방과 최상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 책의 초입에 소개한 어느 독자가 짚었던 부분이 정확히 이 지점이다. 그가 품위를 “말랑말랑한 가치”라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품위는 타인과 더불어 사는 데 완충재와 윤활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메가 지적하듯, 오늘날의 사회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도덕적 규범”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개인들이 사회 공동체를 오직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질서와 규범에는 무관심한 채 자유를 위한 고유의 행동반경을 방어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 사회는 결속과 분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른바 '중간 세계'가 있다. “이 중간 세계에서 개인은 타인과 서로 조율하고 화합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면서(사적 영역을 존중하며) 나란히 성장해 간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품위가 존재해야 할 곳은 바로 이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탈'이 아닌 '동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럼 자연스럽게 인간의 공존 및 공생에 토대가 되는 요소들로 넘어가게 된다. 에티켓의 아버지인 크니게는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또한 에리히 케스트너와 한스 팔라다 같은 소설가들이라면 작품 속에 무언가를 담지 않을까? 무엇보다 한스 팔라다는 전범자들이 권력을 막 장악하던 1930년대에 인간의 공존에 필요한 필수 요소들을 글로 풀어내지 않았을까?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기초 지식을 다루지 않았을까? 인간으로서 한 개인이 갖추어야 하는 염치를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팔라다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소설 『소시민, 이제 어쩌지?』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판매원으로 살아가는 요하네스 핀네베르크와 그의 아내 엠마의 삶을 그렸다. 당시 경제 위기와 정치적 급진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나치 시대로 넘어가면서 결국 끝을 맺는다. 사회적 혼란 속에서 핀네베르크는 해고라는 불행까지 겪지만 그럼에도 그는 비극적 운명에 맞서고자 고군분투한다. 핀네베르크와 엠마는 일상의 작은 행복을 통해 안정적인 삶을 꾸리고자 한다. 그들은 서로 간의 사랑과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줄 거라 믿는다. 팔라다는 엠마가 사랑·행복·품위 같은 “몇몇 단순한 개념들”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시대를 꼬집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못된 상태로 살아가지.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도 그렇게 나쁜 인간으로 살아갈 거야. 아무도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위대한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늘 생각하지만 소시민들은 그걸 느끼지 못하지. 소시민들의 내면에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굳이 그걸 생각해내지 않아.”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우리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 상황과 매일같이 혼란스럽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 무언가가 결핍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실제로 그 무언가는 꽤 오랫동안 우리 안에 없었다. 그런데 포퓰리스트와 극우 집단 같은 '반민주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우리 안에서 사라진 그 무언가가 새삼 떠오르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열정'이며, 다른 하나는 명확히 제시된 '비전'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잃어버린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덤덤해졌다. 예컨대 공동체·소속감·연대 의식 그리고 몰입과 열정 등이 지닌 의미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상'이 없는 상태로 삶을 지속하며, '시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민으로 살아간다. 지금 우리는 기술 발전에 열을 올리며 첨단을 향해 가고 있다. 동시에 원인 모를 불안과 지속적인 자기표현 또한 극에 달하고 있다. 우리는 내심 자신의 불안을 부인하지만, 사실 현대인들은 과도한 불안에 뒤덮여 있다. 침착하고 냉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너무도 산만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하수구

    개인적으로 나는 페이스북의 설립자 겸 대주주인 마크 저커버그가 비전을 제시하는 선구자이며 인도주의자로 칭송받는 현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현재 그의 회사는 인류 공생의 토대가 차츰 허물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려 뻔뻔하게 이를 이용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인 페이스북은 이익을 극대화하고 세금을 줄이는 데 정통하다. 또한 광고를 통해 엄청난 수입을 거둬들이며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으로 과거 (페이스북을 향해) 비판적이고 중립적이었던 언론에 재정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몇 해 전부터 페이스북은 생방송으로 중계할 수 있는 '페이스북 라이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서비스로 인해 다양한 사건·사고가 벌어졌다. 예를 들어 한 번은 미국 시카고에 사는 네 명의 젊은 남성이 정신 질환 장애인 한 명을 학대하는 장면을 생중계로 내보냈다. 스웨덴 웁살라에서는 세 명의 남성이 여성 한 명을 집단 성폭행하는 장면을 생중계했는데, 이 영상은 특정 페이스북 그룹에서만 중계되었다. 또한 미국 클리블랜드의 한 남성은 자신이 거리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을 페이스북에 게시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동물 학대와 테러 선전 그리고 반유대주의 선동 등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일들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처럼 쓸데없는 일에 우리의 생각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페이스북을 통해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이런 쓰레기 같은 게시물들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아니, 사라져야만 한다. 또한 이 오물들은 온라인 공간에 퍼트려 놓은 자들이 제 손으로 직접 깨끗이 치워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다.


    말했듯이 나는 법률가도 아니고 소프트웨어 기술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의식 있는’ 시민이라면 최소한 이런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이스북이라는 기업은 자신의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다뤄지는 것을 왜 보고만 있는 것일까? 적어도 크게 놀라거나 괴로워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또한 그런 일들을 저지하기 위해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사이트에서 날마다 비방과 거짓으로 점철된 홍수가 끝없이 넘쳐흐르는데 왜 여기에 대응할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일까? 저커버그의 주변인 중에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거나 그가 지금 적절한 대응책을 계획 중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회사의 이익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게 이용자들은 돈이나 마찬가지다. 각 이용자는 회사의 가치를 높여주며, 광고 수입을 가져다준다. 페이스북은 끊임없이 성장 중이고, 그 성장 가도는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의 유대 관계를 토대로 성장하는데, 이 관계는 지속적으로 새롭게 형성된다. 이는 페이스북의 성장에 가속도를 붙여준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존재여서 타인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 페이스북을 포함한 다른 모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인간의 이런 욕구를 이용하여 이득을 취한다. 게시물 아래 위치한 '좋아요'는 (애정과 진심을 두고) 서로 영원한 경쟁을 벌이도록 설계되었기에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의 주제는 법이 아니라 공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법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려면 각 개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자세와 배려이다. 이를테면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세계에서 나름의 규칙을 하나둘 만들어가며, 석기 시대 때부터 물려받은 충동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동물의 조심성처럼 서로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 모두가 각각 한 명의 시민으로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종종 나는 이렇게 자문하곤 한다. 왜 하필 사람들은 누군가 전혀 의도하지도 않은 말에 상처를 받으며, 일면식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던진 인종 차별주의적인 비난에 모욕을 느끼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댓글에서 사람들은 보모라는 직업을 존중받지 못하는 일로 치부했다. 이 또한 차별주의적인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이런 전제 위에서 논쟁을 펼쳤다. 그리고 이 부분을 따로 지적하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재차 말하지만 지금 우리는 지극히 복잡다단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공간과 세계화라는 시대적 현상 속에서 무수한 것들이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뭐든 서로 ‘쉽게 쉽게’ 다루고 넘어가려 한다. 상대와 마주 앉아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컴퓨터 앞에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타자를 치며 뒷공론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후자는 이런저런 반론의 댓글을 남긴 다음, 커피를 끓이거나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본인이 쓴 글을 잊는다. 그러는 동안 그 댓글을 읽은 상대방은 인종 차별주의적인 발언에 타격을 받고는 얼음찜질로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분노로 거품을 물며 새로운 댓글을 달게 된다. 그러나 이 댓글은 읽히지 않는다. 방금 말했듯이 분노를 유발한 당사자는 자신이 쓴 댓글을 까맣게 잊은 채, 커피를 내린 다음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로도 그는 철물점에 가서 사야 할 물건들 생각에 빠져 있을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뉘앙스 같은 미묘하고 세부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0 아니면 1이다. 극단적이고 차가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그림자도 짙고 서늘하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했는가

    동독이 몰락하던 시절, 신문 기자로 활동하던 나는 당시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동독 지역은 새로운 주(州)로 재편되어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 있었다. 당시 나는 취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대부분은 나를 보자마자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나 시간이 없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모두가 정신이 없던 시기였기에 동독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 또한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그들과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내가 그들의 삶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내 앞에서 기나긴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개중에는 눈물을 쏟으며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앞서 등장한 장관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고 말한다거나, 나를 더 괜찮은 대화 상대로 내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그럴 목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것도 아니다. 당시 나는 기자로서 동독 주민들과의 대화와 의사소통에 관심이 많았다. 말 그대로 일을 위해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즉 앞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존하려면 더불어 살아야만 하고 또 더불어 살고자 하는 타인에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관심은 결코 손해로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정치인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현대인들은 분주한 업무와 정해진 일상에 치여, 타인을 향한 일말의 관심이 끼어들 여유조차 없다. 그로 인해 (우리 삼촌의 이야기로 돌아가 비교했을 때)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며, 인간이라면 응당 받아야만 하는 존중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드레스덴의 장관 같은 정치인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와 카메라 너머에 있는 유권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 노부인에게 적극 관심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는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단지 먼저 무언가를 말하기만을 기다리며 대화를 요구했다. 관심은 뒤로 한 채로 말이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이나 기사를 보면 기본적으로 독선적이고 가르치려 드는 어조가 깔려 있다. 자신의 의견이 확실히 옳다고 여기며 다른 견해는 들으려 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식의 말투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며 그 게시물에 담긴 생각이 일부 타당하더라도, 그리고 진실 추구에 어느 정도 이바지했더라도 왠지 모를 거부감을 가지게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독단적인 어투의 게시물은 반감을 불러일으켜 호기심조차 사라지게 한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급진주의화되고 있다. 이들은 낯설고 생소한 모든 것을 증오로 느끼며 이 증오라는 감정 속으로 도망친다. 그로 인해 어떤 이들은 영양 섭취 면에서 극단적 방법만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믿으며 그쪽으로 빠져들고, 건강에 집착하는 이들은 자신의 몸에 모든 것을 결며 완벽한 육체를 가지려 애쓴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언어에 엄격한 법칙을 정해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를 지키려 한다. 이 모든 현상들은 불안이 극심해진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각 개인이 나름의 안정감과 자존감을 확보하기 위해 찾아낸 대안인 셈이다. 개인들의 이런 행보는 결국 광적으로 치달아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향해 벽을 쌓게 하고 이견에 부딪혔을 때 조율하는 능력을 떨어트린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본인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특정 집단에 속하는데, 이때 이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척 및 투쟁의 대상이 된다. 집단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이들에게 위협이 된다.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품위나 정의, 연대감 등의 가치들은 동일한 가치로 한데 묶여 똑같이 취급되고 만다.


    하필이면 지금 우리 시대에 너무도 뻔뻔한 거짓말들이 이처럼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저변에는 인간의 특성이 깔려 있다. 즉 우리는 항상 진실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이유가 뭘까? 때때로 우리는 진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에게는 아주 오래된 갈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며 세상을 보다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향한 그리움이다. 단순 명료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가 존재할 때 인간은 안정을 느낀다. 이러한 욕구는 현실 세계에서는 채워지기가 힘들다.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고단한 일들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이 더욱 어렵고 복잡해질수록 단순함에 바탕을 둔, 문제 해결책을 가진 지도자를 향한 갈망이 더욱 커진다. 세상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며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다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지도자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다. 설령 그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거짓 여부에는 관시이 없다.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감정이다. 이때 유발되는 감정은 몹시 강렬해서 사람들은 이 감정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과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소개한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를 통해 이야기가 인간의 결합과 연대에 얼마나 중대한 역할을 했는지를 매우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여기서 이야기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목적은 진실의 전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예로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신을 향한 신앙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가톨릭교회의 핵심은 신의 실존을 함께 확신한다는 데 있다.


    다른 모든 생물들과 달리 인간은 언어를 지니기 때문에 이 같은 이야기들을 서로서로 나누고 전하는 일이 가능하다. 또한 인간은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라리의 주장은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라리가 거론한 이야기의 힘은 우리가 어떤 가치를 공통으로 확신하게 될 때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컨대 품위와 같은 가치 말이다. 품위 역시 우리 인간이 함께 이루어낸 가치이다. 품위라는 가치를 공통으로 확신하는 사회는 올바른 행동과 태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절실히 소망할 때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



    그럼에도 품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물었다.


    “내 인생에 원칙이 하나 있다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땐 무조건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라고 할 수 있어. 이러면 인생관이 너무 단순해지나?”


    “딱 그거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며 무슨 행동과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자신의 언행을 올바르고 경건하며 선하게 하는 일에만 신경 쓰는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넘친다. 주변 사람들의 악하고 검은 마음을 엿보지 말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너만의 길을 걸어가라.’”


    이야기 방향을 다시 돌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연설문을 잠시 들여다볼까 한다. 그는 졸업식 축사에서 우리 인간에게 정해진 ‘기본 설정 값’이 있다고 언급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내면에 깊이 자리한 자기중심적인 본성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기본 설정을 가진 '보통' 인간은 마치 거대한 공장처럼 단조롭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살아간다. 그러다 가령 퇴근길 교통 체증을 놓고 뭐라도 사려고 마트에 들어서면 마트 안은 지칠 대로 지쳐 신경이 곤두선 인파로 그득하다. 계산대 직원과 그 뒤로 늘어선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지쳐서 넋이 반쯤 나간 상태이다. 월리스는 기본 설정이 정해진 보통의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정은 우주의 중심에 자기 자신만이 놓여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자신을 방해하는 존재로만 느껴지게 한다. 이런 때 우리는 타인을 향해 짜증과 분노를 내게 된다. 자기 중심적인 기본 설정하에서 내 앞을 방해하는 모든 이들을 증오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을 '자연스럽게' 증오하는 쪽을 택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은 더욱 끔찍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러면서 월리스는 바로 이 순간에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생각과 태도가 자동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는 기본 설정 값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르게 본다'는 말은 예컨대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모든 사람들 역시 나처럼 피곤에 지쳐 신경이 곤두서 있으며 불평불만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 중 다수는 나보다 한층 더 힘들고 권태로우며 더욱 고통스런 삶을 지탱하고 있으리라 여기는 태도를 의미한다.”


    수백여 년 전, 인간관계에 필요한 예법을 집필했던 크니게는 인간의 책무와 함께 인간의 다양성을 건드리기도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크니게는 “모든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이 세상에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한편 콰메 앤터니 애피아의 책에서 나는 이런 내용을 소개했다.


    “당신이 아는 모든 인간과 당신이 그들에게 가하는 모든 행위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인간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어떤 개인적인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이 책무를 잊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도덕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인간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 표현도 나는 참 마음에 든다. 이 문구에서 모든 인간이란 우리가 잘 이해하는, 우리와 닮은,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가 공감하는, 우리와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사는, 우리와 겉모습이 같은 사람들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 뿐 아니라 비열하고, 불안하고, 무례하고, 몰염치하고, 어리석고, 시끄럽고, 조용하고, 고집스럽고, 생경하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 어떤 책임이 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는 이들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또한 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인정과 배려 그리고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여기에는 '모든 유형의 인간'과 연대하려는 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연대감은 우리가 인간다운 품위라 칭하는 가치의 근본적인 토대이기도 하다. 각 개인의 문제는 곧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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