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슬럼프였을 뿐, 더 괜찮아질거야
 
지은이 : 한기연
출판사 : 팜파스
출판일 : 2020년 02월




  • 최근 몇 년 간 신체적, 정신적 무기력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번아웃, 우울증, 공황장애, 조울증 등 다양한 정신 질환이 활발하게 이야기되었다. 질환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 불안장애, 강박증 등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도 많다. 현대인이라면 이들 중 하나의 증상에는 속하기 마련이겠지만, 그것이 그 사람을 전부 설명해줄 수는 없다. 하도 번아웃,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그러니까 ‘나도 그런가 보다’ 추측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냥’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 기본적으로 무기력하고 기쁘지는 않은 상태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낸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슬럼프’에 빠진 상태일 수도 있다. 슬럼프는 예전만큼 실력 발휘를 못하는 상태, 예전보다 후퇴된 상태, 침체, 부진의 느낌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통 예술가, 운동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졌다’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엄밀히 생각해보면 그 단어는 일상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삶은 마라톤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라톤을 뛰는 선수인 우리도 슬럼프를 겪을 수 있지 않을까. 그간 막연히 번아웃, 우울증, 불안장애 등으로 얼버무렸던 상태에 ‘슬럼프’라는 적확한 단어가 필요하다.



    잠시 슬럼프였을 뿐, 더 괜찮아질거야


    슬럼프란 무엇일까요?

    ‘이 무기력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요?’

    슬럼프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상태이자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느라 진이 빠진 상태입니다. 내면에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모습을 똑바로 보라고 외치지만 그러기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먼저 몸이 피곤해지고 지치지요, 피곤하고 지친 몸에게 중요한 일이란 그다지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점, 부정적인 면, 개선할 면을 보는 것은 뒷전입니다. 차라리 몸의 어딘가가 뚜렷하게 아프다면 훨씬 마음이 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픈 것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고단하고 지친 일상의 반복을 깨버리는 계기가 되어주니까요. 아프면 아픈 것만 생각하면 되니까요.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을지 몰라요

    늘 자신은 제자리이고 무기력하며 무가치하다고 느끼는데 막상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뭔가 변화를 바랍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다 좋아지고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면 어쩌면 슬럼프는 정신의 아픔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정신의 감기에 걸렸거나 피로가 잔뜩 쌓여, 뭐라도 어떻게 해 보라는 신호를 받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 신호에 멈추어 서서 주목한다면 더 큰 병으로 진행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반대로 마음 속 가득히 걱정거리를 안은 채로, 그렇지 않은 척하다가 한순간에 실족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지난달, 6개월 전, 아니면 1년 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쭉 잠재되어온 것일 수 있습니다. 잠재되어있던 무엇인가가 도화선이 되어 슬럼프라는 결과물로 나타나는 데는 외부의 스트레스가 한몫합니다. 스트레스를 마주할 때 우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온갖 불편한 심정들을 경험합니다. 두려움이나 욕구 불만, 자기 비난, 죄책감 같은 것들에 한꺼번에 휩쓸리게 됩니다.


    슬럼프는 엄청난 스트레스 상황에서 큰 압력을 겪어 사고와 행동이 경직되고 막혀 버리는 상태입니다. 또는 지나치게 감정이 분출해 마음의 사이클에 혼동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정상적인 상태라면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에너지를 모아 어떤 행동을 하며 대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응이 끝나면 만족하면서 그 자극에 대한 행동을 마치고, 다시 다른 것을 경험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다른 동물들의 최우선 목표도 결국 환경에 잘 적응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슬럼프 상태라면 어떨까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력하게 솟구치는 두려움과 욕구 불만, 자기 비난, 죄책감 같은 불편한 심정들을 억누르는 데 온 힘을 쏟을 것입니다. 자연히 현재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람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결국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들을 찾을 능력도 잃습니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게 무엇인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좋은 방법을 선택할 수도, 행동으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슬럼프’입니다.


    ‘제가 왜 슬럼프에 빠졌을까요?’

    슬럼프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려면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경험을 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 마음은, 생각은, 심지어 내 표정과 태도와 성격은 그동안의 내 경험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에 대한 내 역사의 산물입니다.


    수치심에 빠지면 희망은 없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우리 대부분이 수치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자신을 지지해 주는 몇몇 사람에게 이해와 확인을 받고 안심하는 과정을 거치며 생깁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 수치심의 정도가 심각하다고 여기거나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게 되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점점 커집니다. 결국엔 검증받을 기회도 없이 쌓인 수치심의 희생자가 됩니다. 수치심은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 가면 너머까지 낱낱이 보고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릴 것이고, 고치거나 도망칠 수도 없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어느 한 부분을 보는 일도, 아는 척하는 일도 사실은 다 부끄럽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욕구나 바람이 있다는 것도 부끄럽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정상적인 성적 충동을 느낄 때도, 심지어는 슬프거나 즐거울 때조차도 다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지극히 정상적이며 필연적인 부분조차도 그 실체와 분리시킨 채 마치 아무 욕구가 없는 것처럼 굽니다. 느끼면서도 못 느끼는 것처럼 굴고, 슬프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자신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성적으로 아주 둔감한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힘든 느낌과 욕구를 피하기 위해 더욱 문란하게 굴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생생한 부분들로부터 스스로를 잘라내는 것이어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구성한 경험들, 특히 ‘잘 처리하지 못한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슬럼프의 원천을 살펴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두 개만 자기 이야기라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항목이 조금씩 자기 안에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그것은 마음속의 원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새로운 공간이 생겨야 비로소 슬럼프에 대처하거나 그것을 덜어낼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 ‘새로운 공간’은 자신의 엉킨 문제들을 풀어내야 생기는 영역입니다. 당신이 왜 삶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지, 왜 늘 공격받는 기분이 드는지를 알아보세요. 거듭되는 당신의 슬럼프 속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면, 슬럼프에 빠지기 쉽습니다

    일상이 일상답지 않은 완벽주의자

    일하기 싫다고요? 실수할까 봐 두려운 거예요

    일을 대충하거나 자꾸 미루는 사람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일을 반드시 해야 하고 혹은 완성해야만 하는 의무로 느낍니다. 그들은 매사를 ‘요구받는다’고 느끼면서 미루고 대충하는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저항‘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하기 싫다는 느낌이 들 수 있지요. 성가시거나 구미에 맞지 않는 일, 정녕 원치 않는 일이 주어지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성가신 기분을 ’요구 저항‘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일상적인 일을 규칙처럼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보거나, 어떤 기준을 요구당하는 것으로 느낀다면, 그건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요구하나요? 혹시 당신 자신?

    당신이 혹시 요구 저항자는 아닌지 한 번 살펴보세요. 무엇엔가, 누구에겐가 압력이나 기대나 요구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잠깐 멈춰서 자신의 반응을 날카롭게 자각해 보세요. 누군가가 기한을 주면서 일을 해 놓으라고 요구하면 마음이 불편해지나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관찰해 보세요. 무슨 일인가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거부감이 생기나요? 또 자꾸 일을 미루지는 않나요?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을 앞두고 ‘아직 시기가 좋지 않아서’ ‘아직은 여건이 되지 않아서’ 늦추고 있나요? 하지만 결국 여전히 같은 조건에서 그 프로젝트를 나중에 시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나요? 왜 주저하나요? 왜 평범한 요청을 들어주는 데 그토록 성가신 기분이 들까요? 언젠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가요?


    대부분의 일이 의무처럼 느껴져 자꾸만 미룬다면, 그 마음 밑바닥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그럼 사람들에게도 일은 일이 아니라 평가입니다. 평가는 그저 평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걸린 문제입니다. 평가 자체는 원래 일의 정도를 헤아리는 것인데, 이들에게 평가는 자신의 실수가 만천하에 밝혀지는 행위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유도 자신이 유능하다는 평가를 계속 받을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부정적 평가보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

    이들의 이런 신념은 사실 자신의 불안감을 잠재우려는 나름의 아이디어인 셈입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좋지 못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고, 이는 곧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연결에는 어린 시절 부모와 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실수는 곧 부모의 사랑이 철수되는 것을 의미하며, 사랑의 철수는 곧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애정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버려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니 실수를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실수가 드러날 수 있는 평가를 막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됩니다. 실수를 면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결정을 미루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어린 시절 자신이 어떤 일을 잘하건 못하건 간에 부모는 늘 나를 인정해 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어땠을까요? 평가를 앞둔 일이라 해도 그토록 등 떠미는 일로 느끼거나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심정은 들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관여하는 결정의 대부분은 수정할 수 있고 번복해도 되는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100%짜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꿀지 말지를 고려하면 됩니다. 그때도 역시 얼마나 더 나은가를 상대적으로 따져 보면 그만입니다. ‘완전히’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쪽으로 결정하면 됩니다. 물론 결정을 바꿀 때 자존심이 상하거나 창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결정을 번복했다고 사회적으로 끝장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끝내는 잘못된 결정으로 판명이 나더라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고질병보다는 낫습니다. 결정을 내린 후에야 비로소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신이 처한 입장과 상황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실수가 있어야 배울 수도 있습니다.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미신입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면 완벽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완벽성은 미신입니다. 미신이란 어떤 일과 그 일의 결과가 연달아 일어났을 때, 분명한 연관성이 없을 때조차도 둘 사이의 관련성을 굳게 믿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언젠가 보고서를 제출한 후에 대단한 찬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해 봅시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한 일이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것이었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일까요? 그 일을 평가한 사람이 후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보고서와 무관하게 당신의 노력을 참작해 좋게 평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일과 그 실수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모든 사안에 대해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사소한 일 하나를 마치 커다란 돋보기로 들여다보듯이 확대 해석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을 곧 삶 전체로 인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실수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를 못합니다. 내가 아닌 남이 완벽하지 못할 때에도 크게 실망하고 화를 냅니다. 심지어 어떤 일에서든 결점과 문제점을 먼저 찾아내는 비상한 능력자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엔 사는 것 자체가 실망이고, 무엇에 대해서든, 누구에 대해서든 참을 수 없습니다.


    일에서 실수는 인격의 결함이 아닙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방어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지적할 때 ‘아니야! 내가 옳아!’라고 입증하려할 때의 압박감도 상당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실수에도 완벽성을 적용시키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100% 완벽할 수 없는 것처럼 100% 완벽한 실수도 드물다는 것을 모릅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어떤 것은 실수이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합니다. 어느 면은 잘했는데 다른 면이 조금 모자란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 실수를 지적했을 때 “아, 그런가요? 제가 실수를 했군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상대방은 자신이 인정받았다고 느끼면서 “뭐, 전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라고 할 것입니다. 당신이 실수를 인정한다고 해서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를 모자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은 당신의 어떤 부분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일의 실수를 인격의 결함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그저 당신의 실수 하나일 뿐입니다.


    실수를 건강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실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일종의 ‘신호’입니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안 하면 빨간불이 깜빡이거나 소리가 나듯이 실수는 당신에게 천천히 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신호입니다. 진짜 문제는 실수 그 자체가 아니라 실수 이후의 태도입니다. 실수를 반성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그것으로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물론 스트레스조차 안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감당할 만하지 않은가요? 끝끝내 아니라고 우기든지, 스스로 자책하며 우울해 하든지, 다른 사람 책임으로 떠넘기든지, 회피해서 문제를 악화시키든지 할 정도의 실수는 사실 세상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 독(毒)이 될 만한 실수는 흔치 않다는 말입니다. 실수를 하나의 ‘경고’로 인식하는 습관을 가져 보세요.


    쉬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필수 사항이에요

    쉬는 것이 죄스럽나요?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 중 극소수만이 자기 모습에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삶에 은근히 자부심을 갖거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겪는 심리상태를 ‘휴식 혐오증’이라고 부릅니다. 해야 할 일이나 예상되는 일 이상으로 일을 열심히 하고 일에 대해 생각하느라 전혀 쉬지 않습니다. 이들은 일주일에 60~70시간을 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작업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만 계산한 것이고, 일과 관련된 생각을 하는 시간까지 셈한다면 사실 그 두세 배를 일한다고 봐야 합니다.


    왜 자신을 위해 짧은 휴식도 용납하지 않는 걸까요? 쉬는 것을 죄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어야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쉼 없이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긴장을 풀고 휴식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어떤 일을 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좋고 나쁨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일에는 반드시 동기가 뒤따라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를테면 조깅을 했으니 과자를 먹어도 된다거나, 과제를 제대로 못했으니 느긋하게 목욕은 할 수 없고 샤워로 대신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나 자신을 돌보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부터 하세요

    이 모든 상황이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얻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잃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에 제대로 된 휴식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입니다. 당신이 휴식 혐오자라면 휴식이라는 과업을 대단한 ‘일’처럼 의도적으로 삶 속에 배치해야 합니다.


    우선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또 머릿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만 해.’하는 생각을 열심히 하게 되겠지요. 그 또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억압하는 사람

    화를 참고 이성적이어야 어른?! 결국 폭발합니다

    착한 여자, 사나운 여자 따로 있나요? 사실 모두 괴로운 사람일뿐입니다

    착한 여자들은 화를 내고 나서 겪어야 하는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화를 자기 안에 가둡니다. 하지만 가둬 둔 것 안에는 사실 분노만이 아니라 그녀의 생각과 감정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다른 사람과 자신의 차이를 내보이는 것인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분위기를 화목하게 하는 데 자기 에너지를 써 버립니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감정을 가두는 데도 에너지가 드니까, 정작 자신을 분명히 하는 일에 쓸 에너지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런 일에 서툴러지지요. 즉, 착한 여자가 될수록 다른 사람의 느낌과 반응에는 예민해지는데 자기 내면의 소리에는 둔감해집니다.


    ‘착한 여자’의 반대말로 ‘사나운 여자’를 상상해 봅시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는 사람, 또 성질이 불같아서 항상 누군가와 싸우는 것 같은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흔히 ‘사납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납다’는 것과 ‘분노를 잘 처리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납다’와 더불어 ‘떼를 쓴다’ ‘불평을 잘한다’ 등의 말은 모두 무기력한 사람들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 본인은 정작 무엇인가에 발목을 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 태도들이 실재로 자신이 불편해 하는 것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여자’와 ‘사나운 여자’는 얼핏 보면 양극단의 모습 같지만 사실은 같은 기제를 가진 다른 표현입니다. 표현을 하고, 하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무기력하고 무능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똑같습니다. 자기 존중감이나 위신을 지키지 못했다, 정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느낌에 휩싸여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이 두 유형의 사람 모두 분노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노가 얼마나 두려운 것이며, 어떻게 억압하고 부인해야 하는 것인가 알았을 뿐입니다. 결국 둘 다 분노를 엉뚱한 방법으로 표출해 자신의 이익과 반대되는 행동만 반복하게 됩니다.


    감정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대하는 것도 이런 교감이요, 공감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두려움이나 긴장이 아닌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고 만족스러운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순서입니다. 공감은 내가 먼저 남에게 내 생각과 마음을 드러낸 후에 따라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반응에 먼저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그것만 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건 타인의 반응이 아니라 자기 자신, 즉 자신이 행동하고 느끼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관찰하고 이해하면서, 타인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진솔한 자기표현’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거나 감명을 주거나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일 뿐입니다.


    말하지 않으면 절대 모릅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작 공감이 필요한 힘든 경험에 대해서 진솔한 자기표현을 더욱 하지 않습니다. 힘든 감정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구질구질하게 여기거나, 서툴고 우스운 사람이 하는 일로 여깁니다. 혹은 자존심 때문에, 고집 때문에, 해 보지 않아 너무 어려워서, 여하튼 남에게 절대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 하는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그중 정말 자기 이야기를, 자신의 힘들고 어려웠던 이야기를 과연, 누가, 얼마나 할까요?


    우리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떠드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혹여 자기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월감을 내비치거나 자랑거리를 둘러댑니다. 이렇게 무의미한 히스테리적인 대화로 공허한 내면을 채우면서 정작 심리적인 고통은 서로 외면합니다.


    힘들고 나빴던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내게 그렇게 한 그 상대방’을 찾아서 대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힘들었던 그 경험을 감정적으로 힘든 것임을 스스로 알아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나쁜 일을 겪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아도 그 일과 연관된 불만스러운 감정은 해소됩니다. 그리고 우리 정신에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감정 표현도 쓰기나 읽기처럼 훈련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성찰을 통해 기억과 경험을 인식하면서 감정을 불러오고, 긴장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고통이나 슬픔과 같은 진솔한 감정이 상대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면 감정이 해소되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원하던 것이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못하면 고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통이 일어나고, 더 나아가 공감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겠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잘난 척에 좋은 소식만 일삼는 이야기도 환영을 못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솔한 자기표현이란 남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것들에 대해 자연스럽고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표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걸음마부터 배워 보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는 것부터 시작해야합니다. 그렇게 해도 부끄럽지 않으며, 구차한 것도 아니고, 상대가 당황하지도 않을 것이며 아무도 상처입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공감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마치 옹알이를 하듯 저 안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드러내 보세요.


    진짜 감정, 진짜 주제를 이야기하세요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끄집어 낸 가짜 주제

    가짜 주제란 서로 다른 견해 같은 것입니다. ‘어디를 갈 것인가’ ‘무엇을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들에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격렬하게 다툽니다. 하지만 여기서 ‘진짜 주제’는 그 결정을 하는 데 누가 더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일 뿐 싸움의 원인이 된 그 주제 자체는 아닙니다. 여기서 밀리면 자신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생각, 이 파워 게임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실은 진짜 주제입니다. 진짜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가짜 주제는 반복됩니다. 다만, 이번 다툼이 저녁 메뉴 문제였다면 다음은 쇼핑이나 육아 따위로 그 주제가 바뀔 뿐입니다.


    반복되는 다툼을 멈추기 위해서는 서로 진짜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불만스럽고 힘든지 솔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 내용은 어쩌면 자신의 약점을 내비치는 것일 수도 있고, 유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간혹 그동안 제대로 된 상호 작용 없이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맞닥뜨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분노는 악순환만 가져옵니다

    화를 잘못 내는 사람들이 범하는 대부분의 오류는 타인을 변화시키는 데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믿음이나 생각, 태도, 행동 따위를 바꾸겠다는 시도는 늘 하나의 경로를 밟습니다. 타인은 변하지 않고 화 낸 사람의 불평불만은 점점 늘고 결국 더 많은 화를 불러온다는 경로 말입니다.


    ‘화를 제대로 낸다’는 건 아무 때나 벌컥벌컥 화를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화를 참는 것이 건강하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진정으로 참는다’는 것은 겉으로 화를 드러낼 때와 아닐 때를 안다는 말입니다. 거절당하거나 버려질 것이 두려워 화를 못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화가 났음을 자각하되 지금은 화낼 때도 아니고 장소와 상대도 아니라서 감정의 표현을 보류하는 것입니다. 남은 모르되 자신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고 자신을 알리는 것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소통하는 것이고 자기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각입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이 상황에서 내가 입은 상처와 공허감, 공포심, 절망감들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충분히 알아주는 것이 제대로 화내는 방법임을 유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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