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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저   자 : 호사카 유지
출판사 : 북스코리아
출판일 : 2019년 08월

  •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일본 들여다보기

    바람직한 한일 관계는 가능한가?

    <한일 관계사> 요약으로 보기

    한일 관계는 고대로부터 활발했다. 7세기에 한반도 3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망해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까지, 100만 명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원전 4세기에 일본 선주민(先住民)의 인구가 약 7만 명으로 추정되므로 고대 일본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들보다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 DNA는 가깝다고 한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수용해 발전해 갔다. 그런데 일본과 한반도, 중국 대륙과의 관계가 920년경부터 1400년대 초까지 단절되었다. 그 사이에 일본은 무사 사회가 되었고, 한반도에는 문인을 중심으로 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되었다.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다음의 공격 목표를 조선으로 삼아 20만 이상의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이것이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침략으로, 끔찍한 침략이 7년간 이어졌다. 그 후의 약 270년간은, 일본에 조선의 국교 성리학을 수용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들어서서 조일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서양 세력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에 조일 관계가 격변했다. 1868년 도쿠가와 정권을 타도하고 일본을 근대화시킨 메이지 정권은 한반도 침략을 국책으로 삼았다. 이에 러시아가 남하하여 한반도와 일본을 장악하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한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 결과 1910년에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했다. 이후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가 이어졌고, 지금까지 청산되지 않은 그 기간의 문제로 인해 한일 관계는 우호와 대립을 되풀이해 왔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는 가능한가?

    현재의 한일 관계는 경제적 보복으로 시작한 부당한 수출 규제를 일본 측이 풀어줘야 다시 정상궤도에 올라갈 수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반발한 한국 국민들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전개해 그 규모가 연일 확대되어 가고 있다. 8월 10일 현재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겠다는 한국인은 80%를 넘었으며,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국내 여행으로 바꾼 사례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반대로 한국인들이 많이 찾았던 일본의 도시들은 일본 정부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현재 실질적인 경제적 피해도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 일본 측에서 표면화되고 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일본에서 수입해 온 주요 소재들의 국산화를 추진 중이고 몇 달 안에 일부 품목의 실용화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은 무모한 경제 보복으로 자국의 산업에 상처를 입힐 가능성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는 일본이 독일처럼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해야만 비로소 성립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태를 통해 많은 문제들이 수면 위에 떠올랐는데, 앞으로는 한일 관계의 문제들을 피해자의 인권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이 점이 한일 관계 개선의 오체라 할 수 있다.


    아베 총리의 후계자는 누구?

    그동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뒤를 이을 일본 총리로 거론된 인물은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전 간사장 등이었다. 그런데 2019년 4월 1일 이후 차기 총리 후보로 급부상한 인물이 있다. 바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다. 그는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를 세상에 공표한 사람으로, 이후 ‘레이와 아저씨’로 불리며 인기가 급상승했다.


    스가 관방장관은 2012년 19월 제2차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일관되게 관방장관 자리를 지키고 있고 아베 총리의 대변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지만, 그가 차기 총리 자리에 의욕이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새 연호 발표와 함께 관방장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미국 방문을 단행한 후 단번에 지명도가 올랐고, 이때부터 여당 자민당 내 다른 파벌들은 스가 관방장관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4월 1일에 새 연호 ‘레이와’라는 글자를 자신의 손으로 들어 올리며 발표한 스가 관방장관은 며칠 후 “확실히 제 지명도가 상승했더군요”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고 한다. 이후 각종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스가 관방장관에게 참가자들의 환호가 터졌다. 그는 이런 자신의 인기에 대해 “이렇게 주목받을 줄은 몰랐다.”라며 기쁨을 드러냈다.

    스가 관방장관은 기자 회견에서 ‘포스트 아베’에 의욕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반복하고 있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현재 아무도 없다. 스가 관방장관은 자신보다 연하인 아베 총리에 대해 늘 경어를 쓰면서 예의를 다했다. 아베 총리는 이러한 스가 관방장관의 헌신과 기여를 높이 평가했기에, 누구나 당연히 총리가 공표한다고 여겼던 새 연호 발표의 큰 무대를 스가 관방장관에게 양보한 것이다.


    스가 관방장관은 5월 첫순 미국 워싱턴 D.C.와 뉴욕을 방문했다. 그의 미국 방문이 주목받은 이유는 내정을 도맡아온 그가 총리의 독무대인 외교에 나섰기 때문이다. 스가 관방장관은 미국 체류 중 마이크 펜스(Mike Pence) 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국무장관 등 트럼프 행정부의 중추들과 연달아 회담을 가졌고 UN에서도 연설했다. 미국 측은 스가 관방장관을 아베 정권의 No.2로서 잘 대접했다.


    그러나 그가 포스트 아베가 될 수 있다는 의견에는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자만당의 각료 경험자들이 그가 총리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먼저 포스트 아베로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다. 아직 아베 총리의 자민당 총재 임기(2021년 9월까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측 입장에서 볼 때, 소위 자민당 내 리퍼럴파라 할 수 있는 기시다 후미오 정조회장이나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이 총리가 된다면 한일 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것이 다소 용이하지만, 스가 관방장관이나 가토 가쓰노부 총무회장 같은 아베 총리의 측근이 총리가 된다면 결국 혐한 정권이 다시 창출된다는 부담이 남게 된다. 포스트 아베 경쟁이 본격화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 한국 측에서는 일본의 움직임을 눈여겨봐야 한다.



    ‘손자병법’의 나라, 일본을 연구해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식을 갖고 움직이는 나라 일본. 모든 일이 치밀하게 계산되고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생각하면 많은 한국인들은 진저리를 칠 것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에다 DNA도 가장 비슷하다고 하고, 생김새도 가장 닮은 두 나라가 이처럼 확연히 다르다.


    이처럼 일본인의 근성을 만든 본질적인 공식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이다. 이 병법은 중국에서 8세기에 일본에 전래되었는데, 오히려 일본에서 더욱 꽃을 피운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일본인의 것이 되어버렸다. 여기서는 ‘손자병법’의 기본적인 사상을 알아보고 이 가르침들을 일본인들이 어떻게 이용하여 왔는지를 파악해 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한국이 일본에 지지 않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일본인들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미리부터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준비를 한다. 그리고 이익이 있을 거라는 계산이 먼저 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모험정신이 없다. 그러므로 일본 내에는 벤처 기업들이 그다지 번성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모험심이 강하다. 사전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도 새로운 일을 과감하게 시작한다. 좋게 말하면 용감하고, 나쁘게 말하면 신중하지 않다.


    일본인의 계획성은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 근본정신에는 무사시대, 무사들의 경전이었던 ‘손자병법’ 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손자병법 모정편(謨政篇)』을 보면 이 병법을 대표하는 이와 같은 금언이 나오는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영원한 진리로 생각한다. 특히 일본의 정계와 재계는 이 원리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인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근본적인 삶의 공식은 바로 이 ‘손자병법’이다. 일본인들은 먼저 상대방을 상세히 연구한다. 상대방을 잘 파악한 후에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서면 일본은 선제공격을 시작한다. 진주만 공격 같은 선제공격 형태가 일본의 병학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떤가. 한국인들의 기본적인 사고는 유교사상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그것은 조선왕조가 유교를 국교로 삼아 500년 넘게 정권 유지의 이념으로 삼았던 까닭이다. 평화 사상이 기초에 깔린 한국인에게 선제공격이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인은 상대를 연구하여 파고들기보다는 자신의 입장만을 표명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여기에 반해 일본은 약 700년에 걸쳐서 실질적인 세력이었던 무사들이 지배한 무사국가였다. 무사들은 병학서 중에서도 특히 ‘손자병법’을 특별히 지침서로 삼았는데, 일본의 무사들은 칼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병법을 공부하고 무술을 연마했었다. 섬나라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화했고 미국까지도 건드릴 용기와 잠재력을 키웠던 힘은 다름 아닌 이 병학사상에서 나왔던 것이다.


    고대 이후 한민족은 평화를 애호하고 무력에 거부감을 느끼는 민족이 되었다. 유교로 인하여 무력적으로 약해지다 보니, 거꾸로 제국주의의 표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교사상이 근저에 깔린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일본인들에 비해 무인을 경시하는 경향이 크다.


    세계는 무한 경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국은 평화주의에 입각한 지금까지의 대외노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국익을 위해 상대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손자병법’적인 사고방식을 많이 도입해야 한다. 상대를 잘 파악하여 절대로 손해 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방만하지 말고, 자신을 꼼꼼하고 엄격하게 돌아봄은 물론 제대로 판단한 후 행동해야 한다. 일본을 알고 한국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 일제의 결혼정책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아시아를 침략했던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 국가들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과 일본인을 혼합시켜 나가는 결혼정책이었다. 그리고 이 결혼정책은 역사적으로 보면 성공한 전략이다.


    유럽이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근거 중 하나가 ‘피의 연대’이다. 유럽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혈통적으로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왕족들 간에 정략결혼이 역사상 여러 번 이뤄졌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가 혈통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가까운 관계에 있다.


    미국은 다민족 국가라고 해도, 백인들의 몸에는 대부분 유럽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처음 미국에 발을 디딘 백인의 조상들이 유럽에서 왔으므로 유럽과 미국은 혈통적으로 가깝다. 그래서 유럽과 미국 사이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해도 원활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 한국을 합방한 후에는 결혼정책을 취했다. 식민지 시대 일본과 한국 간의 결혼은 내선(內鮮) 결혼이라고 하였는데, 처음 시작은 1920년 4월에 거행된 왕세자 이은(李垠)과 일본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후의 이방자 여사)와의 정략결혼부터였다. 이것은 3·1 독립운동 후의 한국에 대한 일본의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다.


    내선 결혼이란, 말하자면 일본 민족과 한국 민족 간에 행해진 대규모 정략결혼이었다. 주로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이 결혼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아이는 여성이 키우는 것이므로 일본 여성이라면 아이를 일본식으로 키울 수 있고, 한국인을 동화시키는 빠른 길이라고 조선총독부가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시되었던 내선 결혼은 한국인을 동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결혼방식이었으므로 결혼생활이 행복할 리가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해방되고 난 후, 한국인과 결혼한 많은 일본인 처들이 한국 가정에서 추방되거나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 비참하고 어두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현재는 국제결혼이 나라와 나라를 연결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들의 경우도 그렇다. 어찌 보면, 그들은 한국을 위해 활약해 줄 수 있는 민간 외교사절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일 간에 태어난 2세들에게 한일 두 나라를 아우를 수 있도록 한일 두 나라가 협력하여 장기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방학기간들을 이용하여 교육시켜 나간다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욱 넓어져서 화합하여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한일 간에 태어난 아이들을 잘 활용한다면 한일 간을 위한 가교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황국사상의 숨은 얼굴

    고대로부터 시작된 한반도 경시 사상

    근접해 있는 나라끼리는 대부분 사이가 나쁘다. 지리적으로 가깝다보니 이해타산이나 감정이 많이 생겨나서 싸움으로까지도 번진다. 과거에 침략을 했거나 당한 국가 간이라면 감정의 골은 더욱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열도와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고대의 어느 시기에 일본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선진 국가였던 백제의 속국과 같았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성립되는 시기에도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던 이웃이 바로 한반도이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가슴 밑바닥에는 한국을 경시하는 고정관념이 있다. 물론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거의 사라졌고 기성세대들도 그러한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이 일본인들의 마음속 한 부분에 들러붙은 채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한국을 경시하게 된 원인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등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해 올 때마다 면죄부를 주었던 ‘황국사상’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고대 삼국시대로부터 얽히기 시작했다. 백제와 일본은 원래 형제처럼 친밀한 관계였다. 형님 같던 백제가 당나라 군대와 손을 잡은 신라에게 함락되었다. 위기에 몰린 백제를 구하려고 일본은 수차례에 걸쳐 바다 건너 백제로 군대를 보낸다. 666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완전히 참패해 멸망해 버린다.


    백제를 되찾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고 게다가 잘못하다가는 신라와 당나라가 바다 건너 일본으로까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 일본은 그로부터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일본에서는 한반도에서 패배한 이 싸움을 ‘백촌강(白村江, 지금의 금강)전투’라고 하는데, 섬나라인 일본으로서 역사상으로도 손꼽힐 만큼 부끄럽게 참패한 전쟁이었다.


    당나라와 손을 잡고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가 두려운 데다가 대륙이 당나라에게까지도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그 이후로 한반도와 대륙과의 관계를 끊는다. 그리고 내실을 기하는 동시에 국내의 힘을 응집하기 위해서 ‘일본’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은 국가를 새로이 재정립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법률을 정비하였는데, 당나라를 본떠 701년에 제정한 다이호 율령이 그것이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역사서 편찬 작업을 행하였다. 그 결과 탄생한 국학(國學) 사상의 2대 성전(聖典)인 『기기(記紀)』『고지키(古事記)』와『니혼쇼키(日本書記)』가 각각 712년과 720년에 완성되었다.


    특히 『일본서기』는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로서 중요시되어 왔다. 그런데 바로 이 두 권의 역사서 속에 일본의 ‘한국 경시 사상과 침략사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은 한반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기』에는 반대로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했다는 식으로 바꿔서 기술해 놓았다. 역사 왜곡은 근ㆍ현대의 문제가 아니라, 7세기에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뼈아픈 패배에 그 원천이 있다.


    일본은 신라에 패했던 역사를 은폐시키고 역사를 왜곡하더라도 신라를 굴복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열도를 평정하려는 목적과 일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필요성으로 인하여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던 『기기』는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았고, 1,300여 년에 걸쳐 일본인들의 핏속을 흐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기기』가 학교교육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한 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에 의해 학교 교과서에서 『기기』에 대한 기술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이 신화로서만 알고 있는『기기』가 조상들의 침략사상과 한반도 경시 사상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새 역사 교과서』에는 마치 실제 역사라도 되는 것처럼 약 10페이지 분량의 신화가 서술되어 있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다는 한국의 중학교 ‘국사’교과서에도 단군신화에 관한 부분은 단 2페이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국 측에서는『기기』에 기술되어 한반도 침략에 이용되었던 부분과 일제강점기에 편찬되었던 국사 교과서라든가『기기』를 인용하여 한국의 속국화를 정당화시켰던 수많은 당시의 서적들을 찾아내어,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사이트와 여러 지면에 공개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일본인들이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된다면 한국 경시 사상과 침략사상이 허구의 신화를 기초로 해서 정당화되어 왔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어 커다란 교육 효과가 생길 것이다.



    보이지 않는 면이 더 훌륭한 한국인

    한국인은 보이지 않는 면이 보이는 면보다 더 훌륭하다

    한국인들이 왜 그렇게 훌륭한가는, 나의 어린 시절에 수수께끼 같은 관심사였다. 그 후로도 나는 한국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관한 것이라면 역사ㆍ문학ㆍ스포츠ㆍ사상ㆍ철학ㆍ종교 등을 비롯하여 무엇이든 다 깊은 관심을 가졌다. 결국은 한일 관계 연구를 위해 1988년에 한국으로 거처를 아예 옮겨 왔다. 나중에 나는 재일 한국인들이 특별한 분야에서 아주 우수한 힘을 발휘하는 비결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환경적 요인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차별당하는 일본 사회 속에서 재일 한국인들은 일반기업에 입사하거나 출세할 길이 거의 막혀 있기 때문에 전문직에 진출하여 성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업에 취직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스포츠계ㆍ예능계ㆍ자영업ㆍ의사ㆍ변호사ㆍ교수 등을 목표로 삼는 재일 한국인들이 많고, 한번 그 길에 들어섰다 하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눈앞의 현실 때문에 피나는 노력을 하여 결국 그 분야에서 월등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역시 한국인의 체력이 강한 이유 중 하나가 음식문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음식은 대부분 한방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치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김치는 생선, 조개 등의 젓갈을 비롯하여 여러 영양분이 고루 들어 있는 발효식품이다. 한국 식탁에는 야채, 나물 등이 많다. 그것이 얼마나 한국인의 건강을 지켜주는지 요즈음 더욱 실감한다.


    한국인이 노래를 잘하는 민족인 것 또한 사실이다. 옛 중국의 문헌을 보면, ‘동이족은 가무에 능하다.’라고 나와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한국인이 노래를 잘하는 진짜 이유를 나는 한국에 살면서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한국어의 우수성에 있다. 한국어는 발음이 많고, 일본어와는 달리 목구멍까지 사용해야 하는 발음도 있다. 당연히 성대가 발달되어 노래를 특별히 잘할 수밖에 없다.


    대학교 때의 친구 중에 ‘최’씨 성을 가진 재일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일본 사회 속에서 차별을 이미 체험한 탓인지 같은 20세 정도의 젊은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가 인생관을 이야기할 때면 나는 그 깊이에 놀라곤 했었다. 일본 땅에서 비록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자신은 조국에 대해 무한한 긍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당시 대학 초년생이었던 나는 같은 일본인 친구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깊이와 매력을 그에게서 맛보았었다. 당시에 그는 나와 다른 깊은 세계를 가진 철학자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한국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도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그동안 만나왔던 많은 사람들 중 가장 인격자라고 느꼈던 사람은 서울대학교의 박 모 교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학회에서 가끔 박 교수를 만났었는데, 식사를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박 교수 같은 고매한 인격자를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다고 감탄하셨다.


    이처럼 아버지의 한국인에 대한 존경심은 한국이 내 마음속에서 신비한 이미지로 채색되는 데 일조를 했다. 그러한 한국과의 만남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한국과의 관계를 운명적인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숲은 제대로 보려면 숲을 떠나서 보아야 한다고 했던가. 전에 일본에서 살았을 때보다도 한국에 살면서 모국인 일본을 더 깊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평화사상이 없는 내 모국 일본을 처량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훌륭한 점도 많지만, 근본적인 하드웨어 기능이 잘못된 나라임에 틀림없다. 이젠 제발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서 아시아의 주변국들을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고, 올바른 관계를 맺었으면 하는 것이 내 고국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한국인은 보이지 않는 쪽이 훌륭하고, 일본인은 보이는 쪽이 훌륭하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깊은 심성을 갖고 있고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다. 그러나 일본인은 어려서부터 공중도덕을 잘 지키고 남을 배려하며, 보이는 측면에서는 바르게 행동한다. 그리고 정확하고 정직하다.


    한국인은 일본인의 계획성 있고 정확한 생활습관, 나보다는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 반면, 일본인은 한국인의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따뜻한 정의 세계를 배워야 한다. 서로 배우고 보완한다면 이웃한 두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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