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 세계사
 
지은이 : 모토무라 료지(역:서수지)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19년 11월




  • 저자는 역사학이 실용적인 학문일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모여 이루어지는 지식 마차의 중심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역사지식, 즉 세계사 문맥력과 통찰력을 가진 자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향후 세계를 이끄는 리더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세계사 문맥력과 통찰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저자는 7가지 핵심 코드를 제시한다. 이 7가지 핵심 코드를 통해 저자는 지난 5,000년간 인류가 어떻게 혹독한 환경에 맞서 싸우며 문명을 건설하고 번영과 쇠퇴를 겪으며 역사를 이루어왔는지 날카롭게 분석하고 통찰한다



    천하무적 세계사


    Tolerance 로마는 ‘관용’의 힘으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로마는 어떻게 번영을 이루었으며 쇠퇴하고 멸망했는가

    로마와 미국의 진정한 힘 소프트 파워

    소프트 파워는 하드 파워처럼 눈에 명확히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의식의 흐름과 가치관마저 바꿔놓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하드 파워보다 더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로마는 하드 파워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시대를 거치면서 군사력에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제국 유지를 위한 보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마는 막대한 국가 재정 부담이라는 만만치 않은 문제에 부딪혔다. 당시 국고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국가적으로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로마의 하드 파워 관점으로만 보면 분명히 제국 전체가 쇠퇴해가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 파워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측면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 로마제국은 주변 세계의 로마화 형태로 꾸준히 확장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소프트 파워를 이해하는 열쇠는 라틴어가 쥐고 있다. 라틴어는 로마의 공용어였으나 로마 귀족은 초기에 그리스어를 고수했다. 로마인의 관점에서 그리스는 문화 선진국이었고 그리스어는 현대인에게 영어가 갖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대단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귀족들이 자녀의 그리스어 조기 교육에 무척 공을 들인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고대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교육사상가 쿠인틸리아누스(Marcus Fabius Quintilianus, 35-95년경)는 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모는 그리스어에 능통한 사람으로 골라야 한다. 그러나 이상한 사투리를 쓰는 유모를 들여서는 곤란하다. 반드시 제대로 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모를 선택해야 한다."


    이는 오늘날 영어회화를 배울 때 발음이 좋은 원어민 교사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과 일치한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처음에 로마인은 그리스어를 열심히 배웠으나 언젠가부터 라틴어가 그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실레로 4세기의 그리스인 라틴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Ammianus Marcellinus, 330-391년경)는 네르바 황제(Nerva, 재위 96-98년)부터 발렌스 황제(Valens, 재위 364-378년)까지 다룬 책 『로마의 역사(The Roman History)』를 남겼다. 마르첼리누스는 그 책을 자신의 모국어인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로 집필했다. 이는 당시 국제 공용어가 그리스어에서 라턴어로 바뀌었다는 명확한 증거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4세기 로마 제국은 하드 파워 면에서 명백히 쇠퇴하는 중이었으나 소프트 파워 면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든 두 가지, ‘관용’과 ‘패자부활전을 가능케 하는 문화’

    위에서 던진 질문을 한 번 더 던져보자. ‘고대 지중해 세계에 1,000개가 넘게 존재했던 수많은 도시국가 중에서 왜 유독 로마만 제국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로마인에게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 로마적 전통) 개념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목적은 어디까지나 승리에 있다. 이 점에서는 로마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데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승리하되 명예롭게 승리하느냐였다. 이는 로마의 제국주의(Imperialism)를 논할 때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점이다.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전쟁 과정에서 원로원 고위직에 있는 귀족 등의 특권층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우수한 존재인지 알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명예욕은 시공을 초월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기본 욕구 중 하나다. 그러나 명예를 대하는 관점과 사고방식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게 뭘까? 한마디로 말해 관용과 패자 부활 가능성의 유무다. 다시 한 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를 비교해서 살펴보자. 명예를 중요시한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에 패한 장수는 두 번 다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패하고 살아서 돌아갈 경우 운이 좋으면 추방, 운이 나쁘면 사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반면 로마는 전쟁에 패한 장수나 병사라도 조국에 귀환할 수 있었다. 당당히 적에 맞서 싸웠다면 설령 패배했더라도 로마인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리스인은 패전이라는 결과를 엄청난 불명예로 여겼다. 그러나 로마는 최선을 다해 싸운 결과가 패전이라면 살아 돌아온 시점에 그 자신이 이미 충분한 불명예와 치욕을 겪었다고 생각해서 돌팔매를 던지거나 손가락질하지 않았고 책임을 따져 묻지도 않았다.


    바로 이 점에 임무에서 패한 동족이나 동료를 보는 관점과 태도에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그리스의 패전 장수는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패배하고 비루하게 목숨을 부지한 경우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로마의 패전 장수는 전쟁에서 맛본 쓰라린 치욕을 떨쳐내기 위해 다음 전쟁에서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했다.


    로마인들은 그런 마음에 기대를 걸고 패전 장수에게 기꺼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 그런 로마인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44년)를 꼽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경험이 있어서인지 부하 장수나 병사들의 실수나 실패를 무조건 질책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며 스스로 만회할 기회를 주고자 항상 노력했다.


    로마인이 지닌 관용과 패자 부활전을 허용하는 자세는 로마를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하고 수백 년 동안 패권을 유지하게 해준 근원적인 힘이 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유명한 장수들은 누구나 한 번쯤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감을 딛고 자신에게 주어진 다음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했다.



    Deficiency ‘결핍(건조화)’이 문명을 탄생시켰다

    - 문명 태동부터 도시국가를 거쳐 민주정 탄생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건조화’는 어떻게 문명 태동으로 이어졌나

    문명이란 무엇인가? 학자마다 다양한 기준과 방식으로 문명을 정의한다. 나는 문자를 기준으로 문명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본다. 왜 문자가 문명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위에서 언급한 대로 문명은 문화와는 달리 지역성을 초월해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인데, 그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문자가 수행하는 역할이 매우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문명은 도시와 매우 관련이 깊은데, 하나의 집단이 농촌에서 도시로 진화해가는 과정에 점점 규모가 커져 인구가 많아지고 복잡해지면서 문자, 즉 기록의 필요성이 더욱더 절실해지기 때문이다.


    문자 못지않게 중요한 문명 조건이 있다. 바로 건조화다.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세계 4대 문명이 태동한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건조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문명사·인류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지만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허의 이른바 4대 문명을 비롯한 주요 고대 문명들의 탄생 시기를 살펴보자. 흥미롭게도 대부분 기원전 5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시기에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태동했다. 왜 마치 비 온 뒤 여기저기 죽순 돋아나듯 이 시기에 인류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문명들이 다투어 탄생한 걸까?


    오늘날 문명 발상과 건조화가 서로 깊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을 대놓고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대다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추세다. 그런데 왜 그런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당시 건조화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프리카 북부에서 중동, 고비사막을 거쳐 중국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서 건조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기원전 5000년 무렵부터 거의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지구가 건조화해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인류는 어떻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했을까? 잠시 이 점을 살펴보자. 먼저 생존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물(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마을이 만들어지고 그 마을들이 통합되며 차츰 도시라고 부를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 마을과 마을, 집단과 집단 사이에 물을 둘러싸고 하루가 멀다고 분쟁이 벌어졌다. 도시나 국가의 통치자는 이런 물 분쟁 문제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 필요에 따라 물 분쟁을 방지하는 ‘물 사용 시스템’이 개발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통치자와 지배 계층은 이런 사실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기록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자가 탄생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 기록을 살펴보면 거래기록 등 실무적인 기록이 꽤 많이 발견된다. 위에 언급한 대로 문자는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것이므로 왜 필요했는지 파악하려면 당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기록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Huge Migration ‘대이동’하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민족들

    - 게르만족 ‧ 몽골제국의 드라마틱한 역사, 대교역시대부터 난민 문제까지

    ‘입력’과 ‘출력‘ 개념으로 통찰하는 민족이동

    민족이동은 인류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후 영토를 상실한 유대인의 방랑, 영국인·프랑스인을 비롯한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대이주, 노예무역, 전쟁 난민 등 다양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민족이동은 이어지고 있다.


    민족이동은 왜 일어나는 걸까? 출력과 입력 개념으로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먼저 출력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민족이동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인은 ‘식량 부족 문제’였다. 식량 부족은 왜 생기나? 여기에는 단 한 가지로 압축해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원인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갑작스러운 인구 폭증과 한랭화나 건조화와 같은 이상 기후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출력에는 기후 변동 이외에도 다양한 요인이 있다. 예를 들면 종교 박해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동, 노예매매처럼 인위적인 강제 이동 등이다. 최근 시리아 등지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화를 피해 다른 나라로 이동한 전쟁 난민의 사례가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이 싫어져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지고 생명의 위협마저 느껴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민족이동은 전쟁의 불씨가 될 소지를 안고 있다. 개중에는 노동력이 부족한 지역에서 이들을 받아들여 다방면의 이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아메리카 대륙은 개척지 개발과 금광 채굴 등에 굉장히 많은 일손이 필요했으므로 이주자를 두 팔 벌려 맞아들였다. 19세기 감자 역병으로 인한 참혹한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한 사건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일구어낸 영국의 바통을 이어받아 급속히 공업화를 이루고 있었고 상당 부분 아일랜드 등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의 땀과 노력에 힘입어 눈부신 성장과 번영을 달성했다.


    게르만족 대이동, 유럽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민족이동은 게르만족 대이동이다. 엄청난 규모의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이동한 이 사건은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일어났다. 게르만족 대이동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민족이동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뭘까? 이 사건의 영향으로 유럽 전체가 송두리째 변화했기 때문이다.


    게르만족은 왜 서쪽으로 이동했을까? 여기에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원인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단연 기후 변동이다. 오늘날은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품종개량으로 추위에 강한 작물 재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터라 제대로 실감하기 어려우나 평균기온이 2도만 내려가도 세계 최대 밀 생산지인 캐나다에서는 밀 수확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만큼 기온 저하는 개인과 집단의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당시는 전근대 사회라 기후 변동이 일어날 경우 농작물 피해가 상상 이상으로 막심했을 것이다.


    4세기 무렵부터 게르만족은 엄청난 규모로 무리 지어 서로마제국 영토로 물밀듯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왜 갑자기 로마제국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을까? 아시아에 살던 기마민족인 훈족이 서쪽으로 옮겨옴에 따라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좀 더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어난 대규모 이동이 바로 게르만족 대이동이다.


    다른 민족이 소규모로 들어올 때는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임계점을 지나 허용치를 넘어설 지경이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정착 세력과 이주 세력 사이에 갈등과 알력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유럽의 난민 문제를 보면 어느 정도 실감이 날 것이다.


    로마에서는 오늘날의 유럽 난민 문제와 비슷한 문제가 훨씬 큰 규모로 빈번히 일어났다. 평소에는 사소한 다툼으로 끝나던 일도 사람이 많아지면 자칫 폭동으로 발전하기 쉽다. 로마는 더 심각한 문제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진압에 나서야 했다. 이런 식으로 폭동과 진압이 반복되면서 잔 매에 장사 없듯 로마의 국력은 차츰 쇠약해져 갔다.


    오늘날 유럽에서 난민으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이 로마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게르만족 대이동이라는 요인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관용의 끝판왕’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탄압한 진짜 이유

    민족대이동이 일어나면 언어와 종교, 생활습관 등이 이리저리 뒤섞이고 복잡해진다. 게르만족 대이동 시기는 절묘하게도 그들이 기독교를 수용한 기간과 겹쳤다. 이 무렵 많은 게르만족이 기독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물론 원형 그대로의 기독교가 아니라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게르만식 기독교였지만 말이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는 민족이동으로 언어와 문화, 종교가 뒤섞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해볼 수 있다. 앞으로 이슬람교도가 본격적으로 파고들면 유럽에 이슬람교 국가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미 많은 난민을 받아들인 국가에서는 언어와 문화, 생활습관, 신앙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유럽은 학교 교육에서 가치관 차이를 수정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알 수 없다.


    잠시 로마 초기 시대로 돌아가 보자. 로마는 어떻게 새로운 가치관을 구축했을까? 그리스 가치관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새로운 로마 질서를 만들어갈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마인에게는 기독교를 탄압한 이미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로마는 신앙에 관대했고 정복지에서도 "너희가 너희 신을 믿는 것은 자유다"라고 인정했다.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기독교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런 로마는 왜 기독교를 탄압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 탓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책에서 "여호와 이외의 신은 모두 사이비다. 거짓 신과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도들의 독선과 오만, 배타성이 문제의 근원임을 밝혀왔다. 왜 신앙심이 돈독한 로마인이 다른 신을 믿는 속주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로마인은 누구도 자신들의 개인적 신앙에 간섭하거나 강요하지 않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신앙에 참견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너희의 신앙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너희도 우리 신앙에 딴죽 걸지 말라"라는 것이 로마인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정도 선에서 만족하지 않고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너희가 믿는 신은 가짜다. 엉터리 신을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로마인의 눈에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놨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며 생떼 부리는 상황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로마인은 기독교 신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Nowness 현재성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진다

    - 모든 역사가 ‘현대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

    ‘정확하게 쓰는 것’보다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이 왜 더 중요한가

    역사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 Carr. 1892~1982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를 통해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가 대화라면 공통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실제로 의사소통이 이뤄지려면 현재와 과거 사이에 놓인 장벽을 극복해야 한다. 그 장벽은 바로 ‘상식의 차이’다.


    제5장에서 고대인은 실제로 신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했다는 내용을 다뤘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신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고 어떤 방식으로 들을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어쩌면 고대인에게는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현상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상식이 다르면 당연히 행동으로 이어지는 판단 기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역사학자는 옛날 사람들의 감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 시대 고유의 감성과 의식에 최대한 동화하려고 애쓴다. 이처럼 학자로서 시대적 감수성을 이해하려는 자세는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논문을 쓰는 일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에서까지 그런 입장을 견지하면 곤란하다. 자칫 독자에게 외면당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쓴 역사서가 자주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는 "정확하게 쓰는 것과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입니다."


    왜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이 중요할까? 아무리 정확하게 써도 사람들이 읽고 들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낸 해결책은 처음부터 역사는 모두 현재사다라는 관점으로 글을 쓰는 방식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지금이라는 필터로 들여다보게 된다. 즉 지금 시점을 의식하면서 이를 강조해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역사가의 해석은 많든 적든 그 시대의 가치관과 상식, 국제정세 등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작가는 물론이고 학자가 쓴 글도 아무리 해당 역사 속 사람들의 생각에 근접한다고 하더라도 100퍼센트 일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냉철히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현대인이 당시를 최대한 유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수록 역사는 모두 현재사다라고 생각하며 역사를 즐기고 진실에 좀 더 가깝게 역사를 해석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고 싶다면 역사를 배워라

    ‘모든 역사는 현재사다’라는 관점을 가지면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사실이 있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인재들이 역사를 올바르게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젊은이가 역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시대별로 역사 지식을 나열해 달달 외우는 방향으로 흘러왔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도 학교 수업도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방통행식으로 지식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즉 지금까지의 교육과정에서는 오늘날은 이렇지만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지금 이렇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등 현대의 관점으로 고대를 살펴보는 사고와 인과관계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고대사는 고대사고 중세사는 중세사라고 생각하며 지식을 통째로 암기하는 재미없는 학문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실제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우리가 사는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일어나는 문제의 배경에는 반드시 그 문제와 관련된 역사가 존재한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로마 역사 속에는 인류 경험의 총체가 담겨 있다"라는 말이 상징하듯 인류가 현재 직면한 문제는 대부분 과거의 인류가 이미 경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하면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고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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