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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저   자 : 김미지
출판사 : 생각의힘
출판일 : 2019년 06월

  • 우리 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유럽과의 첫 만남과 첫인상

    동과 서, 그 최초의 만남들

    우리와 우리 주변을 넘어 더 크고 넓은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 사람들과 삶의 모습은 우리와 판이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조상들에게 기껏해야 중국과 그 주변 ‘오랑캐들’이 전부라고 여겨졌던 ‘세계’ 또는 ‘천하’라고 하는 테두리가 무너진 것은 언제이며 우리와 서양 세계와의 만남은 언제 처음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까?


    대제국을 수차례 건설했고 넓은 영토가 서역에까지 닿았던 중국 대륙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방 세계와의 만남의 역사가 전해지는데, 본격적인 서양 국가와의 접촉은 서력기원 이전인 한나라 때 실크로드의 개척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의 만남은 13세기 들어 전쟁과 정복의 시대를 거치면서 명실상부하게 상호 교류와 접촉이 확산되는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칭기즈칸이 페르시아와 소아시아까지 접수하며 몽골 제국을 확대해 나아가던 시기는 서구 세계가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있던 시기와 겹쳐진다. 이슬람 지역을 재패한 몽골 제국과의 외교적인 접촉을 이유로 교황청에서는 사신을 파견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아시아에서도 대륙의 끝자락이자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에도 실크로드의 한 귀퉁이로부터 중국 너무 서역의 풍문은 일찍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미 신라시대에 페르시아의 유리 등 서방의문물이 전해졌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또한 16~17세기에는 매우 우연한 일이긴 하지만 조선 땅에서도 유럽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종종 있었다.


    1627년 제주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 1653년 8월 제주도에 역시 난파되어온 네덜란드인 하멜 등이 그들이다. 이는 서양인이 조선을 발견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선인들이 서양인을 최초로 발견한 사건이기도 하다. 즉 유명한 『하멜표류기』를 통해서 그 시절의 첫 만남을 이해할 수 도 있지만 또한 당시 조선의 관리들이 작성했던 『지영록』이나 『석고재』와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우리의 ‘새로운 발견’을 새삼 확인해볼 수 있다.


    물론 이보다 앞선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 시기 1593년에 일본군 종군 신부로 온 스페인 사람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웅천포(진해)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지에 일년 여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고, 1577년 포르투갈인 몬테이로 선장이 마카오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조선에 표착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런데 16세기에서 17세기 중반에 조선 땅에 닿은 이들은 애초에 조선을 행선지로 한 것이 아니고 대개가 표류로 인한 우연한 접촉들이었기에 서양과의 본격적인 만남보다는 해프닝과 같은 일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서양인의 조선 방문이라는 이러한 사건은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사람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들은 유럽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와 이후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물결의 한 자락이 이 땅을 적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 문명의 첫 물결이었던 천주학과 서학

    동방 포교에 열을 올렸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서양의 종교와 과학을 전파하던 17세기 초, 조선의 학자들 역시 ‘서학’이라는 이 새로운 앎의 대상에 눈뜨며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편찬된 마테로 리치의 한역 서학서 『천주실의』(1603)과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1602)는 그 이듬해에 곧바로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의 손으로 조선 땅에 전해진 것이다. 매년 수차례 북경에 파견된 조선의 연행사들와 그들의 수행원들, 즉 연경(북경의 옛 이름) 등 청나라 이곳저곳을 드나들었던 이들이 첨단의 서책들과 서양 문물을 조선 땅에 들여오는 전달책 또는 소개자의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중국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적극적으로 서양의 학문과 과학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나마 싹트기 시작했다. 중국의 서학 수용의 역사에서 가장 앞자리에 놓이는 대표적인 인물로 상해 출신의 서광계가 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서광계는 서양의 서적들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간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학의 선구자이며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천주교 선교자들은 서양의 새롭고도 매력적인 문물과 학문을 앞세우면서도 유교 전통과 타협 정책을 취하며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해갔다. 이런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 및 일본에 이어 조선에도 진출하고자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 진출은 번번이 좌절되었고 천주교회가 조선에 만들어진 것은 18세기 말인 1784년이 되어서였다.


    조선에도 중국의 서광계와 같이 일찍이 서양의 새로운 과학과 학문에 매료된 이들, 적어도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최한기, 홍대용 등은 주자학의 질서를 거스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세계와 학문에 대한 앎을 사상적 성찰의 계기로 삼은 이들이다. 유럽이라는 수만 리 밖의 세계와 서학의 존재, 중국의 서양 과학 수용을 진작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18~19세기 조선의 일부 학자들은 그 낯선 학문이 충분히 상고(詳考)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시대, 《한성순보》가 포착한 유럽

    세계 속으로 들어간 조선 그리고 《한성순보》의 탄생

    유럽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수백 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서학서나 지리지, 천주교 선교사들의 저작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중개된 지식들이긴 했지만 유럽에 대한 우리의 앎이 쌓이고 서양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나가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더욱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당대의 지식들이 소개되고 정리될 필요가 생겼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은 이미 조선보다 수십 년 더 이른 시기부터 그러한 작업들을 해오고 있었다. 대표적인 작업이 바로 근대적인 의미의 신문, 즉 ‘뉴스페이퍼’를 발간하는 일이었다. 중국에서는 개항장인 상해와 홍콩을 중심으로 신문이라는 근대 정보 매체가 1850년대부터 등장했다. 1860년대부터는 영자신문과 중문신문이 함께 발행되어 경쟁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일본도 1860년대 말부터 동경을 비롯해 각 지방마다 신문들이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 창간호가 세상에 나왔다. 당시 중국과 일본 대부분의 신문들이 한 장의 종이에 전체 지면을 인쇄하여 여러 번 접는 방식인 전장 신문지 형식이었던 것과 달리, 조선에서는 아직 근대식 인쇄 조판 기술이 도입되지 않았던 터라 일반적인 서책 형태로 제작되었다. 1884년 10월 9일까지 1년 남짓 발행된 이 서책 형태의 신문 또는 잡지 앞부분에는 왕실 조정의 소식과 인사, 정책 결정 사항들을 담은 관보인 ‘조보(朝報)’가 배치되고 나머지 분량에는 각종 외신 기사들을 순서대로 배열한 ‘각국근사’로 채워졌다. 그러다가 5호부터 이 둘 어디에도 속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중요한 국내 기사들을 따로 ‘국내사보’라는 항목으로 두기 시작하면서 조보-국내서보-각국근사로 삼분된 지면 체재가 폐간 때까지 이어진다.


    이 외에도 종종 과학과 인문지리 정보들, 즉 지리와 천문에 대한 설명문에서부터 시작해 세계의 각 대륙에 대한 역사 문화 지식, 최신 서양 과학 지식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수록했다. 국내에서 생산된 기사가 매호 제일 첫머리에 등장하긴 하지만 창간사인 「순보서」에 ‘외보를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내사까지 기재한다’는 취지대로. 한성순보가 나라 바깥으로 훨씬 더 많은 시선을 돌리고 있고 전통보다는 새로움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각국근사’에 해당하는 외신 기사의 비중이 전체 지면의 70~80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한성순보는 외신의 비중이 훨씬 높은 외신 전문 매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성순보는 비록 중국과 일본의 신문에 의존하여 첫걸음을 떼긴 했지만 세계, 특히 서양에 대한 정보가 ‘새로운 뉴스’의 핵심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꿰뚫고 있었다. 창간호의 「순보서」에도 나타나 있듯이 지구상에 펼쳐져 있는 세계의 지식들이란 “세무(世務)에 마음을 둔 사람이라면 몰라서는 안 될 것”들이며, 외신을 널리 번역하는 것은 “견문을 넓히는 것 외에도 상리(商利)에도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매우 실용적인 일이기도 했다. 한성순보의 편집자들은 “선박이 전 세계를 누비고 전선이 서양까지 이어져 연락되는 데에다 공법을 제정하여 국교를 수립하고, 항만ㆍ포구를 축조하여 서로 교역”하는 마당에 “남북극, 열대, 한대 할 것 없이 이웃 나라와 다름이 없어진” 세계를 절실하게 받아들이고 또 전달하려 했다. 이는 한성순보의 기사들이 포괄하고 있는 이웃나라의 범위가 지구상의 모든 지역을 포괄할 정도로 사실상 제한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제국주의와 서세동점의 한허리를 관통하여

    한성순보는 세계사적 전환기, 지구사적 재편기의 1880년대 초라는 한 시점, 특히 동아시아가 빠르게 변해가던 그 시점에 현장의 파편들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이를 통해 세계에 새로이 접근하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나 천하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해체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아시아 차원에서 이루어진 다른 세계와의 대결 의식, 동아시아가 보는 서양이라고 하는 인식론적인 중심은 있었다. 그것이 꼭 중화주의나 유교적 세계질서를 고수하고자 하는 최후의 몸부림 또는 완고함으로 설명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흔들리는 현장들뿐만 아니라 서양이라고 하는 견고해 보이기만 했던 성채 역시도 매우 어지러운 혼란 속에 있음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성순보의 인식론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키워드를 꼽으면 ‘상호성’을 들 수 있다.


    창간호에 실린 ‘각국근사’의 가장 첫 번째 기사는 ‘한학서행’, 즉 ‘한학이 서양으로 가다’였다. 영국 대학에서 한학을 가르치는 과정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첫머리에 내세운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을 위시한 영국의 대학에서 한학과를 설치했고 또 설치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한성순보의 가장 첫 기사에 배치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서학이 동쪽으로 전해진 ‘서학동행’의 시대는 이미 몇 백 년 전인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즉 서학이 동아시아에 들어온 지 삼백 년이 훨씬 넘은 시점에서, 이제 뉴스가 되는 것은 그 역으로 한학이 서양에 들어간 것이다. 이는 이 시점에 이미 서양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질서 아래에서 동서양의 상호작용이나 상호 이해의 가능성은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제 사건은 서학이 동양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한학이 서양으로 ‘나아간’ 것이며, 이는 19세기 말이라는 시대를 특정 짓는 동아시아 세계관의 일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서학동생 또는 서세동점의 일방적인 시대(17~19세기 전반)을 넘어서 태세를 균형 있게 보고자 하는 욕망이 등장할 법하다.


    이후 한성순보의 기사들은 거세고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오는 유럽 국가들과 이에 맞서는 청과 아시아의 분투, 제국주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유럽 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경쟁 관계와 혼란 등을 생생하게 담아내게 된다.



    오랑캐에서 문명국으로, 우리가 발견한 유럽

    새로운 문명의 향방과 유럽이라는 모델

    당대의 지식인들이 서양 각국의 역사와 내력을 살펴보건데, 유럽의 우수한 문명국들은 저마다의 특징과 강점에 맞는 각자의 문명을 건설하고 이를 널리 전파했다. 즉 국민의 주된 성격에 따라 그 문명과 발달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장차 어떠한 문명국이 될 것인가를 묻고자 할 때, 이들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일제강점이 언론인 문일평이 쓴 「한국의 장래문명을 논함」이라는 글은 당대의 수준에서 구미 각국의 핵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준다.


    영국은 해상권을 장악하야 해외에 다대한 식민지를 개척했고

    미국은 자주자유의 권을 익익발달하야 완전한 공화국체를 조직했으며

    덕국은 과학과 정치로써 세계에 독보적이고

    불국은 인간적 사상과 감정으로써 우내에 광포(廣布)하니 이는 기 국민의 고유한 특질을 인하여 문명의 취(趣)가 각이한 바라.


    이 글은 영국의 대제국의 나라, 미국을 공화국의 나라, 독일을 과학과 정치의 나라, 프랑스를 인문주의와 예술의 나라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여기에는 국민 각각의 고유한 특질에 따라 문명의 색깔이 달라졌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글은 우리 역시 우리 국민만의 특질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나타낸다. 일본은 유럽의 열강 국가들을 모델로 삼아 제국주의로 나아갔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문명국을 건설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1907년의 글이니 을사조약(1905)으로 외교권을 뺏기고 통감부가 설치되어(1906) 보호국으로 전락한 시점이지만, ‘새 문명’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난 왕조는 망하고 국가는 비록 사라질지라도, 문명은 세워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 새 문명의 창조를 바탕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 글에서 이러한 앎과 고민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만국의 평화를 위한 문명’이었다. 우리 민족의 기질과 특성으로 볼 때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확산시키는 것이 가장 적합한 문명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사상과 문화의 보물 창고: 근대 문화의 지향점이 된 유럽

    시베리아 철도로 닿을 수 있는 그곳, 「세계일주가」가 노래한 유럽

    중국 중심의 천하관,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며 그를 중심으로 세상의 질서가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던 세계관이 깨진 뒤에는 ‘우리가 얼마나 오래 고립되어 있었던가’ 하는 인식이 생겨났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유지돼온 세계 안에서 그에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새로운 세계 인식과 급변한 질서 감각 안에서 그것이 단지 전적인 고립이나 지체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제 ‘대무대에 고립’된 우리는 더 먼 세계로 나아가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 세계를 배워야 했다.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확장으로서의 앎을 뜻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를 따라서 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우리나라에서 세계일주라 할 만한 여행을 실제 행한 이는 1920년대의 허헌과 이정섭, 1930년대의 이순탁 등이 있다. 그런데 일찍이 1910년대에 최남선은 세계일주라는 아득한 꿈과 저 먼 나라들의 이야기를 창가의 형식으로 펼쳐내 보인 적이 있다. 1914년 잡지 《청춘》의 창간호 부록으로 실린 「세계일주가」가 그것인데, 세계 각국의 도시들을 샅샅이 살피느라 분량이 전체 300여 쪽 가운데 65쪽에 달했다. 이 장문의 창가는 한양을 떠나 평양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 너머 유럽과 미국까지 건너가는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 작품은 그에 앞서 나왔던 일본의 세계여행 안내서나 기행문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섬나라 일본에서 세계일주를 하는 여정은 거의 예외 없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또는 미국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최남선이 노래한 세계일주는 구아연락열차, 즉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부터 시작해서 유럽을 여행한 후 대서양을 건너가는 여정이다. 꼭 백여년 전 최남선은 종횡으로 뻗어간 조선의 철도가 세계 대교통로가 되어 북방으로 유럽으로 통하게 되었으니 그 중심인 평양이 장래에 세계적인 대도회지가 될 것이라 장담한다.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 안동현, 장춘을 지나 하얼빈으로 가는 러시아 동청 철로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 거기서 시베리아 철도가 시작된다. 이 창가의 화자는 모스크바, 톨스토이 생가, 페테르부르크를 거친 뒤 독일 국경을 넘어간다.


    “한양아 잘 있거라 갔다 오리라”로 시작하는 가사는 실제 세계일주 여행을 해본 사람이 기술한 것인 양 실제적인 경험의 감각을 드러내는 표현들을 적절히 사용한다. 예컨대 “하룻밤을 기차에 몸을 누이니 어느덧 페테르부르크”라든지, “십자산에 올라서 굽어보니 전시(全市)의 번화가 한눈 아래라”와 같은 식이다. 그러나 이 글의 저자 최남선이 아무리 종횡무진 동서를 오갔다 할지라도 세계일주를 했던 것은 아니며 또 당시로서는 세계일주를 해본 조선인이 없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한양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가 중국,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미국까지 다다른 이 노래는 상상과 지식의 산물이랄 수밖에 없다. 즉 이는 세계 지도와 철도 노선, 세계 각 도시와 명소들의 사진이라는 시각적 재료를 통해 상상된 여정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가사마다 빽빽이 달려 있는 주석들은 세계 여러 나라와 도시들에 대한 백과사전적 정보들을 상세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총 133절에 달하는 세계일주가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국가는 단연 영국이다. ‘쁘리텐 제국’이라 칭하고 있는 영국 편에서는 칠백여만 명의 인구가 사는 런던의 명소들, 즉 런던성, 런던교, 런던탑은 물론이고 버킹엄궁, 웨스트민스터 사원, 국회의사당, 대영박물관, 하이드 공원, 옥스퍼드ㆍ케임브리지대학, 이튼ㆍ해로우중학까지 두루 섭렵하고 영국 유수의 공업도시들을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등장시킨다.


    이 창가가 등장한 1914년 말은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합병 이후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였고, 유럽 쪽에서 보면 1차 세계대전이 막 발발한 때였다. 19세기 이래의 제국주의와 그에 힘입어 번성한 유럽 문명이 큰 위기를 맞이한 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창가에는 그런 당대의 세계사적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관광용 그림엽서 속에서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유럽의 모습만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는 여전히 19세기 말에 동아시아에서 팽배했던, 서양 문명을 무턱대고 찬양하는 기운과 분위기가 충만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점차 넓어지면서 또 좁아지고 있었다. 최한기가 말한 “예법과 풍속이며 교육과 문화 등이 멀리 옮겨와” ‘성안의 젖’, 즉 우리의 자양분이 되는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는 그러한 세계의 상호 교통과 소통이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세계를 하나의 성으로 만들어간 시대이다.


    작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된 유럽 문학과 작가들

    유럽 문학을 경유하여 얻은 자국 문화의 자양분

    외국, 특히 유럽의 작가들과 작품들이 우리 근대문학의 시작과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 원로 문학평론가는 외국문학을 가리켜 “이 나라 문학청년들의 무의식을 장악한 팜므파탈”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1930년대는 작가 개개인에게 외국문학이 갖는 의미를 묻는 설문조사나 회고의 글들이 신문 잡지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여 또 다른 서양문화 독서 목록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적인 문호와 인물들 가운데 조선에 초청하여 직접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묻는 설문조사도 있었다.


    당대의 작가들이 유럽 여러 나라의 어떤 작가들과 작품을 읽었는가 하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읽었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면 김동인은 웨일스 스노우든 산지를 배경으로 명문가 아들과 그 집안 묘지기 딸의 사랑을 줄기로 하여 유랑 집시들과 당대 화가들의 생활을 담은 『에일윈』을 ‘좋은 소설’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던튼에게 던튼의 길이 있듯이 내게도 나의 길이 있다는 것, 하나의 예술을 두고 받는 감명에는 갑과 을이 나뉠 수 없다는 소회를 밝힌다. 당시는 외국문학 전공자들로부터 한국 근대문학은 “넓은 세계 문단에서 남들이 볼 때 소 등에 붙은 벼룩 같은 위치에 있을 뿐”이라는 폄하를 받았던 때였다. 그러나 예술의 이름 앞에서는 영국 작품이나 조선의 작품이나 얼마든지 대등한 존재라는 자신감 또는 의지가 김동인의 이 몇 마디에 담겨 있다.


    당시 작가들은 서양 유명 문호들의 작품에 큰 감명을 받고 그를 통해 배우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했지만, 그들을 모방하거나 그들의 아류가 될 생각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것이 그 역사가 수십 년에 불과하지만 전통의 것과 외래의 것이 부딪치고 깨지는 과정 속에서 조선문학이 거머쥔 하나의 도달점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서 조선의 문학계에서 등장했던 주장 가운데 하나는 조선문학도 세계문학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세계문학이란 서구의 문학을 중심으로 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를 자국 문학에 대한 허무맹랑한 도취 또는 서구 추종자들의 아류의식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위계 관계 속에서의 한낱 아류가 아니라 저들의 문학과 일대일로 서로를 비춰 볼 수 있는 상태, 말하자면 한 세게 전에 괴테가 상상한 ‘국민문학들 간의 상호 존중과 번역을 통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세계문학’의 꿈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식민지 시기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고 우리말과 글이 위협받던 시기, 문학에서조차 일본어 쓰기와 읽기가 강요되던 시기였지만 적어도 일제 말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조선어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이 시대의 과제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19세기 말 시작되어 1920~1930년대까지 이어진 초창기 근대문학과 문화의 좌충우돌과 여러 실험은 분명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우리 문학과 문화가 다시 나아가는 기반이자 자양분이 되었다. 우리의 19세기와 20세기를 영원히 단절시키고 완전히 분리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전의 시기를 우리의 현재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로만 가둬둘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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