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 역사다
 
지은이 : 최성철
출판사 : 책읽는귀족
출판일 : 2019년 07월




  • 이제까지 우리가 알았던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잊어라! 『나는 대한민국 역사다』는 그동안 우리에게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국사 교과서처럼 그저 외워야만 하는 대상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면 이젠 그 편견을 버리게 해준다. 『나는 대한민국 역사다』는 때로는 소설처럼, 때로는 판타지처럼, 때로는 SF영화처럼 우리를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때로는 휘몰아치기로 우리에게 폭풍 같은 울분과 눈물 그리고 감동 속으로 몰아넣는다.


    나는 대한민국 역사다


    독립군 명장, 지청천

    지청천이 걸어온 길

    백산 지청천은 188년 1월 25일, 아버지 지재선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국의 독립운동으로 일제의 감시에 쫓기다 보니, 이름을 자주 고쳐야 했다. 어렸을 적 이름은 지수봉이었는데, 지을규, 또는 지석규로 바꾸었다가 어머니 성을 따서 이청천으로 바꾸기도 했으며, 이대형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쪽 육촌형제 중에는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 선생이 있었고, 그의 영향으로 지청천은 신학문을 배운다. 그리고 그는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박애, 평등사상 등을 공부하고 구국 활동에 관심을 갖는다.


    군인이 되겠다고 다짐한 지청천은 노백린이 교장으로 있던 대한제국의 무관학교가 폐쇄되는 바람에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가게 되는데, 이듬해인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고민 끝에 육사를 졸업하는 즉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1918년, 일본군 중위였던 지청천은 일본이 가담한 연합군의 승리하자 일본군 옷을 벗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던 차에, 1919년 2월 어느 날, 3.1운동을 계획하던 손병희 밀사와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지 않았다. 일본에 남아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 전개에 힘을 보태라는 요청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서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인 중국 땅 만주로 향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육사를 졸업한 현역 일본군 장교가 탈출한 격이 되었으니, 일본 군내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이청천으로 개명하고 나서, 그는 압록강을 건넜다. 이청천, 즉, 지청천이 탄생하는 시점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넘어 정치로 향하는 발자국

    지청천은 일본 육사 3년 선배인 김광서와 함께 한인 거주지인 서간도 길림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신흥학교를 찾아간다. 당시 만주에는 김좌진, 이범석 등 독립군 지도자들이 활약하고 있었고, 일본에서 정통 군사교육을 받은 지청천, 김광서의 합류로 신흥무관학교는 더 체계적으로 군사교육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지청천은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지청천의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서로군정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독립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둘 때, 지청천의 서로군정서 부대도 이 전투에 같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 계곡을 따라 백운평, 청수평, 어랑촌 등지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연이은 승전을 기록했다.


    1925년에 지청천은 오동진, 양기탁 등과 함께 새로운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를 신설하고, 무장독립군으로 의용군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 직책을 맡게 된다. 지청천은 정의부를 이끌면서 강력하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한 각 부의 통합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만주 이전 등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광복을 위하여 횃불같이 살다간 지청천

    1930년 7월에 지청천은 황학수, 홍진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만주에 있는 한인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의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고, 지청천은 군사위원장을 맡는다. 한국독립당은 한국독립군을 창설하고, 일본의 만주침략 전쟁인 만주사변 이후 대규모 항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 즈음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중국 국민당 장개석 위원장과 만나 무관학교 설립을 상의하고, 낙양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한다. 김구는 만주지역에 있는 독립군 간부들을 교관으로 데려오면서 그간 독립을 위한 항일전쟁을 전개해 온 지청천을 군사훈련의 총책임자로 초빙한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만들고, 지청천을 위원으로 선임하여 독립전쟁을 가속화했다. 이때 안중근의 친동생인 안공근도 군사위원으로 지청천과 함께 활약했다. 이 위원회가 후일 광복군 창설의 기초를 마련해주었으며, 지청천은 이를 통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임시 정부는 1940년 8월 15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함에 따라 광복군의 역할도 마무리되었으며, 지청천은 조국으로 귀국했다.


    1948년 3월, 지청천은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 국회의원이 된다. 그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는데, 그가 선호한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였으나 이것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시대의 풍운아, 백산 지청천은 이렇게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항일의 최전선에서 투쟁하며 살았다. 그리고 미리 대비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 민족의 아픔, 6.25를 겪고, 1957년 1월 15일, 향년 70세로 횃불같이 살았던 이 세상을 조용히 떠났다.


    지청천의 인물탐구

    일본 육사를 나와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투쟁

    당시 대한제국에는 1896년 1월에 설치된 무관학교가 있었지만, 그 활동이 미미했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1909년에는 그나마 폐지되어 정예 군인이 되고자 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당시 사회 각층의 조선 인재들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조국으로 돌아와 조국의 근대화 등 각 분야에서 이바지했던 것을 보면,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교장이었던 노백린이 일본 육사 출신이며, 일제 초기 항일운동가였던 이갑과 유동열도 그렇다. 그렇기에 그는 일본 육사를 다니면서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흔들리지 않도록 강직한 정신력과 굳건한 의지를 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그의 강직함 밑바탕에는 어머니의 강한 가르침과 훈육이 깔려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역할까지 하면서 그를 강하고 엄하게 키웠다. 그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간 것도 이러한 강인함과 도전정신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의 훈육과 자신의 의지는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조국의 현실을 똑바로 보게 했고,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정과 집념으로 정신을 무장시키고, 각오를 다지게 했다.



    유림골 선비, 김창숙

    김창숙이 걸어온 길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독립투사, 불멸의 화신 등으로 일컬어지는 김창숙은 1879년에 태어나 1962년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84년 동안 이 나라의 운명과 그 희로애락을 같이 했던 독립투사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쳐 동학혁명과 명성황후시해사건까지, 그리고 을사늑약이라는 수치를 겪으며, 3.1운동의 격동 속에서 구한말 경술국치까지, 그리고 6.25를 거쳐 자유당 정권 말기까지 그 긴 기간 나라의 회오리치던 산 역사의 중심에서 몸부림치며 살았던 의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의리와 정의를 중시여기고, 나라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를 지켜 살아간 진정한 유학자였다. 애국주의자였으며, 계몽주의자였다.


    심산 김창숙은 1879년 7월 10일, 경북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퇴계학파 후손들이 사는 선비골이었다. 김창숙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똑똑했으나, 어디에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면서 그의 부친인 김호림의 가르침을 통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의식이 있는 소년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조국의 현실과 문제점을 확실히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05년 을사오적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이었다. 당시 그는 26세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김창숙은 스승 이승희와 함께 을사오적의 목을 베고, 을사늑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조정에 올렸다. 그 사건으로 스승 이승희는 투옥되고, 김창숙은 본격적인 구국 항일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


    난립했던 임시정부들이 상하이에 자리한 임시정부로 통합되면서

    1919년 3월, 김창숙은 유림의 동지들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조선의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작성한다. 137명의 유림학자가 서명을 한 이 청원서를 가지고 김창숙은 극비리에 출국하여 중국 선양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국내에서 발각되면서 일제는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유림학자가 체포되었다. 제1차 유림단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김창숙은 손문 등 당시 중국의 정치지도자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지며 본격적인 구국 활동에 나선다. 국내외로 난립했던 임시정부들이 일단은 상하이에 자리한 임시정부로 통합되면서 그 혼돈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를 요청한다는 내용이 공개됨에 따라, 김창숙과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혹독한 고문은 결국 그를 앉은뱅이로 만들다

    이후 김창숙은 내몽골 수원성 지역에 독립기지로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무장독립단체인 의열단을 지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자금모금을 위하여 국내로 들어온다.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 김창숙의 이러한 계획이 일본 경찰에 폭로되면서 일제는 대대적인 유림을 검거하는 활동을 벌이는데, 이것이 바로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일제는 전국적으로 약 600여 명의 유림학자를 검거하여 투옥했는데,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김창숙 체포였다.


    부산으로 압송된 김창숙은 곧바로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옹고집의 유림학자요, 의리의 선비인 김창숙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갔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본 조선의 두 변호사가 무료 변호를 제의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겠다면서, 그는 자신의 심경을 시로써 표현하기도 했다. 혹독한 고문은 결국 그를 앉은뱅이로 만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벽옹(躄翁), 즉 앉은뱅이 노인이 되었으며, 이것이 그의 또 다른 호가 되었다.


    김창숙의 인물탐구

    심산 김창숙은 84세로 생을 마감했으니, 다른 독립투사들보다 오래 살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과 장기간 감옥생활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온몸에 병이 들었어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감옥에서 나와 망가진 몸을 회복하기 위한 피눈물 나는 회생의 과정을 겪는다.


    1952년, 부산 국제구락부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독재 호헌구국 선언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참가한 김창숙은 어느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오른쪽 이마를 적셨지만, 그는 이런 것에 굴하지 않았다. 백발에 한복 두루마리, 선명한 그의 눈매는 이마에 흐르는 피도 두렵지 않았다. 이런 그의 당당한 모습이 가슴 뭉클하다.


    그가 성균관대학에서 연설했던 초대학장 취임사를 살펴보면

    1946년 9월 25일, 그는 유교 정신과 그 문화를 계승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는 취임사에서 봉건시대의 사상을 답습하지 말고, 외래사상과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동서고금의 좋은 점을 잘 받아들이고 절충해서 이를 우리의 고유한 유교 정신과 접목하여 올바른 민족정신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강조했다. 이 부분은 학자로서, 정치가로서, 민족지도자로서 그의 미래지향적이며 거시적인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와 관련된 많은 일화 중 하나를 소개하면, 그는‘조선’이라는 칭호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우리 황제의 의해 나라 이름이 이미‘대한’으로 명명되었으므로, 앞으로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해야 한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일본인들이 우리를 부르는 호칭일 뿐이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대대로 전통적인 유교의 영향을 받으며, 유림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그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매우 전향적이며 진취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잔 다르크, 김마리아

    김마리아가 걸어온 길

    1905년 12월, 김마리아가 13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그녀는 고향을 떠나 서울 서대문에 있는 숙부 집으로 이사를 한다. 그녀는 숙부가 노백린, 유동열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류한다는 걸 알면서부터 침탈된 국권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신여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노백린의 딸 노숙경, 이동휘의 딸 이의순, 이인순 등과도 교유하면서 조국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생각한다.


    김마리아는 1910년 6월, 정신여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루이스 교장의 요청으로 정신여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향후 조국을 이끌어 갈 여성 지도자의 양성에 매진한다. 김마리아는 루이스 교장이 주선으로 일본유학길에 오르고, 그곳에서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결성하여 회장직을 맡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전 세계 약소국가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무렵, 1919년 2월 8일에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 유학생들의 함성으로 어우러진 2.8 독립 선언대회가 열렸다. 2.8 독립 선언은 경술국치의 부당성 지적을 통하여 일본 식민지배의 종결을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자유행동에 돌입하여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궐기대회로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김마리아와 황에스터 등이 그 중심에 있었다.


    고향으로 내려간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2월 17일 귀국하여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소식을 학교 등 주변에 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 사람들에게도 독립운동 시기가 왔다는 걸 알리고, 그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3.1 운동이 터졌다.


    1919년 3월 6일, 김마리아는 3.1운동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동경유학생들의 행적, 동조자, 독립운동 배경 등 일본 경찰의 심문이 시작되었으나, 그녀는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악랄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동안, 일제의 악랄한 고문과 구타로 그녀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 투옥되었다.


    김마리아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던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3.1운동 투옥 지사에 대한 옥바라지와 그들의 가족에 대한 보살핌 및 독립투사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등을 목적으로 하여 혈성단부인회가 결성되었고, 이 조직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로 확대되었으나, 실제의 활동은 부진한 편이었다. 이에 출소한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황에스터를 비롯한 17명의 여성 지사들이 모여 독립군에 대한 군자금 지원, 자금모금 등에까지 업무의 폭을 넓히면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탄생시켰다. 김마리아의 강한 리더십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미국 유학 생활 8년과 그 후

    1921년 4월, 김마리아에 대한 재판은 경성법원에서 이어졌다. 이때를 전후하여 그녀에 대한 중국 망명이 추진된다. 선교사 맥균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임시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녀는 인천에서 배를 탄 지 일주일 만에 산둥반도 항구도시인 웨이하이웨이에 도착한다. 그리고 북경과 천진을 거쳐 상하이에 안착한다. 몸과 마음이 고통스럽기만 한 망명길이었다.


    그녀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대표 자격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몇 갈래의 정책 방향을 놓고 혼선을 빚는 독립운동에 대하여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개조할 것은 과감하게 개조하여 통일된 정책을 밀고 나가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회의는 바람직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이 났고, 김마리아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제2의 망명길이었다.


    그녀는 미주리주에 있는 파크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으로 가서 수학을 계속했다. 그러는 중, 그녀는 뉴욕에서 뜻밖의 반가운 인물을 만나는데, 바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서 같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함께했던 황에스터였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근화회라는 재미애국부인회를 결성한다. 근화회는 1927년 이미 고국에서 결성된 단체였는데, 이에 자극 받아 뉴욕에서도 결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국 유학 생활 8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인종차별, 경제적인 어려움, 고국에 남아 있는 친지들에 대한 향수병,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 등 몸과 마음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그녀의 미국 생활은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투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귀국을 결심한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고문 후유증과 긴 망명 생활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김마리아는 1944년 3월 13일, 53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한 줌의 재로 대동강에 뿌려진다.


    김마리아의 인물탐구

    “한국에서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없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동경에서의 2.8 독립 선언 당시, 동경 유학생 독립단에 가입한 김마리아는 독립 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 속에 감추고는 대한해협을 건넜다. 당시 항구마다 일본 경찰들이 득실거렸는데, 특히 부산항은 일본과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곳으로 감시가 가장 심한 곳이었다. 걸리면 바로 감옥행은 당연하고, 그들의 야비한 고문이 예상되어 있던 터였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동경여자학원 졸업을 한 달 앞두고, 동경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게 되었지만, 여성도 실력을 갖춰야 한다, 실력이 국력이라는 평소 그녀의 소신이 그녀의 당시 성적에 고스란히 나타나있었다.


    그녀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는 생활로 무한한 신뢰를 쌓아왔다는 걸 보여주는 일련의 사례가 있다. 그녀의 미국 유학을 성사시키는 데에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사로 파견된 맥큔의 도움이 컸다. 김마리아의 인간 됨됨이에 무한한 신임이 있던 맥큔은 그녀의 중국 망명 때도 도움을 주었으며, 미국 파크대학 입학 때도 추천서를 직접 써서 파크대학 학장에게 보냈다.


    “한국에서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없으며, 일본에서 공부했던 5년간 모든 성적이 90점 이상이다. 그녀는 이제껏 우리가 알았던 기독교인 중 최고이며, 잔악한 박해 속에서도 그녀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간구한 여성”이라고 극찬했다. 나아가, 맥큔은 김마리아의 인격을 100% 보증한다고 썼다. 맥큔은 자신이 졸업한 파크대학이 열등한 조선의 한 학생으로 인하여 격이 떨어지지 않기를 당연히 바랐을 것이다. 대학 측에서는 그녀를 3학년으로 인정하여 특별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일본 검사와의 기이한 인연

    김마리아를 뚜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또 있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 의사였던 스코필드 박사(한국명 석호필)는 일제의 악랄한 고문에 항의하기 위하여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를 찾아간다. 그는 총독 앞에서, “그분 제가 잘 압니다. 한국 여성 애국자로 제일가는 사람입니다. 내 누이동생이니 석방해주어야 하겠소”라고 강하게 항의하여 결국 백신영과 함께 김마리아를 보석으로 석방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탰다. 백범 김구는, “기미년 만세 때에 큰 활약을 하여 일제의 악독한 체형을 받고 기형이 되었지만, 끝끝내 굽히지 않고 애국 운동을 하신 여성 애국자”라고 김마리아를 높게 평가했다.


    1919년 12월 11일, 김마리아가 애국부인회 독립자금 모금사건으로 대구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을 때 일이다. 당시 일제 담당 검사는 가와무라 검사였는데, 잔인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검사로 자신이 이 사건을 담당하겠다고 자원을 한 터였다. 그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 가와무라 검사는 김마리아를 일본의 국적(國賊)이라고 칭하며, 황에스터와 함께 징역 5년을 구형했다. 그러한 가와무라를 그녀는 19년 뒤, 뉴욕에서 만나게 된다. 당시 김마리아는 복역 도중 미국으로 망명해버린 것인데, 사람의 삶이란 참 알 수 없는 곡선을 타고 도는 법인가 보다.


    김마리아는 고모와 함께 가와무라가 머무는 호텔에서 그를 만나게 되는데, 가와무라는 강인하고 투철한 그녀의 애국정신을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는 이미 자기 아내를 통하여 김마리아가 자기 아내와 동경여자학원 동기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아내로부터 김마리아의 인격과 인간 됨됨이에 대하여 익히 들었으며, 그때 그는 김마리아가 훌륭한 한국의 여성 지도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가와무라의 사과가 진심이었는지, 김마리아는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잘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녀에게 가장 잔악무도한 고문이 있었던 그때, 몸이 망가지고 평생의 병을 얻을 그때의 담당 검사가 그였다는 사실에 나는 여전히 분노를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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