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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1
저   자 : 최종고
출판사 : 와이겔리
출판일 : 2019년 06월

  •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1


    조선이 독립국임을 주장한

    오웬 니커슨 데니 Owen Nickerson Denny

    오웬 니커슨 데니는 한국이름‘덕니(德尼)’로 널리 알려진 개화기의 미국인이다.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의 후임으로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이 된 그는 청나라의 조선 내정 간섭에 반대하고 위안스카이의 횡포를 비난했다. 더 나아가 1887년 수호각국(修好各國)에 조선 정부가 외교 사절을 파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1888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을 주선해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조약 문서에 서명했다. 그는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이 중국에서 독립한 나라라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주장을 『청한론 China and Korea』이라는 책에 담아내었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서 청나라가 저지른 횡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그는 고종황제에게 이른바‘데니 태극기’로 불리는 태극기를 받았는데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 참으로 고마운 미국인이었다. 이런 인물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작가의 생애

    오웬 니커슨 데니는 1838년 9월 4일 미국 오하이오 주 모건 카운티(Morgan County)에서 태어났다. 변호사로 활동하다 판사로 임명되었고, 1868년 12월 23일 게르트루드 홀 화이트(Gertrud Hall White)와 결혼하고, 1870년 포틀랜드 주 즉심법원 판사가 되어 평생 동안‘판사 데니’로 불리게 되었다. 1877년 5월 그는 중국 톈진 주재 미국 영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시워드(William Seward) 국무장관과 불화를 일으켜 일시 귀국하였다가 1885년 7월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데니가 서울에 처음 도착한 것은 1886년 3월 28일이었다. 위안스카이의 횡포가 한창일 무렵 외교고문으로 취임한 데니는 이홍장과 친분을 유지하면서도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1886년 조선-프랑스 조약을 체결하는 데도 고문 역할을 하였다. 1888년 한러조약을 체결하는 데도 활약했고, 1890년 4월 15일 공직에서 물러났다.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로 추천 되었으나 임명되지 못했고, 1892년부터 4년간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00년 6월 30일 워싱턴에 위치한 태평양 연안의 롱비치에서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작품속으로

    데니는 미국 상원의원 미첼(John Mitchell)에게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비판하는 책자를 써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청한론 China and Korea』이다. 이 책은 1887년 겨울에 써서 1888년 2월에 탈고하였다. 논설체로 쓰여진 이 책은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된 국가임을 주장하는 팸플릿 형태로 되어 있는데, 분량이 짧은 만큼 장절을 따로 구분해 놓지는 않았다. 이 책은 우선 오웬 데니가 조선에 오게 된 경위를 밝히고, 청나라의 횡포를 토로하고 있다.


    조선 국왕이 직예총독 이홍장 각하에게 그의 외교고문관과 세무사의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천거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에 내가 1885년 7월 이 직에 초빙되어 부임하였다. (…) 지난 2,3년간 음모와 법률 및 사실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중국 내에서 발행되는 중국어판 및 외국어판 신문에 한청 관계에 대한 허위보도가 게재된 일이 비일비재하다. (…)


    데니는 더 나아가 위안스카이의 부당한 태도를 유감없이 지적한다.


    1885년 내가 조선으로 초빙된 후에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청국 정부는 조선합병정책인(a policy of absorption)을 서서히 결정한 듯 여겨진다. (…)한편 위안스카이 총리는 결코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주태공사의 직함을 가진 것도 이 무렵이기 때문에 그는 이제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이 조선에 와 있는 것을 마치 자기 집 안방에 와 있는 것과 같닥 천박한 구실을 늘어놓으면서 손님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행세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


    데니는 1887년 수호각국(修好各國)에 조선 정부가 외교 사절을 파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1888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을 주선해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조약 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책을 통해 생생히 엿볼 수 있다.


    (…)전하는 기타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면 그의 행동거지의 특색을 이루고 있는 차분한 위엄을 갖추었고, 그리고 청나라의 외국 사절단 파견반대의 보고를 받고 이를 신중히 고려한 후 청나라의 항의에 대처했다. (…)불행히도 국왕은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그의 위대한 사업을 수행함에 너무나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조선 국왕은 확실히 선량한 만백성으로부터 동정과 지지를 받을 만한 분이다.(1888년 2월 3일 조선 서울에서)


    이러한 내용이 담긴 『청한론 China and Korea』이 미첼 의원을 통하여 미국 국회에 보고되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아무튼 당시에 벌어진 이러한 일들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서양인 ‘작가(저자)’들이 책을 통해 세계에 알린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생활사를 생생히 포착한

    윌리엄 리처드 칼스 William Richard Carles

    윌리엄 리처드 칼스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그는 구한말에 영국공사관의 영사가 되어 18개월간 한국에서 살았는데, 『조선풍물지 Life in Corea』(1888)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칼스가 처음 조선에 방문할 때는 1883년 겨울이었고, 그해 11월 26일에 한영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1884년 3월 17일에 중국어를 잘하는 칼스가 조선 주재 영국공사관의 영사가 된 것이다. 그는 1883년 11월 9일 상하이에서 내한하여 서울에 며칠 머물고, 11월 16일 북부 지방의 광산지역을 탐사했다. 다시 서울로 와서 제물포와 부산을 거쳐 상하이로 돌아갔다.


    작가의 생애

    윌리엄 리처드 칼스는 1848년 6월 1일 영국 워릭(Warwick)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말보로대학을 졸업하고 1886년 헬렌 제임스(Helen Maude James)와 결혼했다. 그 후 공사관 서기관 대리(1882~1883)가 되었다가 1884년 3월 17일에 조선주재 영국영사로 부임하여 18개월간 머물렀다. 그 후 상하이 주재 부영사, 충칭 주재 영사 등을 거쳐 베이징 주재 총영사(1899~1900)로 외교관 생활을 했다. 1929년 4월 7일 요크셔의 브래드필드(Bradfield)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취미는 크리켓, 테니스와 승마였다.


    작품 속으로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 Corea, The Hermit Nation』은 1882년 출간되었지만 6년 후에 나온 윌리엄 칼스의 『조선풍물지 Life in Corea』는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쓴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이 책은 당시 조선 곳곳의 생활상을 생생히 담아냈으므로 눈여겨봐야 할 책이다. 이 책은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히 담아냈는데, 조선 사람들이 짐을 꾸리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설명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짐 꾸리는 방법이 매우 흥미로웠다. 우선 짐을 말의 등에 싣는다. 짐은 아주 필요한 것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은 나무로 된 틀 위에 줄을 어긋나게 맨 다음 그 위에 짐을 싣는다. (…)짐에 고리를 끼어 늘어뜨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듯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쪽에 짐을 실으면 고리를 반대편에 고정시키나. 따라서 사람이 한 손만으로 조랑말에 짐을 싣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틀림없으며 그러한 기술을 묘사할 수도 없다. (49쪽)


    이 책은 갑신정변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했다. 1884년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정변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3일 만에 진압되어 ‘3일 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칼스는 언어에 관심이 많고 중국어를 잘했는데, 마지막 장에서는 한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글이 11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이렇게 서술한다.


    한글을 읽고 쓰기란 너무 쉬워서 한글은 아주 경시를 받기 때문에 대개 여자들과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만 사용하였다. 포고문이나 재판에 관계된 일을 제외하고 공식적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문학의 발달은 저조했다. (…)중국은 한국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과가 오늘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자로 된 작품 중 어떤 작품은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출판되었는데, 그 작품들의 가치관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옷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 (219쪽)



    영국의 여성화가 겸 여행가

    에밀리 조지아나 켐프 Emily Georgiana Kemp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에밀리 조지아나 켐프는 1860년에 영국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 서머빌 칼리지를 졸업한 화가였다. 훗날 자신의 모교인 옥스퍼드대학 부속 박물관인 애슐몰린 박물관에 작품을 기증했는데 이 박물관은 근대 박물관의 효시로 꼽힌다. 조지아나 켐프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중국, 조선, 인도, 중앙아시아와 아마존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아시아를 여행하고 1911년에 만주와 한국, 러시아 투르키스탄에 대해 소개한 『The Face of Manchuria, Korea and Russian Turkestan (만주, 조선, 러시아 투르키스탄의 얼굴)』을 출간했고, 1921년 중국에 관한 책인 Chinese Mettle을 출간하여 프랑스지리학회의 베르밀 대훈장을 수여하였다.


    작가의 생애

    에밀리 조지아나 켐프는 1860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 서미빌 칼리지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면서, 만주와 한국 등 아시아를 여행했다. 에밀리 켐프는 불교에 관한 책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939년에 사망하였다. 후일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의 일본사 교수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켐프가 100년 전에 떠났던 여행을 추적하여 To the Diamond Mountains: A Hundred-Year Journey through China and Korea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길 위에서 만난 북한 근현대사』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작품 속으로

    이 책의 제목은 『The Face of Manchuria, Korea and Russian Turkestan (만주, 조선, 러시아 투르키스탄의 얼굴)』인데, 말 그대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만주와 투르키스탄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한국과 관련된 내용은 6장에서 13장까지 다루고 있다. 그런데 1999년에 신복룡 교수가 이 책의 6장부터 13장까지를 번역해 한국어판인 『조선의 모습 한국의 아동 생활』(1999)을 출간하였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작가가 왜 한국을 여행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나는 친구인 맥두걸 양과 함께 3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중국의 동북쪽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여행했다. (…) 의화단 사건(1900) 이후 청국 정부로부터 상업적ㆍ정치적 이권을 얻으려고 각축해 온 유럽과 기타의 열강들은 이제 어느 정도 물러서 있지만 아직도 먹이를 물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개떼처럼 청국에 대해 탐욕스러운 눈길을 떼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접경지대가 만주와 한국이며, 새로운 개발이 기대되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


    이 책의 작가는 화가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린 그림까지 책 속에 곁들였다. 책에 실린 그림 중에는 펜으로 그린 스케치도 있지만 정식 수채화 작품들도 있다.


    몇몇 소녀들은 장소를 차지하는 모자를 쓴다. 그 모자는 우산보다 훨씬 크고 두 손으로 운반하며, 앞쪽에는 머리에서 시작하여 뒤쪽으로는 오금까지 내려간다. (…)나는 이 큰 모자를 쓰고 현관에 서 있는 여학생 한 명을 스케치했다. (…)(40쪽)


    이 책은 조선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다음과 같이 담고 있다.


    기차를 타고 만주에서 서울까지 여행하면서 지루함과 불편함을 겪었던 우리는 돌아오는 길은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마침 우리 일행이 출발하기를 원하던 때쯤 해서 제물포에서 대련으로 가는 배가 있었기에 우리는 그 배를 타기로 결정했다. (…) 그러나 한국을 여행한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예약했던 증기선의 출항 다음 날로 항해 일정이 공시된 다른 증기선을 보았다. (…) 이에 우리는 가능하다면 승선표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우리의 승선표를 마련해 놓은 역장에게 갔다.(88쪽)



    한국을 사랑한 어머니와 아들

    로제타 셔우드 홀 Rosetta Sherwood Hall

    셔우드 홀 Sherwood Hall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과 아들 셔우드 홀(1893~1991)의 일기는 한마디로 그 자체가 문학이다. 분량도 적지 않지만 본 대로 느낀 대로 일기체로 남긴 솔직한 역사적 기록이다. 로제타 홀의 일기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2년에 걸쳐 한국어로 번역되어 『로제타 홀 일기 Diary of Dr. Rosetta Hall』6권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서양인에 대한 시련과 편견을 극복하고 조선에서 의료와 장애인 교육의 기틀을 다진 한 벽안 여성의 감동적인 삶을 보여준다. 셔우드 홀의 『닥터 홀의 조선회상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은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 묻힌 셔우드 홀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담은 자선전이다. 2대에 걸쳐 어머니와 아들이 한국을 사랑하고 책까지 남겼으니 실로 고마운 일이다.


    작가의 생애

    로제타 셔우드 홀은 1895년 9월19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1886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1889년 의사가 되었다.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뉴욕의 빈민가 의료시료원에서 일하다 1890년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892년 6월 서울에서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 Hall)과 결혼하였다. 윌리엄 홀은 평양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1894년 11월 24일 사망해 양화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간 로제타 홀은 189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에 딸 에디스 홀을 남편 곁에 묻어야 했다. 이처럼 한국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했지만 그녀는 평생 동안 한국을 위해 살았다.


    1898년 6월 평양에서 여성치료소 광혜여원(Womans Dispensary of Extended Grace)을 열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맹학교인 ‘에디스 마그리트 어린이 병동’을 개원하였다. 1900년 6월에는 평양외국인 학교를 세웠고, 1928년 9월에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대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동대문부인병원(현재 이화여자대학 부속병원), 인천간호전문보건대학 등도 설립하였다. 1951년 4월 5일 미국 뉴저지주 오션 그로브에서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시신을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남편과 딸이 묻힌 양화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아들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고, 1900년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1928년 12월 3일 결핵 요양소의 운영비를 마련하고 결핵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한국 최초로 남대문을 그린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였다. 한국을 위해 봉사하던 그는 1940년 스파이 혐의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벌금 5천 엔을 물고 인도로 추방되어 의료선교를 하였으며, 1963년에 은퇴하였다. 1991년 4월 5일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사망한 그는 1992년 4월 10일 양화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묻혔다. 어린 시절에 사망한 에디스 홀을 뺀 나머지 4명이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을 합치면 무려 73년이나 된다.


    작품 속으로

    『로제타 홀 일기 Diary of Dr. Rosetta Hall』는 6권이나 되는 방대한 기록물이다. 제1권은 1890년 8월 21일부터 9월 24일까지의 일기를, 제2권은 1890년 9월 24일부터 1891년 5월 17일까지, 제3권은 1891년 5월 15일부터 1891년 12월 31일까지, 제4권은 1891년 5월 15일부터 1891년 12월 31일까지를 다루고 있다. 제5권은 아들 셔우드 홀과 관련된 육아일기이고, 제6권은 에디스 홀과 관련된 육아일기이다.


    그런데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은 『닥터 홀의 조선회상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에서 군데군데 어머니의 일기를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은 1978년에 처음 간행되었으며, 1984년 김동열(金東悅)의 번역으로 동아일보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조선에서 선교 개척자로 일생을 바친 의사 부부 사이에 태어나, 훗날 아내와 함께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다시 와서 16년의 세월을 보낸 저자의 자서전이다. 2대에 걸쳐 한국을 사랑했던 홀 일가의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이들이 한국에서 겪은 일들은 아름답고 재미있으며 문학성도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한국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로제타 홀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내 부모의 의료선교 사업에 있어서 나는 훌륭한 홍보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나를 예쁘다고 칭찬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한국아이에 비해 너무 큰 코와 파란 눈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튼튼한 한 쌍의 폐를 가지고 있던 내가, 여느 조선 아기들이나 마찬가지로 힘차게 소리 내어 울자 구경꾼들은 “이 아기도 역시 사람새끼로구나”하고 나를 인간으로 곧 인정했다 합니다. (…)(23쪽)

    로제타 홀은 처음에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낯설게 느꼈지만 점차 따뜻한 애정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조선인들은 대단히 인사성이 있어서 어떤 도움을 받으면 무슨 방법으로든지 꼭 은혜를 갚으려 한다. 나는 조선에서 내가 맡은 일을 좋아하며 나를 이곳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85쪽)


    어머니 로제타 홀과 마찬가지로 셔우드 홀은 이 책에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경험과 에피소드를 적어놓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을 고안하였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영국에서 온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는 홀의 집안에 머무르면서 크리스마스 실을 그림으로 그렸다. 또 호주 장로교 선교사이자 화가인 에드먼드 뉴(Ed-mond W. New)와 한국인 화가 김기창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을 떠나는 저자의 심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고요한 아침의 땅’에 내 인생을 수놓은 지 22년, 그 동안은 문자 그대로 사건과 흥분의 연속이었다. 그렇다. 조선을 떠나기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출발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아이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아름답게 수놓은 조선 국기를 꺼냈다. 해주에서의 환송연 때 조선친구들이 기념품으로 우리에게 준 것이다. 나는 태극기를 펼친 다음 나뭇가지에 걸었다. 우리 가족은 태극기 주위에 모여 섰다. 조선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축복을 기원할 때 “만세!”를 부른다. 이 말은 “1만년을 사십시오!”라는 뜻이다.(…) 이렇게 작별의 “만세”를 외치며 우리 가족은 잊을 수 없는 그 궁원과 조선을 떠났다. (729쪽)



    한국으로 신혼여행 온 독일인

    칼 후고 루돌프 차벨 Carl Hugo Rudolf Zabel

    1904년 러일전쟁 중에 독일인 신혼부부가 한국에서 신혼여행을 했다면 신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언론인 칼 후고 루돌프 차벨은 아내와 함께 한국 땅을 여행한 뒤 1906년에 『독일인 부부의 한국 신혼여행 1904 Meine Hochzeitsreise durch Korea』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 등 국제정세에 대해 날카로운 논평을 남겼다.


    작가의 생애

    칼 후고 루돌프 차벨은 1876년 9월 1일 독일 작센 주의 볼린(Wolli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아이제나하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마르부르크대학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시아 룬트샤우 Osrasiatisdhe Rundschau>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의화단사건’을 취재하였다. 그 후 기자 겸 작가로 중국, 만주, 시베리아, 한국, 일본, 모로코, 투르키스탄, 터키, 멕시코를 여행했다. 1939년 7월 3일 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14권의 여행기를 남겼는데, 한국 여행기는 그의 일곱 번째 여행기였다.


    작품 속으로

    이 책은 1906년 독일 알텐부르크(Altenburg)의 가이벨(Gaibel)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었는데, 2009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독일인 부부의 한국 신혼여행 1904 』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 차벨은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 해관(海關)에서 독일인 요한네스 볼얀(Johannes Bolljahn)과 만나 일본호텔에서 머물렀는데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적었다.


    도착 첫날부터 일본 순사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서 이름과 무슨 일을 하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게다가 형사까지 왔다. (…)그런데 바로 오늘, 일본에서 발급받은 우리의 신원증명서가 위조로 밝혀졌다. 거기에는 내가 ‘심분상’즉 신문기자라고 적혀 있었는데, 커다란 안경을 낀 일본 경찰이 증명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위조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아내와 내가 러시아 위장 간첩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156~157쪽)


    1883년부터 조선은 항구에 해관(海關)이라는 관아를 설치하였는데, 해관 근처의 일본호텔에서 루돌프 차벨은 러시아 위장 간첩으로 오해받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에 러시아와 일본이 러일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이 책의 저자는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일본에게는 러시아가 적국이었기 때문에 서양인만 보면 러시아의 스파이가 아닌지 경계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낙네들의 옷차림새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그 옷은 품이 넓은 아마포 바지를 치마가 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성의 상체를 덮고 있는 것은 짧은 아마포 저고리로서 긴 소매가 짤막한 몸통 부분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저고리는 목과 가슴 위쪽만 감싸고 있을 뿐, 허리띠 윗부분과 젖가슴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저자는 일본 경찰의 시선을 피해 조선 곳곳을 여행해야 했는데, 몸통 부분의 길이가 유난히 짧은 조선 여인들의 윗저고리를 바라보고 독일 사교계 여성의 무도회 의상을 떠올렸지만 우리 고유의 의상을 존중했던 것이다.


    장기간의 금 채굴권이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해 최근에는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특이하게도 미국과 일본의 사업만이 번창하고 있었다. 당고개에 있는 독일의 대규모 금광은 한때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현재는 전면 중단된 상태라고 들었다. 독일 금광이 실패한 데는 아마도 매장량이 부족하다는 것보다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404~405쪽)


    이 책의 저자는 저널리스트였기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글들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저자가 촬영한 사진들이 여러 장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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