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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저   자 : 유발 하라리(역:전병근)
출판사 : 김영사
출판일 : 2018년 09월

  •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기술적 도전

    환멸: 역사의 끝은 연기되었다

    모기 죽이기에서 생각 죽이기로

    방향감 상실과 임박한 종말에 따른 불안감은 파괴적 기술 혁신의 가속으로 악화된다. 자유주의 정치 체제는 인류가 산업 시대를 거치면서 증기기관과 정유공장,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세상을 관리하기 위해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에서 일어나는 혁명적 변화에 대처하는 데 곤란을 겪고 있다.


    지금도 이미, 금융 시스템은 컴퓨터에 의해 너무나 복잡해진 상태여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AI가 점점 개선되면서 조만간 금융 시스템을 이해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지는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 정치 과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똑똑한 알고리즘이 예산이나 새로운 세제 개혁안을 승인하기를 정부가 초라하게 기다리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나? 그러는 사이 피어투피어 방식peer-to-peer(중앙 집중식 관리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 상호 연결된 노드[피어 peer]들이 서로 자원을 공유하는 방식-옮긴이)의 블록체인과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가 기존 통화 체계를 완전히 재편하면서, 결국에는 근본적인 세제 개혁이 불가피해질지도 모른다. 가령, 그때 가서는 달러에 세금을 매기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금융 거래가 국가 통화나 어떤 화폐로 명확히 교환하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완전히 새로운 세금-아마 정보(미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일 뿐 아니라 수많은 거래에서 교환되는 유일한 품목)에 대한 세금-을 창안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치 체제는 재정이 고갈되기 전에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을까?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의 혁명은 기술자와 기업가, 과학자들이 만들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지 거의 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알아서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기술의 파괴적 혁신은 정치적 의제에서 우선 사안도 아니다. 그 결과, 2016년 미국 대선 기간에도 파괴적 기술과 관련해 주로 언급된 것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이었고, 실직에 관한 온갖 이야기 중에도 자동화의 잠재적 충격 문제는 어느 후보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유권자들에게 그들의 일자리를 멕시코와 중국이 가져갈 것이며, 따라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일자리를 가져갈 거라는 경고는 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접경에 방화벽을 세워야 한다는 제안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유주의 서방의 심장부에 있는 유권자들조차 자유주의 이야기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한 가지(유일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유가 될지 모른다. 보통 사람은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옆을 지나가는 미래를 감지할 수는 있다. 1938년 소련과 독일 혹은 미국에 살았던 보통 사람은 삶의 조건이 암울했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미래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물론 그가 유대인이거나 흑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임을 전제로 했을 때 얘기다). 그는 선전 포스터를 보았고-여기에는 보통 석탄 캐는 광부, 철강노동자, 영웅적인 포즈를 취한 가정주부가 그려져 있었다-그 속에서 자신을 봤다. “저 포스터 속에 있는 건 나야!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야!”


    하지만 2018년의 보통 사람은 점점 자신이 사회와 무관하다고 느낀다. 수많은 신비한 단어들-세계화, 블록체인, 유전공학, 인공지능, 기계 학습machinc learning-이 테드 강연과 정부 싱크탱크, 하이테크 콘퍼런스 같은 곳에서 신나게 오르내리지만, 보통 사람은 이 중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할 법하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사이보그와 알고리즘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실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자유: 빅데이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알고리즘에 귀 기울이기

    조만간 권위는 다시 이동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말이다. 과거 신적 권위를 종교적 신화로 정당화한 것처럼 인간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은 자유주의 이야기였다. 따라서 다가오는 기술 혁명은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바로 개인의 자유라는 생각의 기반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두 가지 혁명이 합쳐지는 지점에 와 있다. 한편으로는 생물학자들이 인간 신체, 특히 인간의 뇌와 감정의 신비를 해독하고 있다. 동시에 컴퓨터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유례없는 데이터 처리 능력을 선사하고 있다. 생명기술 혁명과 정보기술 혁명이 합쳐지면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것은 내 감정을 나보다 훨씬 더 잘 모니터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권위는 아마도 인간에게서 컴퓨터로 이동할 것이다. 지금까지 접근 불가였던 나의 내부 영역을 제도와 기업, 정부 기관이 이해하고 조작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자유 의지에 대한 나의 환상은 산산조각 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사상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늘 환자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몸 어딘가에는 늘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무언가 개선될 것이 있게 마련이다. 과거에는 몸에 고통을 느끼거나 절름발이처럼 눈에 보이는 장애로 고생하지 않는 한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2050년이면 생체측정 센서와 빅데이터 알고리즘 덕분에 질병이 고통이나 장애로 나타나기 훨씬 전에 진단과 처방이 내려질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은 늘 어떤 ‘의료가 필요한 상태’에 놓이고, 이런저런 알고리즘 추천을 따르게 될 것이다. 거절하면 의료보험의 효력이 정지되거나 상사가 당신을 해고할지도 모른다. 왜 당신이 고집 부린 대가를 그들이 지불해야 하나?


    일반적 통계상 흡연이 폐암과 상관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흡연을 계속하는 것과, 생체측정 센서가 좌상부 폐에서 암세포가 17개 감지됐다고 구체적으로 경고하는 것을 듣고도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설령 당신은 센서를 무시할 의향이 있다 해도, 센서가 보험 대리점과 직장 매니저, 어머니에게 경보를 전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절망과 희망

    테러리즘: 당황하지 말라

    테러리즘이란 말 그대로 물리적 피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퍼뜨리는 방법으로 정치 상황을 바꾸려 드는 군사 전략이다. 이런 전략은 적에게 물리적으로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없는 아주 약한 일당이 주로 사용한다. 물론 군사 행동도 모두 공포를 유발한다. 하지만 재래식 전쟁에서 공포는 물리적 손실에 따라붙는 부산물이며, 대개 손실을 입히는 힘에 비례한다. 반면, 테러리즘에서는 공포가 주무기다. 테러범이 실제로 갖고 있는 힘과 그것이 유발하는 공포 사이의 불균형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카드 바꾸기

    하지만 테러범들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들은 너무나 약해서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대신 극적인 광경을 연출함으로써 적을 자극해 그들로 하여금 과잉 대응에 나서도록 한다. 테러범들은 끔찍한 폭력 장면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고서 그것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도록 한다. 테러범들은 아주 적은 사람을 살해할 뿐이지만 그로써 수백만 명이 목숨을 걱정하게 만든다. 이때 정부는 공포를 가라앉히기 위해 테러극에 맞서 안전함을 보여주려 애를 쓴다. 이 과정에서 온 국민을 귀찮게 하거나 외국을 침공하는 식으로 막대한 힘을 조직적으로 과시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테러에 대한 정부의 과잉 대응이 테러범들보다 우리의 안전에 훨씬 더 큰 위협이 된다.


    테러리즘은 핵무장으로 간다

    앞의 분석은 지난 두 세기 동안 우리가 봐왔거나 현재 뉴욕과 런던, 파리, 텔아비브 거리에서 출몰하는 테러리즘의 경우에는 유효하다. 하지만 만약 테러범들이 대량살상무기까지 손에 넣을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테러리즘의 성격뿐 아니라 국가와 글로벌 정치의 본질까지 급변할 것이다. 만약 소수의 광신도들을 대표하는 자그마한 조직이 온 도시를 파괴하고 수백만 인명을 살해한다면, 더 이상 정치 폭력에서 자유로운 공공 영역이란 기대할 수 없어진다.


    오늘날 일어나는 테러의 대부분은 가상의 공포를 낳는 데 반해, 미래의 핵 테러나 사이버 테러, 바이오 테러는 훨씬 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정부로서도 훨씬 과감한 대응이 필요할 것이 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가정한 시나리오들과 지금까지 목격해온 실제 테러 공격을 대단히 조심해서 구분해야 한다. 테러범들이 언젠가는 핵폭탄을 손에 넣고 뉴욕이나 런던을 파괴할 거라는 공포감에 쫓긴 나머지, 자동화기나 폭주 트럭으로 행인 10여 명을 살해한 테러범을 향해 발작적으로 과잉 대응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국가가 반체제 집단을 상대할 때도, 언젠가는 이들이 핵무기를 입수하거나 자율주행 차량을 해킹해 킬러 로봇 군단으로 전용할 것이라는 근거 위에서 박해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더 주의해야 한다.


    겸손: 당신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영국인이며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그리고 무수히 많은 다른 집단들까지 저마다 자기 민족의 눈부신 업적이 아니었으면 인류는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무지 속에서 살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역사 속의 어떤 민족은 심지어 자신들의 정치 제도와 종교적 관행이 만물을 지탱하는 법칙에 필수적이라고 상상했을 정도였다. 바로 매년 자신들이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태양도 뜨지 않고 온 우주가 해체될 거라고 확신했던 아즈텍족이다.


    이 모든 주장은 거짓이다. 역사에 관한 의도적인 무지와 뚜렷한 인종주의가 합쳐진 결과물일 뿐이다. 인류가 세계를 식민화하고 동식물을 길들이고 도시를 처음 건설하고 글쓰기와 화폐를 발명했을 때에는 오늘날의 어떤 종교나 민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과 예술, 영성, 창의성은 우리 DNA에 각인된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이다. 그것의 기원은 석기시대 아프리카에 있다. 따라서 황제 시대의 중국이든, 플라톤 시대의 그리스든, 무함마드 시대의 아라비아든 그보다 후대의 장소와 시간을 기원에 갖다 붙이는 것은 모두 터무니없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일 뿐이다.

    성경 이전의 윤리

    이스라엘인은 ‘세계 3대 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가 많다. 기독교(신도 수 23억)와 이슬람교(18억), 유대교(1,500만)를 가리킨다. 여기에 신도 수가 10억에 이르는 힌두교와 5억인 불교는 들지 못한다. 신도(5,000만)와 시크교(2,500만)는 말할 것도 없다. ‘세계 3대 종교’라는 말에는, 이스라엘인의 머릿속에는 암암리에 모든 주요 종교와 윤리 전통은 유대교의 모태에서 출현했으며, 따라서 유대교야말로 보편적인 윤리 규범을 설파한 첫 종교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마치 아브라함과 모세 시대 이전의 인간들은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에서 아무런 도덕적 규약도 없이 살았으며, 지금의 도덕률은 십계명에서 유래했다는 듯이 말이다. 이것은 근거 없는 오만한 생각이며, 세계 곳곳의 많은 중요한 윤리 전통들을 무시한다.


    유대교의 어떤 성자들은 심지어 저 유명한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십계명의 계율조차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며, 비유대인을 사랑하라는 계율은 없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레위기의 원문은 “동포 중 누군가에게 복수를 꾀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장 18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네 이웃’은 ‘동포’의 구성원만 가리키는 것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나아가 이런 의심은 성경에서 유대인을 향해 아말렉족과 가나안족 같은 특정 부족 사람을 몰살하라고 명령한 사실 때문에 대폭 강화된다. 성경에는 이렇게 나온다. "“한 영혼도 살려두지 말라. 주 너의 하느님이 너희에게 명한대로 그들-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가나안족과 브리스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을 완전히 멸하라.”(신명기 20장 16~17절) 이는 인류 역사에서 집단 학살을 구속력 있는 종교적 의무로 제시한 첫 기록에 해당한다.


    세속주의: 당신의 그늘을 인정하라

    세속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세속주의는 가끔 종교의 부정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사람은 그가 믿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에 따라 규정된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세속적인 사람은 어떤 신이나 천사도 믿지 않고, 교회나 절에도 가지 않으며, 종교적인 의식이나 의례도 행하지 않는다. 이렇게만 보면 세속적인 사람은 속이 비어 있고 허무주의적이며 도덕관념이라고는 없는 존재-무언가로 채워지기만을 기다리는 빈 상자-처럼 보인다.


    이런 부정적인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스스로 세속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세속주의를 아주 다르게 본다. 이들에게 세속주의란 이런저런 종교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기보다 나름의 일관된 가치 기준으로 규정되는, 대단히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세계관이다. 실제로 세속적 가치의 다수는 다양한 종교 전통들도 공유하는 것들이다. 일부 종교 분파들이 모든 지혜와 좋은 것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세속주의자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그런 독점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과 지혜가 어느 특정 장소와 시간에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과 지혜는 모든 인간의 자연적인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최소한 몇몇 가치들은 세계 도처의 인간 사회에서 저절로 생겨났으며, 이것이 무슬림이나 기독교인이나 힌두교도나 무신론자에게나 공통적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된 것이었다.


    세속주의 이상

    그렇다면 세속주의의 이상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세속주의의 가치는 진실이다. 단지 믿음이 아닌 관찰과 증거를 기반으로 한 진실을 말한다. 세속주의자들은 이 진실과 믿음을 혼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이야기에 대한 강한 믿음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심리와 유년기, 뇌 구조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려줄 수 있겠지만, 그 이야기가 진실임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가 진실이 아닐 때 강한 믿음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더욱이 세속주의자들은 어떤 집단이나 개인, 책을 두고 오직 그것만이 진실의 유일한 후견인인 것처럼 신성시하지는 않는다. 세속주의자들은 진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어디에서 나온 것이든 신성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고대의 화석화된 유골이나 머나먼 은하를 촬영한 사진, 통계 수치가 적힌 표, 다양한 인류의 전례 기록들이다. 이처럼 진실에 헌신하는 태도야말로 근대 과학의 기저를 이룬다. 덕분에 인류는 원자의 비밀을 풀었고, 유전체를 해독했으며, 생명의 진화 과정을 알아냈고, 인류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세속주의자들이 중시하는 또 다른 가치는 연민이다. 세속주의 도덕률은 이런저런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데서 나온다. 가령, 세속주의자가 살인을 금하는 것은 어떤 고대 서적이 그것을 금지해서가 아니라 살인이 지각 있는 존재에게 막대한 고통을 끼치기 때문이다. “신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을 피하는 사람은 더 심각한 곤란과 위험을 야기할 소지가 있다. 그런 사람은 연민보다 복종심에 따라 행동한다. 만약 자신이 믿는 신이 이단자나 마녀, 간통자, 이방인을 죽이라고 명한다고 믿게 되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세속주의의 쌍둥이 가치인 진실과 연민에 헌신하는 태도는 또한 평등을 향한 헌신으로 귀결된다. 세속주의자들은 경제적, 정치적 평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은 달라도 근본적으로는 모든 선험적인 위계를 의심한다. 고통은 누가 경험하더라도 고통이다. 지식은 누가 발견하더라도 지식이다. 특정 민족이나 계급, 성이 경험하거나 발견한 것을 그들만의 특권으로 삼을 때 우리는 무뎌지고 우매해지기 쉽다. 세속주의자는 자기 민족이나 국가, 문화의 고유함에 분명히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고유함’과 ‘우월함’을 혼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속주의자는 자기 민족과 국가를 향한 특별한 의무를 인정하면서도, 그 의무가 배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동시에 인류 전체를 향한 의무도 인정한다.


    끝으로, 세속주의자는 책임을 소중하게 여긴다. 세속주의자는 어떤 상위의 힘이 있어서 세상을 돌보고, 사악한 자를 벌하며, 의로운 자에게 보상하고, 우리를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에서 보호해준다고는 믿지 않는다. 따라서 피와 살로 된 우리 인간이 우리가 행하는-그리고 하지 않는-모든 것에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세상이 온통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해법을 찾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세속주의자는 근대 사회가 전염병을 치료하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세계 곳곳에 평화를 전파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취를 거둔데 자부심을 느낀다. 이런 성취를 어떤 신적인 보호자의 공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식과 동정심을 계발한 결과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대량 학살에서 생태계 악화에 이르기까지 근대성이 초래한 범죄들과 실패들에 대해서도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올리는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회복탄력성

    교육: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다

    1,000년 전인 1018년에만 해도 미래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은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특징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1018년 중국에 살던 사람이라면 1050년쯤이면 송 제국이 멸망할 것이고, 북쪽에서 거란이 쳐들어올 수도 있으며, 역병이 닥쳐 수백만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1050년이 되더라도 여전히 대다수 사람은 농사를 짓거나 베 짜는 일을 하고, 통치자는 군대와 관직에 사람을 충원하며, 남성은 여성 위에 군림하고, 인간의 기대수명은 40세 정도에 신체는 예전과 똑같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1018년 가난한 중국 농부라면 아이들에게 벼를 심고 비단을 짜는 법을 가르쳤고, 부유한 부모라면 사내아이에게는 유교 고전을 읽고 붓글씨를 쓰고 말을 타고 싸우는 법을 가르치는 한편, 여자아이에게는 조신하고 순종적인 주부가 되도록 가르쳤다. 이런 능력이 1050년에도 여전히 필요할 거란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2050년에 중국이나 세계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돼 있을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군대와 관료제는 어떻게 작동할지, 젠더 관계는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십중팔구 지금보다 훨씬 오래 살 것이고, 인간의 몸 자체도 생명공학과 직접적인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덕분에 유례없는 혁명적 변화를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것의 대부분은 2050년이면 별 소용이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세상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열기는 달아올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의 교육 내용을 ‘4C’, 즉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소통communication, 협력collaboration, 창의성creativity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적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경제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의 의미 자체가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은 “모든 단단한 것들은 공중으로 분해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로 염두에 둔 것은 사회적, 경제적 구조였다. 2048년이면 물리적, 인지적 구도 또한 공중이나 클라우드 속 데이터 비트로 분해될 것이다.


    그 변화는 너무나 심대해서 삶의 기본 구조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럴 경우 단절성이야말로 삶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된다. 태곳적부터 인생은 두 개의 상호 보완적인 부분으로 나뉘었다. 배우는 시기와 그다음 일하는 시기다. 인생의 전반부에는 정보를 축적하고 기량을 연마하며 세계관을 구축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비록 15세 때 하루의 대부분을 (정규 학교가 아니라) 가족의 논에서 일을 하며 보냈어도, 이때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학습이었다. 일하는 중에 쌀을 경작하는 법과, 대도시의 탐욕스런 쌀 상인과 흥정하는 법,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과 땅과 물 분쟁을 해결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다음 인생 후반부에는 그동안 축적한 기량을 활용해 세상을 헤쳐 나가고, 생계를 꾸리며, 사회에 기여했다. 물론 50세가 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쌀과 상인과 분쟁에 관한 새로운 것들을 배웠지만, 이미 잘 연마된 능력에 약간의 조정을 더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21세기 중반이 되면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데다 수명까지 길어지면서 전통적인 모델은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인생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서로 다른 기간들 사이에 연속성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전에 없이 다급하고 복잡한 질문으로 떠오를 것이다.


    인간 해킹

    앞으로 생명기술과 기계 학습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심층 감정과 욕망까지 조작하기가 점점 쉬워질 것이고, 그만큼 우리의 마음을 따르는 일도 점점 위험해질 것이다. 코카콜라나 아마존, 바이두 혹은 정부가 우리의 가슴에 연결된 조종끈을 당기고 뇌의 버튼을 누르는 법을 아는 상황에서, 어떤 것이 나 자신의 목소리이고 어떤 것이 시장 전문가가 주입한 내용인지 식별할 수 있을까?


    그런 막중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우리 자신의 운영 체계를 더 잘 알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책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교훈이다. 너 자신을 알라.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과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라고 촉구했다. 하지만이 조언은 21세기에 와서 더없이 다급한 것이 되었다. 노자나 소크라테스 시대와 달리 지금 우리 앞에는 위협적인 경쟁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와 아마존, 바이두, 정부 모두 우리를 해킹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이들의 해킹 대상은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은행 계좌도 아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유기적 운영 체계를 해킹하는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컴퓨터를 해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은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진실의 절반도 담고 있지 않다. 사실인즉, 우리는 지금 인간을 해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모든 권위를 알고리즘에 넘기고 우리와 나머지 세계를 위한 결정을 믿고 맡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긴장을 풀고 질주를 즐기면 된다.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맡아서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개인의 존재와 삶의 미래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싶다면 알고리즘보다, 아마존보다, 정부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그들보다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빠르게 달리려면 짐이 많아서는 곤란하다. 갖고 있던 모든 환상들은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그 환상들은 너무나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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