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공화국
 
지은이 : 강준만
출판사 : 인물과사상사
출판일 : 2019년 02월




  • 저자 강준만 교수는 ‘바벨탑 공화국’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를 다루었다. 욕망의 내재와 분출로 응축된 ‘바벨탑’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각자도생형 투쟁을 상징한다. 그래서 수많은 바벨탑이 세워지며, 상호소통이 불가능해진 불통은 이 단계에서부터 나타난다. 이러한 바벨탑은 탐욕스럽게 질주하는 ‘서열 사회’의 심성과 행태, 서열이 소통을 대체한 불통사회를 가리키는 은유이자 상징이다.


    바벨탑 공화국


    왜 고시원은 타워팰리스보다 비싼가? : 초집중화

    왜 고시원의 80퍼센트가 수도권에 몰려 있을까?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특임교수 함인선은 「왜 고시원은 타워팰리스보다 비싼가?」라는 글에서 타워팰리스의 3.3제곱미터당 월세는 11만 6,000원이고 고시원은 13만 6,000원이라고 했다. 그는 고시원의 존재 이유이자 경쟁력의 원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자리, 정보, 문화, 교류에서 소외되지 않고 짧은 출퇴근 시간”이 보장된다면 개인 공간이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에 있음은 문제가 아니다. 좋은 입지는 ‘강남’만큼 희소하고 저성장 및 1, 2인 가구 증가로 경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기에 고시원은 당분간 시장 지배자일 것이다.


    고시원이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건 최장집이 말한 ‘초집중화’의 문제를 실감나게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초집중화란 정치적 권력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자원들이 지리적 / 공간적으로 서울이라고 하는 단일 공간 내로 집중됨을 의미한다. 이런 중앙 집중은 집중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중첩되면서 집적되는 형태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함인선이 잘 지적했듯이, 일자리에 대한 접근성이 초집중화 문제의 핵심이다. ‘집 아닌 집’의 수도권 집중도에 대한 정확한 통계 역시 없지만, 고시원의 80퍼센트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수도권의 일자리 집중도와 비슷하다는 게 우연일까?


    국세청의 ‘연말정산 통계 현황’에 따르면 2013년 억대 연봉자 70퍼센트는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으며, 취업 포털사이트 잡코리아가 2015년 자사 사이트에 등록된 기업들의 신규 채용 공고 650만 9,703건을 근무 지역별로 분석한 결과, 전체 채용 공고의 73.3퍼센트가 수도권 지역에 몰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의 경제 집중을 해소하지 않고 그런 ‘신주거난민’의 인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서울이 곧 한국이다”

    수도권의 경제 집중 못지않게 문제가 되는 건 대학 집중이다. 대학이라고 해서 다 같은 대학이 아니다. 한국인이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서열이 가장 철저하게 관철되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살벌한 입학 전쟁이 벌어지는 서열 높은 대학의 80퍼센트 이상이 서울에 몰려 있다. 서울의 서열을 그대로 물려받은 덕분이다. 서울은 이 대학들을 빨대로 이용하면서 지방의 학생과 돈을 빨아들이고 있다. 서울 학생의 35퍼센트 가량을 점하는 지방 학생들이 주거 문제로 겪어야 하는 고통은 서열에 대한 대가치고 너무 가혹하다.


    경제와 대학만 그런 게 아니다. 정치, 사회, 문화, 미디어 등 전 분야에 걸쳐 지방은 한국의 내부 식민지다. ① 경제적 종속, ② 종속 상태의 지속성, ③ 정치적 종속, ④ 국가 엘리트의 독점, ⑤ 소통 채널의 독점, ⑥ 문화적 종속, ⑦ 문화적 모멸, ⑧지 방 엘리트의 탈영토화 등 8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식민지라는 말이 듣기에 끔찍하다는 이유로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이미 1960년대의 서울에 대해 "서울은 단순히 한국의 최대 도시가 아니라 서울이 곧 한국이다"고 했는데, 서울의 한국화는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한국 사회를 집어삼킨 소용돌이

    한국 정치의 최대 특수성은 바로 이런 서울 초집중화 체제다. 이건 서양 정치 이론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한국적 현상이다. 이런 한국적 특수성을 가장 잘 보여준 책이 바로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1968)다. 반세기 전에 나온 책이지만,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건 바로 ‘중앙과 정상을 향한 맹렬한 돌진’이다. 김달중이 잘 분석 / 요약했듯이, 이 책의 메시지는 다음 4가지다.


    첫째,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적 열쇠는 동질성과 중앙 집중에 있다. 둘째, 엘리트와 대중 간에 매개 그룹이 없는 사회관계로 인해 한국 정치의 역학은 사회의 모든 활동적인 요소들을 태풍의 눈인 중앙 권력을 향해 치닫게 하는 거센 소용돌이를 닮았다. 셋째, 이런 중앙 집중적 환경 속에서 한국의 정치는 당파성, 개인 중심, 기회주의성을 보이면서 합리적 타협의 기초를 결여하게 되었다. 넷째, 소용돌이 정치 패턴에 대한 처방은 다원주의와 분권화다.


    이런 소용돌이 현상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나타난다. 헨더슨은 "한국에서 집단을 만드는 것은 주로 구성원들을 권력에 접근시키기 위한 기회주의적 수단이었으며, 서로 간 별 상이점이 없기 때문에 각 집단은 구성원의 개성과 그 당시 권력과의 관계에서만 구별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의 여러 조직들은 조직 자체나 조직원들이 중심축을 향해 상승하는 흐름에 참여하려고 하는 아메바적 성격을 갖고 있어야 했다.……모든 가치는 중앙 권력에 속했다. 권력 기반도, 안정성도, 야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체 수단도 없이 권력을 행한 경쟁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계속 증가했다. 이 사회는 높이 솟은 원추형 소용돌이라는 특유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헨더슨의 이런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보완할 점이 있다. 그건 소용돌이의 이중 구조다. 소용돌이라는 은유는 ‘서울 대 지방’이라는 구도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이런 단순 구도엔 문제가 있다.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가 한국리서치를 통해 2017년 12월에 실시한 ‘2017년 한국인의 공공 갈등 의식 조사’ 결과에선 ‘수도권 / 비수도권 갈등이 영 / 호남 갈등보다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건 전부는 아닐망정 상당 부분 ’가짜 갈등‘이다. 서울 초집중화에 의한 내부 식민지 체제는 지역의 문제라기보다는 계급의 문제기 때문이다



    왜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고 하는가? : 젠트리피케이션

    젠트리피케이션은 ‘구조적 폭력’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어떠한가? 서구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비해 악성이다. 서구의 젠트리피케이션은 거주민을 저소득층에서 중상류층으로 대체하는 주거 젠트리피케이션인 반면,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주민들의 생존권과 주거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미래 성장 동력과 지속가능성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형이 서구형에 비해 더 잔인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2009년 용산 참사 이후 널리 쓰이는 말이 되었다. 『한겨레』(2017년 11월 17일)에 따르면, “곳곳에서 쫓겨나는 세입자들의 비명이 끊이질 않고, 최근 5년간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한 책과 논문, 기사가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고 있으며, 국립국어원도 ‘둥지 내몰림’이라는 대체어를 내놓을 만큼 젠트리피케이션은 일상이 되었다.”


    『안티 젠트리피케이션: 무엇을 할 것인가?』(2017)의 저자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도시형 재난’으로 선언한다. 재개발처럼 ‘용역 깡패들’의 폭력이 동원되지 않아 그 문제의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할 뿐, 매우 고약한 ‘구조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은 경제적 착취나 정치적 억압과 같이 사회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을 말하며, 근본적으로 한 사회의 차별적 권력 분배로 표현되는 사회적 불평등에서 비롯된다. 구조적 폭력은 구조 속에 폭력이 내장되어 있으므로 간접적으로 피해를 발생시키며, 현상 포착이 어렵고 비가시적이며 폭력의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선의에서 비롯된 일이라도 구조적 폭력 구조를 보지 못하면 얼마든지 의도하지 않은 폭력적인 결과를 유발할 수 있는데,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추진하는 도시 재생 사업이 좋은 예다. 서울시도시재생지원센터의 한 활동가는 “‘핫’해지는 공간은 어김없이 도시 재생 사업지가 된다”며 “가만히 놔둬도 변화가 생길 지역인데 세금 수백억 원을 들여 개선하고 있다. 건물주들이 할 일을 서울시가 대신해주는 셈”이라고 했다.


    그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핫’해지기 때문에 영세 세입자들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다. 도시 재생 사업을 왕성하게 추진해온 서울시는 “도시 재생은 일방적으로 추진된 재개발의 반성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정책”이라고 차별화했지만, 재개발과 도시 재생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생활경제연구소 소장 구본기는 “적어도 재개발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반성 / 차별화라 할 수 있다”며 “한꺼번에 쫓아내면 ‘재개발’, 한 명씩 쫓아내면 ‘도시 재생’이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는 비아냥이 아니다

    2018년 8월에 일어난 ‘궁중족발’ 사건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겨주면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는 세입자가 임대료 인상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 건물주에게 둔기를 휘두른 사건이다. 아내와 함께 2009년 서울 종로구 서촌에 족발집을 연 김씨는 2016년 1월부터 건물주와 갈등을 빚었다.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명목으로 임대 보증금을 3,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월세는 297만 원에서 1,200만 원으로 4배 넘게 올려 달라고 요구한 게 발단이 되었다. 김씨가 임대료 인상을 거부하자 건물주는 명도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고, 법원 명령으로 건물을 강제 집행하는 과정에서 12차례나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 사건은 상가임대차보호법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2018년 1월 시행령 개정으로 임대료 인상률 상한이 9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낮아졌지만, 이는 계약 5년까지 해당할 뿐이다. 5년이 넘으면 몇 배씩 임대료를 건물주가 올려도, 재계약을 거부해도 상관없다. 상인들에겐 투자 이익을 회수하기에 지나치게 짧은 기간이지만, 2001년 법 제정 이래 이 조항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한국은 임차 상인의 영업권보다 건물주의 재산권 보호를 우선시하는 현행법을 고수해온 걸까?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이데올로기가 정부와 정치권 엘리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대중까지 그 몹쓸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 갈등 사건이 터지면, 부자 세입자의 ‘을질’이라거나 ‘약자 코스프레’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연대와 나눔의 운동가 최소연은 “왜 이렇게까지 폭력적으로 내몰까? 왜 대화를 안 할까? 왜 가짜뉴스를 퍼뜨릴까? 왜 시민들은 건물주 편일까? 그 많던 이웃들은 다 어디로 쫓겨난 걸까?”라고 묻는다.



    왜 ‘휴거’라는 말이 생겨났는가? : 소셜 믹스

    “여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만지지 마”

    “여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만지지 마.” 2018년 초 경기도의 한 주공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한 아이가 층 버튼을 누르려 하자 엄마가 이렇게 말하며 아이의 손을 쳤다는 사실이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려졌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던 사람의 제보였다.


    원래는 바로 이런 계층적 분리와 배제를 막기 위해 도입된 게 ‘소셜 믹스’다. 즉, 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상이한 계층이 함께 거주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통합적 주거 단지 개발 전략을 말한다. 사회계층 간 반목이 심한 영국 사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19세기 중반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개혁가인 제임스 실크 버킹엄이 직업과 소득 수준이 다양한 주민 1만 명이 모여 살도록 제안한 빅토리아 모델 타운이 최초의 소셜 믹스로 알려져 있다.


    그 후 1920년대 초, 미국에서 빈곤으로 인해 심화되는 사회문제의 치유책으로 시작되어 조닝 규제를 적용시킨 소셜 믹스가 등장했다. 혼합 단지 아파트가 국내에 도입된 것은 1990년대 초였으며, 2005년 4월 25일 건설교통부 주도로 시행된 지속가능한 신도시 계획 기준을 통해 소셜 믹스를 위한 본격적인 관련 제도가 도입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소셜 믹스에 거는 기대는 크다. 사회적으로 혼합된 거주 지역은 사회집단 사이의 문화적 상호 교류를 통해 지적 / 문화적 진보를 촉진할 것이고, 이는 점차 더 큰 관용으로 이어질 것이며, 더 나아가 사회적 인프라 시설의 효율, 일자리 창출 효과 등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선 그 기대가 완전히 배신당한 것으로 보인다.


    소셜 믹스는 실현 불가능한 꿈인가?

    전문가들은 소셜 믹스가 자리 잡으려면 ‘공익’ 실현을 위한 성숙한 시민의식 제고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바벨탑 공화국에선 그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소셜 믹스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수도권, 특히 서울 아파트의 소셜 믹스는 곧 쓰라린 실패의 흔적만을 남긴 채 침몰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두환은 “소셜 믹스 방식으로 지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에서는 분양-임대주택 입주자 사이의 갈등은 일상적입니다. 단지 내에 주민들이 임의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해놓고 견원지간이 된 곳도 부지기수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단지 옆에 혐오 시설도 아닌 독신 직장인 / 학생 등 1 / 2인 가구가 거주하는 행복주택이 들어서는 것에도 거부감을 갖는데 같은 단지 내에 이질적인 계층이 한데 공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리적 혼합’ 위주의 기존 정책에도 변화가 필요해 보입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소셜 믹스 단지에 특화된 주민 의사 결정 규약이나 갈등 조정 기구 마련입니다. 이와 함께 저소득층이나 서민 위주에서 탈피해 다양한 계층을 흡수할 수 있는 임대주택 정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임대-분양 주택을 무리하게 함께 배치하기보다는 임대주택 단지에 일반 분양 단지 못지않은 다양한 생활 복리 / 부대시설을 조성해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임대주택의 주거 여건 개선을 위해서는 차라리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남에 집중되는 공공 인프라 건설 사업

    소셜 믹스를 배제한 거주지 분리엔 심리적 문제를 넘어선 더 큰 문제가 있다.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적 자원이 부유층 거주 지역에 집중되는 문제다. 이미 강남이 누리고 있는 온갖 특혜가 그걸 잘 말해준다. 인구수가 거의 엇비슷한 강남구(인구 56만 5,000여 명)는 노원구(56만 2,000여 명)에 비해 지하철역이 2배 이상 많다(27대 13). 하다못해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마저 노인 인구가 많은 강북은 강남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수서고속철은 강남의 잘 갖춰진 교통 인프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종전까지 고속철을 이용해 지방에 가려면 서울역이나 용산역, 청량리역까지 나와야 했던 수고가 사라졌다.


    지금도 공공 / 민간 인프라가 국내 최고 / 최대 규모인데, 정부 주도의 공공 인프라 건설 사업은 여전히 강남에 집중되고 있다. 서울 아파트값을 잡을 카드라며 착공에 들어간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는 어떤가? 이건 그야말로 ‘강남 집중화’를 위한 거대한 굿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GTX의 중심은 강남구 삼성동이다. 삼성동은 GTX 3개 노선 중 2개 노선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삼성동은 현재 서울 지하철 2 / 9호선이 지나는데, 여기에 GTX 2개 노선과 KTX 동북부연장선 등이 추가된다. 서울시는 이곳에 버스와 GTX 등을 연계하기 위한 지하환승센터(영동대로 복합환승센터)를 건설할 예정이다. 이 환승센터는 지하 6층 규모로 연면적이 잠실야구장의 30배, 광화문 서울광장의 2배 수준이 넘는 16만 제곱미터에 이른다.



    왜 ‘무릎 꿇리기’라는 ‘엽기 만행’이 유행하는가? : 학습된 무력감

    가정·학교·직장에서 이루어지는 “억울하면 출세하라” 교육

    우리의 가정, 학교, 직장은 약육강식과 “억울하면 출세하라”의 원리를 가르친다. 갑질엔 두 종류가 있다. 제도적 / 조직적 갑질과 개인적 갑질이다. 우리는 갑질이라고 하면 주로 후자의 갑질만 생각하지만, 전자의 갑질이 후자의 갑질을 번성케 하는 토양이 되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제도적 / 조직적 갑질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일어나지만, 개인이 저항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체득한 학습된 무력감이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제도적 / 조직적 갑질의 최상층엔 법이 있다. 법은 믿을 게 못된다. 우리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유전무죄 / 무전유죄’를 믿는다. 정부는 믿을 수 있나? 공직은 그걸 차지한 사람들에게 단지 좋은 직장일 뿐이다. 자칭 엘리트라는 사람들은 전관예우에 미쳐 돌아가면서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위장전입’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고위 공직 엘리트의 ‘필수’가 되어버렸다. 이렇듯 거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없는 개인은 자신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믿는다. 악랄한 강자에게 복종하거나 순응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믿는다.


    “정규직 안 해도 좋다. 더 이상 죽지만 않게 해달라”

    산업재해는 어떤가? 고용노동부가 산업재해 발생 현황을 집계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7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2,209명으로 2016년에 비해 10퍼센트 가까이 늘었다. 이는 유럽연합의 5배,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1위이며 OECD 회원국 중 칠레, 터키, 멕시코보다도 많고 영국의 11배, 일본이나 독일의 5배에 달하는 수치다.


    한국에서 산재 사망자들은 주로 떨어지고(2017년 기준 38.0퍼센트), 기계에 끼이고(10.6퍼센트), 부딪혀(10.4퍼센트) 숨진다. 한국의 사고사망 만인율(1만 명당 명)은 0.71(2013년 기준), 미국은 0.37, 독일 0.17, 영국 0.04(이상 2011년 기준) 수준이다. 한국이 영국의 18배인 셈이다. 2015년 OECD 통계로는 한국은 영국보다 20배 이상 많다.


    주 5일 노동 기준 매일 9명이 산업재해로 죽어나간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 통계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산업재해 피해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는 게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기업의 힘이 센 대기업일수록 더욱 그렇다. 정부가 대기업 편을 들기 때문이다.


    2018년 12월 9일 방영된 MBC 탐사기획 /lt;스트레이트/gt; “기업 살인, 버려진 사람들”편은 이 점을 생생하게 잘 보여주었다. 상대가 삼성전자인데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선 작업 환경 보고서가 필수인데, 삼성전자는 그 공개를 거부하고 산업자원부는 국가기밀이라 삼성전자의 공개 거부엔 문제가 없다고 거드는데 무슨 수로 이들의 갑질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한국의 산재 사망률이 영국의 20배 이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국은 2007년 ‘기업 과실치사 및 살인법’을 제정해 기업 부주의로 노동자가 숨지면 이를 범죄로 보고 상한 없는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했다. 반면 한국은 국가가 공모한 사회적 타살을 일삼을 정도로 정반대다. 이에 대해 오민석은 “우리는 징후들 속에서 다가올 비극을 읽고 미리 대비하는 국가가 아니라, 가짜 안전, 거짓 행복의 지우개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징후들을 마구 지우며 불행을 양산하는 국가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고 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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