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낫 파인
 
지은이 : 이가희
출판사 : 팩토리나인
출판일 : 2010년 11월




  • 우울한 것은 ‘무조건’ 안 좋게 보는 시선들.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쉬쉬해야만 하는 분위기. ‘정신’과 ‘마음’은 의지의 문제라 단정 짓는 고정관념…. 아픈 마음에 대해 선뜻 이야기할 수 없게 만드는 이런 것들을 하나씩 걷어내고, ‘괜찮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기로 했다. 우울과 우울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과 궁금증부터, 치유와 치료에 대한 예민한 문제들 그리고 우울의 터널을 지나 다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전문가들의 꼼꼼한 팩트 체크를 바탕으로, 수십 명의 취재원들과 소통하며 쓰고 엮었다. 


    아임 낫 파인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

    한번 보자보자 성화였던 동기들과의 모임이 다가왔다. 어디서 보자, 몇 시에 보자 하며 약속을 잡을 땐 얼른 만나 수다 떨고 싶었는데, 막상 약속 날이 되니 아침부터 영 움직이기 싫다. 만나기 싫은 건 아닌데 뭐랄까. ‘요즘 어떤지’ 근황을 늘어놓거나 그게 아니면 너도나도 신세 한탄 릴레이할 게 빤한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피곤하다.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약속 시간을 넘겨 느지막이 참석했다. 올까말까 고민했던 나는 어디 가고, 막상 또 사람들을 만나니 오랜만이라고 반갑다며 웃고 떠들고, 뭐하고 사는지 랩 배틀하듯 뱉어내며 맥주잔을 들었다. 맥주랑 안주를 정신없이 먹었는데 이상하게 허기가 진다. 집에 가서 혼자 맥주 한 캔 더 하고 자야 할까? 싶다가 이내 귀찮은 기분이 들어서 편의점을 그대로 지나쳐 집에 도착했다. 그새 방금 끝난 모임의 단체사진이 타임라인에 올라오고 있다. 어째 다들 참 잘 살고 있다. 아무래도 기분이 더 우울해지는 것 같다. ‘난 왜 이러고 있지…. 나만 못 지내는 걸까?’


    언제부터 우울한 사람이 이렇게 많아진 걸까

    한 매체의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의 83.5퍼센트가 우울함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나만’ 못 지내는 것 같은 나날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우울한 사람이 많다는 우울한 기사인데, 어쩐지 우울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에 슬쩍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세상엔 언제부터 우울한 사람이 이렇게 많아진 걸까. 현대인은 ‘인류의 선배’들에 비해 우울이라는 감정을 더 잘 느끼게 된 걸까? 아니면 원래 인간 자체가 우울한 존재인데, 현대에 와서 그 감정이 발견되고 부각된 것일까?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대한입시, 취업 이후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항상 좁은 문을 통과하느라 경쟁해야 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싸우면서 지금껏 불안을 달고 살아왔다. 동시에 급속하게 늘어나는 1인 가구, 혼자 문화 등 개인화되어가는 사회구조 역시 우울을 생산하는 주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우울이 생산되고 만연해지는 데에는 사회적, 구조적인 수십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내 잘못이 아니라 사회 탓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내 우울의 당위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딱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우울’과 그 감정의 지속적인 확장은 논리적인 인과관계 안에서 생성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의 먼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는 이 ‘우울’이라는 감정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대부분’이라는 거대한 익명성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실제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5,000명 정도의 친구가 연결되어 있는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우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했다. 24시간 만에 100여건에 달하는 답글이 달렸다. 사람들은 어떨 때 자신이 우울하다고 혹은 우울증이라고 느낄까? 우울에 빠졌을 때 어떤 기분, 느낌이 드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단어와 표현이 중복된다. 특히 ‘사라지고 싶다.’ ‘죽고 싶다.’가 가장 많고, ‘무기력’ ‘허탈감’ ‘공허함’이 라는 표현이 그다음으로 많다.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눈에 띄게 반복된다.


    ‘우울하긴 한데 이게 우울증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꽤 많다. 스스로의 괴로움마저 확신을 갖지 못하고, 그로 인해 2차적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세상에. 내가 괴로우면 괴로운 거지, ‘괴로운 게 맞나?’ ‘괴로워도 되나?’라고 한 번 더 의심해봐야 한다니.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는 답변은 의외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명제가 나를 안심시키는게 아니라, 도리어 ‘나 아프다고 말도 못 꺼내게 하는 셈’이다.


    신기한 건, 자신의 우울을 감추고 있던 사람들이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게 해주니 자신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하고 싶었고,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 아닐까. 늘.



    우울이 삶을 덮쳐도 차마 병원을 찾지 못한 이유

    우울과 그로 인한 괴로움을 토로한 사람들에게 “병원에 가 본 적이 있나요?”라고 묻자 59.9퍼센트가 “가봤다.”고 답했다. 나머지 40.1퍼센트의 사람들은 우울한 상태를 ‘병’으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나서도 병원에 가지 못한 것. 물론 우리는 자라면서 생겨난 사회적인 여러 잣대로 ‘정신과’ ‘심리상담’ 같은 단어에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면서도 깊은 의문이 들었다. 왜 그토록 병원에 가기 힘든 걸까? 이렇게 괴로운 상태를 참아가면서까지 뭐가 두려운 거지? 오로지 사회적인 시선 때문일까?


    현경 작가의 소개로 만나게 된 ‘자원’ 님은 오랜 시간 본인이 우울증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병원에 가지 못한 케이스였다. 우울증 치료를 오래 받아온 현경 작가와 스스로 치료를 거부해온 자원 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우울이 삶을 덮친 후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건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서 확신했어요. 매스컴에서 예기하는 우울증의 증상과 또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상태가 저랑 되게 비슷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스스로도 ‘내가 지금 정상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단을 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요. 우울증이란 걸.”


    자원 님에게는 외부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찾아온 우울은 자원 님의 모든 생활을 빼앗았다. 낯가리는 성격도 아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 이후로는 사람들 만나는 게 진절머리 나게 싫어졌다. 새로운 사람뿐만 아니라 친했던 사람들에게도 연락이 오는 게 싫었다. 혼자 있고만 싶었다. 그리고 계속 잤다. 자면 아무 생각 안 해도 되니 그게 가장 좋은 상태였다.


    자원 님의 상황을 익히 알고 있던 현경 작가는 하루라도 빨리 병원을 가보라고, 가도 괜찮다고 격려하고 조언했지만 그럼에도 자원 님은 아직까지 병원에 가지 못한 상태다.


    왜 병원에 못 가는 걸까?

    경제적 이유

    “솔직히 금액이 부담스럽긴 해요.” 자원 님은 경제적인 부담을 맨 처음으로 꼽는다. “처음엔 한 번 가는 데 10만 원 정도 드는 줄 알았어요. 이젠 그 정도로 비싸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한테는 큰 금액이죠. 감기약이나 피부약 이런 건 겉으로 효과가 드러나잖아요. 근데 이건 정서적인 거니까. 혹시 그다지 몸에 작용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위안을 삼아서 괜찮아지는 건 아닐까. 괜한 돈을 쓰는 게 아닐까 반신반의 하는 거죠. 계속.”


    결국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것의 근본에는 ‘마음의 약으로 진짜 치료가 되는가.’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깔려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사실 더 큰 걱정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있었다. 자원 님에게는 여섯 살 어린 동생이 있는데, 부모님보다 그 동생이 마음에 더 걸렸단다. 언니가 우울증이라면서 약을 먹는 모습을 본다면 어린 동생이 혹시라도 안 좋은 영향을 받진 않을까 걱정했다. 자원 님은 친구들이 어떻게 볼까도 걱정됐다. 우울증 약은 식후에 꼭 먹어야 하는데, 행여 친구들이 ‘너 무슨 약 먹어?’ 라고 물을까 봐 숨어서 먹거나 피임약을 먹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경 작가도 상처받았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양극성장애(조울증)인 현경 작가는 조증 상태에서 3~4일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계속 일할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친구가 “너 진짜 우울증이야? 우리 모두 합친 거보다 지금 더 잘하고 열심히 하는데?”라고 말했다. 그런 말들은 고스란히 상처가 됐다. “차라리 나한테 말 안 걸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정말 친한 친구들은 정작 말을 아끼는데 꼭 안 친한 애들이 한마디 더 얹잖아요. 알지도 못하면서….”


    정신과 치료/상담에 대한 불신

    자원 님은 앞서 약물치료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상담치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상담치료 경험이 있는 현경 작가도 처음에는 구체적인 솔루션과 결론을 원했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저렇게 하면 나아질 거예요.’ 같은 말들을 바랐다.


    “그런데 상담선생님의 역할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상담을 통해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달까. 가령, 이런 일들을 병원에 가야 하고, 이런 일들은 포기해도 괜찮고 그런 것들. 또 너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을 땐, ‘아차!’ 하고 깨닫게 되더라구요. 이런 걸 되짚어주고 알게 해주는 게 상담의 역할이라는 거예요. 날 한 방에 낫게 해주는 만병통치약 같은 게 아니라.”


    정보 부족

    현경 작가는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고 해도, 정작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고 했다. “사실 성형외과, 피부과 정보는 많이 공유되잖아요. 근데 ‘언니 공황장애 어디서 치료했어요?’ 뭐 이런 거 물어보는 것도 좀 이상하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당황하게 되니까 입소문 같은 것으로도 정보 얻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병원에 못 가는 이유를 찾다가 밤을 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만큼 우리가 병원에 가기까지 정말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결국 병원에 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건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너의 말 한마디 덕분에 오늘을 또 살아냈어

    친구가 ‘나 우울증이야.’라고 고백했을 때, 또는 우울증인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이건 곧 내가 우울증에 빠진다면, 내 주변 사람들 역시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서 괴롭고 위험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언어로 그들과 소통해야 할까?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사람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도 하거니와, 우리는 ‘힘들고 슬픈 친구에게는 힘내라고 말하는 것’이 예의이고 ‘착한 것’이라 배우며 컸다. 또는 “나도 너처럼 힘들어.”라는 말로 공감을 해주고, “너만 힘든 거 아니다.” 정도로 불행을 평준화해주면 위로의 정석에 거의 가깝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표현이다. 안 그래도 너덜너덜하게 까진 마음을 더 후벼 파는 역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


    “너보다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더 힘들어.”


    - 예전에 저는 활발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너 왜 이렇게 변했니.’ ‘뭐가 그렇게 힘드니.’ 그런 말을 많이 들어요. 사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그럴 땐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해?” 그러다 제가 힘든 기분을 조금 이야기하면 자기가 예전에 더 힘들었던 얘기를 해줘요. 그리고 그걸 위로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사람들은 제가 우울증이라고 하면 영화 같은 시나리오, 자기보다 힘든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봐요.


    “너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잖아. 네가 무슨 우울증이야?”


    - 우울한 사람이니까 집에 가만히 박혀 있어야 하나요? 이 문제로 한번 친구와 크게 다툰 적이 있어요. 친구가 하는 말이 “네가 괜히 꾀병 부리는 것 같잖아.” 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제가 밖에서 보면 활발한 편이에요. 그런데 잘 놀다가도 갑자기 슬퍼질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거나 하는데, 그때 눌러두었던 우울한 감정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우울증 환자라고 해서 집 밖으로 아예 못 하오는 건 아녜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가기가 더 두려워지는 거죠.


    그 외에도 “다 네가 성장하는 과정이야.” “다들 그러고 살어. 그러려니 하는 거지.” “신경 쓰지 마. 너 너무 예민해.”와 같은 말들이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괴로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공감해주고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 나는 다 안다는 듯한 표현이다. 나는 그 감정을 잘 모르겠지만 ‘고통스러웠겠다.’ ‘힘들겠다.’고 공감해주고 가급적 그 기분을 헤아려보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잘 모르겠을 땐,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 하고 묻는 것이 낫다. 


    너의 말 한마디 덕분에 오늘을 살아

    “어떤 말보다는…. 그냥 덤덤하게 들어주고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게 가장 좋았어요.” 굳이 뭘 해주려고 하는 것보다, 우울도 그 사람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 그들에겐 상대방의 이러한 마음가짐이 가장 절실하다.


    “말해줘서 고마워.”


    - 어렵게 털어놓았을 때 무엇보다 안심이 될 때는, 상대방이 나의 속 얘기를 기꺼이 받아들여줄 때. 그리고 그 눈빛이에요. 특히 “네가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줘서 참 고맙다.” 라고 말해주면, 문제가 해결되고 말고를 떠나서 눈물이 터질 만큼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 들어요. 이 사람이 내 마음의 병을 귀찮게 여기지 않고 받아들여주는구나. 아무 말 없이 안아주는 것도 좋았어요. ‘난 항상 여기 있고, 우울증은 어려운 마음의 병이지만 그래도 너와 함께 있는 게 두렵지 않다.’는 마음이 전해져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 지금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해주는 말은, 어떤 말보다 더 값지게 다가왔어요. 내 마음과 감정을 무시하는 말은 상처로 남는 것 같고,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말은 힘이 됐던 것 같아요. 힘들어 해도 괜찮다고, 좀 더 천천히 나아도 괜찮다고 말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것 같았어요.


    지금 우울에 잠겨 있는 친구에게는 나의 위로가 눈에 잘 보이지 않거나, 혹은 감사를 표현할 에너지가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 그의 길을 동해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운이 된다.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커피 한 잔 하고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게 바로 옆에 있어주는 것의 의미다. 사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지만 내심 한편으로는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고, 따듯한 위로를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지금은 위로나 해결책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가정 하에, 이해와 공감으로 다가가야 한다.



    방구석에 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냥 두세요

    사실상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는 ‘배부른 소리’ ‘어리광’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는 된다. 정신 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숨겨야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시대를 살아오셨으니까. 특히 정신과 기록이 자녀의 미래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약물에 의존하게 되면 더 피폐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오해와 걱정들이 큰 것도 어찌 보면 다 따뜻한 관심이므로.


    하지만 우울증으로 힘들 때, 가족들에게 특히 부모님께 위로를 받지 못하는 건 당사자에게 매우 큰 상처가 된다. 심지어 겪고 있는 현상을 더 극단적으로 키울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가 “엄마 아빠, 나 우울증이에요.”라고 고백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병원에 데려가는 게 올바른 것일까?


    30대 정신과전문의 5인이 모여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의 허규형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우울증은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울증이 오는 원인은 크게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으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생물학적 원인으로는 뇌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신경전달물질, 즉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등의 불균형에서 온다. 특히 세로토닌의 농도가 낮거나 불균형한 게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심리적으로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거나 자존감의 손상, 계속 실패를 경험하는 경우 발생하는 ‘학습된 무기력’같은 다양한 요인이 있다. 사회적으로는 지지 체계, 즉 내가 힘든 걸 언제든지 들어주고 지지해줄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올 수 있다. 


    “우울증은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우울한 상태에서는 나가서 영화도 보고 친구도 만나면 기분이 개선될 수 있지만 우울증은 이미 그런 걸 할 수 없는 상태인 거죠. 그렇게 때문에 의지의 문제는 아니고 이미 그 정도 수준은 넘어갔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의지와 다르게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만 피어나는 상태, 그게 바로 우울증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울증에 걸린 자녀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만 처박혀 있는 모습 때문에 부모님과의 갈등이 많이 생긴다. 이럴 때 그냥 둬도 되는 걸까? 나가서 운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땀이라도 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병원에서 적절한 처방을 받는 게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그냥 둬도 됩니다. 9~10시간씩 잠만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충분히 자고, 자책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몸이 그만큼 쉬는 걸 필요로 했던 거니 마음을 편하게 먹도록 해주세요. 그냥 이렇게 쉬는 것도 정신질환에는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정신과 치료에서도 무기력의 경우 작은 목표를 부여한다. 양치하고 세수하는 것까지만 하고, 성공하면 칭찬한다. 혹시 못했다고 해도 비난하지 않는다. 우울증은 보통의 경우 6개월~1년 정도면 자연적으로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치료받을 경우 3개월 정도면 회복된다. 기간뿐만 아니라 힘든 정도, 재발하는 정도도 낮아진다.


    약물치료를 받을 때 부작용은 없을까?

    한편, 부모님들은 약물치료 자체를 걱정하기도 한다. 항우울증제를 복용하면 초반에는 메스껍고 울렁거리거나 설사하는 것 같이 위장 쪽에 부작용이 오기도 한다. 처음 약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두통이나 불안, 초조를 호소하거나 오히려 더 가라앉고 졸음이 쏟아지거나 어지러울 수도 있다. 이 적응기만 지나면 크게 부작용은 없다. 항불안제나 수면제는 내성이나 의존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다루고 적절하게 처방해주는 의사선생님의 지침에 잘 따른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가족들이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약물복용을 중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적지 않은 수의 중고교 청소년들의 목소리에는 다른 우려도 담겨 있다. ‘어렵게 학교 상담이나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비밀 보장이 안 돼서 실망이 컸다.’ ‘부모님이 불신을 갖고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울증에 빠지면 나와 내 환경,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일어난다. ‘나는 쓰레기야. 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어, 뭘 해도 안 될거야. 주변 사람들도 내 말을 듣지 않아. 내 미래는 당연히 시궁창이겠지.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때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뿐이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조금만 열고 부모님과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우울증은 사실 명백한 병인데도 사람들은 ‘병이 낫구나, 병원을 가야지.’ 이렇게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흔히 마음의 병이라고 하는데, 사실 마음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뇌의 작용으로 생기는 거잖아요. 우리는 보통 심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뇌의 변화로 인해서 생긴 질병이니까. 생각과 마음의 문제로만 치부하지 말고 병원에 가서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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