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지은이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역:박문재)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18년 04월




  • 플라톤이 꿈꾸던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인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전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스토아 철학이고,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지만, 일부는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영원의 관점에서 성찰한 마르쿠스의 이 저작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도전과 격려와 위로를 주는 영속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명상록


    제1권

    내 어머니에게서는 신을 공경하며 살아가는 경건한 삶, 사람들에게 후히 베푸는 삶, 잘못된 일을 실제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일을 생각하는 것조차 하지 않는 삶, 부자들과는 거리가 먼 검소한 삶을 보았다.


    내 증조부 덕분에 일반 학교에 다니지 않고 훌륭한 선생님들을 집으로 모셔서 배우게 되었고, 이런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개인교사에게서는 전차 경주에 나오는 녹색군과 청색군, 또는 검투 경기에 나오는 큰 방패군과 작은 방패군 중에서 어느 한 쪽을 편들고 응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어렵고 힘든 일들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 최소한의 것만으로 만족하며 요구하는 것이 별로 없는 것,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하고 남이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 남을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디오그네토스(마르쿠스에게는 미술과 음악 선생이 따로 있었는데, 그 중에서 디오그네토스는 미술담당 개인교사였다)에게서는 쓸데없는 일들에 힘을 쏟지 않는 것, 주술사들이나 사기꾼들이 주문이나 축귀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 것, 메추라기를 싸움 붙이는 놀이를 하지 않고 그 같은 일들에 열광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이 해 주는 솔직한 말들을 막지 말고 귀 기울여 잘 듣는 것을 보았다.


    루스티쿠스(93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처형당했던 스토아학파의 순교자 퀸투스 아룰레누스 유니우스 루스티쿠스의 후손으로서 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마르쿠스에게 20대 중반부터 지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로부터는 나의 성품을 교정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 교묘한 언변과 수사학을 익히는 일에 빠져서 열을 올리지 않는 것, 순전히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문제들에 대한 글들을 쓰지 않는 것, 잘잘못을 따져 훈계하는 연설을 삼가는 것, 사람들에게 금욕주의자나 자선사업가처럼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 수사학과 시학과 미사여구를 멀리하는 것, 정장을 하고 집안을 산책하는 것과 같은 허황된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 루스티쿠스가 시누엣사(라티움 또는 캄파니아 접경지대에서 가까운 비아 아피아에 있던 해안도시였다)에서 내 어머니에게 쓴 편지처럼 편지는 담백하게 써야 한다는 것, 어떤 사람들이 내게 화를 내거나 잘못한 경우에도 금방 평정심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 그들이 조금이라도 돌이키고자 하는 기색을 보이기만 해도 그들과 기꺼이 화해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 책들은 피상적으로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의 깊게 정독해야 한다는 것, 유창한 언변으로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주의해서 들어야 하고 성급하게 동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집에 있던 필사본을 빌려주어서 에픽테토스(마르쿠스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서, 그가 한 말들은 「명상록」에서 자주 직간접적으로 인용된다)의 「담화록」도 알게 되었다.


    플라톤학파의 철학자인 알렉산드로스(소아시아의 킬리키아 속주 출신의 철학자이자 수사학자였다)로부터는 누구에게 말하거나 편지를 쓸 때 “내가 너무 바쁘다”라는 말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자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생겨나는 의무들을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나의 형제인 세베루스(146년에 집정관을 지낸 그나이우스 클라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를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큰데, 그의 아들은 마르쿠스의 딸들 중의 한 명과 결혼했다)로부터는 가족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 정의에 대한 사랑을 보았고, 그를 통해서 트라세아와 헬비디우스와 카토와 디온과 브루투스(폭정에 저항했던 스토아 철학자 또는 정치가들)를 알게 되었으며, 하나의 법률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하나는 것, 평등과 언론의 자유를 토대로 한 정부, 신민의 자유를 최우선적인 가치로 하는 왕정에 대한 사상을 갖게 되었다.


    내 양아버지(마르쿠스의 양아버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로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138년 7월 10일에 즉위해서 161년 3월 7일에 죽었고, 그의 뒤를 이어 마르쿠스는 황제가 되었다)에게서는 온유함, 신중하게 심사숙고해서 한 번 내린 판단은 흔들림 없이 고수하는 것, 명예를 얻고자 하는 허된 허영심이 없는 것, 일 자체에 대한 열정과 끈기, 공공의 유익을 위해 무엇인가를 제안하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 상벌을 엄격히 하는 것을 보았고, 밀어부칠 때와 풀어 주어야 할 때를 경험으로 알고 계신 것을 보았으며, 소년들에 대한 모든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해서, 친구들에게 자기와 함께 식사하거나 여행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들이 다른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경우에도 그들을 늘 이전처럼 대하셨다. 회의가 있을 때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모든 안건을 꼼꼼하게 세심하게 살폈고, 처음에 보고를 듣고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을 생략하는 법이 없었다. 멀리 내다보고 아무리 작은 일도 미리 계획을 세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지는 않았다.


    그는 행운이 그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기 위해 그에게 풍부하게 공급해 준 물건들을 아무런 주저 없이 사용했지만, 과시하는 것이나 미안해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있을 때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사용했고, 없을 때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변화를 주는 것이나 오락가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늘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일을 하곤 했다. 잠시 심하게 두통을 앓았다가도 이내 다시 힘을 차리고서 일상으로 돌아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했다.


    그에게는 냉혹하거나 무자비하거나 고압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그는 속된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진땀나게 만드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매사가 마치 여유로운 사람이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침착하게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체계적으로 계획한 후에 그 계획을 단호하고 일관되게 실행해나가는 것 같았다.


    제2권

    그라누아 강변에 있는 콰디족의 땅에 머물며 쓰다(그라누아는 오늘날 헝가리 북부에 있는 에스테르곰 지역을 흐르는 도나우 강의 한 지류 이름이고, 콰디족은 도나우 강 북쪽에서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살던 게르만족의 한 부족이었는데, 마르쿠스는 170년대 초반에 그 지역으로 원정을 가 있었다).


    내가 누구이든, 나는 육신과 호흡과 이 둘을 지배하는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다. 네가 보던 책들을 집어 치워라. 그런 것들로 더 이상 너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말고, 마치 네가 지금 죽음을 앞둔 사람인 것처럼 육신을 무시해 버려라. 육신이라는 것은 단지 피와 뼈, 그리고 신경과 정맥과 동맥이 서로 얽혀 있는 그물망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호흡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라. 호흡이라는 것은 공기의 흐름이고, 그 공기도 늘 동일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마시는 것이다. 너를 이루고 있는 세 번째 부분은 너를 지배하는 정신이다. 네 자신을 노인이라고 생각해서, 너의 정신이 이제 더 이상 노예로 살아가게 하지도 말고, 온갖 이기적인 충동들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꼭두각시가 되게 하지도 말며, 현재의 운명에 불만을 품거나 장래에 닥칠 운명을 두려워하게 하지도 말라.


    신들이 하는 일들에는 섭리가 가득하다, 그리고 운명이 하는 일들은 자연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섭리에 의해 안배된 모든 것들로 서로 섞여 짜여 있다. 필연이라는 것도, 네가 속해 있는 우주가 주는 온갖 혜택도 다 거기에서 흘러나온다. 신들이 그동안 네게 무수히 많은 기회들을 주었는데도, 너는 그 기회를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들을 미루어 왔었는지를 기억해 보라. 하지만 이제는 네가 속해 있는 우주가 어떤 것이고, 그 우주의 어떤 지배자가 너를 이 땅에 보내어 태어나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이 땅에서 네게 주어진 시간은 엄격하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네가 그 시간을 활용해서 네 정신을 뒤덮고 있는 안개를 걷어내어 청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지나가 버리고 네 자신도 죽어 없어져서, 다시는 그런 기회가 네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너는 왜 너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냐? 그럴 시간이 있으면 네게 유익이 되는 좋은 것들을 더 배우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일들에 쓸데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을 멈추라. 하지만 그런 후에도 또 다른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죽을 수도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인간 세상을 떠나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만일 신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신들도 존재하지 않고 섭리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 속에서 더 이상 살아간들, 그것이 네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우주의 본성이 무지해서, 또는 알기는 하지만 보호하거나 바로잡을 힘이 없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방관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또한 우주의 본성이 능력이나 솜씨가 없어서 유익한 일과 해로운 일이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선한 자들에게나 악한 자들에게나 똑같이 일어나는 죽음과 삶, 명예와 불명예, 고통과 쾌락, 부와 가난은 그 자체로는 사람을 존귀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부끄럽게 하는 것도 아니며 진정으로 유익한 일도 아니고 해로운 일도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들은 점에 불과하고, 우리의 실재는 유동적이며, 우리의 인지능력은 형편없고, 우리의 육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다 썩게 될 것이며, 우리의 혼은 늘 불안정하고, 우리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고, 우리의 명성은 위태롭다. 인생은 전쟁이고 낯선 땅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망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호위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는가. 오직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철학이다. 철학은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이 침해를 당하거나 해악을 입지 않게 지켜 주고, 쾌락과 고통을 이기게 해 주며,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해 주고, 거짓과 위선으로 행하지 않게 해 주며, 남들이 무슨 짓을 해도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고, 우리에게 일어나거나 안배된 모든 것들을 우리 자신이 기원한 바로 그곳에서 온 것으로 알고 받아들이게 해 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이 해체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해준다.

    제4권

    우리를 지배하는 이성은 본성과 일치하게 작동되는 경우에는 우리에게 생기는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성향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거나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언제나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불길 속으로 어떤 것을 던져 넣으면 불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지배해서 자신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시골이나 해변이나 산속에서 혼자 조용히 물러나 쉴 수 있는 곳을 갖기를 원하고, 너도 그런 곳을 무척 그리워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다. 너는 네 자신이 원할 때마다 그 즉시 네 자신 속으로 물러나서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 속으로 물러나서 거기에 있는 것들을 보자마자 그 즉시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네 마음속으로 물러나 쉼으로써, 너의 마음이 선하게 정리되고 늘 새롭게 되게 하라.


    네가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원리들은 핵심을 담고 있는 짧은 것들이어서, 네가 그 원리들을 너의 뇌리에 떠올리자마자 그 즉시 모든 고민과 잡념이 제거되고, 네가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들로 너를 돌아가게 해 주어서, 네게서 모든 불만이 사라지게 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고력이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듯이, 우리를 이성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이성도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것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저것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성도 우리 모두에게 공통이다. 그렇다면, 법도 공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동일한 시민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일한 국가 공동체이 구성원들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일종의 국가다. 인류 전체를 구성원으로 하는 국가가 우주 외에 다른 어떤 국가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 전체가 공통적으로 속해 있는 이 국가로부터 우리의 사고력과 이성과 법이 생겨난다.


    모든 일어나는 일들은 정의롭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너도 이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정의롭다”고 말한 것은 일들의 인과관계가 정확하고 옳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 모든 것을 공과에 따라 안배하기 때문에, 정의 개념에 비추어 보아서도 “정의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무슨 일을 하든 진정한 의미에서 오직 선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하는 방식을 따라 하라. 모든 행위에서 이것을 지켜라.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언행심사를 바르게 하고 의롭게 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고 여유가 넘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검은 마음을 곁눈질로 훔쳐보는 일을 그만두고,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선한 자가 해야 할 일이다.


    우주는 질서를 따라 잘 정돈되어 있거나 모든 것들이 서로 혼잡하게 뒤엉켜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우주 전체에 내재하는 질서가 존재한다. 만일 우주 전체에 무질서만이 존재한다면, 네 안에 네 자신의 개인적인 질서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특히 만물은 서로 구별되어 흩어져 있는데도 서로 연결되어 함께 공감하고 감응하는 것을 보면, 거기에는 분명히 질서가 존재한다.


    머지않아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아직도 여전히 단순하지 않고, 초연하지 않으며, 외적인 것들에 의해서 해악을 입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사람과 화목하지 못하며, 정의롭게 행하는 것만이 지혜라는 확신도 갖고 있지 못하다.


    신이 너에게 네가 내일 아니면 모레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너는 아주 쪼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하루 차이는 차이도 아니라고 여겨서 내일 죽든 모레 죽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는 수십 년 후에 죽든 내일 죽든 그런 것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제7권

    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네가 충분히 많이 보아 온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이 일은 내가 전부터 많이 보아 온 것이다”라고 생각하라. 저 옛적의 역사나 좀 더 가까운 시대의 역사나 현대의 역사나 모든 역사가 그런 동일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오늘날의 도시들과 가정들도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늘 친숙하게 보아 왔던 것들이고,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이다.


    나의 사고력으로 이일을 하기에 충분한가. 아니면 충분하지 않은가. 충분한 경우에는, 우주의 본성이 내게 준 도구인 나의 사고력을 이 일에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일이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나는 그 일에서 손을 떼고 나보다 더 잘해낼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고,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되, 나를 지배하는 이성과 협력해서 바로 이때에 공동체에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혼자서 일하든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든,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공동체의 유익과 화합이라는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선한 신(神)이거나 우리를 지배하는 선한 이성이다. 감각에 의해 일어나는 망상이여, 그런데 네가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 기어드는 것이냐. 신들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네가 왔던 길로 다시 가버리고 여기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라. 내게는 네가 필요하지 않다. 너는 오래된 습관을 따라 여기에 온 것일 뿐이니, 나는 네게 화를 낼 생각은 없다. 다만 여기에서 떠나가기를 바랄뿐이다.


    화난 표정은 본성을 아주 많이 거스르는 것이다. 그것이 자주 반복되어서 습관으로 굳어지면, 사람의 살아 있는 표정은 죽어가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완전히 죽어 버려서 되살릴 수 없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화내는 것이 이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어져 버린다면, 사람이 살아갈 다른 어떤 이유가 남아 있겠는가.


    소박함과 겸손함을 지니고, 미덕도 아니고 악덕도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네 자신을 빛나게 하고, 인류를 사랑하며, 신을 따르라. 데모크리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 “만물은 법을 따르고, 사실 오직 원자들만이 진정으로 존재할 뿐이다.” 만물이 법을 따른다는 것을 네가 기억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과거를 돌아보고서 수많은 왕조들의 흥망성쇠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내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과 똑같을 것이고,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사십 년을 살펴보든 만 년을 살펴보든 거기에서 거기고 똑같다. 인생에서 더 볼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고통을 겪을 때마다, 고통은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너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지성에 해를 끼쳐서 그 이성적이거나 공동체적인 본성을 손상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에피쿠로스가 한 말을 기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고통은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네가 너의 상상력으로 네가 겪는 고통을 부풀리지만 않는다면, 참아낼 수 없거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로 인해 짜증이 나고 화가 날 때에는 네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 “내가 이런 일에 짜증이나 화를 낸다며, 나는 고통에 지고 있는 것이다.”


    제11권

    이성적인 정시의 속성들은 이런 것들이다 : 자신을 보고, 자신을 분석하며, 자신의 뜻대로 자기를 만들고, 자신의 열매를 자기가 거두며, 삶이 어느 대에 끝나든 자시의 고유한 목표를 달성한다. 무용이나 연극 같은 예술 공연에서는 방해를 받아서 중도에 중단되면, 공연 전체를 망치게 되는 반면에, 우리의 인생은 어느 때 어느 장면에서 갑자기 중단되어도, 이성적인 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현재의 그 순간에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나무에 붙어 있는 어떤 가지가 자기 옆에 있는 가지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면 그 나무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모든 사람이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뭇가지는 남의 의해서 베어져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인 반면에, 사람은 이웃을 미워하거나 이웃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스스로 이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기가 공동체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떨어져 나오는 것이 너무 자주 반복되는 경우에는, 떨어져 나온 가지가 다시 그 나무에 붙어서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네가 바른 이성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을 방해할지라도, 너로 하여금 바른 행동에서 벗어나 빗나가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가 그들에게 질려서 그들에 대한 너의 선의를 거두게 하는 것도 할 수 없게 하라. 너는 이 두 가지 방향에서 네 자신을 철저하게 지켜서, 한편으로는 바른 길을 따라 나아가고자 하는 너의 판단과 행동이 변함이 없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의 길을 방해하거나 어떤 식으로 너를 훼방하고자 하는 자들을 선의로 대하는 것에서 변함이 없게 하라.


    가장 고귀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은 혼에 있고, 사람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담담한 태도를 취하기만 한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가치중립적인 것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쓸데없이 그런 것들을 판단해서, 그 판단들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각인시켜 둠으로써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다보면, 어느새 우리의 인생은 종착역에 도달해 있을 것임을 명심하라.


    너는 너의 이성이 빠지기 쉬운 네 가지 잘못된 길을 무엇보다도 특히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고, 그런 길이 탐지될 때마다 네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거부함으로써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을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첫 번째 잘못된 길을 만났을 때는 “이 일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두 번째 잘못된 길을 만났을 때는 “이 일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세 번째 잘못된 길을 만났을 때는 “이 생각은 진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라. 네가 너의 이성에 책망해서 나아가지 못하게 해야 할 네 번째 잘못된 길은, 너의 신적인 부분이 너의 열등한 부분이자.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부분인 육신과 그 조잡한 움직임에 져서 무릎을 꿇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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