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
 
지은이 : 에노모토 히로아키(역:정지영)
출판사 : 쌤앤파커스
출판일 : 2018년 12월




  • 이 책은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정의’의 실체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다시금 묻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가 정의롭다고 굳게 믿었던 그 모든 행위는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일방적인 정의감이 진정한 정의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논리는 맞고 너의 논리는 틀렸다.’라는 그 이상한 정의감에 도취된 사람이 혹시 나는 아니었을까. 이 책이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정의로운 사람이 많은 건강한 사회, 누구에게나 통하는 정의가 힘을 가지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까.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


    정의로운 사람인가, 위험한 사람인가?

    피해자를 대변하는 관계없는 사람들

    2016년, 일본의 구마모토현에서 7.0 이상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구마모토 지진으로 지역 사람들은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그중 남편과 세 아이들을 키우며 구마모토에서 살던 탤런트 이노우에 하루미씨의 자택 피해 상황도 알려졌다. 그녀는 텐트에서 생활하면서 블로그를 통해 현지의 험난한 상황을 알렸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괴로운 심경을 블로그에 하나씩 남겼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하소연하고 싶은 건 당신만이 아니다.라며 비난했고, 이노우에는 블로그 활동을 그만두었다. 물론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 지역에는 이노우에와 똑같이 비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혹독한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나가려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리 비정한 채찍질을 할 수 있을까? 그 행동은 정말로 정의감에 따른 것일까? 이런 공격적인 비판을 볼 때마다 유명인에 대한 선망과 시샘, 상대적으로 초라하다고 느낀 자신에 대한 짜증이 투영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2011년,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9,0 규모의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이 3월에 발생했는데, 격한 여진이 계속되어 꽃이 만발하는 계절까지 이어졌다. 당시 일본 사회는 전반적으로 자숙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때 꽃구경을 간 사람들은 격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 꽃구경을 즐기는 것이 말이 되냐며 신중하지 못하다고 분노한 사람들은 정작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는 실제로 본 적도 없는 불특정 다수, 온라인에서 떠들기만 하는 방관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피해자에게 투영해서 꽃구경을 즐기는 사람들을 비판한 사람은 과연 정의감으로 움직였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정말 정의감인가?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상대의 잘못을 판단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살펴보면 정말로 순수한 정의감 때문인지 종종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그중에는 얼핏 정당한 의견처럼 들리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그렇게까지 분노해서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느껴진다. 비판하는 사람이야 괘씸하게 여겨지는 상대에게 자기 의견을 정당하게 피력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언행을 보면 옳은 소리, 바른말 한다는 생각보다 꼴사납게 느껴질 때가 있다.


    소방대원이나 구급대원에게 규칙 위반이다.라고 말하면서 비난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시간을 아껴서 위급한 상황에 놓인 임무를 필사적으로 해내려는 사정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래서 인지 이런 상황을 보면 ‘이것이 과연 정의감만으로 하는 언행일까?’ 잘못을 지적할 만한 상대를 찾아 공격하면서 분풀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의를 둘러싼 논쟁이 복잡한 까닭은 무엇인가?

    왜 말이 통하지 않을까?

    상대가 당연히 알아주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왜 이해를 못하지?’ 하며 당황스러워 할 때가 있다. 아무리 말해도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럴 때 상대가 ‘참 어리석구나.’ ‘일부러 그러나?’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상대는 내 말을 이해하면서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입장이 달라서 매사를 각자 다른 구도로 보기 때문이다. 구도를 달리 보면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이치도 달라진다. 따라서 자신만의 이치를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입창 차이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에는 감정도 얽혀 있다. 조직의 파벌 싸움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직장에 파벌이 둘러 나뉘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한 파벌의 누군가가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상대 파벌의 중심인물에게 적은 외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 직장에서 서로 다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의견을 건넸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가 뭐라고 할까? 당신이 하는 말은 머리로는 알겠어요. 그런데 나는 외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아무래도 상대편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는 말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그가 인품이 매우 훌륭해서 대체로 합리적이라 해도 이 문제는 다르게 대처할 수 있다. 상대가 내세우는 의견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에 없을 수도 있다. 물론 이렇듯 감정적으로 대립하지 않더라도 현실에서는 입장의 차이, 즉 전제가 되는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정의감을 앞세워 집단으로 공격하는 사람들

    법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도 윤리적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을 보게 되면 분노를 느낀다. 교활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자신이 정당하다는 식으로 포장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뻔뻔한 태도로 못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 문제에 크게 분노하며 세상의 불합리함을 강하게 느낀다.


    권력이나 재력을 휘두르며 횡포를 부리는 정치인, 관료, 기업가들에게 분노해서 그들을 비판하는 일이 결코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대중매체가 해야 할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신상 공개는 주의해야 한다.


    예전에 철도를 자주 이용하던 소년 두 명이 역 빌딩의 10층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흩뿌린 일이 있었다. 그들이 뿌린 사진에는 한 남성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 것이다. 새치기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들이 공개한 사진 속 인물을 보고 확실히 매너가 없어 보이는 얼굴이라며 외모를 평가하는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새치기하는 사람을 비판할 목적으로 벌어졌지만, 신상 공개로 인해 얼굴 평가 등 문제 행동과 관련 없는 불필요한 인권침해까지 받았다. 인터넷에 한번 공개가 되면 그것을 본 사람들이 눈 깜짝할 새에 신상을 털어 인터넷상에서 험담을 한다. 공격 대상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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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비즈니스와 미디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인 <J-CAST> 뉴스가 한 가지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범죄자에 대한 인터넷상의 집단 공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범죄 행위를 저질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라는 대답이 41.9%로 가장 많았고, 범죄를 억제하는 기능도 있을 것 같아서 지지한다. 라는 대답이 19%였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상의 집단 공격에 긍정적인 사람이 60%나 되며, 과반수가 그러한 공격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의를 밀어붙이는 행동 이면의 심리

    분노의 이면에 있는 갈등

    자신주장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본인이 정의롭게 때문에 분노한다고 생각한다.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보고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쌀 홍보대사를 모집하는 전단지에 흰 피부에 스타일이 좋은 분 모집이라는 표현을 쓴 주최 측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여자는 무조건 흰 피부여야 한다는 거야? 차별이다. 피부가 희지 않은 여성을 깔보고 있다. 라며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그리하여 주최 측은 이 부분도 남녀 불문 홍보대사 모집이라고 수정해야 했다. 물론 이 두 문구는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주최 측의 사정 같은 것은 전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비난만 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 한 번은 일본에서 새해에 우동 먹는 풍습을 대중화하기 위해 우동 그림 카드를 판매하려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카드에 적힌 강한 허리, 흰 피부, 굵직함이 마치 아내 같구나.라는 문구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어서 그 문안이 전면 재검토 되었다. 연관성보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아내’라는 표현을 쓴 것인데, 이것을 유머로 받아들이지 않고 아내를 무시했다며 분노에 사로잡히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이런 일로 분노에 사로잡혀 과도하게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어쩌면 그 내면에 어떤 갈등이나 불만이 있어서가 아닐까?


    자신이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한다는 불만

    자기주장을 하는 데 집념을 불태우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나는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라는 불만이 많다. 물론 이런 생각은 사실 누구나 마음속으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착각이란 쉽게 말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인지 왜곡을 말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미시간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던닝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리더십 능력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 대상의 약 70%가 자신의 리더십 능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답했고, 평균 이하라고 한 사람은 단 2%밖에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는 능력에 대해서도 학생 중 85%가 자신을 평균 이상이라고 말했고, 평균 이하라고 평가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 외에도 풍부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느냐는 물음에 79%가 그렇다고 답했으며, 75%가 자신을 현명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이 수치의 의미는 많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 긍정적 착각을 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게 된다. 사실 평가하는 쪽이 아무리 정당하게 평가하려고 해도 인간이 하는 일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기에 왜곡하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떻게 평가해도 자신은 낮은 평가를 받고 있고,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해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욕구불만이 자기주장만 밀어붙이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자신은 정의의 편이라는 자아도취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정의의 편이다.’ 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주변 사람이 ‘그렇게까지 화낼 정도의 일이 아닌데.’ ‘그렇게 일을 시끄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라며 고개를 가로저어도 본인은 못 본 척 넘기지 못한다. 그런 일에 사명감마저 느끼는 듯하다. 그런 식의 자아도취에 빠져 있기 때문에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형태를 띤 일방적 자기주장을 하거나, 자신의 주장이 통하지 않으면 어째서 이렇게 당연한 일을 모르는 거야?라고 상대를 공격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것일까? 그들 안에 일종의 열등 콤플렉스가 잠재되어 있어서다. 열등 콤플렉스의 한 변종으로 메시아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이 콤플렉스는 무의식중에 자신이 구세주가 될 운명이라고 믿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을 구제하려고 하며 타인의 사고나 감정, 행동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분석심리학을 연구하는 가와이 하야오는 메시아 콤플렉스로 움직이는 사람은 타인을 구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불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하거나 동정한다고 한다. 불필요한 도움을 받는 상대의 입장에서는 고맙지만 난처하다. 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셈이다.


    사실 이런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열등감과 비뚤어진 우월감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자신이 업무를 하며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주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무의식중에 열등감이 생긴다. 그래서 그 열등감을 뿌리치기 위해 정의의 사도를 자처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악을 비난하는 것이다.



    정의를 비웃는 정의감의 역설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도리를 지키기 위한 모든 행동은 장려되어야 한다. 이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상대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행동이다.


    욕구불만과 불공평하다는 감정을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로 패배자 의식이 있다. 그런 의식이 있으면 ‘나는 어차피 패배자다.’라며 의욕이 사라지고 불만이 쌓인다. 애초에 모든 일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 자체가 이러한 불만과 불공평하다는 감정을 낳는 근원이다.


    학력 차이가 월등해서 처음에는 절대 대적할 수 없는 상대라고 해도 성실하게 일해서 실력을 쌓다 보면 대등하게 승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승자와 패자로 구분 지어 생각하면 ‘어차피 나는 패자이니까.’ 라며 처음부터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미련이 남으면 그 감정이 질투로 바뀐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질투가 승자의 발목을 잡아서 어떻게든 끌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바르게 하기보다 무조건 잘하기를 바라는 사회

    최근에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회의 모순에 의문을 품거나 기성세대의 윤리관 결여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기보다 그런 사회나 윗세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본다. 물론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젊은이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기적인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은 싫다.’ ‘오로지 영리만 추구하며 일하는 것은 보기 흉하다.’라는 의식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지금 사회 전체가 ‘올바르게 하기’보다 ‘능숙하게 잘하기’에 좀 더 가치를 두고 있다.


    이런 식으로 사회가 돌아가다 보니 정치 세계에서는 옳고 그름이 통하지 않고, 권력을 쥔 사람은 아무리 비열한 수를 쓰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는다. 기업들이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일을 해도 돈이 많으면 이기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 자기만의 정의를 내세우거나 조직을 비난하는 데에는 이런 시대 분위기도 작용한 것 같다.


    수치심과 부러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의에 눈감거나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이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갈등은 접어두고 일단 눈앞의 일에 몰두해야 하는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회사의 방침에 의문이 생겨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불합리한 처우를 받는 사람을 보고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동정심을 품으면서도 외면하고 아무 도움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을 수치스럽게 느낀다.


    그런데 이때 회사의 방침이나 상사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회의에서 반론을 제시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런 이를 보면 자신의 생각을 대변해준 것처럼 후련해지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진다. 그러다가 용기 있게 올바른 일을 주장하던 사람이 미움받고 배척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응원하지도, 도와주지도 못한다. 또다시 외면하고 만다.


    이들은 그런 자신에게 느끼는 한심함, 정의를 주장하지 못하는 데에는 오는 수치심,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에게 느끼는 부러움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안 된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문제에 분노하거나 인터넷상에서 정의를 주장하기도 하고, 무언가 잘못한 사람들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를 밀어 붙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정의를 밀어붙이는 위험한 사람의 특징

    언제나 불만투성이

    살다 보며 세상일이 자기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며 불만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의 회사는 인사 평가가 이상하다거나 상사가 사람을 막대해서 곤란하다고 토로한다. 아내가 자신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신경하다거나 상냥하지 않아서 함께 있어도 피곤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출세한 친구를 보면 학창 시절에는 자신의 성적이 더 좋았다며 그 친구는 약삭빨라서 잘 풀리는 거라고 한숨짓는다.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사람은 불만이 있어도 불만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불만이 많은 사람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도 못한다.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지 못하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참지 못하고 불만을 쏟아낸다. 욕구불만-공격가설을 통해 보면 이 유형은 어떤 계기가 생겼을 때 독선적인 정의를 앞세워 공격적인 모습을 쉽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난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

    상대가 자신을 얕잡아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상대에게 무시당하는 일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할 때나 사적인 자리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가 자신의 의견이나 제안을 반대하면 화를 내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 주장을 굽히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고 주면 사람들은 또 시작이네. 어째서 항상 저러지? 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만의 정의를 밀어붙인다.


    그들은 자기보다 두드러지거나 유능한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을 때도 이렇게 행동한다. 그런데 아무 이유 없이 끌어내려고 하면 보기 흉하기 때문에 상대의 잘못을 찾아내어 이를 지적하고 비판한다. 따라서 얼핏 들으면 정당한 의견을 주장하는 듯해도 필요 이상으로 감정이 격하거나 ‘저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을까?’ 라는 느낌을 준다면 의심해 봐도 좋다.


    악인을 비난하는 일에 집념을 불태운다

    트집이 아니라 정말로 상대가 나쁘게 행동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나 조직을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그 방식이 매우 무자비하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악플러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인터넷의 영향도 크다. 온라인에서는 누구나 글을 써서 퍼뜨릴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 어떤 목소리를 내면 많은 사람의 눈에 띄기가 쉽다. 그래서 상대에게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고,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도 있다.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공격을 퍼붓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기운이 감지된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내면에 가득 찬 공격성을 발산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셈이다.



    정의로운 사람이 위험한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

    정의로운 사람이 어느새 변해 있을 때

    잘못된 일, 불합리한 일을 봤을 때 못 본 체하지 않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올바른 자세다. 올바른 일, 정당한 의견을 주장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본인은 올바른 일을 할 의도였다고 해도 태연하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언행은 문제가 된다.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정의감을 품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일 테지만, 실제로 그가 좇는 것은 독선적인 정의감에 불과하다.


    위험한 사람이 가진 일상적 패턴

    정치 등의 사회문제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버젓이 불합리한 일이 통하고 정의를 주장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정치계에 이익과 손해가 얽힌 뒷거래가 만연하다 보니 직장의 권력자 또한 태연하고 뻔뻔하게 부조리한 일을 저지른다. 이런 현실에 대한 염증이 사람을 공격적으로 변하게 만든다.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점차 공격적인 충동이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 갈 곳 없는 공격성을 발산할 대상을 외부에서 찾는다.


    가령 온라인에서 잘못을 저지른 인물을 찾아 비난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때로는 정말로 비난받아야 할 언행을 한 것도 아닌데, 비난하고 싶은 충동이 지나치게 강해서 잘못이 없는 사람의 작은 실수까지 꼬투리를 잡아 비난하게 된다. 정의로운 사람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정의감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이 때문에 쌓인 울분을 안전한 형태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렇게 점점 위험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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