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32가지 생물학 이야기
 
지은이 :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은이), 서수지 (옮긴이)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24년 02월




  • 쇠무릎과 식물 우슬은 왜 자신을 해치려 드는 천적 애벌레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도울까요? 성체가 되면 오히려 몸집이 작아지는 패러독스 개구리 이야기, 일정 기간 육아휴직을 내고 새끼들을 돌보는 우두머리 수컷 고릴라 이야기 등 흥미롭고도 기상천외한 생물학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32가지 생물학 이야기


    황제펭귄은 왜 다 자란 새끼가 어른보다 몸집이 클까?

    황제펭귄 새끼가 어른 펭귄보다 몸집이 클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이유

    황제펭귄은 다 자란 새끼가 어른 펭귄보다 크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남극과 같은 지역에서 서식하는 생물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 새끼 펭귄도 마찬가지다. 새끼 펭귄은 굶주림을 견디기 위해 몸에 지방을 축적한다. 물론 부모 펭귄도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지방을 저장하지만, 성장 과정에 있는 새끼는 훨씬 많은 영양분과 지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른 펭귄보다 새끼 펭귄의 몸집이 큰 것이다.


    참으로 신비한 자연의 이치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단지 몸집 크기만이 아닌 모양이다. 몸집이 커져도 성숙하지 않은 새끼 펭귄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수컷과 암컷 개복치 두 마리가 한꺼번에 3억 개의 알을 낳아 그중 두 마리 정도만 성체로 키우는 까닭은?

    개복치의 알이 모두 성체로 자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척추동물 중에서도 새끼를 돌보는 동물은 소수다. 생물은 대부분 알과 새끼를 낳기만 하고 돌보지 않는다. 척추동물 중에서 가장 오래전에 출현한 어류의 일부 특수한 종류는 새끼를 돌보는 예가 알려져 있지만, 대다수 물고기는 새끼를 돌보지 않고 나 몰라라 내팽개치는 방임형이다. 그저 알을 낳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 알이 무사히 성체로 자란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알을 낳기만 하는 물고기는 생존 확률이 낮은 만큼 알을 많이 낳는다.


    수족관의 인기 어종인 개복치는 한꺼번에 3억 개나 되는 알을 낳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 알이 모두 성체로 자라면 전 세계 바다가 물 반 개복치 반이 될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수컷 한 마리와 암컷 한 마리, 즉 개복치 두 마리가 낳은 알은 최종적으로 두 마리 정도만 살아남는다고 계산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개복치 두 마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3억 개의 알이 필요한 셈이다. 생존율이 1억 5,000만분의 1이니, 살아남아서 성체가 될 확률은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보다 훨씬 낮다. 따라서 성체로 자란 개복치는 운이 엄청 좋다고 할 수 있다.


    어미가 새끼를 돌보지 않는 생물의 경우, 새끼가 성체가 되는 과정이 너무나 가혹하다. 척추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먼저 어류가 육상으로 진출한 뒤 개구리와 도롱뇽 등의 양서류가 탄생했다. 양서류도 알을 낳기만 할 뿐 새끼를 돌보지 않는다.


    양서류가 진화해서 만들어졌다는 파충류는 어떨까? 육지에 상륙하는 데 성공한 파충류는 ‘물가’라는 서식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 더 건조한 환경에 내성을 지닌 파충류가 등장해 육상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양서류는 물가에 알을 낳고 새끼 시절 물속에서 올챙이로 사는 반면, 파충류는 건조한 뭍에서 알을 낳는다. 그래서 파충류는 알이 말라 죽지 않도록 껍데기가 단단한 알을 낳도록 진화했다. 그리고 보온을 위해 흙 속에 알을 낳는다.


    파충류의 산란 과정을 보면 알을 보호하는 것 같지만, 새끼를 돌보는 파충류는 거의 없다.


    우두머리 수컷 고릴라는 왜 육아휴직을 내고 새끼들을 돌볼까?

    고릴라는 수컷이 육아를 전담한다는데?

    인간과 가까운 고릴라는 수컷이 육아를 전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릴라는 수컷 한 마리가 우두머리가 되어 여러 암컷을 거느리며 무리를 이룬다. 일단 어린 새끼를 돌보는 것은 어미의 몫이다.


    갓 태어난 새끼 고릴라는 몸무게가 200그램 정도로 매우 작기 때문에, 세 살 때까지 젖을 먹으며 엄마 품에서 어리광을 부린다. 이처럼 새끼가 어릴 때는 어미가 줄곧 품에 안고 애정을 듬뿍 쏟는다.


    그러다가 젖 뗄 무렵이 되면 수컷 고릴라가 육아를 맡는다. 어미는 수컷 고릴라 곁에 새끼를 두고 볼일을 보러 다닌다. 고릴라 무리에는 암컷이 여러 마리 있어, 다른 암컷 고릴라도 마찬가지로 새끼를 데리고 온다. 따라서 수컷 고릴라 주위에는 새끼 고릴라가 바글바글 몰려 있다. 마치 유치원 같은 풍경이다. 이렇게 몰려든 새끼들은 수컷 고릴라 곁에서 어울려 논다.


    수컷 고릴라는 새끼들을 뒤치다꺼리하지 않는다. 새끼들이 노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다가 새끼들이 티격태격 싸움을 시작할라치면 심판처럼 끼어들어 중재에 나선다. 수컷 고릴라의 중재는 평등하다. 나이가 어린 새끼와 공격받은 쪽의 새끼를 보호한다. 이러면서 새끼 고릴라들은 고릴라 무리의 규칙과 사회성을 배운다.


    우두머리 수컷 주위에 모인 새끼들은 모두 아비가 같다. 그래서 수컷 고릴라는 편애하지 않는다. 어미는 아무래도 자기 새끼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각자 제 새끼 편을 들면 무리가 잠잠할 날이 없기에 수컷 고릴라가 새끼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새끼들은 수컷 고릴라 아래에서 ‘사회의 규칙’을 몸으로 익힌다.


    이렇게 성장한 새끼들은 어미와 아비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마치 ‘어리광’과 ‘자립’ 사이를 오가는 사춘기 청소년과 같다. 그리고 새끼들은 어미의 잠자리가 아닌 아비의 침대에서 자고, 더 성장하면 아비 근처에 잠자리를 마련한다. 고릴라가 자기 잠자리를 만드는 것은 자립했다는 증거다.


    고릴라는 성체가 되는 데 10~15년 정도 걸린다. 포유동물 중에서 상당히 긴 편에 속한다. 이렇게 긴 세월에 걸쳐 천천히 새끼를 기르는 것은 고릴라가 새끼를 지킬 힘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배울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 손에서 자란 동물원의 고릴라는 새끼를 돌볼 줄 모른다고?

    사람의 손에서 자란 동물원의 고릴라는 새끼를 돌볼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고릴라의 육아는 복잡해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야만 고릴라 세계의 육아를 소화할 수 있다. 따라서 새끼 고릴라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야만 비로소 온전한 고릴라가 될 수 있다.


    새끼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부모’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부모도 육아를 통해 부모가 되어간다. 부모에게 육아는 경험이며 지능으로 학습해야 하는 일이다.


    민들레 등의 식물이 솜털 같은 홀씨를 이용해 씨앗을 최대한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민들레 씨앗이 부모 식물 근처에 떨어진다면 부모 식물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고?!

    민들레는 바람을 통해 씨앗을 퍼뜨린다. 그렇다면 민들레는 무엇을 위해 씨앗을 흩날릴까? 한 가지 이유는 분포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다. 식물은 움직일 수 없지만, 평생 두 번 이동할 기회가 있다.


    첫 번째는 꽃가루 이동이다. 꽃가루는 바람을 타고 이동하거나 꿀벌 등의 곤충에게 묻어가서 다른 꽃과 수분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동으로 다른 식물과 교배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씨앗이다. 분포를 넓힐 기회는 씨앗일 때밖에 없어서, 식물은 다양한 방법을 궁리해 씨앗을 이동시킨다. 민들레처럼 바람으로 씨앗을 이동시키는 식물도 있고, 도꼬마리나 도깨비바늘처럼 갈고리 형태로 인간의 옷가지와 동물의 털에 붙어 씨앗을 이동시키는 식물도 있다.


    이처럼 식물은 다양한 노력으로 씨앗을 이동시킨다. 그러나 멀리 여정을 떠나는 씨앗이 생육에 적합한 땅에 무사히 당도한다는 보장은 없다. 확률이 낮음에도 굳이 씨앗을 떠나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식물은 단순히 분포를 확장하기 위해 씨앗을 이동시키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또 다른 꿍꿍이가 있다. 바로 부모 식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다.


    만약 부모 식물 근처에 씨앗이 떨어진다면 작은 새싹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부모 식물이 될 것이다. 부모 식물이 가지를 무성하게 드리우면 그늘이 생겨 겨우 싹을 틔운 새싹은 충분한 빛을 공급받지 못한다. 또 땅속의 물과 영양분도 부모 식물이 빨아들여 빼앗아간다.


    부모 식물은 새로 싹을 틔우는 어린 식물에 걸림돌 같은 존재다. 그래서 식물은 부모 곁에서 먼 곳에 씨앗이 떨어지도록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왔다.


    식물이 씨앗을 최대한 먼 곳으로 보내려는 생물학적 이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부모 식물은 그 자리에서 터줏대감으로 성공해 큰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마찬가지로 대를 물려 성공한다는 법은 없다. 부모 식물과 어린 식물은 자라는 시기와 환경, 상황이 다르다. 자녀 시대는 부모가 자란 시대와 다르다. 완전히 같은 시대는 없다.


    지금까지 생육에 적합하던 장소가 환경이 바뀌며 불모지가 될 수도 있고, 여태까지 볼품없던 장소가 생육에 적절한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식물의 서식 환경은 언제나 변화한다. 그래서 식물은 씨앗을 새로운 곳으로 멀리 떠나보낸다. 자녀 세대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장소에서 성장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민들레는 왜 꽃을 다 피운 뒤 스스로 줄기를 쓰러뜨려 땅바닥에 누울까?

    식물은 꼼짝 못 하고 제자리에 못 박히듯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식물도 나름대로 꼼지락꼼지락 움직일 수 있다. 민들레는 줄기를 똑바로 뻗어 꽃을 피우는데, 꽃이 다 피면 줄기를 쓰러뜨려 땅바닥에 눕는다.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이유는 알 수 없다. 꽃이 다 피고 씨앗이 여무는 동안 씨앗을 바람과 천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일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민들레는 씨앗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날아가버린 씨앗에 부모 식물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모 민들레는 먼 고장에서도 야무지게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속이 꽉 찬 씨앗을 만들어내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씨앗이 여물 때가 되면 민들레 줄기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꽃이 피었을 때보다 더 높이 힘껏 발돋움해서 줄기를 뻗는다. 바람을 받아 씨앗을 조금이라도 더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서다. 아기 민들레들은 드넓은 하늘로 높이 날아갈 수 있는 보송보송한 솜털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싹을 틔우고 성장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런 자식을 위해 부모 식물은 줄기를 높이 뻗는 일밖에 해줄 수가 없다.


    이윽고 바람이 불면 민들레 씨앗은 여행을 떠난다. 부모 식물이 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둥실둥실 나풀나풀 날아간다.


    새끼를 살뜰히 돌보던 여우가 갑자기 돌변해서 무섭게 구는 이유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여우의 출산과 육아법

    생물이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또 새끼와 정을 떼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육식 동물의 독립과 정 떼기는 애절한 한 편의 서사시와 같다. 여우의 경우를 보자.


    여우는 정이 깊은 동물이다. 옛날이야기에는 둔갑해서 사람을 홀리는 요망한 동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가족애가 끈끈하다. 여우는 새끼를 낳을 때가 가까워오면 굴을 깊이 파고 보금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어미 여우는 굴 안에서 출산 준비를 시작한다. 산실에 틀어박힌 암컷을 위해 수컷은 부지런히 먹이를 나른다. 새끼가 태어나도 수컷은 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수컷 여우가 새끼를 보고 싶어 굴 옆에서 살금살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부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눈치 보는 남편과 같다.


    암컷이 출산을 마치면 수컷은 암컷을 위해 성실하게 먹이를 나른다. 여우는 쥐와 토끼를 주로 잡아먹고 산다. 그러나 먹이를 구하는 것은 고된 노동이다. 여우는 먹이가 풍부한 산골에서도 1제곱킬로미터의 영역이 필요하다. 먹이가 적은 곳에서는 영역이 50제곱킬로미터에 달하기도 한다. 수컷 여우는 가족의 입에 넣어줄 먹이를 구하기 위해 넓은 영역을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그러나 눈치가 빠르고 민첩한 쥐나 산토끼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여우는 고도의 사냥 기술이 필요하다. 기본적인 사냥은 점프다. 몰이식 사냥은 쉽지 않아, 예나 지금이나 숨죽여 기다리다가 단숨에 껑충 뛰어올라 위에서 먹잇감을 덮치는 방식으로 사냥한다. 참으로 우아한 기술을 선보이는 특수한 사냥이다.


    먹이를 발견한 여우는 사냥감이 도망치지 못할 정도 거리에서 숨이 넘어갈 듯 나뒹굴고 몸부림치며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그 연기에 홀린 쥐와 토끼는 호기심에 이끌려 도망치는 것도 잊고 바라본다. 그러면 몸부림치던 여우는 조심조심 거리를 좁혀 불시에 먹잇감을 덮친다. 죽은 척해서 사냥감을 방심하게 만드는 전략은 고도의 연기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물새 등을 사냥할 때는 수초와 잡초 등을 몸에 휘감아 위장하고 기척을 숨긴 채 다가간다. 고도의 지능이 필요한 사냥이다.


    이렇게 정교한 사냥을 하려면 높은 수준의 학습이 필요하다. 태어나서 석 달이 지날 무렵이면 부모 여우는 새끼를 데리고 굴 밖으로 나들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냥 방법 등 살아가는 데 중요한 기술을 차근차근 가르친다.


    다정다감하던 여우가 갑자기 돌변해서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굶기는 이유

    마침내 사냥 방법을 가르치면 아빠 여우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날라주지 않는다. 배가 고파야 먹이를 찾아 나서는 법, 아빠 여우는 일부러 새끼들을 굶겨 자립을 독려한다.


    새끼가 배를 곯든 말든 냉정하게 모른 체하는 것은 아니다. 집 근처에 먹이를 숨겨두고 새끼들이 스스로 찾도록 유도한다. 엄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사랑이 넘친다.


    그러나 여름 끝자락이 되면 헤어져야 한다. 새끼들은 언제까지나 부모 곁에 머물 수 없다. 부모 품을 떠날 때가 되면 부모 여우는 새끼들을 매정하게 몰아낸다.


    여우는 자식 걱정이 많은 동물이다. 정도 많고 새끼를 살뜰하게 돌본다. 어미 여우도 아비 여우도 새끼들에게 다정하다. 그리고 새끼들은 따뜻한 부모 품에서 마음껏 어리광을 부린다.


    그러다가 모든 응석과 장난을 인자하게 받아주던 부모가 어느 날 갑자기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변한다.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어 당황한 새끼들은 부모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부모 품으로 파고들려고 한다. 그러나 부모 여우는 그런 새끼들을 매몰차게 밀어낸다. 이빨을 드러내고 앙칼지게 위협하며 새끼들을 내쫓는다. 심지어 어미 여우가 새끼들에게 이빨을 들이대며 입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새끼들은 좀처럼 부모 품을 떠나지 못한다. 새끼가 돌아올 때마다 부모 여우는 새끼를 위협하고 공격한다. 그러면 이윽고 새끼들은 포기하고 부모 품을 떠난다.


    이것이 부모 여우가 새끼들과 정을 떼고 독립시키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부모 여우는 새끼들에게 살아가는 기술을 가르친다. 새끼들도 언젠가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부모가 될 터이다. 아낌없는 사랑을 주다가 어느 날 갑자기 냉정하게 정을 떼고 돌아서는 부모, 그것이 여우의 육아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살고 어른은 아이를 만들기 위해 산다!

    어린 생물의 역할은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어린 생물의 역할은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 자란 생물, 즉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까? 바로 ‘후손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살고, 어른은 아이를 만들기 위해 산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는 다시 어른이 된다는 목표로 살아간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렇다. 생물에게는 그게 전부다. 후손을 남기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사는 게 너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우리 인생에서 보람을 추구하고 삶의 의미를 고찰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생물적 관점에서 보면 그게 전부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살고, 어른은 아이를 만들기 위해 산다. 조금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아이는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살고, 어른은 ‘좋은 아이’를 만들기 위해 산다.


    고도로 진화한 포유류에 대입하면 ‘어른은 아이를 만들고 지키고 키운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잘 포장해도 그게 전부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살고, 어른은 아이를 만들기 위해 산다. 그리고 그 아이는 다시 어른이 되기 위해 살고, 이윽고 어른이 되어 아이를 만든다. 생명은 그 과정을 한없이 되풀이할 따름이다.


    모든 생물은 영원히 지속되는 릴레이 경주에 참여하는 달리기 주자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아이를 만든다……. 생명은 그렇게 반복된다. 이 순환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혹시 마라톤 코스를 완주해본 적 있는가? 42.195킬로미터를 혼자서 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라톤 풀코스도 결승점이 있기에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낼 수 있다. 만약 결승점이 없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경기라면 전력으로 달릴 수 있을까?


    그럼, 거리를 줄여보자. 1킬로미터라면 어떨까? 1킬로미터라면 까짓것 달려보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거리를 더 줄여 10미터라면 어떨까? 10미터를 달리면 결승점에 다음 주자가 대기하고 있다. 다음 주자가 있는 곳까지만 달려서 배턴을 건네면 그만인 10미터 이어달리기라면 장애물 경주처럼 이런저런 난관이 있어도 뛰어넘어 배턴을 건네줄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 배턴을 건네주려고 최선을 다해 달린다.


    이 과정이 생명의 릴레이다. 하나의 생물이 아무 사고 없이 영원한 시간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세대가 정해진 시간을 살고 다음 세대에게 배턴을 건네주며 다음 세대는 다시 그다음 세대에게 배턴을 넘긴다. 이런 식으로 생명은 배턴을 이어가며 달리고 있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아이를 만들며 쉼 없이 달린다. 그리고 계속 다음 주자의 손에 배턴을 건넨다. 지금, 그 배턴을 건네받은 우리는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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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