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박성미는 책 《불안이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있을 때》를 통해 자신의 불안, 가족에 대한 미움, 온몸과 온 마음으로 통과시켜야 했던 고통의 시간을 솔직하고 진솔하게, 그리고 섬세하고 적나라하게 꺼내놓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저자 개인적 경험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곧 불안, 우울, 공포, 증오, 혼란, 고독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트라우마에 대한 글을 쓰길 권한다. 글쓰기가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할 순 없어도, 글쓰기 전보다 트라우마를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돕고, 트라우마보다 더 큰 자신을 만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 기억에 닻을 내려 안개를 헤치며 잠시 살펴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통을 매개로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외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며, 고통을 이야기 속에서 흘러가게 해야 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의미를 획득한 순간, 고통은 이야기와 함께 흘러간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비로소 그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고통보다 큰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 저자 박성미
고려대학교 학부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배웠고, 문화심리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재는 건국대학교에서 문학치료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연구자로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으며, 「어떤책방」으로 심리학과 문학을 통한 인문학적 치유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고통이 회복되지 못한 채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정신적 혼란, 신체적 질병을 통해 끊임없이 소환되는 경험을 겪으며, 고통과 트라우마,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 관련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통은 우리를 한없이 고독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소외시키기도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깊게 연결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에 연결될 때 고통의 주체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에 1인 주거 형태의 증가에 따라 고독사가 증가하며, 개인의 고통이 친밀한 관계나 사회적 망 안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외로움이 사회적 질병이 되는 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제적 캐릭터 심리 사전(공저)』이 있다.
ㆍ 인스타그램 「어떤책방」 @anybookroom
ㆍ 블로그 blog.naver.com/idealsm
■ 차례
PROLOGUE_ 내 인생의 블랙스완적 순간
PART 1. 과거로부터 오는 부서진 메시지
소리 없는 비명이 계속됐다
눈물의 의미
공감을 위한 노력과 내 유령
시간의 비가역성
죽음을 경유하는 곳
괜찮다고 말한다고 괜찮은 게 아녔어
손상의 경험이 주는 영향
우리의 뒤에 누가 남을까?
PART 2. 갇힌 ( )
세 여자 이야기
슬픔-연결 or 단절-세계
사랑 노래만큼은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어
길을 잃은 걸까, 애벌레 껍질 안에 갇힌 걸까
누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여기에 머무르기
흑화의 매력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실상
PART 3. 흔들리는 계절을 산다는 것
불안이 젖은 옷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 있을 때
뛰어나지 않아 괴롭습니다
나는 이상하지 않아요, 숨길 게 많을 뿐
나는 밤이 무서워 낮게, 자꾸 낮게 운다
지금 여기가 지옥이다
PART 4. 그리운 미래
매일 밤 나는 이 세상의 끝을 생각한다
Come Back to Me
우리는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짧은 소설_ 빈 여자
EPILOGUE_ 달빛의 윤슬
부록_ [논문] ‘고통을 통한 성장’과 ‘증상 경험 글쓰기’에 대한 자문화기술지
어린 시절 상처받고 내면이 뒤흔들린 ‘나약한 개인’이었던 저자가 심리학과 문학치료를 연구한 후, ‘분석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관찰하기를 노력하여 써내려간 심리 치유 에세이입니다.
불안이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있을 때
PROLOGUE_ 내 인생의 블랙스완적 순간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어릴 때 교회에 갈 때마다 지나가야 했던 양계장에서 칼 아래에 놓인 닭의 비명, 혹은 먹을 것 좀 얻어먹으려고 사람들 사이를 기웃거리다가 애먼 발길질에 얻어맞던 개의 비명. 내가 내던 소리도 그 짐승들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언어를 잃은 것 같았고 비명만 질러대는데, 동시에 그런 내가 생경하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한순간에 짐승같이 울부짖는 나와 그걸 호기심으로 관찰하는 나로 분리되었다. 공포에 질려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나를 지켜보던 할머니가 애원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애가 뒤로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기를 그만두었다. 그 후 내가 그 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어찌어찌 그 밤을 지나쳐 다음 날을 맞이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건 언어를 잃은 짐승의 소리를 내던 나와 그런 나를 관찰하던 나로 분리되었던 느낌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빈도와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강렬한 사건을 ‘블랙스완’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에서 예기치 않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비극이 발생해, 그 이후로는 그 사건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하면서 온통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건.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트라우마적 사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를 변화시키는 사건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블랙스완 개념을 적용해, 나를 변화시킨 사건이 무엇인가 탐구하는 일환으로 의도적으로 경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과거로부터 오는 부서진 메시지
소리 없는 비명이 계속됐다
“엄마, 나 이상해.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처음엔 피곤해서 눈에 경련이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꺼풀에 힘을 주고 감아보려 해도 눈이 감기지 않았다. 그다음엔 목이었다. 목이 점점 뻣뻣해지는데, 눈이 그랬을 때와는 달리 아파 오기 시작했다. 목 근육에 쥐가 난 건가 싶어서 목 근육을 풀기 위해 좌우로 움직이려 했지만, 내 뜻대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집 근처 동네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목이 뒤로 기이하게 꺾이면서 숨을 쉬지 못하고 복도에 쓰러졌다. 어머니의 비명이 들렸다. 다행히 나는 다시 숨을 쉬게 되었지만, 목은 뒤로 한껏 꺾여 있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입에 산소 호흡기를 착용했고, 잠시 후 동네 병원 의사는 소견서를 내밀며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쯤엔 내 입의 위아래는 좌우로 틀어지고 있었다. 감지 못하는 눈에, 목은 뒤로 꺾어지고 턱은 틀어져, 나는 벌어진 입에서 흐르는 침을 어쩌지 못했다. 응급실 침대 위에 있었지만, 몸이 틀어져 있어 제대로 누워있을 수도 없었고, 의사 표현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목에서 팔, 손 일부에까지 근육 이상은 계속 진행되었다. 단 30분 만에 나는 몸속에 갇히게 되었다.
오후 1시 정도 응급실에 와서 밤이 되어서야 벗어났다. 강력한 안정제를 맞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간간이 눈을 뜨곤 했는데,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고 있었고, 그다음엔 집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내 몸은 익숙한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이 들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음 날 교회에 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시작됐다.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냈지만, 밤이 되면 자다가 그대로 또 숨을 못 쉬고 죽을까 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땐 낮이어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만약 밤이라면?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는 날들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지친 후에 찾아오는 엄청난 공허감. 언젠가 어디서 맞이할지 모르는 미지의 죽음이 두려웠다. 나는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데, 어머니는 외면하고 싶어 고개를 돌렸고, 아버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 시기에 적절한 치료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집을 떠나 혼자 살기에도, 공부하기에도 벅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무엇보다 제 발로 계획적으로 가족을 벗어났음에도 버림받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고, 친구를 사귈 정도의 심적인 여유도 갖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간에 혼자였고, 혼자 있는 게 고통스럽게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느꼈다. 가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날이 선 말을 한다거나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이 경직되다 못해, 고장 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무감정, 흥미나 즐거움의 상실은 우울장애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그리고 나는 과도한 긴장과 불안감을 느끼는 불안장애까지 함께 해서 우울과 불안으로 이어지는 무한궤도에 빠져든 것 같았다.
공감을 위한 노력과 내 유령
내가 타인의 감정을 알기 위해 한 노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이 둘을 반복 실행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1.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관심을 기울인다.
2. 시나 소설,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특정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접한다.
3. 1번과 2번을 통해 습득한 것을 내 감정에도 적용하여 표현해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며 표현방식에 대해 보완·수정한다.
첫 번째 항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 그동안 내가 사람들과 대인관계를 형성하지 않아, 누군가가 나에게 먼저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기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우연히 사람들 사이에 낄 수 있을 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지 살펴보았다.
두 번째 항목을 실천하기 위해서 학교 도서관에 오래 머물렀다. 주로 책을 읽었지만, 책에 집중하기 힘들 때는 학교 멀티미디어실을 찾아서 DVD를 빌려 보았다. 초반에는 책도, 영화도 주로 강한 자극을 주는 것에 끌렸다. 내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감정의 파동이 큰 게 효과적이었다.
소설이나 영화를 고를 때에도 병 든 자아를 가진 인물의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이야기에 대한 이런 취향은 직접적으로 내 공감력을 높이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 글로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시도한 데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글로 쓰고 나면, 글을 쓰기 전보다는 마음속에 무겁게 매달려 있던 추가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내가 처음 쓴 시는, 「나비」였다.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프랑스 역이름 중 가장 낯선 이름, 퐁마리 역을 골라서 그 역에서 구걸하는 보스니아 여자아이 이야기를 썼다. 보스니아 내전 중에 부모와 눈을 잃은 아이는 프랑스로 어렵게 피난 왔지만, 아무도 이 아이를 돌봐주지 못했다. 그 아이는 아름다운 춤으로 구걸하며 살다가 어느 날 사라졌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은 소식을 듣고, 나(시적 화자)는 그 아이가 나비가 되어 날아간 것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시를 작은 공모전에 내고 받은 20만 원으로, 프로이트 전집과 임상심리학 전공 서적을 샀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놀랍고, 기뻤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불안발작이 나를 덮쳐와 괴로울 때, 나도 모르게 기도인지 모를 중얼거림을 자주 했다.
“제가 제 고통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고통 또한 알게 해주세요. 눈물 흘릴 수 있게 해주세요.”
다른 이들의 고통을 알 수 있다면, 그래서 울 수 있다면, 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감을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하다 보니, 수년이 지난 후 영화나 소설을 볼 때도 섬세하게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변화의 시점이 왔다. 자신의 팔을 손톱으로 찍어누르며 이별을 말하는 「화양연화」 속 장만옥의 모습이 슬펐고, 「러브레터」 마지막 장면이 왜 감동적인지 알게 됐고, 사랑이 시작할 때 영화가 끝나는 「사월 이야기」를 흥미롭게 보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었던 츠마부키 사토시가 걷다가 길 위에 주저앉아 울음을 폭발하는 장면에서 나도 같이 울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잔잔한 이야기에도 반응할 수 있었고, 눈물 흘리는 영화 속 인물에 반응해 울게 되면서부터는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는 자동으로 보지 못하게 됐다. 칼에 찔리는 장면이라도 보면, 자꾸 내가 칼에 찔리는 것 같아서 볼 수가 없었다.
타인의 감정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느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사실 세상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겠지만 내가 만나는 세계가 달라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내 안이 풍요로워진 느낌이었다. 다양한 색채를 품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놀라운 건 많이 울게 되면서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공감을 잘 할 수 있다고 해서 이전에 날 괴롭히던 불안발작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일순간 사라져 흩어져버릴 것 같은 내적인 분열과 고통, 허무감을 경험하곤 했다. 약을 먹어도 잠시 진정할 뿐, 아예 사라지진 않았다. 그 고통은 나에겐 너무나 확실한 유령이고, 난 그저 그 유령을 다스리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
잘 알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내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유령을 달래면서 산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매일, 또 한 번 아침을 맞이하면서 승리자가 된다.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승리자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승리하는 중이다.
시간의 비가역성
우리가 불안해하는 이유. 그건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재난을 통제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가능한 한 나의 미래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바람이 불안이라는 기제를 통해 온다. 불안에는 가상의 일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면서 안 좋은 일을 사전에 막는다는 기능적인 면이 분명히 있지만, 과도한 통제에 대한 욕망은 오히려 불안의 ‘악순환’을 만든다. 불안으로 인해 불안을 유발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우리가 끔찍하게 여기는 그 순간이 막상 현실로 다가왔을 때, 생각보다 잘 대처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불안에 빠져 있을 때는 불행한 사건이 주는 영향에만 초점을 맞춰서 미래의 사건이 주는 영향력에 대해 과대 지각하기 때문이다. 막상 현실에서 그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해결에 집중하느라 사건이 주는 영향력에 머무를 수 없다. 그리고 과거에 날 불안하게 했던 사건을 경험하고, 그 사건의 영향력이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는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사건–결과’와 같은 단순한 상황에 꼭두각시 인형처럼 놓이지 않는다. 불안 유발 사건과 동시에 많은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체험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우린 많은 자극 가운데에 놓인다. 예를 들어, 입원 대기를 하며 머물렀던 병원 로비에서 봤던 드라마가 나에게 준 느낌, 수술 전날 밤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치는 나에게 어머니가 건네준 물수건으로 입술을 적셨을 때의 시원함. 그리고 수술 끝나고 다음 날 죽을 먹으면서부터 경험한, 생각보다 대단한 회복에 대한 내 의지와 실천. 날 찾아와 격려해주며 건넨 사람들의 따뜻함이 아직도 내 안에 머물고 있다.
어떤 불쾌하고 끔찍한 사건을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다고 해서 미래에도 생길지 모른다고 여기면서 불안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린 매일 똑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지금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고, 이미 그 시간은 흘러가 버려 똑같이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울과 불안은 이미 흘러간 시간을 매번 붙잡는 착각으로 사는 셈이다. 과거의 시간에 우린 머물 수도 없고,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 그 점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길이다. 그러나 참 인간적이게도, 그걸 알면서도 아직 나는 가끔 헤매곤 한다. 우린 모두 과정 중에 있는 셈이니깐.
흔들리는 계절을 산다는 것
나는 이상하지 않아요, 숨길 게 많을 뿐
“왜 너는 자꾸 혼자 먹어?”, “밥 다운 밥을 먹어야지, 왜 그런 분식 같은 것만 먹어?”
나를 이상하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나를 이상하게 본 게 혼자 밥을 먹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 돈을 써야 하는 상황 등 나를 숨겨야 하지만 숨길 수 없었던, 여러 곤란한 상황들에서 나는 이상해졌다. 나를 숨기고 싶었던 이유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달에 20만 원으로 생활해야 했는데,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15만 원. 학기 초엔 책도 사야 해서 더 힘들었다. 가끔 옷이라도 사고 싶을 때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사야 했다. 당시 연구실 분위기가, 대학원생이 연구 말고 다른 일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에 몰래 과외를 몇 번 했지만, 지속하진 못했다. 학교에 있었을 때 나는 계속 가난했고, 계속 어딘가 아팠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더 많은 시간 동안 숨겨야 할 것이 많았다.
그래도 학교에 있으면 좋았고, 연구실에 혼자 있으면 좋았다. 한국에서 좋은 대학으로 손꼽는 데에 어느 한 귀퉁이에 내 자리가 있다는 생각도 좋았고, 항상 온도 조절이 되면서 책이 완비된 도서관에 있는 것도 좋았다. 상상 속에서 나는, 시련을 이겨내고 곧 빛을 낼 사람 같았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내 삶은 낡고 찢어졌지만 벗을 수 없어 오래 같이 한 속옷 같았다. 위태롭게 내 중요 부위들을 가리고 있는데, 내가 그 속옷 위로 괜찮은 옷을 입는다 해도 나는 그 속옷이 금방이라도 찢어져,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창피해질까 봐 무서웠다.
“너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10대였구나. 20대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긴 하지만, 점점 벗어나게 될 거야.”
대학원 연구실 신입생들의 사주를 봐주고 했던 선배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나는 그 말이 위로가 되어 내가 하던 걱정–‘앞으로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기충족적 예언의 효과인지, 20대 중반 이후로 받았던 수술들이 별로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이전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삶을 살 테니까.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극심한 적이 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격렬하게 고통을 견뎌야 했지만, 이젠 고통을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예전과 대처 방식이 다른 건 지금의 남편이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혼란스러울 때 남편과 대화를 나누면 안정을 되찾았다. 남편이 “너도 어쩔 수 없었잖아”라고 무심한 듯 한마디 하면, 내 가슴 속에 단단하게 묶어놓았던 끈이 스르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맞아.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매달렸구나. 남편은 나와 함께 고통의 현장에 동참하면서도 내가 통제력을 잃었을 때 버텨주었고, 나의 성장을 돕는 ‘의미있는 타인(significant others)’으로,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의미있는 타인’은 나의 자기관과 세계관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거나 현재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는 대상을 뜻한다. 예를 들어, 부모님, 형제자매, 애인, 배우자, 자식 등이 있다.)
고통은 우리를 외롭게 하고, 외로움은 ‘다정한 타인’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다정한 타인의 부재는 고통의 주체를 ‘이상해’ 보이게 만든다. 이상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해는 고통의 내용을 들어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20대의 나는 고통을 회피하고 숨기려 했고, 그것은 나의 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데에 실패했고, 실패한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그 당시의 나에겐 최선이었다. 다만, 이제 어릴 때의 나처럼 ‘이상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다정하게 대해야겠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내가 버텨줄게.”
그리운 미래
우리는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나는 집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책을 읽었던 이유는, 공식적으로 방에 혼자 있길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방에 혼자 있고 싶은데, 달리 혼자 할 건 없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자고 있는 안방 문을 노려보면서 내가 언젠가 아버지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식탁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반찬과 깨진 반찬 그릇을 치우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성가신 사람, 비상하려는 내 발목을 붙잡고 고통만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엄마를 때렸듯이 날 때렸으면. 그럼,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고 그 계기로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으리라, 모진 상상을 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부모에게서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안정적인 애착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 자신 또한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그저 자식이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부산물로 여기는 정도였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그랬듯이 외모 가꾸는 것과 먹는 것에 집착했다. 잘 먹어야 하고 잘 입어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깊었던 시기에는 나는 내 식욕마저도 싫었다. 그래서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굶주릴 때가 많았고,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겨웠다.
조금씩 이전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또 한 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목표했던 대학원 과정을 갔고, 그때에는 그 목표가 나의 전부였다. 그럴 수만 있으면, 할머니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나로 이어지는 그 고리를 끊어내고 내가 날아오를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에게서 물려받은 점도 도려냈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아버지와 반대로 가선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직간접적으로 주는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해서 자꾸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뭐지?
내 세상에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자꾸 나타났다. 나에게 와서 대놓고 “넌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대학교 같은 수업을 들은 남자 동기가 그랬고, 교수가 그랬고, 회사에서 만난 남자 상사들이 그랬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진장 애썼는데, 지금에 와서는 괜한 짓을 한 것만 같다. 그 경험을 통해 내 약점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들이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있었던, 무례한 말과 행동은 그들의 나약함이 드러나게 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아랫사람에 대한. 그리고 할머니, 아버지, 나 또한 우리는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내가 그들에게 반응하고, 그들이 나에게 반응한다. 서로의 삶이 종적으로, 횡적으로 겹쳐, 원인이 되고 동시에 결과가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내 안에서 밀어내려고 한 지 오래다. 그러다가도 가끔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업데이트하는 일들이 아직도, 생기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아직 변하지 않았으니, 나는 아버지에게서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악수를 한다거나, 포옹을 할 수 있다면…….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수고했다’라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또 한 번 그런 상상을 해본다.
“수고했어, 내 딸아.”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