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지은이 : 장재형
출판사 : 미디어숲
출판일 : 2023년 04월




  • 삶 속에서 우리는 숱한 질문과 마주합니다.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꿈꾸고 욕망해야 하는가?” 고전 문학 속 주인공들과 함께 그 의미와 행복을 찾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자아: 나만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어라 -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만 헤세는 그의 대표작「데미안」 서문에서 우리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돈, 건강, 가족, 사랑, 자유 그리고 삶 자체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살면서 가장 힘겨운 상황에 부딪힐 때, 자신의 내면으로 뛰어들어야 강력한 내면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안정적으로 받쳐주던 것들이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성장한다.


    한 해가 지나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돌아오면, 갖가지 화려한 꽃과 식물들이 피어나는 나만의 정원을 가꾸어 보자. 그곳에서 슬픔의 위안을 받을 수 있고, 힘든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은신처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안에 함께 살고 있으며, 그들은 나를 지탱해 주는 믿을만한 존재이다.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

    「데미안」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열 살 때부터 스무 살 정도가 될 때까지 대략 10여 년간 겪었던 내적인 변화와 성장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싱클레어는 작은 도시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닌다. 그는 이 세상이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싱클레어는 악당 크로머와 데미안을 통해 처음으로 밝은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바깥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이제 싱클레어는 어린애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와 의 사이에서 삶의 모든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즉, 싱클레어는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낙타, 사자, 아이의 비유를 들어 자기 자신을 찾아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극복한 초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변화의 과정은 ‘낙타’의 단계이다. 무거운 짐을 버티는 삶의 태도가 바로 낙타 정신이다. 낙타가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짐만 지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는 낙타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말종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두 번째 변화의 과정은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자’의 단계이다. 하지만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즉, 기존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더욱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변화의 과정은 ‘아이’의 단계이다. 여기서 아이의 정신이란 어린아이가 춤을 추듯, 놀이에 흠뻑 빠지듯,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즉, 아이의 정신은 우리의 삶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아이처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창조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신의 세 가지 변화의 과정이 바로 본래 자신의 모습에 이르는 길이다.


    독서: 그 사람의 인생을 드러내는 것 - 장 폴 사르트르 『말』

    독서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삶의 진리와 의미를 발견하게 해 줄 책들을 위해 책장에서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책들은 정리해서 버리고, 빈자리를 마련해 두자. 좋은 책 속에 나오는 수많은 아포리즘과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고통스럽고 고독한 우리의 삶에 작은 위안이 되어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사랑한 사르트르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인 장 폴 사르트르의 대표작「말」은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 시절을 기록한 그의 자서전이다. 1부 ‘읽기’, 2부 ‘쓰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르트르가 대문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환경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의 서재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면서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나의 오늘날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가 어릴 적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느꼈던 심정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독서와 글쓰기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첫째,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한다. 만 권의 책을 읽었어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좋은 책은 작가의 정신이 담겨 있다.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책을 읽다가는 깨달음을 위한 독서는 불가능하다. ‘양서’를 읽어야 한다.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는 독서력을 소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째, 고전은 혼란스럽고 답답한 정신을 위한 청량제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전을 읽는다면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경험하게 될 세상을 미리 볼 수 있다. 고전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거울이자 나침반이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 검증된 책이기 때문이다. 헤세는 ‘수백 년 세월을 버티면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아마 우리 평생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 책은 그 사람의 인생을 드러낸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손꼽히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하 2층부터 옥상까지 대략 10만여 권에 달하는 장서들로 가득 들어차 있는 ‘고양이 빌딩’ 서재를 소유한 독서광이자 애서가다. 그는 저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에서 ‘서가를 보면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책을 잘 처분하지 않아, 고등학교부터 대학 시절에 산 책을 지금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서가에 꽂힌 책등을 보기만 해도 그 당시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고뇌했으며 또 무엇에 기뻐했는지 책과 함께 추억이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여기저기 얼룩이 진 책일수록 버리기 힘든 이유는 그 책을 되풀이해서 읽고,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했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사랑: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면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에 빠진 주인공 베르테르가 로테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자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소설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때대로 우리는 사랑 때문에 행복감 또는 절망감으로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경험을 한다. 롱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에 빠져드는 것을 ‘절망 또는 충족감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사라짐의 충동’이라고 말한다. 즉, 이처럼 수렁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은 어느 곳에도 내가 설 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할수록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베르테르도 마찬가지였다. 베르테르의 절절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살하려는 순간 그의 사랑 로테를 소유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죽음을 선택했다. 


    연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살면서 우리는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랑을 열망하고, 타인의 행복한 사랑을 부러워하기도 하며, 불행한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수많은 가사를 보면, 사랑은 분명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이 틀림없다.


    세상 어디를 가든, 어느 시대를 들여다보든 인간사에서 사랑은 빠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그토록 사랑을 갈구하지만, 시대가 변할수록 사랑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에 실패한 것은 사랑의 대상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즉, 사람들은 사랑을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사랑에 대해서 좀처럼 무언가를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닌 기술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흔히 생각하는 ‘감정’이 아닌 ‘기술’이라 말한다. 그러나 현대인들 대부분은 사랑을 단순히 감정의 문제로만 알기에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에리히 프롬은 세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 대부분이 사람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자신이 적극적인 사랑을 표현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소극적 사랑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라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상대방과 사랑에 빠져 하나라고 느낄 때, 처음에 느꼈던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로 인해 이별을 택하게 된다.


    그녀가 정말 사랑한 것은 누구일까?

    프랑수아즈 사강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익숙함과 매너리즘에 매몰된 우리의 삶과 사랑에 대해서 ‘고독’이라는 형을 선고한다. 우리가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그저 내 안에 가둬 둘 존재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유리관에 갇힌 대상은 유기적 존재가 아닌 무기적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숨통을 조인 존재는 결국 숨이 멎고 우리는 고독이라는 중형을 선고받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대상은 아무런 의지나 감정이 없는 인형이 아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의지와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지닌 존재다.


    우리는 종종 이런 사실을 잊는다. 사랑하는 그 또는 그녀가 단지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집에 있는 오래된 가구나 의자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어려움은 그 또는 그녀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소유하려는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항상 내게 줄 수 있는 의무가 있다고 한결같이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내 삶의 의미를 묻다

    시련: 시련은 삶의 의미를 찾게 한다 -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유대인이었던 프랭클 박사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자전적 체험에 관한 수기다. 그는 이러한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가 끌려갔던 강제수용소의 삶은 파멸 그 자체였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고, 가진 모든 것을 박탈당했으며, 기나긴 죄수 생활로 남은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런데 프랭클은 어떻게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누이만 제외하고 가족 모두가 수용소 가스실에 보내져 몰살당한 것을 보고도, 어떻게 자신의 삶의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창조적 가치'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창의성이라는 견지에서 예술 활동, 교육, 학문, 봉사활동 등 주어진 일을 통해서 의미를 찾는다. 프랭클은 인간은 모든 것을 빼앗기더라도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길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태도적 가치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운명에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 시련을 대하는 어떤 태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올바른 방법으로 견뎌낼 때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프랭클은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자신에게 닥친 절박한 시련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그에게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었으며,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산다는 것은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우리의 삶은 끝을 알 수 없으며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강제수용소의 삶처럼 우리의 삶도 불확실성 그 자체다. 불확실한 사건 하나가 끝나면 또다시 불확실한 사건이 뒤따른다. 나의 삶이 어떤 형태로 끝날지 또 언제 끝날지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프랭클은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 프랭클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이 처한 삶의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에겐 충족시켜야 할 의미, 구체적으로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반드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부른다.


    소명이란 개인적·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는 일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며 손상되지 않는다. 내 삶에는 나에게 발견되어 실현되길 기다리는 ‘의미’가 있다.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프랭클은 개인마다 다르다고 말한다.



    행복해지고 싶을 땐

    지혜: 오로지 내가 내 삶을 한 층 한층 쌓아 갈 뿐 -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싯다르타」는 싯다르타와 그의 친구 고빈다가 속된 현실의 세계를 떠나서 자기 발견을 위한 구도자의 길을 떠나는 정신적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소년 싯다르타, 장년 싯다르타, 노년 싯다르타,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고행길을 떠난 소년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인도의 사성계급 가운데 가장 높은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식욕에 불탔으며 총명해서 위대한 현인이자 사제가 될 아름다운 소년으로 성장했다. 특히 그의 친구이자 바라문의 아들인 고빈다는 그 누구보다 싯다르타를 사랑했다. 하지만 정작 싯다르타 자신은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그의 친구이자 그림자인 고빈다와 함께 사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호흡을 아예 멈추어버리는 법을 배웠다. 또한 사문들 가운데 최연장자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 초탈 수련과 침잠 수련을 배웠다. 그는 그러한 고행을 통해 많은 능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수천 번씩 자아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자아로 되돌아오는 것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갈증을 느꼈고, 그 갈증을 극복하려다 또 다시 새로운 갈증을 느꼈다.


    어느 덧 수행한 지 3년 정도 지났을 무렵에, 두 젊은이에게 세존 고타마가 내면에서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타마의 설법을 듣기 위해 떠났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가르침 그 자체로부터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그곳을 떠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더 나은 가르침을 찾기 위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구도자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누구에게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아무리 현인이라 해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우친 것이다.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외부에서 삶의 해답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어떠한 가르침보다도 자기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자기 자신의 비밀을 알아낼 것이라고 결심했다.


    사랑의 환희와 막대한 부를 좇은 장년 싯다르타

    큰 도시에 도착한 싯다르타는 유명한 기생인 카말라라는 여인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었다. 카말라를 만나 제2의 삶인 속세의 삶, 쾌락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카말라의 소개를 받아 상인 카마스와미에게서 사업하는 법을 배워서 많은 돈을 벌었다.


    싯다르타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부유함도 맛보았고, 환락도 맛보았으며, 권력도 맛보았다. 하지만 그는 무사안일한 권태로운 생활에 휩싸였고 지치고 지겨운 삶이 엷은 안개처럼 그의 주변에 드리웠다. 고빈다와 작별한 후 속세에서의 새로운 삶도 이제 낡아빠지게 되었고 쾌락, 욕구, 태만이라는 세상의 덫에 사로잡힌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카말라의 금빛 찬란한 새장에 자그맣고 희귀한 새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면서 깊은 비애감과 자신의 인생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빠졌다. 바로 그날 밤 싯다르타는 자신의 정원을 떠났으며, 다시는 그 도시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삶의 지혜를 깨닫고 해탈의 경지에 들어선 노년 싯다르타

    이제 그 도시에서 빠져나와 강기슭에 서 있던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 이 강을 건너게 해 준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했다. 뱃사공 바주데바는 온 마음을 기울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싯다르타는 그런 그에게 경청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에게 우리는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싯다르타도 이제 자신의 인생이 한 줄기 강물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현재진행형

    우리는 누구든 삶의 주인공처럼 살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계속 길을 가야하며,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러한 부조리로 인해 우리는 삶의 주인공은커녕 방관자처럼 살아간다.


    아직 우리의 인생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전체를 볼 수도 없고, 전체를 행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과거나 현재의 마음속 혼란과 불행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더는 이루어야 할 꿈을 가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느냐이다. 지금 잠깐 불행하고 절망스러운 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해서 망쳐 버린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삶은 먼 훗날 인생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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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