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에 담긴 다양한 ‘사랑의 행태’에 대해 해부하며, 작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반복적으로, 날카롭게 상기시킨다. 저자의 지적 통찰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지난 사랑을 재편집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독자들은 자신의 과거, 어느 사랑하던 시절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왜 끌렸나,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그리고 다시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의 쓸모〉는 만남과 이별, 결혼과 불륜 등의 키워드로 고전을 읽는 새로운 독서법이자, 어렵고 부담스러워 미뤄뒀던 책을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독서록이다.
■ 저자 이동섭
파리 제8대학에서 조형예술학, 사진학, 현대예술과 뉴미디어 등으로 학사와 석사를, 예술과 공연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동섭의 패션인문학’, ‘이동섭의 빠담빠담’ 등 한국일보와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연재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와 EBS클래스e 등에서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를 융합시키는 강의를 했다.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 『반 고흐 인생수업』, 『다빈치 인생수업』, 『파리 로망스』, 『그림이 야옹야옹 고양이 미술사』 등 예술과 인문학을 소개하는 다수의 책을 썼다.
사랑은 문학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 차례
I. 끌림과 유혹
1. 〈첫사랑〉 이반 투르게네프 - 왜 나는 하필이면 너를 사랑할까? 12
2.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 자신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30
3. 〈적과 흑〉 스탕달 - 너를 선망하므로, 증오한다 46
4. 〈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 우리가 사랑에서 얻기를 바라는 그것 64
II. 질투와 집착
5. 〈질투〉 알랭 로브리그예 - 질투는 사랑의 독약이다 86
6. 〈오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 내가 갖지 못하면,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된다 104
7.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 간통은 사랑일까? 120
8.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 옛 애인에게 집착하는 뜻밖의 이유 144
III. 오해와 섹스
9.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 섹스보다 중요한 그것 168
10.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 섹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183
11. 〈연인〉 마그리트 뒤라스 - 외롭고 쓸쓸하고 나약한 것들의 섹스에 대하여 201
12.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 우리가 섹스에 집착하는 의외의 이유 218
1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 왜 그녀는 연인의 외도를 참을까? 234
IV. 결혼과 불륜
14.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 결혼은 사랑의 유일한 목적지일까? 256
15. 〈부활〉 레프 톨스토이 - 결혼을 인생의 두 번째 기회로 삼는 법 276
16.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 이혼은 행복의 의지다 294
17. 〈제인에어〉 샬럿 브론테 -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주저하는 이에게 320
사람을 이해하는 궁극의 방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경험치가 쌓일 때 타인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니까요. 환희와 열정, 분노와 질투 등 감정의 극한에 닿는 일은 주로 사랑할 때 일어납니다. 사랑을 소재로 쓴 위대한 문학 작품을 통해 ‘사랑’을 해부해봅니다.
사랑의 쓸모
끌림과 유혹
‘위대한 개츠비’-자신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매력은 타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외모와 분위기, 지식과 품위, 재산과 능력 등 매력을 느끼는 지점은 저마다 다르다. 안타깝게도 내가 매력을 느끼는 상대가 원하는 매력과 나의 매력도 자주 어긋난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매력을 잘 모른다. “그(개츠비)는 자기가 미소를 지으면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친구의 추측과 달리 개츠비는 알지 못했다. 여기에서 가장 낭만적인 소설 속 인물로 꼽히는 그 남자, 제이 개츠비의 비극이 만들어졌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아니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생 네댓 번밖에 볼 수 없는 희귀한 미소, 상대를 안심시켜주는 보기 드문 미소였다. 그것은 잠시 영원한 세계에 직면했다가-또는 직면한 듯했다가-다시 다음 순간에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억누를 수 없어서 ‘당신’에게 집중되는 미소였다. 그것은 당신이 이해받기를 바라는 만큼 당신을 이해했고, 당신이 스스로 믿고 싶어 하듯 당신을 믿었고, 당신이 최상의 상태에서 남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 바로 그 인상을 당신한테서 받았다고 당신을 안심시켜주는 미소였다.” - 닉
얼굴에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는 미소, 마주 보는 이에 대한 무한한 이정을 담은 미소, 상대가 보이고 싶은 이미지로 보인다고 확인시켜주는 미소, 무조건적인 호의를 갖게 만드는 미소, 아주 잠시라도 우리를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는 미소, 그 희귀한 미소가 바로 개츠비의 진짜 매력이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10대 후반의 데이지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개츠비가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았더라면 데이지에게 돈은 문제되지 않았을 수 있다. 개츠비의 미소가 그대로인 한, 그에 대한 사랑도 그대로였을 것이다. 미소는 얼굴로 짓지만, 얼굴이 곧 미소는 아니다. 하지만 개츠비의 미소는 호텔방에서 진실이 폭로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미소에 가려졌던 개츠비의 범죄자 얼굴을 접하자, 데이지는 미소가 변질됐음을 느꼈다. 이것이 그를 떠난 진짜 이유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로잡은 자신의 매력을 몰랐다. 자신의 미소가 지닌 신비로운 힘을 알았더라면 진실을 털어놓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데이지의 매력도 몰랐다. ‘개츠’는 그녀가 상류층 여자여서 끌릴 수 있지만, 그가 뼛속들이 ‘개츠비’였다면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지요.”가 아니라 데이지의 절친인 조던 베이커처럼 그녀의 목소리에는 뭔가 남자를 끄는 힘이 있다고 했을 것이다. 소설에서 꼭 짚어 말하지 않지만, 데이지의 매력의 핵심은 미모에 결부된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성격의 알맹이자 관능의 무지개다. 데이지와 재회했을 당시에도 개츠비는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단숨에 5년 전 그때로 돌아간다.
개츠비의 미소와 데이지의 목소리, 그것이 서로를 이끈 매력이었다. 데이지는 개츠비에게 미소를 원했으나, 개츠비는 돈을 주려 했다.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주려고 한 것과 데이지가 개츠비에게 바란 것은 어긋났다. 그래서 개츠비의 삶은 한때 화려하게 빛났으나 보람 없는 삶이 돼버렸다. 사랑의 영역에서는 압도적인 장점 하나가 소소한 단점들을 잊게 만든다. 그러나 소소한 장점들이 많다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단점을 채우려는 방향으로 삶을 경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 가운데, 후자가 매력적인 이유다. 개츠비가 자신의 미소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면 진정 위대해지지 않았을까?
‘오페라의 유령’-우리가 사람에서 얻기를 바라는 그것
가면은 이중 기능을 수행한다. 가면은 에릭의 흉측한 얼굴을 가리는 동시에 그것을 가리고 싶은 마음도 드러낸다. 가면을 쓰지 않으면 얼굴을 가리고 싶은지 알 수 없지만, 쓰면 확실하게 표시된다. 그래서 에릭의 가면은 ‘얼굴을 감추고 싶고 그게 드러나는 걸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가면은 곧 그의 콤플렉스다.
“내 어머니조차 내가 키스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엄마는 뒤로 물러서면서 내게 가면을 던져주었지.”
갓 태어난 에릭의 얼굴은 몹시 추했다. 어머니는 가면을 첫 선물로 주면서 그를 버렸고, 버려진 소년은 살아 있는 시체 같은 기괴한 외모를 시장에서 구경거리로 팔아서 먹고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유럽 각지를 떠도는 집시 무리에 섞여 들었고, 예술과 마술 등 갖가지 재주를 익힌 덕분에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살게 된 것이다. 추한 외모 때문에 세상의 멸시와 조롱을 받던 소년은 마음 밑바닥에 녹지 않는 얼음송곳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언제나 세상은 그에게 차갑고 무정한 곳이었다.
“사랑이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익숙해지는 거야. 정말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말이야.” - 에릭
가면을 쓰고 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나에게도 따스한 손길과 부드러운 눈길을 주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도 웅크리고 있었다. 항상 기대는 어긋났고 희망의 답은 절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바꿨다. 그에게는 인정이 사랑이고, 사랑은 인정이다. 일의 결과로 칭찬받는 것과 타인에게 사랑받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나, 그는 둘이 같다고 믿었다. 사랑과 인정을 분리시키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어미의 사랑처럼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넌 그 일을 참 잘해.‘ 같은 칭찬이 곧 사랑이었다. 사실을 알지 못하면, 아는 것을 사실로 믿는 법이다.
“사람은 자기를 느끼게 해준 사람을 사랑한다.”
프랑스 철학가 파스칼이 ‘팡세’에 쓴 대로, 에릭은 크리스틴에게 받은 선생으로서의 인정을 사랑으로 믿었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다른 이유들도 짐작 가능하다. 부모 잃은 크리스틴의 사정을 알고 ‘불행한 저 여인이면 나의 불행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혹은 처음에는 자신처럼 불행한 그녀를 음악의 천사로서 순수하게 도와줬으나 점차 그녀의 고운 마음씨에 ‘어쩌면 그녀가 나를 사랑해 줄지도 몰라.’라면 희망을 가졌으리라.
“그녀는 내 모습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니까.”
그가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라울이 등장하면서 그가 품은 기대와 바람은 분명히 위태로워졌다. 콤플렉스는 최선이 아닌 최악을 피하는 쪽으로 그를 몰아갔고,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명령했고, 거절에 부딪혔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선택의 덫을 던졌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가 그녀와 하려던 새로운 삶은 무엇일까?
행복은 보통 사람처럼 사는 것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블로뉴 숲을 산책하고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저녁이면 오페라를 보러 가는, 즉 보통 사람처럼 사는 것. 이것이 에릭이 바란 행복이다. 그가 다가서면 모두가 소리 지르며 시체를 본 듯 겁먹고 도망치니,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이 그에게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리스틴에게 필요한 보호자는 라울이 적합했다. 콤플렉스로 비뚤어진 내면을 가진 선생님과 섬세하고 다정한 보호자 가운데, 그녀는 놀랍게도 에릭을 선택한다. 에릭의 아내가 되기로 결정하고 라울을 살린다.
크리스틴은 에릭의 정숙한 아내로서 그의 입술을 받아낸다. 체념인지 사랑인지, 동정인지 연민인지, 그사이 어딘가인지 그 전체를 합친 것인지 가늠되지 않았으니 그는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한 줌의 사랑도 사랑은 사랑인지라 크리스틴의 사랑이 그의 몸으로 건너오자, 울어지지 않던 서러움과 울 수 없었던 미움의 멍울이 메마른 목을 헤치고 눈으로 차올랐다. 그의 짐승 같은 울음에 그녀도 눈물을 쏟아낸다.
가면을 벗는 용기는 확신에서 비롯된다.(‘내 얼굴 그대로 너와 마주할 수 있다, 그리도 너는 나를 외면하지 않을 테니’). 콤플렉스는 사랑으로 씻겨졌고, 세상을 향한 증오는 울음으로 해소되었다. 그러자 크리스틴을 향한 사랑이 되돌아왔고, 포악한 오페라의 유령은 사랑의 천사로 부활한다.
“사랑……난 사랑 때문에 죽는 거야. 난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어. 난 난생처음 살아 있는 여자에게 키스를 해본 거라네....”
오랫동안 어두운 곳에서 혼자 웅크리며 쌓아왔을, 사람들의 무시와 냉소에 시달리며 숨어 살았던 고통과 두려움이 크리스틴의 키스에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그는 그녀의 착한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에릭은 깨달았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포기할 용기임을.
에릭은 라울을 풀어주고 크리스틴과 함께 떠나게 했다. 다만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그 반지를 끼고 있어 달라며 부탁한다. 어머니에게 외면받으며 세상에 나왔던 에릭은 크리스틴의 사랑을 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질투와 집착
‘오셀로’-내가 갖지 못하면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된다
오셀로는 흑인 이교도에 나이가 많다. 자신에게 덧씌워진 인종과 종교의 편견을 실력으로 극복해 낸 군인이다. 데스데모나는 베니스인이 원하는 모든 것(인종, 종교, 신분, 미모, 나이)를 가진 여자다. 그녀에게 오셀로는 용감한 탐험가였다. 드넓은 세상을 탐험한 그에게 반한 것이다. 그녀는 오셀로가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진 존재였다. 그래서 오셀로는 그녀와 결혼했고, 그것들을 상징적으로 소유하게 됐다.
“오, 내 영혼의 기쁨이여. (·····) 내 지금 죽더라도 지금이 가장 행복하리. 왜냐하면 내 영혼은 절대 만족을 맛보았으므로.”- 오셀로.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의 콤플렉스를 가리는 왕관이다. 콤플렉스는 사람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힘의 존재를 가리킨다. 콤플렉스는 무의식처럼 자아와 공존하는 또 하나의 자아로서, 어떤 사실 자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못생겼다고 반드시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못생긴 외모를 주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면 콤플렉스는 형성되지 않는다. 콤플렉스는 대체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오셀로가 흑인 이교도여서가 아니라, 베니스 주류 사회의 편견과 선입견에 눌려 외모와 인종 콤플렉스를 갖게 된 것이다. 왕족의 후예인 그가 조국에 살았더라면 그런 콤플렉스는 없었을 터다. 데스데모나와 결혼해도 콤플렉스는 없어지지 않았고, 다만 공개적으로 드러날 일이 없어졌다. 베니스 원로원 의원인 브라만시오의 사위가 됐으니, 그를 무어인(흑인)으로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알더라도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나의 열등한 외모와 늙음을 언젠가 데스데모나도 싫어할 거야 다들 그래 왔던 것처럼.’ 혹은 ‘나는 그녀의 매력에 미치지 못하니까 지금의 내 자리를 언젠가 누군가 차지할 거야.’ 같은 불안이 오셀로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누군가가 될 만한 자는 ‘백인이며 젊고 잘생긴 기품 있는 기독교도 베니스인’인데, 딱 카시오가 그랬다. 오셀로의 실력을 가진 카시오. 이것이 오셀로가 되고 싶은 모습이자 오셀로의 가장 아픈 곳을 타격할 무기다. 이야고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고, 오셀로는 꼼짝없이 질투의 끈적한 그물에 걸려들었다. 능숙한 거미는 먹잇감이 원하는 모양대로 거미줄을 친다.
“아무것도 몰랐으면 행복했을 것이다. 오 고요한 마음이여. 이제는 영원히 안녕.”
카시오와 데스데모나가 함께 있는 장면을 보고, 오셀로의 머릿속은 그들의 불륜에 집중한다. 그는 불륜의 증거를 가져오라고 이야고를 다그치는데 부인에 대한 믿음보다 카시오에 대한 열등감에 쩔쩔 매고 있는 것이다. 질투심은 살인 충동으로 증폭된다. 줄곧 이야고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오셀로가 처음으로 한 주체적인 행동은, 바로 살인이다. 하지만 살의로 가득 찬 그도 아내를 보자 흔들린다. 정숙하지 못한 부인을 처벌하려는 복수심과 부인의 매끄러운 살결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은 아쉬움이 충돌한 것이다. 콤플렉스와 욕망이 마지막 전투를 치르던 중에 내뱉는 혼잣말에 진실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마음을 왜곡해서 말하는 것은 콤플렉스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오셀로는 카시오와 아내의 삼자대면으로 의심을 해소하려는 최선을 추구하지 않고, 아내를 카시오에게 뺏기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콤플렉스에 먹혀서 아내의 명예를 부정했고, 진실을 찾을 용기도 사라졌다. 왜냐하면 콤플렉스는 항상 최선의 결과보다 최악의 결과를 피하는 쪽으로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오셀로의 자살은 진실을 보지 못한 자신을 처벌하는 행위이자 사랑의 전투에서 완패한 자의 비극적인 퇴장이다. 그렇다면 질투의 해독제는 무엇일까?
믿음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방향이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나는 널 믿어.’는 ‘어떤 상황에서 네가 어떻게 행동할지 내가 안다.’는 뜻에 가깝다. 이것은 내가 예상하는 대로 네가 행동하거나 행동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만약 상대가 내 예상과 다르게 행동하면 ‘나는 너를 믿었는데, 알고 보니 못 믿을 사람이야.’라며 배신감을 느낀다. 이런 믿음은 반쪽짜리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은 상대를 향한 내 마음을 믿는 것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나는 너를 믿는다’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로 읽히는 것이다. 내 마음을 믿는 한, 찝찝하고 불안한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연인의 결백을 믿을 수 있다. 그러니 상대의 의심스런 행동에 대한 판단은 곧 내 사랑의 시험대다. 첫눈에 반할 수는 있어도 첫눈에 믿을 수는 없다. 평범한 날들을 공유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상대를 향한 내 믿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은 한순간에 시작되나 유지하려면 평생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오해와 섹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섹스보다 중요한 그것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 사랑이 시작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서로의 몸을 샅샅이 알아도 사랑으로 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상대의 사랑의 온도와 나의 것이 조응할 수 있느냐의 차이다. 나의 최대 온도가 40도이고 상대는 100도라면 연애 초기에 그는 내게 열정적인 연인이다. 반면 내 최대치로 그를 사랑해도 그는 미적지근하게 느낀다. 연애 초기에는 사랑의 온도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열기가 식어가고 상대의 신비로움이 날아가면서, 사랑의 말과 몸은 당연시되면서, 그때부터 온도 차이가 갈등을 유발시킨다. 내 최대치의 사랑을 줘도 그에겐 밋밋할 뿐이고, 상대의 뜨거움을 나는 집착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문제를 겪는다면 서로 사랑의 온도를 점검해 봐야 한다.
이것이 티타가 페드로를 선택한 결정적인 요소다. 그녀는 페드로와 어두운 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열정적으로 옷을 벗기던 때, 그의 뜨거운 손길이 피부 밑으로 파고들어 살이 다 타버려서 녹아내릴 것만 같았던 때 가장 행복했다. 사랑의 온도가 맞지 않으면 사랑을 체감하고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티타에게 페드로는 적당한 온도이나, 존은 차갑다. 뜨겁게 타오르는 티타를 존이 식혀줄 수는 있어도 서로 격렬하게 열기를 태우지는 못한다. 티타가 페드로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다. 그러니 페트로는 티타에게 행운이자 족쇄였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점이 있다. 티타는 태어나면서부터 마마에게 억눌려 마마의 욕망에 부합되도록 삶의 방향을 몰아가야만 했다. 그러니까 페드로를 선택하려면 먼저 자신의 사랑의 온도부터 긍정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을 넘어서야 한다. 마마와 존이다.
티타의 인생은 사랑의 방해물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마마 엘레나, 마마가 따르는 가족 전통, 마마에게 맞서 싸우지 않은 페드로, 존의 안락한 생활의 유혹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에 반하지만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는 차례대로 그것들을 넘어서서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성취한다. 따라서 사랑의 방해물이 곧 자신의 욕망을 알아가도록 이끈 셈이다.
때때로 삶은 형벌로 시작되어 행복에 도달한다. 티타의 삶은 자신을 구속했던 것들을 털어내는 과정이고, 사랑하는 대상을 확실히 하는 과정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자신의 사랑의 온도를 알고 그에 맞는 연인을 선택하는 사랑이야기자, 소녀 티타가 성숙한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기다.
결혼과 불륜
‘폭풍의 언덕’-결혼은 사랑의 유일한 목적지일까?
“캐서린, 내가 내 몸뚱이를 잊으면 잊었지 너를 잊지 못한다는 거 알잖아!”
우리는 한 번만 산다. 다음 생이 있더라도 지금을 기억하지 못하니 언제나 처음이다. 이번 생에 나를 차지한 영혼이 다음 생에 다른 사람의 몸을 차지한다면 이번 생의 내 영혼도 이전 생의 다른 누군가의 것이리라. 혹은 하나의 영혼이 동시에 여러 사람을 차지한다면 같은 영혼을 지니 사람끼리는 첫눈에 알아볼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낯선 상대에게 ‘영혼이 통한다.’고 느끼는 연유이자, 유럽의 대표적인 사랑의 신화인 둘로 나눠진 하나다. 영혼이 같은 걸로 만들어졌다는 캐서린의 말이나 상대가 제 육신보다 더 자신의 본질에 닿은 존재라는 히스클리프의 대꾸를 미뤄보면 그들은 영혼의 단짝, ‘소울메이트(soulmate)’였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상대로부터 사랑받는 것이다. 영혼의 반쪽을 만났으니 그들은 철학가 스피노자의 말처럼 상대에게 사랑받으려 애썼고,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사랑에 몸을 내맡겼고, 그들만의 성을 견고하게 쌓았고, 어떤 외부인들도 침범하지 못하게 튼튼히 다져 올렸다. 그는 그녀가 못 살게 굴어도 묵묵히 참아냈고, 그녀는 다른 이들이 그를 괴롭히는 걸 참지 못했다. 그는 그녀 덕분에 슬픔과 고통을 견뎌냈고, 그녀는 그의 곁에서 외로움을 털어냈다. 하지만 캐서린이 소녀에서 아가씨로 넘어가면서 폭풍의 언덕에서 누리던 평화는 부서지고, 하나였던 영혼이 두 개로 깨어진다.
“그저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 캐서린
결혼에도 사랑이 필요하지만, 사랑에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없는 결혼은 공허하고, 결혼 없는 사랑은 비참하다. 각각 애드거와 히스클리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결혼이 경유지였던 캐서린이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행복이다. 하지만 3인 2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나, 그녀의 파트너들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캐서린의 잘못도 크다. 애드거의 아내와 히스클리프의 연인으로 자신을 분리하면 된다고 믿었으나, 전부를 가지려는 사랑의 속성상 불가능한 일이다.
캐서린은 죽기 전에 애드거에게 몸을 주고, 영혼은 히스클리프에게 주겠다고 고백한다. 행복을 이루려 애썼으나 불가능해진 이상, 그녀는 현실 너머로 가야만 했다. 죽어서 몸은 땅에 묻혔으나 영혼은 히스클리프를 지배했다. 마침내 그녀의 방식으로 그녀의 사랑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행복이 목적지라면 경유지와 도착지는 변해도 문제없다. 반면 결혼이 사랑의 유일한 목적지일 경우, 제때 이르지 못하면 서로의 사랑은 의심받는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오해를 먹으면 쑥쑥 자라나 관계에 곰팡이를 슬게 만든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의 전부를 소유하려는 욕망에 갇혀서 캐서린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이유다.
슬픔에 빠진 인간은 슬픔을 없애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데, 히스클리프의 해법은 폭력이었다. 캐서린이 죽었으니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했고, 목적지를 잃은 사랑은 캐서린과 결합을 방해한 자들을 향한 증오로 전환됐다. 피붙이들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증오는 캐서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극복되지 못했다. 끝내 슬픔은 털어지지 않았고, 그가 가야 할 곳은 한 곳뿐이었다. 그녀의 묘지다. 그곳을 고향으로 삼는다.
“나만의 천국이 바로 저기 있어. 남들의 천국 따위, 나는 좋은지도 모르겠고 가고 싶지도 않아.”
살아서 하나 되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하나가 되겠다며 에드거와 캐서린 부부의 무덤 사이에 제 묘지를 마련한 후에 스스로 들어간다. 마침내 그는 사랑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몸 없는 사람은 유령, 마음 없는 사람은 환자다. 유령 캐서린과 환자 히스클리프는 짝(mate)잃은 영혼(soul)으로 나뉘어 떠돌았고, 죽어서야 다시 영혼의 짝으로 하나 된다. 캐서린이 수치를 무릅쓰고 히스클리프와 결혼했더라면,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이 에드거와 결혼한 속내를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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