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병 | ||||
지은이 : 나가이 요스케(역:박재현) | ||||
출판사 : 마인드빌딩 | ||||
출판일 : 2022년 03월 |
■ 책 소개
소말리아에서 투항병의 갱생을 돕는 활동을 했을 때, 갓 스물을 넘긴 호쾌한 청년과 만난 적이 있다. 왜소한 몸집의 그는 고향 마을의 친구들이 전부 테러 조직에 강제적으로 가입하면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연을 갖고 있었다.
갱생시설의 작은 운동장에서 장난기 가득한 눈을 빛내며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열심히 축구를 하던 그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받아준 커뮤니티 대표와도 금방 친해졌고, 그의 고단했던 과거도 제법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좋은 모습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갱생시설에서 자립한 아바스라는 서른 살의 청년은 매우 성실했지만 붙임성이 없고 과묵했다. 게다가 테러 조직에 가입한 이유가 ‘돈이 없는 백수라서’였다.
나의 팀은 아바스를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그를 받아줄 커뮤니티를 찾는 건 쉽지 않았고 간신히 찾은 커뮤니티에서도 그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의 태도는 ‘돈 때문에 과격한 테러 조직에 가담했으니 언제든 돈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갈 것’이라거나 ‘제법 나이도 있는데 성격도 별로 좋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는 정착하려던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야 했고, 현재 그곳에서도 여러 문제에 부딪히며 끊임없이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공통항을 갖고 있거나 비슷한 경험을 한 대상, 혹은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대상에 좀 더 쉽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자신이 공감하는 만큼 그 대상에게 정당성이 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공감의 초점이 맞춰지는 포인트는 무엇보다 대상자가 놓인 상황(앞의 문제에서는 당장이라도 굶주림으로 죽을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이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공감하는 사람의 감정적 반응은 그런 본질 외의 것(대상자의 속성이나 배경 같은)에 큰 영향을 받는다.
혼자 힘으로 인생을 헤쳐나갈 수 없는 어린 난민 아이가 분쟁지역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어떻게든 아이를 돕고 싶다는 감정이 공감을 강화시킨다.
한편 길가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남루한 차림의 60세 남성이라면 부랑자나 노숙자로 인식되어 대개의 사람은 그와의 공통항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물며 돈이 없는 이유가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날렸기 때문이라는 배경 정보를 듣는다면 오히려 ‘자업자득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아가 자신과 반대 진영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꼴 좋다’며 고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눈곱만큼의 공감도 싹트지 않는 게 당연하다. 감정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인지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공감할 만큼의 정당성이 없다’는 냉담한 결론이 기다릴 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벌써 60년이나 살았는데 아무렴 어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어린아이가 더 중요하지’, ‘특별히 가여울 것도 없어. 이런 사람은 얼마든 있으니까’라는 생각에 그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내게 공감해주지 않는다’며 분노에 치를 떨며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다.
지나친 과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공감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자신의 인생을 망쳐 치료가 필요할 만큼 심각한 상태에 놓이는 게 세계적인 현상이다.
‘자기 승인 욕구의 과도한 비대화’라고도 할 수 있다. 타자의 공감을 얻고 인정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다. 따라서 불특정 다수의 공감을 얻고 인정받기 위해 SNS에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린다.
자신의 신체를 SNS에 공개했다가 두 번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오지 못하고 파탄을 맞은 일부 여성의 사례도 드물지 않다.
나는 업무상 경건한 종교인(이슬람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과 자주 만나는데 그들의 근거 없는 자기 긍정감에 때때로 감명까지 받는다.
그들은 ‘신이 나를 만드셨고, 나를 이끌어주신다’며 자기 존재에 대해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내 소감은 그렇다).
한편 이렇다 할 배경 없이 과도하게 연결된 지금, 타자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감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자신감을 가지든 그렇지 않든 나는 나일 수밖에 없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고 ‘나는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럴 때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공감을 얻으면(의도적으로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공감은 독약처럼 작용하여 의존성이 높은 마약으로 변해간다.
사이비 종교나 수상쩍은 모임 혹은 온라인 살롱이 다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슬금슬금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대학 시절, 나와 함께 NPO 활동을 했던 어느 후배는 학력 콤플렉스를 비롯한 많은 열등감으로 고민하느라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는데 알고 보니 겉으로는 멋들어져 보이는 어느 다단계 사업 모임에 가입해 있었다.
내게도 돈벌이가 될 만한 솔깃한 얘기를 들려주러 와서는 “이곳저곳 헤맸는데 마침내 내가 있을 곳을 찾았다”고 말해 인상 깊었다.
모임 안에서 따스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임의 울타리 밖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울타리 밖에 있는 외부인의 고통에는 샤덴프로이데를 느끼고 그들의 행복에는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것이 격차나 차별, 대립이나 분단을 불러오기도 한다.
지나치게 공감하면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과도한 공감에 의한 폭주란, 피해자의 보복 감정에 너무 이입한 나머지 그들의 슬픔이나 분노를 제멋대로 대변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피해자와 전혀 관계없는 제3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분쟁지역은 물론 그곳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와 함께 걷던 어머니가 운전자의 전방주시 소홀로 교통사고를 당해 중증 장애가 남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는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선량한 시민들이 SNS를 비롯한 인터넷상에서 자발적으로 피해자의 아픔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반응한다. ‘우리의 사법제도는 썩을 대로 썩었다. 이래서는 보상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너무 가엽다.
내게도 딸이 있는데 만일 내 딸을 죽였다면 죽음으로 복수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가해자는 사회적으로 말살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해자의 이름, SNS, 경력, 가족, 사진 등을 검색해 세상에 그대로 공개하여 사회적으로 매장한다.
이때 생긴 연대로 인해 인터넷상의 익명 게시판에서 서로 분담하여 정보를 캐내기도 한다.
피해자를 대신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당당히 몽둥이를 치켜든다. 피해 감정과 보복 감정에 강하게 공감한 결과, 폭력적이고 과격한 자위단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트위터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도 화제가 됐다. 누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대중 앞으로 끄집어내 실컷 두들겨패는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라면 때로는 이 방법이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또 ‘피해자가 먼저다’, ‘피해자가 중요하다’는 말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분명 당사자인 피해자의 의견이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분쟁 해결과 평화 구축을 위해 일하고 있는 나는 그 중요성을 무겁게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당사자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선동하고 선동당하는 세상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는 SNS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연대’나 ‘원팀(One Team)’처럼 단결을 호소하는 구호에 신물 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는 와중에도 ‘연대’나 ‘결속’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의 개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모습을 보고 내심 혐오감을 느꼈던 사람도 많다.
나 역시 달콤한 말들을 주장하면서 내집단에 없는 타자에게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런 태도를 자각하지 못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곳저곳에서 타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기에 공감의 꺼림칙한 성질이나 공감의 결과로 돌아오는 반동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때론 지극히 평범한 선의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평범한 선의에 대해 ‘사람을 돕고 싶다고? 그거 자기중심이고 위선이야’, ‘NPO 법인은 감성팔이를 하는 곳’이라는 식의 비난은 사회를 더 좋게 만드는 건전한 공감(이성적이고 인지적인 공감)도 현실 도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은 여전히 인종 다양성이 그리 높지 않다. 그럼에도 때때로 여러 불만이나 불안이 표출된다.
문화나 언어에서 오는 차이도 있겠지만 재일외국인에 의한 범죄 등의 뉴스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당신이 있을 곳은 분명 있어요(그러나 내 주변에는 없어요)”라거나 “백인은 그나마 낫죠. 중국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은 안 됩니다”라는 마음이 드물지 않게 드러난다.
냉정히 생각해 자신에게 기분 좋은 타자나 이문화는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타자와의 공생이 죄다 행복하고 반짝이는 나날인 것은 아니다.
생각하건대, 현실적인 실태를 뛰어넘어 ‘이미 그런 시대이니 다양성을 받아들이자’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다양성을 포용하기는 어렵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활 소음의 크기, 조망권에 대한 의식, 종교관, 습관, 사고방식 등등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나와 다르기 때문에 분명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러다 우리의 고유문화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고 경계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착각이라도 ‘우리의 좋은 모습을 지키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일본의 경우 향후 50년, 100년을 생각했을 때 난민이나 이주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파탄에 이를지도 모른다.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는 것이 다양성의 추구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다양성을 꾀해야 하므로 이런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원래 다양성이란 자신에게 껄끄러운 사람의 존재까지도 인정하는 것이다.
일본인끼리든 외국인에 대해서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많다. 이런 현실을 똑바로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에 오히려 대립하고 분단하는 이 시점에서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우리는 ‘타자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전제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타자와 원활히 공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땅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서 괜한 문제의 발생 없이 서로의 생각을 대화로 나눌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생각하고 대화한다. 대화를 나눠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다시 대화한다.
느닷없이 대립점에 마주하는 게 아니다. 특히나 심각한 주제에 대해서는 그런 부분부터 움직이는 게 의외로 문제가 잘 풀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