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 겨울 산, 봄의 매화, 그리고 여름 신록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1년에 걸쳐 진행된 열여섯 번의 인터뷰에서 스승은 새로 사귄 ‘죽음’이란 벗을 소개하며, “남아 있는 세대를 위해” “각혈하듯”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를 쏟아낸다. 스승은 이 책을 읽을 제자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여러 번에 걸친 첨삭과 수정을 거치며 자신의 “유언”처럼 남을 이 책을 완성했다.
삶과 죽음 속 사랑, 용서, 종교, 과학, 꿈, 돈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어령과 김지수의 대화는 오랜 시간 죽음을 마주한 채 살아온 스승이기에 전할 수 있는 지혜들로 가득하다. 그는 “재앙이 아닌 삶의 수용으로서 아름답고 불가피한 죽음에 대해 배우고 싶어” 하는 제자의 물음에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답을 내놓으며,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 저자 김지수
저자 김지수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질문하고 경청하고 기록하며 27년째 기자라는 업을 이어오고 있다. 패션지 ‘마리끌레르’, ‘보그’ 에디터를 거쳐 현재 디지털 경제미디어 ‘조선비즈’에서 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5년부터 진행한 인터뷰 시리즈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는 누적 조회수 1,000만을 돌파하며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일터의 문장들’, ‘자존가들’,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도시의 사생활’, ‘괜찮아, 내가 시 읽어줄게’ 등이 있다.
■ 저자 이어령
저자 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으로 편집을 이끌었다.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을 주관했으며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대표 저서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생명이 자본이다’, ‘젊음의 탄생’ 등이 있고,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펴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사자와의 경주’ 등을 집필했다. 2021년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되어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 차례
프롤로그 - 스승이 필요한 당신에게
1. 다시, 라스트 인터뷰
어둠과의 팔씨름 / 마인드를 비워야 영혼이 들어간다 / 죽음은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내게 덤벼드는 일 /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 /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게 없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 / 풀을 뜯어먹는 소처럼 독서하라
2. 큰 질문을 경계하라
라스트 혹은 엔드리스 / 유언이라는 거짓말 / 큰 질문을 경계하라 / 대낮의 눈물, 죽음은 생의 클라이맥스 / 글을 쓰면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않는다
3.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
쓸 수 없을 때 쓰는 글 / 죽음이란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유리그릇
4. 그래서 외로웠네
운 나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해 / 지혜의 시작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 운명을 느낀다는 것은 한밤의 까마귀를 보는 것
5. 고아의 감각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솔로몬이라는 바보, 바보들의 거짓말 /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즐거움 / 폭풍우 친다고 바다를 벌하는 사람들 / 중력을 거스르고 물결을 거슬러라
6. 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진실이 있다 / 나는 타인의 아픔을 모른다 / 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7. 파뿌리의 지옥, 파뿌리의 천국
어쩌면 우리는 모두 파 뿌리 / 구구단은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어 / 밤사이 내린 첫눈, 눈부신 쿠데타 /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8.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닌 고향
이익을 내려면 관심 있는 것에서 시작하라 /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라 한 커트의 프레임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9. 바보의 쓸모
탕자, 돌아오다 / 바보로 살아라, 신념을 가진 사람을 경계하라 / 꿈은 이루는 게 아니라 지속하는 것 / 성실한 노예의 딜레마
10. 고통에 대해서 듣고 싶나?
카오스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 나는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돌멩이인가 / 상처를 가진 자가 활도 가진다 / 비극 속에서만 보이는 영혼의 움직임 / 인간은 지우개 달린 연필 / 인간은 천사로 죽을까 악마로 죽을까
11. 스승의 눈물 한 방울
눈물은 언제 방울지는가 / 인사이트는 능력 바깥의 것 / 빛이 물처럼 덮치듯 신도 갑작스럽게 우리를 덮친다 / 영성에서 지성으로
12. 눈부신 하루
누가 짐승이 되고 누가 초인이 될까 /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 / 욥 그리고 자족의 경지
13. 지혜를 가진 죽는 자
작은 죽음들의 시간, 정적 / 네 개의 눈 / 지혜자 혹은 광인
14. 또 한 번의 봄
의식주의 언어, 진선미의 언어 / 돈의 길, 피의 길, 언어의 길 / 누가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15. 또 한 번의 여름-생육하고 번성하라
뱀 꼬리와 묵은지 / 리더는 사잇꾼, 너와 나의 목을 잇는 사람들 / 목자, 인류 최고의 생명자본
16. 작별인사
새벽에 가장 먼저 머리를 쳐드는 새, 부지런함이 아닌 예민함 / 가장 슬픈 것은 그때 그 말을 못한 것 / 마지막 선물
에필로그 - 라스트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마지막 인생 수업이 시작됩니다. 이어령이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가장 지혜로운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다시, 라스트 인터뷰
어둠과의 팔씨름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이해하겠나? 어둠의 팔뚝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이생에 마지막 수업이 될 테니,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다고 했다. 어둠의 심연을 직면했던 현자의 눈에 파르르 지혜의 불꽃이 일었다. 예일대 교수인 셸리 케이건이 했던 유명한 이야기로 수업의 서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친구와 작별인사를 했어. 우주의 시간은 달라서 돌아오면 2백 년이 훌쩍 지나버려, 지구 시간으로는 마지막 만남이니, 그게 결국 죽음인 거라. 그런데 이를 어째. 그 우주선이 출발하다가 중간에 폭발을 해버린 거야. TV 중계로 그걸 지켜보던 친구가 깜짝 놀랐겠지. ‘아이고, 내 친구가 죽어버렸네.’ 그제야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럼 아까 죽음은 뭐고, 지금 죽음은 또 뭔가?”
“글쎄요...... 내 눈앞에는 없어도, 다른 시공간을 살아도 ‘어딘가에 있다’라는 인식이, 우리를 견디게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 존재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좀 더 드라이하게 이야기해보지. 고려청자가 있어.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네. 고려청자는 무덤 속에 있었어. 이걸 5백 년 후에 발굴했다면, 내 눈앞에 없었어도 고려청자는 5백 년을 존재한 거야. 그런데 이게 깨지면? 그 순간 ‘아이고 이걸 어째’ 한탄을 하지. 그런데 그 청자는 무덤 속에 있을 때 이미 우리 앞에 없었던 것 아닌가?”
“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을 가지고 삶과 죽음을 설명했네. 소크라테스도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육체와 마음과 영혼, 삼원론으로 삶과 죽음을 설명할 참이야.”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들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컵 하나로 바디와 마인드와 스피릿, 현존과 영원을 설명하는 이어령 선생님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토록 심오한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풀어버리다니! 스승은 풀피리 불 듯 말을 이었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리컵 안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거라고.
큰 질문을 경계하라
큰 질문을 경계하라
“묻는 자로서 저는 어떤 질문을 경계해야 합니까?”
“내가 제일 무서웠던 사람이 있네. 내 글을 읽고 강원도에서 벌을 치던 사람이 꿀 항아리를 들고 찾아왔어. 내가 물었지.
‘왜 왔나?’
‘글 쓰는 것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물어보게.’
다짜고짜 그러더군.
‘선생님,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큰 질문이로군요!”
“나는 이런 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 빅 퀘스천(big question)이지. 문인에게 다짜고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문학을 못 하네. 그런 추상적인 큰 질문은 무모해. 철학자에게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어.”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질문이 너무 커. 책 한 권으로도 담을 수 없는 큰 것을 내게 물어본다네. 평생 공부하고 써야 할 것을, 나한테 물어본다구.”
“그릴 땐 어떻게 하세요?”
“할 수 없이 그것을 작은 이야기로 쪼개서 알기 쉽게 이야기하지. 안타까운 것은 듣는 자들이 그 디테일은 다 빼버리고 결론만 떼어서 전해버린다는 거네. 그러면 어떻게 되겠나? 하나 마나 한 일반론이 돼버려. 가령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자기 인생을 살라고 하더라.’ 뻔한 얘기가 넘치는 세상에 내가 일반론을 보탤 이유가 없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그래서 외로웠네
지혜의 시작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운은 하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나? 그 생각이 궁극적으로는 운명론이라네.”
“운명론이라고요? 결국 인간의 행운과 불운은 예정된 프로그램대로 흘러간다는 그 운명론이요?”
“크게 보면 그렇다네. 그리스 사람들이 운명론자들이었어, 동시에 그들은 합리주의의 극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네. 지금 인간들이 발견한 물리학, 철학, 수학, 천문학, 미학 다 그리스 사람들이 해놓은 걸 기반으로 하고 있지. 그런데 지혜의 끝까지 가본 그 사람들이 운명을 믿었다는 거야. 그 증거가 신탁이야. 신이 맡겨놓은 운명. 지혜 있는 자들은 그 운명을 사랑했네. 운명애, 아모르파티라고 들어봤지?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현자들은 다 신탁을 믿었네. 신탁을 믿고 나아갔기에 지혜자가 됐지.”
“그렇다면 정해진 운명을 아는 자가 지혜자인가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지,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야.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였어. 그가 지혜를 따라간 건 운명을 믿었기 때문이라네. 신탁이 아테네에서 가장 똑똑한 자가 소크라테스라고 하니, 궁금해서 길을 나섰지. 그가 살펴보니 아테네 사람들이 다 똑똑한 척을 하는 거야. 자기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물어보면 다 안다고 하거든. 그때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지.
‘아!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게 이 사람들보다 똑똑하다는 이야기구나.’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고 봤네.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아는 자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한 사람이었던 거야.”
“하하하. 지능과 덕으로 최선을 다해도 우리는 다가올 운명을 바꿀 수 없네. 데카르트처럼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끝까지 가도,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과 만나게 돼. 빅데이터가 모든 걸 설명해주지 못해. 합리주의의 끝에는 비합리주의가 있지. 그렇다고 타고난 팔자에 인생을 맡기고 자기 삶의 운전대를 놓겠나? 아니 될 말일세.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오이디푸스를 떠올려보게.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어. 그러나 ‘아버지를 살해할 운명’이라는 신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 결국 자기도 모르게 친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신탁의 운명을 완성하고 말아. 아버지를 죽이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아들의 운명...... 영리한 프로이트가 그 지독한 비극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따왔잖아.
이걸 이해해야 하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 something great가 있다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something great를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은 머나먼 수련의 길이야.”
“신탁이 서양의 운명론이라면, 주역은 동양의 운명론입니다. 연초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을 보며 다가올 행과 불행을 점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요. 동양의 운명론은 어떻게 보십니까?”
“좋은 운이든 나쁜 운이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운명에 자발적으로 개입하게 되어 있네. 토정 이지함에 관한 재미난 일화가 있어. 토정 이지함이 정월 초에 책을 보며 미래를 점치는데, 곧 자기 앞에서 벼루가 깨어질 운세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벼루가 깨질 이유가 없어서 이상하다 싶었지. 강풍이 부나? 지붕이 무너지나? 그런데 밖에서 어머니가 부르셔,
‘얘야, 나 좀 보자.’
‘조금 있다 나갈게요.’
‘얘야......!’ 계속 부르는데 아들이 무시하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어머니가 문을 확 열어젖히며 그런 거야.
‘이놈아, 에미보다 벼루가 중요하냐?’
그러고는 토정이 들고 있던 벼루를 빼앗아서 마당에 내팽겨쳐버렸다네. 어떤가? 가만히 있었으면 안 깨졌을 벼루가, 자기 예시로 깨져버린 거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래예측에는 자기 투영이라는 핫한 테마가 숨어 있다네.”
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성경에도 인간의 못남과 부도덕함이 바닥까지 다 드러나 있잖아요. 다윗 왕은 전쟁터에 나간 부하의 아내를 탐했고, 유다도 며느리인 다말과 합방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비루함과 위대함이 다 한 몸에서 나왔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기록자들, 작가나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도덕자나 지식자가 아니라네.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시키는 사람들이지, 거울로 비춰주는 거야. 보통 사람은 비참한 자기 얼굴을 안 보려고 해. 흐린 거울이나 깨진 거울로 보지. 직면할 용기가 없으니까. 예술가만이 일그러진 자기 얼굴을 똑바로 봐.”
“자기 삶이 사소하면 사소한 대로 비루하면 비루한 대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인간들이야말로 담대한 사람들이죠. 일본 문단이 부러운 게, 그런 사소설 분야가 잘 발달돼 있어요.”
“정확성보다는 솔직성이 우선이네. 솔직해야 정확할 수 있어.”
“솔직성이 선행조건이군요. 좀 전에 주삿바늘 얘기도 하셨는데, 자기 육체의 고통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솔직하게 기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요. 가려졌던 사람들의 일상적 통증이 들춰지니, 그동안 ‘건강조차 이데올로기화했던’ 사회의 편견이 다 새롭게 보였어요.”
“이데올로기 사회도 이데올로기 소설도 나는 나쁘다고 생각해.”
“내가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떼’로 사는 거라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거지. 그게 어떻게 인간인가? 그냥 무리 지어 사는 거지.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 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 될 말씀이야. 큰일 날 소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거지. 자네와 나 사이에 interview가 있는 것처럼.”
“갈수록 inter가 중요하죠.”
“중요해. 앞으로 점점 더 interface 접속장치가 중요해. (컵을 가리키며)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서로의 것이죠.”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겠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그런데 또 한편 컵에 손잡이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쓰여 있다고 생각해봐. 갑작스럽게 내 것이 되잖아. 같은 사물인데도 달라지는 거야. 유일해지는 거지.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는 거라네.”
파뿌리의 지옥, 파뿌리의 천국
어쩌면 우리는 모두 파 뿌리
“제가 어제 ‘부탁’에 대한 칼럼을 썼어요. 성공한 사람 중에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테이커(taker)’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 ‘기버(giver)’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도움을 주는 사람만큼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리퀘스터(Requester)’도 중요하다고 해요. 사람들은 거절이 겁나 부탁을 두려워하지만, 실험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사회적으로 묻힐 수 있는 자원을 캐내어 유통시킨다는 차원에서, 부탁이 매우 역동적인 행위라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마스크와 똑같은 얘기라네. 마스크는 나를 위해 쓰지만 남을 위해서도 쓰잖아. 부탁도 그래. 나를 위해 하는 거지만, 그게 남에게도 유익이거든. 나는 남에게 부탁할 수도 부탁받을 수도 있어. 그걸 알기에 도와주는 거야. 반대로 남한테 부탁 안 하는 사람은 남의 부탁도 잘 들어주지 않아.”
“맞습니다. 빈자들은 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이웃의 부탁을 선선하게 들어주는 한편, 부자들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기에 이웃을 신뢰하지도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는다고, 데이비드 데스테노(David DeSteno)라는 사회심리학자가 그러더군요".”
“어려운 얘기가 아니야. 보통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남의 부탁을 받으면 쉽게 거절 못 해. 돕는 게 생존에 유리하게든. 살아남으려는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성으로 프로그래밍이 돼 있어. 타인의 부탁을 거절 못 하는 게 딱 그 얘기야.”
“사회적 생물의 특성이죠.”
“사람들이 다 자기만 아는 것 같잖아? 실제로는 안 그래, 길 가는데 어린애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잖아? 그러면 백이면 백, 다 뛰어들어서 그 어린애부터 꺼내. 버스가 진흙탕에 빠져 헛바퀴 돌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차에서 내려서 함께 민다고. 그래서 그 유명한 소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파 뿌리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심오한 이야기지.
살면서 선행을 베푼 적 없는 인색한 노파가 지옥에 갔어. 지옥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수호천사가 그 노인을 가엽게 보고 하나님께 간청을 하지. ‘생전에 저 노파가 거지에게 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으니 선처해달라’고.
하나님은 그 노파가 파 한 뿌리를 붙잡고 천국으로 오는 것을 허락해. ‘평생 인색했지만 그래도 파 한 뿌리의 작은 선행이라도 했으니 그것을 기억한다’고. 노파가 신이 나서 파 뿌리를 붙잡고 지옥불을 빠져나오려는데, 그걸 본 다른 놈들도 ‘살려달라’고 그 파 뿌리에 우루루 아귀처럼 달라붙는 거야. 노파가 달라붙는 손길을 밀쳐내며 소리쳤지.
‘이거 내 파 뿌리야!’
그 순간, 후드득과 뿌리는 끊어지고 모두 지옥불에 떨어졌다네”
“어쨌든 파 뿌리 하나의 선행이라도 신에게 구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네요.”
“끝까지 이기적일 것 같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파 뿌리 하나 정도는 나눠준다네. 그 정도의 양심은 꺼지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거든. 남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마음이 인간에게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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