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까
 
지은이 : 스티븐 존슨(역:강주헌)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21년 10월




  • 우리는 긴 투쟁의 역사 속에서 생존을 위한 ‘방패’를 얻었다. 천연두를 통해 백신을, 콜레라를 통해 데이터학과 전염병학을, 우유를 통해 저온살균법을, 신약과 자동차를 통해 약물 규제, 안전 규제를 발전시켰고, 그 결과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방패들에 힘입어 기대수명을 80세 넘게 연장시켰고, 코로나19 팬데믹은 과거 팬데믹보다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위기도 극복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까


    긴 천장 _ 기대수명의 측정

    특정한 문화권에서 인구와 연령을 기록해두는 관습은 문자만큼이나 오래됐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기원전 제4천년기에 바빌로니아는 정기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해 전체 인구와 개개인의 연령을 파악했고, 그 결과를 점토판에 기록해뒀다. 십중팔구 과세가 그런 인구조사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수명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으로 근대에야 탄생했다. 인구조사 자료는 ‘이 남자는 40세, 저 여자는 55세’ 등과 같은 사실의 나열이다. 반면에 기대수명은 완전히 다르다. 마법이나 억측 또는 개인적인 일화가 아니라, 객관적인 통계자료에 기초해 예측하는 미래의 현상이다.


    기대수명 계산은 뜻밖의 자료에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존 그란트(John Graunt, 1620~1674)라는 영국인 남성복점 주인이 1660년대 초에 취미로 런던의 사망자 수를 치밀하게 연구했고, 그 결과를 1662년 <사망표에 대한 자연적이고 정치적인 관찰>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발표했다. 그란트는 인구통계학자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것이 놀라울 일은 아니다. 당시에는 인구통계학이나 보험통계학이 정식 학문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란트는 ‘런던의 사망률 보고서를 면밀히 분석해 정부 당국의 림프절페스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검역과 시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실시하도록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덕분에 그란트는 역학의 아버지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소책자는 그로부터 3년 뒤, 1665년에 폭발적으로 발병한 역병을 멈추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역병이 바로 새뮤얼피프스(Samuel Pepys,1633~1703)의 일기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1660~1731)의 반(半)실화 소설<전염병 연대기>에서 자세히 설명되며 널리 알려진 흑사병이다.


    그는 사망표를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는 창고가 아니라, 런던 시민의 전반적인 건강에 대한 가설들을 검증하는 수단, 또 런던이라는 공동체의 장기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는 소수의 사망표를 꼼꼼히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망표에는 런던 시민의 건강에 대한 “평가와 의견과 추측”이 담겼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런 일련의 조사에서 용기를 얻은 그란트는 서더크 다리 북쪽으로 브로드가에 위치한 행정 교구 관리청을 수개월 동안 뻔질나게 방문하며, 기대수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사망표를 최대한 많이 얻었다.


    가장 중요한 도표는 그란트가 “격심한 감염병”이라 칭한 것들, 예컨대 천연두와 페스트, 홍역과 결핵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시기에 사망한 총인원을 계산한 후에 그 총수를 질병별로 분류함으로써, 그란트는 ‘우리가 특정한 질병 때문에 사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라는 질문에 처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계산된 확률을 통해, 정부 당국은 공중위생을 주로 위협하는 게 무엇인지를 개괄적으로 파악하고, 그 위협들과 싸우는 동시에 어떤 위협에 우선적으로 맞서야 하는지를 더 효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통찰을 얻었다.


    그러나 그란트가 도입한 가장 혁명적인 통계 기법은 “거주민 수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장에서 확인된다. 이 장은 그란트가 “그 도시의 경험 많은 사람들”과 나눈 다양한 대화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그 도시의 총인구가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그란트가 사망표에 대한 연구에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그 수치는 무척 과장된 것이 분명했다. 그란트의 대략적인 계산을 통해 38만 4,000명이라는 훨씬 낮은 숫자를 런던의 총인구로 제시했다. 실제로 현대 역사학자들도 이 시기의 런던 인구가 40만 안팎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총인구라는 중요한 분모를 찾아낸 뒤, 그란트는 사망표에서 또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 즉 사망 시의 연령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란트의 ‘생명표’에 런던 당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런던 절반 정도가 청소년기를 넘기지 못했고, 60대까지 생존하는 비율이 6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란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란트가 생명표에 모아둔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는 당시의 출생 시 기대수명으로 생명표를 요약해내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란트가 생명표에 모아둔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는 당시의 출생 시 기대수명을 계산해낼 수 있다.



    콜레라 _ 데이터와 전염병학

    1866년 6월, 헤지스라는 노동자가 아내와 함께 리강 언저리의 브롬리바이보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헤지스와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그해 6월 29일, 둘 모두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사실 이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헤지스 부부의 죽음은 결국 엄청난 발병의 시발점으로 밝혀졌다. 헤지스 부부의 시신이 발견되고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리강 주변에서 살아가던 노동자들은 런던 역사상 최악의 콜레라에 고통 받게 됐다. 당시 신문들이 보도한 사망자 수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해,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다. 1866년 7월 14일에 끝난 그 주에 이스트엔드에서 콜레라로 사망한 사람은 20명이었다. 그다음 주의 사망자는 308명, 8월에 들어서자 첫 주부터 사망자가 거의 1,000명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8월 둘째 주에는 콜레라가 걷잡을 수 없이 폭증할 거라는 증거가 명백했고, 런던은 봉쇄됐다.


    코로나19 이 시대에 우리가 봤듯이, 발병을 막는 방어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터다. 런던 시민들이 이스트엔드를 휩쓰는 콜레라의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의사이자 통계학자 윌리엄 파(William Farr, 1807~1883)의 작업이 큰 역할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인 동안 새롭게 나타난 환경, 즉 바이러스의 확산을 추적하는 최근의 숫자들은 윌리엄 파가 만들어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오늘은 몇 명이나 삽관했는가?’, ‘병원에 입원한 발병자는 몇 명인가?’와 같은 숫자들이 요즘에는 가장 중요한 데이터 흐름이 되었으며, 주식 시세표나 정치 여론조사의 낡은 계량적 분석법은 사후약방문에 불과한 것이 됐다.


    역사학자들에게 런던을 괴롭히던 콜레라의 중대한 전환점, 더 넓게는 도시 사망률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화점 하나를 찍어달라고 요구하면, 1866년 6월 말을 꼽는 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훨씬 더 널리 알려진 사건은 1854년 9월 8일, 런던 소호 지역의 교구 위원회가 런던의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이던 콜레라의 발병을 차단 할 목적에서 브로드가 40번지에 있던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한 일이다.


    그 손잡이를 제거하라고 강력히 요구한 사람은 존 스노(John Snow, 1813~1858)였다. 스노는 당시 지배적이던 독기설을 부인하며, 콜라레가 지저분한 공기에 의해 감염되는 게 아니라 오염된 물에 의애 유발되는 질병이라고 이미 4년 전부터 주장해왔었다.


    스노는 조사의 일환으로, 브로드가에서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사망자 거주지에 검은 띠 하나를 표시하는 식으로 그 지역의 발병 상황을 지도로 그렸다. 이 유명한 지도는 지도 제작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작품 중 하나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격자형의 소호 거리 곳곳에 검은 띠들을 하나씩 포개놓으며, 스노는 1492년 이전의 유럽인들에게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선만큼이나 생소했던 것을 당시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려고 애썼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콜레라를 일으키는 미세한 병원균의 감염 패턴을 보여주려고 했다.


    스노는 콜레라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지독한 설사를 유발하는 어떤 미생물이 런던의 식수에 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실험실까지 마련해두고 여러 수원지에서 퍼온 물을 현미경으로 살펴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에는 현미경 렌즈를 제작하는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지금 우리가 콜레라를 일으키는 세균으로 알고 있는 ‘비브리오 콜레라’라는 박테리아를 볼 수 없었다.


    다행히도 스노는 그 병원균을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현미경 줌렌즈 대신,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들의 공간적 분포를 통해 전체를 한눈에 관찰하는 관점을 채택해 병원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파의 생명표가 해결해야 할 일반적인 문제, 요컨대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의 삶에서 무엇인가가 놀라운 비율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을 뿐인 데 비해 스노의 지도는 구체적인 원인과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해줬다. 사람들이 오염된 식수를 마시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지, 유독한 연기를 마시기 때문에 설사하며 죽는 게 아니었다. 그런 죽음의 고리를 끊고 싶다면, 식수원을 깨끗하게 소독해야 한다는 해법까지 제시했다.


    이렇듯 엄청난 공포가 지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 당국에 도전하며 전염병의 원인을 추적한 독불장군 같은 의사의 실증적 방법론에 입각한 탐정 놀이가 결국 그 전염병에 대한 기존 이론을 바꿔놓았고, 그 이후로 수십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인명을 구해냈다.


    19세기 말에는 또 한 명의 데이터 선구자가 지도와 현장역학을 이용해 건강에 대한 우리 인식을 바꿔놓았다. 그 선구자가 바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윌리엄 에드워드 버가트 듀보이스(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 1868~1963)였다.


    듀보이스는 1896년, 즉 20대 말에 1년 임기의 ‘사회학과 조교’로 필라델피아에 들어왔다. 당시 그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최초의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였고, 그 이전에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며 유럽에서 흥미진진한 2년을 보냈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가 듀보이스에게 요구한 연구 과제는 표면적으로 보면 경험론적 조사였다. “우리는 그 계급이 어떻게 살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며 어떤 직종에서 배제되는지, 또 자녀 중 몇 명이 학교에 다니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다. 물론 현재의 사회문제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사실을 알아내고 싶기도 하다.

    훗날 듀보이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문제가 내 앞에 던져졌다. 나는 그 문제를 의뢰받은 과제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내 문제인 것처럼 연구했다. 나는 한 명의 조사원도 대신 보내지 않고, 언제나 내가 직접 갔다. …… 자료를 찾아 필라델피아 공공도서관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틈날 때마다 유색인들의 개인 서재에도 찾아갔다.” 집집이 돌아다니며 현관문을 두드렸고, 직장 생활과 가족에 대해 묻고 대답을 들으며 그들의 거주 조건을 살펴봤다.


    그렇게 3개월 만에 2,000가구 이상을 방문하고, 그 지역의 생활 조건을 문서화하는 데 800시간 이상을 보낸 뒤에야 현장 조사를 끝냈다. 듀보이스는 이런 조사에서 얻은 자료를 기초로 일람표를 만들었고, 스노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중 일부는 나중에 지도로 그렸다. 듀보이스는 제7구 주민들을 다섯 부류로 나눈 뒤에 지도에 각각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색으로 나타낸 분류 결과는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 내에도 뚜렷한 계급 구조가 있다는 걸 입증하고 있어, 제7구의 경계지역에 살던 필라델피아의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줬다. 각 계급이 지도에서 차지하는 공간적 분포에서 계급 구조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표현된 지도들과 거기에 덧붙인 자세한 설명 덕분에 <필라델피아 흑인>은 찰스 부스(Charles Booth, 1840~1916)가 1880년대에 런던의 빈민굴을 조사한 뒤에 작성한 유명한 지도, 듀보이스가 제7구의 조사를 시작하기 한 해 전에 제인 애덤스(Jane Addams, 1860~1935)의 헐하우스가 편찬한 시카고 지도와 더불어 결국 도시사회학 분야의 중요한 저작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패혈증 _ 항생제와 제2차세계대전

    1928년 9월의 그 숙명적인 날, 스코틀랜드 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실수로 포도상구균이 담긴 페트리 접시를 열린 창문 옆에 둔 채 보름 간 휴가를 떠났다. 9월 20일, 여행을 마치고 실험실에 돌아왔을 때에는 청록색 곰팡이가 포도상구균 배양기를 잔뜩 뒤덮고 있었다. 곰팡이를 씻어내려던 플레밍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억제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플레밍은 배양 접시를 더 자세히 조사했고,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파괴하는 어떤 물질-포도상구균의 세포막을 파괴하는 물질이나 실질적으로 포도상구균을 죽이는 물질-을 분비하는 듯하다는 걸 알아냈다. 그 물질은 박테리아 킬러로, 일종의 성배였다. 플레밍은 그 물질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나 그 발견의 의미가 명확해진 후, 플레밍은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항생물질이 제2차세계대전에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수천 가지 형태로 이야기된다. 페니실린이 많은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기적의 영약을 구할 수 없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1942년 5월 27일, 나치 장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는 메르세데스 컨버터블을 타고 프라하 외곽을 달리고 있었다. 히틀러를 만나려고 베를린으로 가던 중이었다. 영국인에게 암살 훈련을 받은 두 체코인이, 길이 급격히 꺾어지는 곳에 잠복해 기다리고 있었다. 암살자가 메르세데스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하이드리히는 부상을 입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의사들의 낙관적인 예측을 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이드리히는 패혈증에 걸리고 말았다. 하이드리히는 6월 4일, 공격을 받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을 때 사망했다. 그는 기관총과 수류탄의 공격에도 살아남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즉 그의 상처를 감염시킨 박테리아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공교롭게도 하이드리히가 숨을 거둔 시기는, 미국 군부의 지원을 받아 영국과 미국의 과학자들이 하이드리히의 생명을 빼앗아간 감염을 치료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안정된 페니실린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때와 거의 일치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연합국은 페니실린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지만, 추축국은 페니실린을 개발조차 못한 상태였다. 이런 차이에서도 연합국은 작지만 확실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연합국은 적을 더 많이 죽이는 방법보다 자기편의 군인들을 죽음으로부터 지켜내는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했다. 전선이 아니라 병원에서의 전투였으나 큰 몫을 해낸 위대한 성취였다.


    페니실린과 제2차세계대전의 이야기 중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1944년 7월 20일, 즉 연합국 병사들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한 달이 조금 더 지났을 때 히틀러의 동부전선 군사 사령부, 즉 ‘늑대 소굴’의 회의실에서 폭탄이 터졌고, 히틀러 암살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폭발로 히틀러는 찰과상과 화상을 입었다. 2년 전 프라하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죽음으로 몰아간 감염증의 위험을 알고 있던 히틀러의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Theodor Morell, 1886~1948)은 히틀러의 상처를 미스터리한 가루로 치료했다. 모렐은 7월 20일 밤,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는 히틀러는 ‘환자 A’라고 칭했다.


    “환자 A: 점안액 투여, 오른쪽 눈에 결막염. 오후 1시 15분 맥박 72, 오후 8시 맥박 100. 정상이고 강함. 혈압 165~170. 페니실린 가루로 상처를 치료.”


    모렐은 그 페니실린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포로로 잡힌 미군 병사에게서 압수한 페니실린 주사액이 한 독일 의사를 통해 모렐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히틀러의 상처가 하이드리히의 목숨을 빼앗은 것과 똑같은 종류의 감염으로 이어졌다면, 그 이후에 전쟁이 어떻게 전개됐을지는 순전히 추측의 영역이다.



    기아 _ 화학비료와 식량 공급 확대

    인간의 기대수명 이야기는 많은 다양한 혁신 - 통계, 화학, 정부의 새로운 규제와 감독 - 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건강을 고려한 포도주 제조자들의 혁신이 뜻하지 않게 구텐베르크 시대를 앞당기는 데 도움을 줬듯이, 기대수명 이야기에도 예상 밖의 인과관계가 숱하게 언급된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과학자들은 흙이 단순히 돌덩이가 가루로 변한 것도, 활성을 띠지 않는 불변의 것도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흙에도 물질대사가 있고, 에너지 유입과 폐기물 관리가 필요했다. 적절한 환경에서 흙은 놀라운 생산력을 발휘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생명이 없는 먼지로 전락했다. 흙에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생명체가 가득했고, 그 생명체 하나하나가 지금 ‘질소순환’이라고 일컬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질소순환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질소의 ‘고정’, 즉 대기중의 질소를 질산암모니아로 환원하는 과정이다. 식물이 질산암모니아를 식량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질소의 문제는, 기체 형태로 대기 중에 풍부하지만 일반적인 상태로는 다른 원소들과 쉽게 결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십억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토양 생태계는 ‘질소 고저 세균’으로 알려진 미생물의 헌신적인 노동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왔다. 그 세균이 질소를 암모니아로 환원하고, 그렇게 환원된 암모니아는 식물의 연료로 쓰인다. 한편 다른 미생물은 식물과 동물을 분해하면서 암모니아를 방출하기도 한다.


    이런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자, 흙은 화학물질 생산 공장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미생물 일꾼들이 땀흘려 일하며 질산염을 생산해내는 공장,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공장이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항생제를 적시에 대량생산해내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과학자들, 특히 미생물학자, 화학자, 농학자로 이뤄진 팀에게 질소순환 과정은 반드시 필요한 지식이었다.


    유망하지만 불가사의한 곰팡이가 전 세계인에게 효과 있는 특효약이 되는 항생제 혁명을 위해서는 적잖은 중대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물론 그중 하나는 현대 토양학의 발전이었다. 우리 발밑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던 과학자들은 스스로 20세기 의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을 위한 발판을 쌓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단순한 흙에서 복잡한 물질대사가 이뤄진다는 깨달음도 기대수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가능성은 약간 예측된 것이기도 하다. 흙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덕분에 우리는 흙을 통한 감염을 경계하게 됐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던 또 다른 위협, 즉 기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굶주림과 집단 아사와의 전쟁이 경작지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축산에서도 논란이 많은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 평론가들은 그런 변화를 ‘공장형 축산’이라고 조롱한다. 닭만큼 그런 혁명의 범위를 적절히 상징해주는 것도 없다. 닭이 전 세계에서 주된 식품이 되고, 미국 패스트푸드점이 메뉴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는 시대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20세기에 들어 처음 수십 년 동안 닭은 고기가 아니라 알의 생산을 위해 사육됐다. 많은 가정에 닭장이 있었고, 더는 알을 낳지 못할 정도로 늙은 닭이나 조리돼 저녁 식탁 위에 올랐다.


    재밌게도, 우리 식단에서 닭의 위상이 달라진 초기 원인에는 단순한 식자의 실수와 저돌적인 기업가가 끼어 있다. 1920년대 초, 델라웨어주의 서식스카운티에는 세실 스틸이라는 젊은 여성이 산란계 몇 마리를 가족 농장에서 키우고 있었다.


    매년 봄이면 세실은 지역 부화장에 50마리의 병아리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런데 1923년 봄, 부화장의 실수로 그녀의 주문량에 0이 하나 더해졌다. 따라서 500마리의 병아리가 세실의 집으로 배달됐다. 그녀는 병아리들을 빈 피아노 박스에 넣어두고, 제재소에 그 많은 병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널찍한 헛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세실은 새롭게 발명한 모이 공급 장치로 병아리들을 살찌웠고, 병아리 무게가 2파운드(900그램)에 도달하자 387마리를 파운드당 62센트에 팔아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이듬해에는 아예 병아리 주문량을 1,000마리로 늘렸고, 병아리 사육 시설도 확장했다.


    20세기 농업혁명 - 토양 비옥도의 증가와 세상 방방곡곡에 닭고기를 제공하는 공장형 축산 기법-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전문가들의 진단에 따르면, 이런 농업혁명으로 지구의 ‘환경 수용력’이 두 배로 증가했다. 이런 혁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지구에서 살아가는 77억 명의 절반이 결코 태어나지 못했거나, 오래전에 기아로 죽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굶주림으로부터의 탈출은 20세기가 거둔 위대한 승리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화학비료를 생산하는 데 세계 전체에서 공급되는 천연가스의 5퍼센트가 사용되고, 유출된 화학비료에 삼각주 근처의 거대한 바다가 죽은 지역이 됐다. 해양 생물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산소를 질산염이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에서 살아가는 77억 인구가 새로운 질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환경 파괴와 온실가스 배출로 지구에 추가적인 부담을 안기고 있다. 기후변화라는 세계적인 위기는 우리가 산업화된 생활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게도 하지만, 인간이 집단 기아로 죽거나 기아의 경계선상에서 살아가는 걸 예방하는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십억 명이 굶주림과 기아에서 벗어났지만, 그 대가로 우리지구는 그런 고삐 풀린 성장의 부작용을 관리하느라 발버둥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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