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지은이 : 조지무쇼(역:서수지)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21년 08월




  • 수백 수천 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며 인류를 고통과 절망에 빠뜨리고 순간순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고 갔던 10가지 감염병!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감염병들이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감염병을 통해 아이러니하면서도 곱씹어볼 만한 역사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유럽 근대화의 인큐베이터 페스트

    유럽에서 페스트 팬데믹이 중세에서 근대로 도약하는 중요한 디딤돌이 된 이유

    시대를 역행한 아시아와 달리 유럽에서는 페스트를 계기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중요한 도약이 이루어졌다. 페스트가 유행한 이후 유럽에서 나타난 변화를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장인과 상인,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는 ‘을의 반란’이 일어났다. 둘째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며 종교개혁의 불씨가 지펴졌다. 셋째 신분과 가문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재 등용 방식이 등장했다.


    먼저 첫 번째 변화를 살펴보자. 당시 화물 운반, 교회와 관청에서 필요한 서류 작성 및 각종 자료 필사, 연락과 통신, 식사 준비와 청소 등 온갖 잡다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려면 사람 손이 필요했다. 그런데 상류계급 사람들은 하인을 고용하지 않고는 살림을 꾸려가기는커녕 제대로 생활할 수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 팬데믹으로 인구가 단기간에 급격히 감소하자 귀족과 성직자의 하인, 상점 점원, 장인 등 다양한 일터에서 일손이 부족해졌다. 그러자 상류계급이 부리던 하인과 노동자는 스스로 고용주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페스트 이전에 철저한 갑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귀족과 거상은 일꾼을 붙들어두기 위해 처우를 개선하고 임금을 올려주는 등 노동자의 다양한 요구를 받아주어야 했다.


    페스트로 크게 줄어든 인구를 오랫동안 좀처럼 회복하지 못한 유럽에서는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 16세기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졌다. 그 덕분에 하급 장인과 상인 등 도시 주민의 살림살이는 나날이 넉넉해졌다. 형편이 나아진 사람들이 식탁에 고기를 올리는 횟수가 늘어나며 식육 수요가 증가했다. 또 연극 등 문화와 여흥, 오락에 돈을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아시아와 중남미에서 수입된 홍차와 설탕 등의 기호품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도시 주민이 늘어나 시장경제 규모가 확대되었다.


    페스트 팬데믹 이후 공중위생을 담당하는 관료가 교회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페스트 팬데믹으로 유럽 사회에 나타난 두 번째 변화의 물결을 살펴보자. 가톨릭교회의 권위 실추는 200여 년 동안 서서히 진행되었다.


    중세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감염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재해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그저 신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페스트의 유행은 단기적으로는 신앙심을 자극해 귀족과 민중이 구름떼처럼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신에게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해도 페스트 유행은 사그라질 줄 몰랐고 사람들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신에게 실망해 가톨릭교회를 향한 믿음을 잃어갔다. 민중 사이에서는 페스트라는 끔찍한 역병이 부도덕한 세상에 신이 내린 천벌이라고 믿는 교리가 퍼지며 기존의 낡고 타락한 교회와 독립된 형태로 기독교 본연의 금욕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도시에서는 공중위생을 담당하는 관료가 교회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연장선에서 감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수시로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미사나 세례 행사 중지, 학교 폐쇄 명령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

    페스트 팬데믹으로 교회에 비판적인 세력이 차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학문과 예술이 교회로부터 독립했다. 또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대로 노동력 부족에서 탄생한 활판 인쇄술이라는 획기적인 발명품이 종교개혁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페스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천재 예술가의 등장을 촉발하고 르네상스를 앞당겼다고?

    페스트는 신분제에도 변화의 물결을 몰고 왔는데, 기존의 귀족이나 성직자 계급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재가 부상했다. 그리고 그들은 문화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계급에서는 상속과 기부가 활발해졌다. 페스트로 사망한 친인척의 유산을 상속하거나 페스트로 사망한 고인의 유언에 따라 교회나 공공기관에 유산을 기부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금이 건설공사 등에 투입되어 경제에 윤활유 역할을 하며 경기가 살아났다.


    페스트 유행 당시에는 왕후장상도 성직자도 농민도 시민도 모두 병마와 죽음 앞에 평등하게 무력했다. 죽음의 손길은 신분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메뚜기 떼처럼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페스트가 지나간 후 유럽에서는 ‘왕도 귀족도 농민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라는 생각이 번져 나갔다


    “누구나 뭔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다.”


    이는 페스트 팬데믹이 진정된 후의 유럽 분위기를 표현한 말로, 14세기 페스트 대유행을 자세히 기록한 이탈리아 북부 도시 시에나의 연대기 작가가 남긴 기록이다. 사람들은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보다는 무슨 일이든 과감히 시도해보는 게 낫다고 여겼다. 이러한 감정이 15세기 이후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천재 예술가의 등장으로 본격적으로 꽃피우는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와 조각, 문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 장기화를 막아 평화를 가져온 인플루엔자

    전 세계 18억 명 인구 중 6~9억 명을 감염시키고 그중 4,0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무시무시한 질병, 스페인 독감

    인플루엔자 감염 사례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그러나 인플루엔자가 인류에게 본격적으로 사나운 이빨을 들이댄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의 일이다. 실제로 20세기에 인류는 세 번에 걸쳐 인플루엔자 팬데믹을 경험했다.


    첫 번째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전 세계를 휩쓸며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다. 당시 사람들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그 병의 원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독감’이라고 불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며,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까? 놀랍게도 당시 세계 인구 약 18억 명의 3분의 1에서 2분의 1 정도가 이 감염병에 걸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6억에서 9억 명 정도가 스페인 독감에 걸렸고 그중 4,000만 명에서 5,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망자 수는 제1차 세계대전 추정 사망자 802만 명의 5~6배에 이르는 엄청난 수다.


    두 번째 사례는 1957년 4월의 일이다. 홍콩에서 ‘아시아 독감’이 발생해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아시아 일대와 호주, 미국,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항공기를 비롯한 각종 교통수단이 발달하며 감염병도 날개를 달고 전 세계로 번졌는데, 스페인 독감 시대와 비교해도 전파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시아 독감으로 100만 명 넘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에서도 300만 명이 이 병에 감염되어 그중 5,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68년 7월에 일어났다. 맨 처음 발생한 곳이 홍콩인 탓에 ‘홍콩 독감’으로 불렸으며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아시아, 유럽, 미국까지 차례로 휩쓸었다. 제1차 팬데믹에서는 비교적 얌전하던 독감이 이듬해 겨울 제2차 팬데믹 당시에는 상당히 높은 감염률과 사망률을 나타냈다. 전 세계에서 100만 명 넘는 사람이 사망했고 일본에서는 병에 걸린 14만여 명 가운데 2,0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인플루엔자의 인큐베이터이자 베이스캠프가 된 프랑스 내 연합국 막사

    연합국 진영은 동맹국 진영에 효과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위해 미국의 파병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유럽으로 파병된 몇십만 명 규모의 미군 중 스페인 독감 감염자가 섞여 있었고, 프랑스에 주둔한 연합국 막사를 드나드는 연합군 병사들이 각자의 모국으로 성실하게 병을 실어 날랐다.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에 진을 치고 있던 미 해군 수상 비행정 기지에서는 병사의 무려 90퍼센트가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스페인 독감 발생 초기에 연합국 진영은 이 병의 실체를 독일이 꾸민 간악한 음모로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가스 같은 신종 화학무기가 도입되며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7년 5월, 독일군 진영에서도 이 병에 감염된 사람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독일군에서 장교급은 1890년에 유행한 러시아 독감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갖추었으나 신병의 목숨은 스페인 독감의 거센 위력 앞에 풍전등화와 같았다.


    1918년 봄부터 여름까지 스페인 독감은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시에는 감염력은 높아도 독성이 약해져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끙끙 앓고 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게다가 치사율도 눈에 띄게 낮아져서 각국 정부는 스페인 독감을 커다란 위협으로 보지 않고 긴급 대책을 마련하지 않음으로써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특히 미군 사이에서는 사흘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고 해서 ‘삼일열 (3-day fever)’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스페인 독감을 얕잡아 보는 풍조도 생겨났다.


    4개월 만에 전 세계를 휩쓸어버린 스페인 독감은 여름이 오자 수습 국면에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때까지는 그야말로 전초전에 불과했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선 스페인 독감 사태는 앞으로 펼쳐질 엄청난 비극을 알리는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스페인 독감이 오히려 전쟁을 중단시키고 평화를 가져왔다고?

    기세가 한풀 꺾이며 잠잠해지는 듯했던 스페인 독감은 다시 살아나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1918년 8월 무렵의 일이다.


    독성이 강화된 스페인 독감이 일반 시민 사이에 침투해 제2차 유행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 종사자가 먼저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대민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관, 인프라를 관리하는 철도 복무원과 청소부, 장례업자 등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지며 사회 기능이 마비되었다. 가정에서도 어른이 먼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일터에 나갈 수 없게 되고 장을 보러 나갈 수도 없어 온 가족이 꼼짝없이 집에 갇힌 채 쫄쫄 굶는 사태가 속출했다.


    서부전선에서는 참호전이 한창이었다. 참호란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 안에 사람과 무기를 숨겨두는 방어 시설이다. 비좁고 습도가 높은 불결한 참호 속 환경은 이질과 발진티푸스, 콜레라, 스페인 독감 등이 제집 안방처럼 활개를 치기 안성맞춤인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스페인 독감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전선을 휩쓸어 병사들이 무기를 잡을 힘도 없을 만큼 쇠약해지며 양측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전선에서 귀환한 병사들로 인해 스페인 독감이 급속히 확산한 독일에서는 식량 부족 사태와 경제 혼란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자 독일 내에서 전쟁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는 반전 풍조와 염세주의가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1918년 10월 킬 군항에서 독일 수병이 출격 명령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여기에 노동자들이 합세해 대규모 소요 사태로 번졌다. 이른바 ‘킬 군항의 반란’을 계기로 독일에서 혁명의 불길이 일어 목숨이 위태로워진 1888~1918 재위한 황제 빌헬름 2세는 황급히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로써 제정이 무너지고 같은 해 11월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1월 11일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연합국 진영과 휴전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19세기 유럽 도시 환경과 위생 상태를 개혁하게 한 콜레라

    인간을 무던히도 괴롭힌 콜레라균이 놀라운 속도로 세계 정복에 성공한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이었다는데?

    18세기까지만 해도 인도 등에서 국지적으로 발생하는 풍토병이던 콜레라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1817년 제1차 콜레라 팬데믹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총 7차에 걸쳐 팬데믹이 발생했다.


    콜레라균의 특성을 알면 콜레라가 어떻게 세계 정복에 성공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콜레라균은 매우 높은 온도에는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영하의 환경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가졌다. 콜레라가 세계 각지의 다양한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또한 감염되고 난 후 잠복 기간을 거쳐 발병하기까지 시간이 매우 짧아 고리가 급속도로 확대될 수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콜레라의 전 세계 확산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운이가 바로 인류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어떻게 콜레라의 급속한 확산에 기여했을까? 바로 인간이 개발한 이동수단의 발달 탓이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를 면제품 시장으로 삼은 동시에 면섬유 생산지로 이용했다. 산업혁명기에 들어섰을 무렵의 상황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마약 아편을 중국, 즉 청나라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청나라의 차를 영국으로 수입하는 삼각무역을 추진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군사 활동과 무역 활성화로 인해 활발한 인구 이동이 일어났다. 그 연장선에서 콜레라는 인도에서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역사상 최초로 콜레라 팬데믹이 일어났다. 1817년 8월의 일이다. 인도 캘커타에서 북동쪽으로 160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역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삽시간에 벵골 전역과 갠지스강 유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당시 인도 중앙부에는 1만 명 규모의 영국군 부대가 주둔했는데, 콜레라가 마치 적군처럼 이 부대를 강타했다.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감염자가 나왔고 한 달 만에 3,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듬해인 1818년 영국군이 북인도를 거쳐 인도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자 동맹군이라도 되는 듯 영국군을 따라 콜레라도 인도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 무렵 영국은 중동의 오스만제국과 치열한 교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 봄베이에서 오스만으로 파견을 명령받은 영국군이 이동할 때 콜레라도 마치 자신이 부대원이라도 되는 듯 함께 아라비아반도에 상륙했다. 이는 1820년의 일이다. 아라비아반도에서 북아프리카로 건너간 콜레라는 이집트에서 하루에 3만 3,000명의 사망자를 내기도 했다.


    브로드 스트리트의 콜레라 원인을 밝혀내어 ‘역학의 아버지’로 불린 존 스노

    1854년 8월, 현재는 브로드윅 스트리트인 런던 소호 지구 브로드 스트리트에서 젖먹이 콜레라 환자가 나왔다. 그 후 그 일대에서만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당시 영국 학계와 민간에서는 여전히 콜레라와 같은 감염병이 미아즈마, 즉 나쁜 공기 탓이라고 믿었다. 런던시 당국은 원인으로 추정되는 악취를 근절하기 위해 오물 구덩이를 덮어 없애고 하수도정비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배설물을 포함한 오수를 계속 템스강으로 흘려보내 강은 거대한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존 스노는 벽을 맞대고 한 건물에 사는 주민은 똑같이 악취에 노출되는 환경에서 생활하는데 누구는 콜레라에 걸리고 누구는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식수 수원과 수도회사가 어디냐에 따라 콜레라 발병률이 크게 달라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미아즈마설을 부정하고 콜레라가 물을 매개로 전파돼 ‘수인성 감염병’이라는 이론을 발표했다.


    존 스노는 콜레라 발생 원인을 특정하기 위해 사망자가 나온 지역을 면밀히 조사해 지도를 작성했고 브로드 스트리트에 있는 우물 근처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브로드 스트리트 가까이 자리한 한 구빈원에서는 신기하게도 환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이 구빈원은 따로 우물을 파서 사용하고 있었다.


    콜레라 발생원이 브로드 스트리트의 우물이라고 확신한 존 스노는 우물에서 길어낸 물을 정밀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가 현미경으로 아무리 열심히 물을 살펴봐도 어떤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 물에 콜레라균이 없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당시 기술이 만들어낸 현미경으로는 콜레라균을 확인할 수 없었을 뿐이다.


    존 스노는 포기하지 않고 행정관청의 문을 두드렸고, 우물물을 퍼 올리는 펌프를 떼어내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처분을 받아냈다. 우물을 폐쇄하자 브로드 스트리트의 콜레라 집단감염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템스강 대악취 사건(The Great Stink)으로 기록되는 악취 소동이 벌어졌다. 1858년 6월의 일이다. 템스강에서 코를 찌르는 고약한 악취가 퍼져 나가면서 강변에 자리 잡은 의사당이 폐쇄되는 초유의 사태로 비화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감염병 사망률이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악취 사건은 미아즈마, 즉 나쁜 공기가 병을 일으킨다는 구시대적 믿음이 부정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템스강 대악취 사건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른 런던시 당국과 의원들은 하수도 증축에 투자와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템스강과 나란히 북쪽에 세 줄, 남쪽에 두 줄의 간선 하수구를 설치하고 오수가 정체되지 않도록 런던 동쪽에서 템스강 하류로 합류하도록 설계했다. 1865년의 일이다. 1887년 이후로는 템스강 하류 대신 바다로 흘러가게 조치했다.


    하수도정비로 위생 상태가 개선되자 템스강에서 악취가 사라졌다. 그에 따라 템스강에 다시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고 식수도 청결하고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1886년 이후 런던에서 콜레라 집단 발병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현재 가치로 환산해 2억 5,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정비한 런던의 하수도 시스템은 오늘날 런던 하수 처리 시스템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공중위생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콜레라에는 ‘위생의 어머니’라는 말장난 같은 별명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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