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지은이 : 고나가야 마사아키(역:서수지)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21년 04월




  • 영웅과 리더의 뇌에 침투한 질병이 세계사의 흐름과 판도를 바꿔놓았다고?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랜트 장군. ‘무자비한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패배한 남군 장병들에게 매우 관대한 처분을 내려 더 큰 분열을 막고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다졌다. 한데 이 역사적 결단이 그의 ‘편두통’ 덕분이었다는데…?!


    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무서운 질병이 영웅과 군주의 뇌를 조종하여 세계사를 흔들다

    잔다르크와 도스토옙스키의 뇌를 지배하여 세계사와 세계 문학사를 바꾸다 -측두엽뇌전증

    잔 다르크를 화형대에서 죽게 한 진짜 죄목은 남자처럼 ‘바지를 입은 죄’와 ‘머리칼을 짧게 깎은 죄’였다는데?

    어느 날 홀연히 빛이 나타났다. 자기를 감싼 빛 속에 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감에 사로잡혀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천국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종교에 귀의해 죽을 때까지 성스러운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중세 프랑스에도 신비한 종교 체험을 한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잔 다르크. 어느 날 신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속에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잔 다르크는 사랑하는 조국 프랑스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용감히 나섰고, 훗날 성녀로 추앙받았다.


    나는 잔 다르크의 불가사의한 종교적 신비 체험을 신경학의 관점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여러분은 ‘성스러움’과 ‘감동’이 교차하는 순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느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1429년, 프랑스 북동부 동레미 마을의 양치기 소녀 잔 다르크는 당시 지긋지긋할 정도로 승부가 나지 않아 프랑스 민중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영국과의 전쟁에 용감히 참전해 오를레앙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잔은 결국 영국군에게 사로잡혀 종교재판을 받고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열세 살에 ‘신의 목소리’가 앞으로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온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무서웠어요. 여름 대낮에 아버지의 정원에서 그분이 저를 부르시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지요. (중략) 세 번째 빛을 보았을 때 저는 천사의 목소리라는 걸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중략) 그 ‘목소리’는 제게 “프랑스를 구하라”, “오를레앙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전투 중 영국군에게 사로잡혀 투옥된 그에게 또다시 ‘신의 목소리’가 찾아왔다. 잔 다르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어제는 세 번이나 ‘신의 목소리’가 찾아왔습니다. 아침 기도를 드릴 때, 저녁 기도를 드릴 때, 그리고 밤에 성모송을 바칠 때였습니다.”


    재판에서 잔 다르크는 이단 판결을 받고 화형당했다. 그에게 씌워진 주요 죄목은 ‘신비 체험’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를 맹렬히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 넣게 한 것은 당시 여성에게 철저한 금기였던 바지를 입은 죄,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칼 등이었다. 남장 은신의 가르침에 명백히 어긋나는 이단 행위로 규정되고 처벌되던 시절이었던 까닭이다. 당시는 기독교 원리주의 시대라 종교적 금기는 절대적이었으며 종교적 율법은 남녀의 복장에까지 엄격히 관여했다.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도박에 빠져 빚쟁이에게 시달렸다고?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몸소 신비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을 자신의 문학 작품에 녹여냈다. 그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영혼 구원을 주장하는 소설을 여러 편 썼다. 그의 내면에는 항상 두 가지 선명한 기억과 경험이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에서 생활하던 처절한 경험이며 다른 하나는 처형당하기 직전 극적으로 감형 처분을 받고 목숨을 건진 아찔한 기억이다. 그러나 신경학 전문가로서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이런 경험 보다는 ‘황홀 발작’이라 부르는, 의학적으로 매우 희귀한 체험을 하며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단의 중심에 섰다가 차츰 변방으로 밀려난 도스토옙스키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무리의 반정부 운동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는 날, 그는 감방에서 자기 차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째깍째깍……’, 분침과 초침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했고, 5분만 지나면 그는 ‘총구 앞’에 설 것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사자가 도스토옙스키의 사형을 즉각 중지하라는 전갈을 들고 달려왔다. 사형 집행이 정지되고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배로 감형 처분을 받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스물여덟 살에 사형수가 되었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나중에 그는 당시의 드라마틱한 경험을 살려 깊이 있는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을 다수 집필했고 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신혼여행 중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는 새신랑

    어느 지인이 시베리아에서 유형 중이던 도스토옙스키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뜬금없이 도스토옙스키가 외쳤다.


    “신은 존재한다. 그분은 분명히 존재하신다!”


    그때 마침 근처의 성당에서 부활절 축일을 맞아 종을 치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빛나며 성령이 임하셨고, 천국이 지상으로 내려와 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진실로 그분의 존재를 느꼈다. 신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 ‘신은 존재한다!’라고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그리고 그 후 기억이 끊어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의 일을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증언했다.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던 도스토옙스키는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1857년 2월의 일이었다. 한데 결혼식을 마치고 떠난 신혼여행 길에서 그는 극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져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는 새신랑을 본 신부는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당시 유형 중이던 죄수들을 돌본 군의관은 다음과 같은 의무 기록을 남겼다.


    “1850년(그의 나이 29세)에 첫 번째 발작을 일으켰다. 비명, 의식 불명, 팔다리와 안면 경련,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을 헐떡였다……. 발작 시간은 15분, 이후 발작이 약해지다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1853년, 재발. 이후 매월 말 발병.”


    대표작 중 하나인 『백치』에서 미쉬낀 공작이 발작을 일으키는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한다.


    발작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특정 단계가 있다. 다만 발작은 의식이 깨어 있을 때 일어나야 한다. (중략) 이 단계에 들어서면 우수와 정신적 암흑, 그리고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다가 느닷없이 뇌가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 들며 순식간에 생명력에 불이 붙는다. 살아 있다는 의식과 감각은 그 순간 열 배나 커지며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중략) 환희와 희망으로 벅찬 가슴에 지성과 신성이 충만하게 찾아든다.


    측두엽뇌전증 환자에게 나타나는, 존재하지 않는 냄새를 느끼는 ‘환취’와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환청‘ 증상

    신을 제 눈으로 생생히 목격했다고 말하며 몸에 극심한 경련을 일으킨 사람이 병원에 실려와 정밀검사를 받았다. 잔 다르크와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물 흐르듯 시간이 흘러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의 일이다.


    그 환자는 예순한 살 여자였다. 다음의 내용은 그의 검사 기록 중 일부다.


    그가 ’신을 봤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 게 첫 번째 증상이었다. 이후 낮에도 같은 말을 하며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다녀온 기분이다!’, ‘벅찬 환희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마음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샘처럼 솟아나고 눈에서 눈물이 솟구친다’, ‘햇빛 아래 만물이 빛나는 모습을 하고 있음을 신께서 내게 일깨워주셨다!’와 같은 말을 반복해서 했다.


    담당 의사는 여자의 뇌를 검사한 결과, 수면 중 왼쪽 측두엽에서 ‘극파(뇌전증의 특징적 뇌파로 발생하는 뾰족한 형태의 파형)’를 관찰했다. 그는 이 부분에 비정상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신경세포가 존재한다는 ‘뇌전증뇌파’ 소견을 냈다.


    뇌전증(Epilepsy)은 뇌의 신경세포가 갑자기, 그리고 반복적으로 흥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질병이다.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의식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등 비교적 가벼운 증상도 있는데, 신경세포 흥분이 뇌의 광범위한 부분에 영향을 미치면 도스토옙스키에게 나타났다는 전신성 발작도 일어날 수 있다. 이 병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의식이 없어지므로 ‘대발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측두엽에 방아쇠가 있다면 측두엽의 역할에 관여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측두엽 하부는 이른바 대뇌변연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감정 작용 등과 연관이 있다.


    대뇌변연계에 있는 편도체라는 신경세포 집단은 다양한 정보에서 호불호를 판정하고 희로애락 감정을 생성한다. 편도(扁桃)는 '아몬드'라는 의미인데, 우리가 주전부리로 즐겨 먹는 아몬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연히 이 편도핵은 감각계 등 뇌의 다양한 부위와 서로 활발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이 부분의 신경세포에 비정상적인 흥분이 발생하면 이런저런 환각(환시와 환미), 감정과 의식 변화, 몽환 상태, 자동운동 등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측두엽뇌전증 발작은 의식 상실이나 경련을 반드시 동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냄새를 느끼는 증상인 ’환취‘나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환청‘을 경험하게 되고 의식과 기분, 기억의 급격한 변화 등의 증상이 주로 나타난다.


    잔 다르크와 도스토옙스키의 뇌를 지배하여 세계사와 세계 문학사를 바꾼 측두엽뇌전증

    소리나 음성을 인식하는 청각기능은 측두엽에 있고 이 부분의 병변으로 환청이 일어날 수 있다. 또 환청을 비롯한 환각 내용은 그 사람의 정신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의 경우 신이나 신의 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다.


    잔 다르크도 도스토옙스키도 측두엽 뇌전증 환자로 추정할 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잔 다르크는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신비 체험을 했으며 ‘프랑스를 구하라’라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신을 의식하던 도스토옙스키도 종소리를 듣고 발작이 시작되어 마침내 종교적 내용의 환각과 도취감을 경험했다.


    도스토옙스키가 황홀 발작이 일어난 순간을 자신의 소설 작품에 생생히 묘사한 부분을 두고 뇌전증의 권위자가 ‘대문호의 창작 능력이 빛을 발했다’라고 평가하여 한때 그의 신비 체험의 진위에 의혹의 눈길이 모아진 적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소개한 증상과 같이 현대 의학에서 정밀검사가 이루어져 상세히 증상이 기록된 황홀 발작 환자의 경우 측두엽에 전형적인 뇌전증뇌파가 관찰되며, 지금은 도스토옙스키가 측두엽 뇌전증 환자였다는 의견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신앙의 힘에 의지해 프랑스를 백년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잔 다르크와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수많은 주옥같은 명작을 써내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칭송받는 도스토옙스키. 한번 가정해보자. 그들이 만일 뇌 질환, 좀 더 구체적으로 측두엽뇌전증을 앓지 않았다면 프랑스 역사와 유럽사, 그리고 러시아 문학사와 세계 문학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위대한 인물, 잔 다르크와 도스토옙스키의 병든 뇌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세계 문학사의 수준과 품격을 한 차원 높였다’고 생각한다.



    넘사벽 천재와 최고의 대가도 무릎 꿇게 한 끔찍한 질병

    위대한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를 마지막까지 괴롭힌 적수 -펀치드렁크 증후군

    캐시어스 클레이는 왜 어렵게 딴 올림픽 금메달을 오하이오강에 던져버렸을까?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Cassius Marcellus Clay, Jr., 무하마드 알리의 본명)는 1942년 1월 켄터키주 루이빌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권투를 시작했다. 당시부터 그는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는데, 아마추어로는 적어도 미국 안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클레이는 열여덟 살 되던 1960년 로마 올림픽에 라이트 헤비급 선수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땄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승리의 환희와 여운을 가슴에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와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했다. 한데 그 자리에서 그는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거부당했다. 이에 분노한 클레이는 거세게 항의한 뒤 어렵게 딴 금메달을 오하이오강에 던져버렸다. 그때까지 당한 온갖 차별과 불공정한 대우에 대한 분노의 표시인 셈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레스토랑뿐 아니라 학교 같은 공공시설이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에서도 노골적으로 백인과 흑인을 차별했다. 캐시어스 클레이가 인종 간 평등을 주장하는 공민권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다.


    1964년, 캐시어스 클레이는 프로 권투선수로 전향한 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Float like a butterly, and sting like a bee)"라는 유명한 말처럼 가벼운 풋워크와 날카로운 펀치로 헤비급 세계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그는 굵고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자신의 펀치를 닮은 독설로도 유명했고 링 위에서도 도발적인 말로 자주 상대를 자극했다.


    이후에도 캐시어스 클레이는 연전연승을 이어가더니 명실상부한 세계 최정상 권투선수의 자리에 우뚝 섰다. 그가 기독교 이름을 버리고 이슬람식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 것은 그 무렵의 일이다. 미쳐 돌아가기 시작한 베트남전쟁 징병을 거부한 대가로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링에서 추방된 때도 그 즈음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대중의 영웅으로 우뚝 선 한 흑인의 반전 운동에 대한 가혹한 보복이자 사회적 린치였다.


    반전운동과 지난한 법정 투쟁으로 5년여 시간이 지났고, 무하마드 알리는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링에 설 수 있었다. 1970년의 일이다. 이듬해 알리가 사라진 이 바닥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조 프레이저 (Joe Frazier)에게 타이틀 탈환을 목표로 도전했으나 판정승으로 아깝게 패배했다. 프로로 전향한 후 그가 겪은 최초의 쓰라린 패배였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만나 인질 해방 문제를 담판 지은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는 서른여섯 살에 세 번째 세계 챔피언이 된 직후 최초로 은퇴했는데, 그 무렵부터 이미 다리가 꼬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른아홉 살 되던 해에 영구 은퇴한 뒤에는 동작이 눈에 띄게 엉성해지고 손이 떨리며 표정이 없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알리는 결국 마흔두 살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파킨슨병이라는 무서운 질병도 무하마드 알리의 열정과 노력에 브레이크를 걸 수는 없었다. 그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뒤에도 사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알리는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로 날아가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만나 인질 해방 문제에 관해 담판을 지었다. 걸프전 직전 스멀스멀 전쟁의 불안한 기운이 감돌던 1990년 무렵의 일이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무하마드 알리의 나이는 쉰다섯 살이었다. 그는 성화를 밝히는 자신의 모습이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면 대중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소신을 밝혔다. 텔레비전에 비친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파킨슨병 증상을 보이는 중증 환자의 모습이었다.


    무하마드 알리를 오랫동안 괴롭힌 질병, 펀치드렁크 증후군으로 인한 파킨슨증

    무하마드 알리를 오랫동안 괴롭힌 질병은 펀치드렁크 증후군(권투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증으로 추정된다. 수시로 뇌에 강한 충격이 가해져 일어나는 뇌 관련 장애다.


    파킨슨증은 파킨슨병 증상으로 펀치드렁크 증후군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파킨슨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흑질 신경세포가 소실된다. 그러나 뇌 현미경 소견에서는 파킨슨병 특유의 레비소체는 발견되지 않아 다른 병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파킨슨병 치료를 시행한다.


    머리에 충격을 받는 일, 즉 ‘두부 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크게 나누어 충격을 받고 쓰러진 뒤 바로 일어나는 급성 두개내혈종과 뇌타박상, 뇌진탕이 있고 몇 주에 걸쳐 서서히 증상이 나타나는 만성 경막하혈종이 있다. 또 알리처럼 뇌세포 수준에서 장애가 생기는 상황은 쉽게 판별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신경세포는 각각 몇백 혹은 몇천 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신경섬유로 연결되어 있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격렬한 두부 타격이 반복되면 그 신경섬유가 흔들리며 망가져 뇌라는 컴퓨터 안에서 수많은 단절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결과 다양한 신경 증상이 나타난다. 때때로 가슴 아픈 학대 사건으로 보도 되는 ‘흔들린 아기 증후군(Shaken Baby Syndrome)’도 어린 아기의 뇌에 격렬한 움직임이 단기간에 반복적으로 가해지면서 손상을 입혀 경련과 의식 장애를 일으키고 때로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무하마드 알리가 앓았던 파킨슨증 외에도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거나 균형을 잃는 소뇌 실조,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언어 장애, 감정 변화와 정신 이상, 치매 등의 증상이 있다.


    래리 홈즈에게 충격적 케이오 패를 당한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는 맨 처음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무렵 신의 경지에 이른 예술적 풋워크를 선보였다. 그러나 5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복귀하고 나서는 상대의 펀치를 허용하며 틈을 노려 상대방을 한 방에 쓰러뜨리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8라운드까지 조지 포먼의 펀치를 허용하다가 한순간의 틈을 노려 콤비네이션 블로(Combination blow)를 꽂아 넣어 승리를 거머쥐었다. 1974년 킨샤사에서 열린 챔피언전에서의 일이다. 그러나 조지 포먼의 펀치를 허용하며 알리도 턱과 얼굴을 맞아 뇌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해 전에는 켄 노턴(Ken Norton)에게 어퍼컷 세례를 당하며 턱뼈가 부서지기도 했다.


    무하마드 알리의 펀치드렁크 증후군은 1980년 라스베이거스 에서 열린 래리 홈즈(Larry Holmes)와의 경기에서 나타났다. 홈즈는 한때 알리의 연습 상대였는데, 이후 무섭게 성장하여 세계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다. 이 경기에서 빠른 속도로 매서운 주먹을 정확히 꽂아 넣던 알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홈즈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10라운드에 케이오 패했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사내가 온몸의 힘을 담아 날리는 주먹은 적게는 몇백 킬로그램부터 많게는 1톤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준다. 그 주먹을 몇 년에 걸쳐 셀 수 없이 얼굴과 머리에 맞은 알리의 뇌에는 당연하게도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시인 보들레르와 암흑가의 제왕 알 카포네를 파멸시킨 질병 -매독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 끝에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유산 권리까지 빼앗긴 보들레르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1821년 프랑스 파리에서 부유한 사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바람에 철이 들기도 전에 크나큰 인생의 쓴맛과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다.


    보들레르는 유년기부터 라틴어로 시를 짓는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며 문학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열여덟 살 나이에 프랑스 최고 수재만 입학할 수 있다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단 한 번의 도전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의 엄격하고 매정한 의붓아버지 자크 오픽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일로 예민한 감수성에 상처를 입은 보들레르는 학업을 내팽개치고 무절제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얼마나 방탕하게 놀았는지 두 달 만에 친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의 절반가량을 탕진해버린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치산자에 버금가는 판정을 받아 남은 재산을 관리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법적 판결로 유산에 손을 댈 수 없게 된 보들레르는 이후 경제적으로 궁핍한 나날이 이어지자 시를 쓰고, 글을 짓고, 미술 평론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 무렵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를 비롯한 낭만주의 예술가를 본격적으로 비평하며 유명해져서 단숨에 미술 평론의 선구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또 그는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들레르는 일찍이 시를 쓰기 시작해 1857년에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을 출간하여 추상적인 근대시의 서막을 열었다.


    당대의 대작가 빅토르 위고에게 찬사를 받은 보들레르, 그러나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매독에 걸려 절망에 빠지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기 파괴적인 생애를 사는 예술가의 전형답게 보들레르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 그의 경험과 감정은 『악의 꽃』에서 유난히 빛난다. 조숙한 보들레르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인 열여덟아홉 살에 매독에 걸렸다. 그리고 서른 살 고개를 넘어 선 뒤에는 신경통과 관절통, 위경련 등의 증상에 시달리며 아편과 에테르로 버텼다.


    요즘 잣대로 보면 유통이 금지되는 마약에 속하는 약물이 당시 에는 일반 의약품으로 사용되었기에 보들레르는 아편과 대마에 관한 에세이도 썼다. 『악의 꽃』 중에는 「병든 뮤즈(La Muse malade)」라는 귀기 넘치는 시도 있다.


    내 가엾은 뮤즈여, 오늘 아침에는 도대체 어인 일이오.

    그대의 푹 꺼진 두 눈은 밤의 환영으로 가득하고

    그대 얼굴에 차갑고 말 없는 광기와

    공포가 번갈아 비치는 모습이 보이오.


    마흔여섯 살에 매독혈관염으로 숨을 거둔 보들레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는?

    서른아홉 살의 보들레르는 길을 걷다가 뇌출혈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 1860년 1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제 현기증과 한몸이 된 모양이다. 현기증이 가시지 않는다. 1862년 1월 23일, 오늘 나는 기묘한 경고를 받았다. 치매의 날개 바람이 내 위를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고 아편과 디기탈리스, 벨라도나, 퀴닌 등 온갖 약물을 복용했으나 이렇다 할 만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보들레르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Non, ki, ki”와 “cre'nom” 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1867년 8월 31일 타계했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이었다.


    그의 병은 매독혈관염으로 인한 진행성 뇌경색으로 오른쪽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편마비와 실어증 증상을 겪었다. 예전에는 젊은 사람의 뇌졸중은 매독혈관염으로 여겨졌다.


    괴로움을 호소하던 매독 환자들의 구세주, 페니실린

    매독은 트레포네마팔리둠균(Treponema pallidum)이라는 병원 미생물로 일어나는, 성행위 관련 감염병이다. 이 세균은 나선균으로 분류되는데 나선균은 매독 병원균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 균에 감염되면 국소적으로 통증이 없는 멍울이나 궤양이 생기고 사타구니 등의 림프샘이 붓는데 증상은 오래가지 않는다. 통증이 없고 오래가지 않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방치하기 쉬운데 절대로 얕보아서는 안 되는 질병이다. 몇 개월 지나면 온 몸에 붉은 반점이 나타나 양매(楊梅) 열매처럼 보인다고 해서 ‘매독(梅毒)’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의학적으로 이 반점은 장미 꽃잎처럼 생겼다 해서 장미진(Roseola)이라고 부른다. 이 반점도 한 달 남짓 지나면 사라진다.


    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몸속에 잠복한 트레포네마팔리둠균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야금야금 온몸의 장기와 뇌에까지 침투한다. 환자는 혈관염과 수막염, 고무종이라고 부르는 염증성 종양, 척수 조직을 침범해 보행 장애를 일으키는 척수로 등의 합병증을 겪는다.


    특히 뇌에 병원체가 침입해 정신 이상을 일으키는 진행 마비가 매독에 대한 편견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감정 기복이 심해지거나 조증이나 과대망상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데 서서히 무력해지고 마침내 치매 비슷한 인지 장애를 일으킨다. 젊어서는 활기차고 이성적이고 적극적이던 사람이 과대망상에 빠져 허풍을 치거나 허세를 부려 주위에 민폐를 끼친다. 그 정도라면 그나마 양반이고 망령이 나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알 카포네의 상태가 전형적인 매독 말기 환자의 경우다.


    슈베르트, 모파상, 니체, 헨리 8세도 피해가지 못한 무시무시한 질병, 매독

    이 병은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왕으로부터 평민, 혹은 노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평등하게 이 병을 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말기에 이르기 전에는 보들레르처럼 창작 의욕을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항진시켜 역설적으로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작곡가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와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 등도 이 병을 앓았다. 독일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등 후세에 남긴 몇몇 작품을 발표한 후 과대망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했다.


    1500년대 초반 영국 왕 헨리 8세(Henry VIII, 재위 1509~1547)도 신대륙에서 건너온 매독에 걸렸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1603)의 아버지였던 그는 후계자가 될 왕자를 낳지 못한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했는데,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로마 교황과 사이가 나빠져 결국 가톨릭에서 독립해 영국 국교회를 창설했다. 캐서린은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재위 1479~1516)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Isabel I, 재위 1474~1504)의 딸이었기에 이 이혼은 훗날 스페인과 영국 사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캐서린은 사산과 유산을 반복했는데, 헨리 8세에게 옮은 몹쓸 병 때문이라고 수군대는 사람이 많았다. 과대망상과 정서 불안 증세를 보이던 헨리 8세는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 되풀이했고 왕비를 여섯 명이나 갈아치울 정도로 변덕을 부렸다. 게다가 그중 둘은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어 처형하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이 억울하게 처형당한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콜럼버스가 가지고 돌아와 아뿔싸 하는 사이에 세계사를 움직인 엄청난 질병이 바로 매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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