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2가지 신소재
 
지은이 : 사토 겐타로(역:송은애)
출판사 : 북라이프
출판일 : 2019년 06월




  •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에서 ‘약’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인류 생존의 역사를 맛깔나게 풀어낸 사토 겐타로가 이번에는 범위를 넓혀 ‘세상을 만든 12가지 대표적인 물질’을 들고 찾아왔다. 전작에서 ‘이 약이 개발되지 않았다면’이라는 ‘역사 속 만약’을 다룬 그는 이 책에서는 혁신적인 물질의 발견으로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펼쳐 보이며 ‘필연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책에서는 각 물질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어떤 사건으로 세계가 연결되고 바뀌었는지를 미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꿰뚫는 한편, 과학 칼럼니스트다운 해박한 지식으로 역사와 과학을 긴밀하게 연결해 독자를 사로잡는다. 


    세계사를 바꾼 12가지 신소재


    인류사를 움직인 찬란한 빛 - 금

    인간을 유혹한 최초의 빛

    세계사를 바꾼 신소재의 첫 타자는 금이다. 금만큼 많은 사람이 갈망하고 욕망했던 물질도 없다. 고도의 야금 기술을 발휘해야만 얻을 수 있는 철이나 구리와 달리, 금은 자연에서 순수한 금속 형태로 얻을 수 있다. 또 다른 물질과는 달리 광택이 나므로 고대인이 발견하기 가장 쉬운 금속이었다. 이런 이유로 금은 아마도 전 세계 많은 민족이 맨 처음 접한 금속이었을 것이다.


    금은 항상 아름답게 빛나며, 어떤 조건에서도 녹슬거나 변하지 않고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이집트 신왕국시대(기원전 1570? ~ 기원전 1070?)의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만들어진지 3,000년도 더 지났지만,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눈부신 광채를 내뿜는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금화는 한때 로마에서 거래에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의 몸을 장식하는 데 쓰였을 수도 있다. 이처럼 금은 인류의 역사와 낭만이 하나로 응축된 존재이기도 하다.


    화폐의 시작, 경제의 탄생

    그럼 금의 가장 중요한 용도, 즉 금화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정설은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 서부의 리디아 왕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금화의 원료는 팍톨로스강에서 채집한 사금이라고 하니 미다스 왕이 금화의 등장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단, 사금에는 은이 포함되어 있고 함유량도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은을 넣어 금과 은의 비율을 맞췄다고 한다. 이 합금 덩어리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깔판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려 무늬를 새김으로써 인류 역사랑 최초로 화폐가 탄생했다.


    ‘가치’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측정할 수 있게 해준 화폐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 영원히 각인되어야 마땅한 대사건이었다. 이전까지는 인류가 소유한 물품을 서로 적당히 교환했지만 화폐라는 매개체가 생김으로써 정확하게, 즉 가치를 정밀하게 측정해 이를 바탕으로 물품을 거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화폐의 재료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귀중한 물품이어야 하고, 작고 운반하기 쉬워야 하며, 오랜 기간 변하지 않아서 가치가 유지되어야 한다. 게다가 일정한 형태로 가공하기 쉬워야 한다. 금은 이 모든 필요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재료였다.


    다만, 금화는 이후 서서히 은과 동(구리)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고대 로마에서는 아우레우스 금화나 솔리두스 금화 등도 주조했지만 기본 화폐로는 데나리우스 은화나 세스테르티우스 동화를 사용했다. 금화는 너무 고가여서 일상적으로 거래할 때는 사용하지 않았고, 대개 저축용으로 사용했던 듯하다.


    어째서 금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까?

    금에는 아직도 커다란 수수께끼가 한 가지 있다. ‘어째서 금만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까’란 문제다. 금속이나 귀중한 재료는 금 이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금만큼 사람을 매혹하고, 광기에 휩싸이게 하며, 포로로 만든 금속은 거의 없다. 다름 금속에는 없는 금이 가진 마력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앞에서 설명했듯이 인류가 맨 처음 임시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금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금의 지위는 은과 동, 심지어 종이로 옮겨갔고, 지금은 플라스틱 카드와 실체가 없는 전자데이터가 그 역할을 이어받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지폐나 전자데이터를 언제나 필요한 물건과 교환할 수 있는 이유는‘이 종이에는 가치가 있다’란 환상을 모두가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금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 역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단 이 환상이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금은 환상이 잠시 머무르기에 최적의 장소일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이 ‘유사시에는 역시 금’이라고 주장하며 재산을 금으로 바꾸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금은 보물로 숭배되고, 금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이 벌어지리라.



    만 년을 견딘 재료 - 도자기

    안전한 식생활을 가져온 터닝포인트

    최초의 도자기인 토기는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졌을까?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정되는 토기는 중국 후난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고에 따르면 약 1만 8,0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일본 아오모리현의 오다이야마모토 유적에서 발굴된 조몬토기 역시 약 1만 6,0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훨씬 옛날부터 토기를 사용한 셈이다.


    일본에서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이다. 날이 풀리고 도토리와 같은 식자재를 간단히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재료를 푹 삶아 떫은맛을 우려내려는 목적에서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견해가 있다. 식량을 확보하게 되자 사냥감을 구하러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필요가 사라졌다. 정착을 위해 토기가 만들어졌든, 토기가 정착을 촉진했든, 인류가 정차 생활을 시작한 커다란 전환점에 토기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다양한 그릇을 사용해 물과 식량을 조리하고 보존하면서 인류는 안전하게 식량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전염병 또한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토기는 인류가 번영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도자기 때문에 숲이 사라졌다?

    점토를 저온에서 구워 만든 그릇을 ‘질그릇’이라고 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도자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땅을 고르는 기술, 수파(물속에서 속도의 차이가 나는 것을 이용해 점토의 입자 크기를 일정하게 맞추는 기술)에 의해 점토를 정제하는 기술, 녹로(흙을 빚거나 무늬를 넣는 데 사용하는 기구)로 형태를 만드는 기술 등 고도의 기술이 발달했다.


    유명한 것이 바로 진시황릉의 병마용으로, 이곳에는 신장 약 180cm의 병사를 본떠 흙으로 빚은 인형이 약 8,000구나 매장되어 있다. 정교하고 치밀한 세공과 규모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에 도달한 기술 수준에 감탄을 금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질그릇을 만드는 것은 병폐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수풀이 울창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사막으로 변해버린 원인 중 하나는 건축 재료나 벽돌을 제조할 때 레바논 삼나무(백향목)를 대량으로 벌채해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데 다량의 벽돌이 필요해지자 삼림을 벌채했다. 이때 많은 삼림이 소실되었다. 고대에는 50%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토고원의 삼림 비율이 지금은 5%로 뚝 떨어졌고, 고원 일대는 건조지대로 변했다. 사막화는 봄에 날아오는 황사의 원인으로 이웃 나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도자기에서 파인 세라믹으로

    처음에는 토기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점토로 만들었지만 머지않아 알갱이 크기가 고른 흙을 엄선하면서 더욱더 훌륭한 토기를 만들게 되었고, 더 나아가 고령석 등의 광물을 이용한 자기가 탄생했다. 도자기의 역사는 원료의 정제도를 높이고 굽는 온도를 조절해 더욱더 아름답고 강한 재료를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오늘날에는 화학 합성 기술로 순도 100%에 가까운 재료를 사용할 수 있고, 알갱이 크기나 굽는 온도 또한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다. 이를 조합해 훨씬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일도 가능하다. 이른바 ‘파인 세라믹’이라 불리는 제품이다.


    이렇게 만든 새로운 재료를 분위기와 같은 예술성의 영역을 제외하고 오로지 기능성만으로 평가했을 때, 그 성능은 지금껏 우리가 도자기에 품었던 이미지를 훨씬 능가한다. 구멍 난 치아를 메꾸거나 예리한 칼을 만드는 데 사용할 만큼 강도가 높은 제품도 있고, 내열성이 높아서 우주로켓이나 대형 가속기에 없어서는 안 될 제품도 있다.


    파인 세라믹이 단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원자 수준에서부터 균일성이 높은 구조라는 점에 있다. 블록을 쌓아 올릴 때 한 군데라도 구멍이나 요철이 있으면 부하가 걸렸을 때 그곳부터 허물어져 결국 전체가 무너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순물이 다량 함유된 천연 점토로 도자기를 만들면 구조적 결함이 많은 그릇이 되고 만다. 파인 세라믹은 고순도 원료를 사용하고 굽기 조건 등을 세밀하게 조절하여 만듦으로써 결함을 크게 줄였다.


    이처럼 고도로 발달한 첨단 재료는 이미 우리 생활에 침투해 있어서 세라믹 없는 생활은 이제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흥미롭게도 첨단 재료 역시 가루를 반죽해 굽는다는 기본 방식은 토기 시대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원료가 되는 원소가 무려 100종류가 넘는데다가 조합이나 비율, 굽는 온도 등을 고려하면 도자기의 가능성은 무한대나 마찬가지다. 만 년 이상을 인류와 함께 걸어온 도자기지만 이 재료가 가진 능력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문화를 전파한 대중매체의 왕 - 종이(셀룰로스)

    종이를 발명한 사람

    종이는 예부터 널리 사용되는 재료로는 드물게 발명자의 이름은 물론 발명 연대까지 확실하다. 발명자는 중국 후한시대(25~220)의 환관이었던 채륜이란 인물이다. 채륜은 발명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어서 그가 만드는 도구류는 정밀하다는 평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 같은 타고난 재능과 자유롭게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는 자리가 만나 역사적 혁신이 탄생한 것이리라.


    서기 105년, 채륜은 나무껍질이나 모시 조각, 찢어진 어망 등을 원료로 삼아 얇고 질긴 종이를 발명해냈다. 역사서에 따르면 채륜이 당시 황제인 화제에게 이 종이를 바치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채륜의 재능을 칭송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기록 매체로 주로 목재 또는 기름을 뺀 대나무를 여러 개 묶어 만든 목간이나 죽간을 사용했다. 이것들은 부피가 커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다루기 힘들었다. 반면, 종이는 글씨를 편하게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얇아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도 않는다. 종이를 말거나 모아서 묶으면 효율적으로 정보를 모을 수 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편리성이 향상된 것이다.


    이집트의 파피루스(파피루스 줄기 껍질을 나란히 놓고 강한 압력을 가해 종이 형태로 만든 것) 등 중국 이외에서도 이미 종이와 비슷한 물건이 발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물건들은 품질이 좋지 않았을뿐더러 값도 매우 비쌌다. 채륜의 공적은 흔한 재료나 폐기물을 원료로 해 종이를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낸 데 있다. 채륜이 만든 종이는 얇고 질겨서, 이전의 종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고품질이었다. 그야말로 파괴적 혁신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채륜은 종이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을까? 먼저 너덜너덜한 모시 천을 깨끗이 빨아서 재와 함께 삶는다. 현대 과학 용어로 표현하면, 알칼리로 가열해 불순물을 분해ㆍ제거해 순수한 셀룰로스를 추출하는 작업이다. 이것을 절구에 넣고 찧은 다음 물에 푼 뒤 망을 덧댄 나무틀로 건져낸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잘 건조하면 종이가 완성된다. 이 제조법은 2,0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의 방법과 기본적으로 똑같다. 이 점을 생각하면 채륜 이전 시대의 유사품이 있었을지언정 채륜을 종이의 발명자라고 단정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양에서는 왜 뒤늦게 종이를 사용했을까?

    751년,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한 당나라는 점차 두각을 드러내던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제국(750~1258)과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부근에서 충돌했다. 바로 ‘탈라스 전투’다. 이 전투는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향을 끼친 원인은 전쟁의 결과 자체가 아니라 당나라군 포로 속에 있던 종이 장인들이다. 장인들에게 종이 뜨기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종이를 접한 아바스 왕조 사람들은 바로 종이의 중요성과 편리성을 깨달은 듯하다. 종이의 재료가 될 만한 식물을 찾아 제지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794년에는 수도 바그다드에 제지소를 세워 행정문서와 공문서에 종이를 사용했다.


    얼마 안 가 종이는 유럽에까지 전파되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제2차 십자군원정에 참전했다 포로로 잡혔던 장 몰로피에란 프랑스 병사가 다마스쿠스(지금의 시리아)의 제지소에서 강제 노동을 한 후 귀향해, 1157년에 제지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지 기술이 전파된 연도를 보면 스페인 1056년, 이탈리아 1235년, 독일 1391년, 영국 1494년, 네덜란드 1586년, 그리고 북미 1690년으로(이들 연대에는 다른 설도 있다), 뜻밖에도 제지 기술이 매우 천천히 퍼져나갔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 제지에 적합한 식물을 좀처럼 손에 넣기가 어려웠던 데 있다. 종이의 원료로 쓰인 낡은 리넨(아마의 실로 짠 얇은 직물)으로, 종이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리넨의 가치도 덩달아 올라갔다. 1666년에 영국에서는 죽은 사람을 리넨으로 싸서 매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을 정도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고틀롭 켈러 Friedrich Gottlob Keller가 목재로 펄프를 만드는 법을 개발한 19세기 중반 무렵에 이르러서야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었다. 유럽에 질 좋은 종이가 풍부했더라면 미술사의 흐름은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세계를 축소한 물질 - 고무(폴리아이소프렌)

    고무를 만드는 식물

    천연고무는 미세한 고무 입자가 섞인 희고 걸쭉한 상태의 수액(라텍스)을 공기 중에서 굳힌 것이다. 라텍스를 만드는 식물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민들레도 그중 하나다. 멕시코에는 사포딜라란 나무가 있어 주민들은 사포딜라 수액에서 얻은 ‘치클’chicle을 씹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껌의 기원이라고 한다.


    라텍스 공급원으로 가장 뛰어난 식물은 고무나무다. 고무나무에서는 라텍스가 많이 나올 뿐 아니라 고무나무의 라텍스로 만든 고무는 탄력성 또한 높다. 더군다나 고무나무 줄기에 상처를 냈을 때 뚝뚝 떨어지는 수액을 모아 말리기만 해도 간단히 고무를 얻을 수 있다. 예부터 멕시코 사람들은 이 수액을 만든 공으로 놀이를 즐겼는데 현재 전용 경기장까지 남아 있다.


    고무가 늘어나는 까닭

    고무의 특징은 월등한 신축성이다. 다른 재료에 없는 이 특성은 고무의 분자 구조에서 비롯한다. 오늘날 고무는 아이소프렌 C5H8이란 분자가 길게 일직선으로 연결된 구조로 폴리아이소프렌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아이소프렌이란 분자는 중요한 단위 구조로, 자연계의 많은 화합물이 아이소프렌을 기초로 형성된다. 감귤의 향기 성분인 리모넨과 박하의 향기 성분인 멘톨은 두 개, 장미의 향기 성분인 파네졸은 세 개, 당근의 색소인 카로틴은 여덟 개의 아이소프렌 단위를 토대로 구성된다. 고무는 이 아이소프렌 단위가 끝없이 길게 이어져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실험이 있다. 부풀어 오른 고무풍선에 귤껍질의 즙을 뿌리면 잠시 후에 풍선이 터져버린다. 비슷한 분자끼리는 한데 섞이기 쉬우므로 껍질에 함유된 리모넨 등이 고무 성분을 녹여 풍선 막을 약하게 만듦으로써 풍선이 터져버리는 것이다.


    아이소프렌 단위에는 탄소끼리 이중결합으로 연결된 장소가 있다. 이중결합은 다른 결합과 달리 회전할 수 없으며, 분자 사슬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긴 사슬에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이중결합 때문에 고무는 분자 전체가 꼬불꼬불한 실처럼 보인다. 이것을 잡아당기면 꼬불꼬불한 부분이 펴지고, 손을 떼면 다시 꼬불꼬불한 형태로 돌아간다. 고무가 지닌 신축성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고무는 나노 크기의 용수철 같은 구조로 되어 있고, 이 용수철이 늘어나고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고무가 없는 시대는 상상할 수 없다

    흔히 바퀴를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한다. 인류의 발명품은 대부분 자연계의 생물에서 그 원리를 터득한 것이지만 바퀴만은 완전히 독창적 작품이다. 바퀴는 다리로 걸을 때보다 에너지 효율이 훨씬 높다. 이 같은 사실은 자전거를 타보면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바퀴를 사용하는 생물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생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는 저서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에서 바퀴가 평탄하고 딱딱한 지면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점을 지적한다. 질퍽거리거나 모래가 많은 땅처럼 마찰이 적은 곳 또한 바퀴에는 부적합하다.


    즉, 자연계에는 바퀴가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할 만한 장소가 거의 없다. 포장된 도로가 없으면 바퀴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너무나 단단한 고무로 만든 바퀴로 달리면 미세한 요철을 넘을 때마다 차에 탄 사람에게 충격이 전해지므로 짐과 차체에 피해가 갔다. 당연히 속도를 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수의사 존 보이드 던롭 Jhon Boyd Dunlop 이다. 열 살 난 아들에게 ‘세발자전거를 더 편하게, 빨리 달릴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던롭은 도로의 요철을 흡수하는 튜브형 타이어를 생각해낸다. 시험 삼아. 나무로 된 원판 둘레에 공기를 넣은 고무 튜브를 리셉(금속재료를 결합하는 데 사용하는 막대 모양의 부품)으로 고정한 타이어를 만들어 세발자전거에 부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타이어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자 던롭은 공기 타이어 특허를 냈고, 1889년에는 더블린에 회사를 설립했다. 이때까지 사용했던 딱딱한 고무 타이어는 겨우 10년 만에 공기 타이어로 완전히 대체되었다고 한다. 던롭의 회사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현재까지 그 브랜드명을 유지해오고 있다.


    가황고무는 발명된 지 백 몇 십 년 만에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고무가 없었던 시대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다. 만일 고무나무가 옛날부터 아시아나 유럽에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만일 로마인에게 고무가 있었다면 로마인의 뛰어난 인프라 정비 능력과 고무 타이어의 효과가 어우러져 지배 영역을 더욱더 넓혔을지도 모른다. 군사령관이 세우는 작전도 달라졌을 테고 성과 도시 또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자유롭게 변화하는 만능 재료 - 플라스틱

    모든 재료의 자리를 빼앗은 신소재

    내가 어렸을 적 주스는 대개 금속 캔이나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 자동판매기에는 병따개가 붙어 있어서, 방금 구매한 주스의 뚜껑 부분을 여기에 걸고 병을 비틀어 뚜껑을 따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쩐지 그리운 광경이다.


    일본에서 유리병이 자취를 감춘 계기는 1982년에 시행된 식품위생법 개정이다. 이로써 폴리에틸렌 테레프랄레이트 PET 로 만든 용기, 즉 페트병을 청량음료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페트병은 가볍고 운반하기 편하며, 투명해서 내용물이 보일 뿐 아니라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뚜껑을 열었다 다시 닫을 수 있다는 점이 획기적이어서 페트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유리병을 시장에서 몰아낸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페트병의 독특한 디자인 또한 다른 제품과는 차별화에 큰 몫을 했다. 원하는 대로 쉽게 성형이 가능하다는 점 역시 유리는 따라 하기 힘든 플라스틱만의 장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플라스틱 섬유로 된 옷을 입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식기로 음식을 먹으며, 플라스틱 카드로 돈을 낸다. 플라스틱 매체로 기록된 영상을 플라스틱제 화면에 띄워 바라볼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저하된 시력을 플라스틱 렌즈로 교정하면서 생활한다. 역사를 통틀어 인류는 수많은 재료를 개발해 다양하게 활용해왔지만 플라스틱만큼 많은 재료의 영역을 빼앗은 것도 없을 것이다.


    플라스틱의 왕, 폴리에틸렌의 탄생

    플라스틱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폴리에틸렌은 가히 왕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존재다. 양동이나 비닐봉지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사용하는 플라스틱 제품은 대개 폴리에틸렌으로 만든다. 생산량으로 따지만 전체 플라스틱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당분간 그 지위가 흔들릴 일도 없어 보인다.


    폴리에틸렌 또한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었다. 캐러더스가 나일론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1933년, 영국의 임페리얼케미컬공업이 에틸렌 가스를 벤즈알데하이드란 물질과 반응시키는 실험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1,400기압, 170℃의 고온고압에서 한 실험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반응 용기를 열어보니 내부가 흰 밀랍 상태의 물질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이 물질은 에틸렌이 여러 개 결합한 물질, 즉 폴리에틸렌이란 사실이 판명되었다.


    폴리에틸렌을 만드는 실험을 할 때, 행운의 여신은 또 다시 그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장치 안에 부족한 에틸렌을 보충할 때 미량의 산소가 들어간 것이다. 이 산소는 에틸렌이 연쇄적으로 차례차례 연결될 수 있게 반응을 일으키는 스위치, 즉 ‘촉매’로 작용했다. 순수한 에틸렌만으로는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해에 폴리에틸렌 제조법이 확립되어 처음으로 생산 공장이 가동되었다. 이 순간은 세계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폴리에틸렌이 레이더 설계에 혁명을 일으킨 까닭이다.


    여태까지 설명한 대로 폴리에틸렌의 역사는 우연한 발견의 연속이었다. 이후 각종 플라스틱의 생산성과 품질을 비약적으로 높인 지글러-나타 촉매의 발견 역시 우연이 크게 작용했으며 테플론이나 폴리카보네이트 등도 행운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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