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역사1
 
지은이 : 박종인
출판사 : 상상출판
출판일 : 2018년 11월




  • 기자들도 인정한 거침없는 필력은 물론 단 한 컷만으로도 그 어떤 메시지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사진으로 잘 알려진 여행문화전문기자 박종인. 그런 그가 전국을 누비며 글을 쓰고 풍경을 포착한 ≪조선일보≫ 최고의 역사 인문 기행 코너 「땅의 역사」가 드디어 책으로 출간됐다. 

    『땅의 역사』(전2권)는 저자가 우리 땅 방방곡곡에서 찾은 역사의 여러 흔적 중 고대사부터 현대의 풍경까지 우리 역사에 ‘중증 내·외상’을 남긴 사건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추려 담았다.



    땅의 역사 1


    소인배 - 비겁 혹은 무능-이들로 인하여 역사는 오래도록 멎어 있었다

    남강(南江)이 피로 물들던 날 선조는 도주 중이었다: 태평회맹도의 비밀과 진주성 전투

    1592년 4월 30일 선조 달아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4월 14일 오전 8시 대마도 오우라항을 떠난 지 9시간 만이다. 그날 부산진 첨사 정발이 전사했다. ‘전사자 속출’, ‘함락’ 소식이 속속 조정으로 올라왔다. 보름 뒤 선조가 서울 모래재를 넘어 평안도 의주로 향했다. 임금이 탄 가마가 지나갈 때 많은 한양 시민이 통곡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많은 시민이 경복궁으로 난입해 전각을 불태웠다. 이틀 뒤 몇 시간 시차를 두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동대문과 남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다. 한양은 비어 있었다.


    1592년 10월 6일 진주대첩

    조선 팔도가 쑥대밭으로 변했지만 호남은 안전했다. 곡창지대 호남을 조선은 반드시 지켜야 했고 일본은 반드시 빼앗아야 했다.


    그리하여 개전 6개월 만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 병력은 3만, 조선군 병력은 3800명. 10대1 싸움에서 조선군이 승리했다. 조총과 활이라는 개인 화기는 열세였지만 천자총통을 비롯한 중화기는 조선이 앞섰다. 진주목사 김시민과 전라의병장 최경회, 경상의병장 곽재우의 성 내외 연합작전에 일본군은 혼란에 빠지고, 결국 조선이 승리했다.


    1593년 6월 21일 2차 진주성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주둔한 병력의 절반을 진주에 집합시켰다. 가토, 고니시, 구로다 같은 명장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했다. 당시 조선에 출병한 병력이 20만이었으니, 절반이 동원됐다. 그 어떤 기록을 봐도 조선군은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날카롭게 조련된 10만 일본군에게 진주성에 있는 조선군과 민간인 6만 명이 학살됐다. 모두가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신임 목사 서예원은 달랐다. 두려움에 도망갈 궁리만 하는 서예원을 대신해 의병장 김천일이 전투를 이끌었다.


    6월 29일 폭우 속 성문이 뚫렸다. 크게 다친 김천일과 최경회, 고종후는 북쪽으로 두 번 절하고 물에 뛰어들었다. 김해 부사 이종인은 일본군 2명을 두 팔로 끼고서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고 외치며 남강에 투신했다. 패배했으되 장엄하였다.


    그때 선조는 평안도 남포 강서현에 있었다. 6월 21일 선조가 탄 가마 행렬을 푸대접한 강서현령 한여숙을 치죄하겠다고 사헌부가 보고했다. 며칠을 무시하던 선조가 이리 명했다. ‘추고하.’(1593년 6월 23일 『선조실록』) 죄를 엄중 조사하라는 뜻이다. 바로 그날 진주에서는 일본군이 진주성을 에워싼 해자를 완전히 메웠다. 본격적인 공성전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다.


    2018년 진주성과 태평회맹도(太平會盟圖)

    임진왜란의 기억을 모아놓은 진주박물관은 진주성 안에 있다. 박물관 수장고에는 ‘태평회맹도’라는 병풍이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나고 1604년 10월 27일 밤 선조가 전쟁 통에 공을 세운 벼슬아치들을 불러 ‘공신회맹제’라는 잔치를 벌이고 만든 그림이다.


    초청 대상은 그때까지 살아 있는 역대 공신 63명. 실제 참석자는 58명. 불참자는 5명으로 류성룡, 정탁, 이운룡과 이산해, 남절이다. 3대첩을 이끈 지도자 이순신과 권율과 김시민을 천거했던 류성룡이고, 옥에 갇혔던 이순신을 변호했던 정탁이고, 이순신 아래 전투를 이끌었던 이운룡이다. ‘늙어서’, ‘아파서’, ‘상중이라’고 변명했다. 류성룡은 자기가 받은 공신 책훈을 취소해달라고까지 했다.


    임진, 정유 두 전쟁 후 전쟁과 관련해 선조가 책훈한 공신은 호성공신과 선무공신 두 가지였다. 호성공신은 자신을 의주까지 무사히 수행한 공신이다. 선무공신은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한 공신이다. 그런데 호성공신은 86명, 선무공신은 18명이다. 호성공신에는 마구간지기와 내시와 심부름꾼도 포함돼 있다.


    목숨 걸고 싸운 의병장들은 그 누구도 선무공신에 선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라 의병장 김덕령은 전쟁 와중에 벌어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며 죽여버렸다. 살의를 느낀 홍의장군 곽재우는 초야에 숨어버렸다.


    선조는 자기 몸 살펴준 사람들 앞가림에 급급한 지도자였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무능함을 숨기기 위해 직업군인, 의병장들의 공은 지워버린 것이다.


    무능한 정권이 자초한 전쟁, 백성들의 붉은 피: 강화도 경징이풀의 비밀과 병자호란

    청을 오랑캐라 배척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조선 임금 인조는 명나라 은혜를 잊지 못했다. 명나라는 왜란 때 군사를 일으켜서 조선을 돕지 않았던가. 전쟁 당시 왕이던 선조는 이순신 ‘따위’ 조선 장수들과 의병 대신 황제국 명나라에 모든 공을 돌렸다.


    그때 명나라 인구는 1억 정도였다. 만주 땅 여진족은 다섯 부족 다 합쳐 100만 정도였다. 그 무렵 누르하치라는 걸출한 추장이 여진족을 규합해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전쟁 후 왕이 된 광해군은 이 새로운 세력에 대한 협조와 두려움을 외교 방향으로 정했다. 소위 등거리 외교다. 명에 대한 배신자라는 핑계로, 그때 야당 세력이던 서인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등극시켰다. 쿠데타 명분이 친명이었다. 인조 또한 당연히 친명이었다. 친명은 즉 배청이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626년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된 홍타이지는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명나라 잔당 모문룡을 조선이 보호하고, 교역 요청을 거듭 거부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전쟁의 징조들

    1636년 2월 후금 권력자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으로 조선에 입국했다. 가지고 온 서류에 인조 정권이 경악했다. ‘우리는 이미 대원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노라.’(1636년 2월 16일 『인조실록』) ‘대원’ 혹은 ‘대원전국’은 진시황이 만들었다는 전설 속 옥새다. 중원을 차지했던 역대 왕조는 이 옥새를 정통성 상징으로 여겼다. 이 옥새를 1635년 누르하치 아들 홍타이지가 손에 넣었다는 말이니, 이제 ‘후금이 황제국임’이라는 뜻이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관료들이 뚜껑이 열렸다. 이미 그 전해 후금 조정이 심양에 온 사신 박로에게 옥새를 종이에 찍어 주며 돌아가 보여주라 했지만 조선 먹물들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1635년 11월 12일 『인조실록』)


    4월 11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심양에서 열린 청 태종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조선 사신 두 사람이 참석했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데, 나덕헌과 이확은 절을 하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이 둘에게 ‘형제국을 무시한 행위’라는 국서를 들려보냈다. 이들이 국경을 넘자 사람들은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고 힐난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두 사람 목을 잘라 거리에 걸자고 주장했다. 인조는 거듭된 양사 주장을 물리치고 각각 백마산성과 검산산성으로 3년 유배형을 내렸다.(5월 27일 『인조실록』『일월록』)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 정권이었다. 그해 10월 청 태종이 선언했다. “11월 25일 전 화친을 결정하라. 아니면 동정하리라. 나는 큰 길을 통해 곧장 경성으로 향할 것인데, 산성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지만 내가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섬으로 나라가 되겠는가. 유신들이 붓을 들어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병자록』)


    청 태종이 말한 그대로 전쟁이 시작됐고 끝났다. 그해 12월 9일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서울까지 10여 개 성은 건드리지 않고 내리 달려서 남하했다. 14일 마침내 청군이 양철평에 도착했다. 지금 서울 은평구 일대다. 청군은 ‘사람은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출입과 왕래도 전혀 금지시켰는데, 다만 우마를 보면 빼앗아가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붙잡아갔다.’(『일월록』) 인조는 여자들과 봉림대군을 강화도로 보내고 숭례문 대신 시체들을 운반하는 문인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급히 도주했다.


    남한산성 풍경

    산성에 들어간 지 13일째. 성안에 말 먹일 풀이 떨어져 말이 많이 굶어죽었다. 그 말을 거둬 군사들을 먹였다. 군사들은 “살이 있을 때 먹이지 왜”하고 원망했다.(『병자록』) 그런데 조정에서는 성 밖에 있는 청군에 술과 소를 대접했다. 관료들은 “고위직을 보냈다가 억류되면 창피하니 아랫사람을 보내자”고 했다.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하급 관리가 갔다. 홍타이지가 말했다. “굶주린 그대들이 나눠먹어라. 팔도의 술과 고기가 우리 마음이다.” 관료들은 “술을 보내자는 놈 목을 베자”고 주장했다.(1636년 12월 27일 『인조실록』)


    설날이 되었다. 인조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망궐례라고 한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누런 우산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1637년 1월 1일 『인조실록』) 이튿날 청 태종이 진영을 찾은 조선 사신에게 말했다. “자식이 거꾸로 매달린 듯 위급한데 아비로서 구원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아비처럼 섬기던 명이 어떻게 너희를 구원할까?”(『연려실기술』)


    17일 청 태종이 다시 문서를 보냈다. “살려고 하는가? 귀순하라. 싸우려고 하는가? 또한 마땅히 나와 싸우자. 두 군사가 접전하면 하늘이 처분할 것이다.” 정권을 창출한 공신은 무능력해도 개의치 않았고, 중화기로 무장한 적 앞에서 최고 지도자가 춤을 추었다. 19일 청군이 성안을 향해 홍이포를 쏘았다. 탄환이 거위알 만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1637년 1월 19일 『인조실록』) 매양 행궁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속으로 한 자가량이나 들어갔다.(『병자록』) 열하루 뒤 인조는 푸른 신하 복을 입고 성 뒷문으로 나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그날 조선은 눈 뜨고 모든 걸 도둑맞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 도장 찍던 날

    일본의 개항 요구

    1868년 왕정으로 돌아간 일본 정부는 조선에 개국을 요구했다. 대마도와 동래를 통해 왜관에서 이뤄지던 교역을 국가 간 교역으로 정상화하자는 제안이었다. 일본 사신 다이라노 요시아키라가 들고 온 수교 문서에 ‘皇室(황실)’, ‘奉勅(봉칙)’따위 단어가 들어 있었다. 문서를 받은 동래부 왜관훈도 안동준은 ‘놀랍고 괴이하다’며 문서 접수를 거부했다. 황제는 오직 하나고 일본은 오랑캐였다.


    1871년 일본이 청나라와 수호조약을 맺었다. 그해 미 해군이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라졌다. 이듬해 대원군은 동지사 민치상으로부터 “일본은 이미 청 황제에 대해 칭신하지 않는 듯하다”는 보고를 받았다.(1872년 4월 4일 『승정원일기』) 대원군은 일본은 곧 ‘서양오랑캐’라고 규정했다. 1873년 일본외상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청나라 실력자 이홍장을 면담했다. 소에지마는 ‘조선과 일본 관계에 청은 간여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았다. 일본은 주도면밀했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1875년 5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부산에 입항했다.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을 공격했다. 4년 전 미군이 파괴했던 그 부대였다. 넉 달 전 열린 어전회의에서 박규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나라에서 황제라고 칭한 것은 주나라부터 수천여 년이 되었다.”(1875년 5월 10일 『승정원일기』) 고종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듬해 일본에서 모리야마 시게루 일행이 강화도에 왔다. 군함을 타고 왔다. 명칭은 변리대신. 자기네 ‘피해’를 조사하고 판정하겠다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무관 출신 관료 신헌을 보냈다. 명칭은 ‘접견대관’이었다. 의전이 당초 목적이었다. 고종은 접견대관으로 나간 신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개화파인 역관 오경석과 역시 개화파인 강위가 수행했다.


    집요하고 치밀했던 일본의 계획

    그 사이 일본은 ‘조선의 종주국’ 청의 의중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1875년 12월 19일 주청 일본 공사 모리 아리노리가 청 총리아문에게 질의를 한다. ‘조선은 청과 무관한 독립국가이니 청은 상관 말라’는 것이다.(『청계중일한관계사료』2권 문서번호 217) 사흘 뒤 총리아문은 ‘조선은 청의 소속 방토이니 침월하지 말라’고 회신했다. 다음 날 모리가 다시 물었다. ‘장래에 조선 정부 및 그 인민이 우리에게 행하는 일에 대해 귀국이 책임을 자임할 수 없다면 비록 속국이라고 하여도 헛된 이름일 뿐.’ 은근한 협박에 총리아문이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의견을 구했다. 질의와 응답은 해를 넘겼다. 1월 4일 총리아문은 ‘속방인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고 회신했고, 사흘 뒤 모리는 ‘속국은 공허한 이름이며 조선과 일본 사이 일은 청과 무관하다’고 했다.


    청의 의지가 박약하기 짝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1월 18일 모리는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주장을 재반박하고 조선과 조약을 맺겠다고 통보했다.


    완전한 상실

    강화도 병영 연무당에서 신헌과 모리야마는 8년을 끈 교섭 협상을 사흘 만에 끝냈다. 모리야마는 신헌에게 13조로 된 조약 초안을 내밀었다. 황제라는 명칭은 쓰되, 이름은 쓰지 않는다는 조건을 일본이 받아들였다. 신헌이 이렇게 기록했다. ‘大’자와 ‘황제 폐하’와 ‘국왕 전하’를 지웠다. 일이 타당하게 되었다.(신헌, 『심행일기』) 나머지 조항은 모조리 통과됐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을 황제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조선 내 일본인 범죄자는 일본 관리가 관할하는 치외법권을 누리게 되었고(10조) 해안을 마음대로 항해하며 지도를 작성하게 되었다(7조). 13개 조항에 분명하게 적혀 있는 이들 불평등 내용에 대해 조선 정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황제라 부르지 않게 됐으니까. 그날이 1876년 2월 27일이었다. 명분에 눈이 가려, 모든 것을 잃은 날이었다.


    떠나던 날, 일본 측 수행원 미야모토 오카즈가 신헌에게 말했다. “귀국은 마치 깊은 산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국외의 일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각성한 이후 후회할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심행일기』) 이후로 오래도록 조선은 무엇을 상실했는지 알지 못했다.


    솔숲은 늘 푸른데 숲에 난 발자국은 모두 다르더라: 담양의 세 기인

    정철이 살았다. 16세기 정적들에게 공포를 안겨준 냉혹한 정치가요, 21세기 대입 수험생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대문장가다. 정철의 친구 고경명도 담양에 살았다. 환갑 나이에 전쟁이 터지자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죽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산 인물들인데 누구는 냉혹한 정치가가 되었고 누구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의사가 되었다. 살아간, 죽어간 방법이 그리도 다르다. 같은 곳 같은 시대 살았던 두 사람 이야기.


    조선의 흑역사, 사화(士禍) 시대

    조선 건국 초기부터 권력을 잡은 개국공신들을 훈구파라 한다. 훈구파는 왕권과 타협과 견제를 주고받으며 국가 체제를 만들어간다. 9대 임금 성종 대에 종합 법전인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국가 체제가 확립됐다.


    이제, 비대해진 훈구파를 성종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성종은 조선 개국을 반대하며 은둔했던 지방 학자들을 대거 중용했다. 속칭 사림파다. 이 신흥 권력집단을 또 옛 권력자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성종이 죽고 4년 뒤인 연산군 4년 무오사화(1498년)를 시작으로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중종 14년), 을사사화(1545년.명종 즉위년)가 잇달아 터졌다. 기득권 집단인 훈구파가 갖은 핑계를 걸어 사림파를 숙청한 암흑시대다.


    50년 권력투쟁에 연패한 사림파는 집단으로 처형되고 유배당했다. 그 가운데 정철 아버지 정유침이 있었다. 왕실과 사돈 관계라 잘 나가던 정씨 집안이었다. 그런데 을사사화에 연루돼 가족이 함경도로 전라도로 경상도로 유배를 당했다. 큰아들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1551년 유배가 풀렸다. 정유침은 전남 담양 창평으로 은둔했다.


    창평에서 완성된 모순된 인격체

    누나들이 왕실로 시집간 덕에 궁궐을 맘대로 드나들던 아이였다. 영민했으되 어른들 권력투쟁으로 그 모든 걸 빼앗긴 정철이었다. 전 나주 목사 김윤제가 정철을 알아보고 자기 정자 환벽당에서 글을 가르쳤다. 김윤제의 학문적 동지인 송순, 임억령, 양산보, 양응정, 김인후가 환벽당에 모여 아이를 함께 가르쳤다. 당대 최고 지성이 총동원돼 지혜와 지식을 쥐어짰다. 정철은 지성의 완전체였다. 11년 뒤 정철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당당하게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1589년 임진왜란 직전 동인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터졌다.(1권 1장 <12. 불운한 혁명가 정여립과 혁명의 산, 진안 마이산 - 참조) 서인 영수였던 정철은 수사반장을 자임하며 동인 당원을 대거 숙청했다. 기축옥사라 한다. ‘기축년에 정여립 옥사가 일어났다. 임금이 정철에게 옥사를 다스리게 했다. 정철이 평소에 과격했던 동인은 죽이지 않으면 귀양 보내니, 조정이 거의 비다시피 했다.’(이중환, 『택리지』「복거총론-인심」편) 임진왜란 직전까지 3년 동안 1000명 넘는 동인 선비들이 죽었다.


    비겁한 권력자, 선조

    동인 학살극이 끝났다. 선조는 정철을 앞세워 이번에는 비대한 집권여당을 정리했다. 옥사가 마무리될 무렵, ‘정철이 뜻이 다른 사람들을 없애고자 하였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선조는 그날로 공식문서 없이 비망록 한 장으로 정철을 강계로 유배시켰다.(1591년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그 무렵 선조가 한 말이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였으니, 토사구팽도 아주 비겁한 토사구팽이다.


    정철의 친구, 고경명과 그 후손

    정철과 같은 마을 창평에는 고경명이 살았다. 정철과 함께 식영정에서 스승 임억령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고경명은 정철보다 세 살 위다. 1591년 동래 부사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 창평으로 은둔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선조가 중국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담양까지 날아왔다. 각지에서 도주한 관군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7월 10일 충청도 금산에서 의병-관군 연합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관군을 먼저 공격했다. 관군이 패배했다. 이에 의병군은 전의를 상실했으나 고경명은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다.


    그날 고경명이 전사했다. 둘째 아들 인후도 함께 죽었다. 큰아들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위해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복수의병장이라 불린 고종후는 이듬해 6월 29일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전해 전사했다. 세 사람은 훗날 ‘불천위’ 지위를 나라로부터 받았다. 4대 이후에도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는 지위다.



    막힌 놈들-왜 그들은 세상에 무지했을까

    그 많던 장영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조선 최고 엔지니어 장영실의 미스터리한 실종

    세종 천문 프로젝트<
    /P>때는 농사가 주요 산업이던 시대였다. 날씨와 절기는 산업 발전과 사회 안정에 필수적인 변수였다. 명나라 역법은 조선과 맞지 않았다. 고려 이후 사용하던 수동식 물시계는 오류가 잦았다. 시간을 재는 기준은 하늘이었다. 세종은 천문을 최우선 국책 사업으로 선정했다.


    즉위 후 3년이 된 1421년 세종은 천문과 역법에 관해 토론회를 열고 윤사웅, 최천구, 장영실을 명나라로 유학 보냈다. 윤사웅과 최천구는 양반이었고 장영실은 노비였다. 이듬해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이라는 천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업무를 맡겼다. 명나라와 아라비아 이론을 바탕으로 이들이 제작한 기계가 바로 물시계요 해시계를 위시한 천문 관측 기구들이다.(『연려실기술』별집 15권, 「첨성」)


    ‘내시 대신 옆에 둘 정도로’ 장영실을 아낀 세종은 그를 면천시키고 상의원 별좌에 임명했다. 이조판서 허조가 반대했지만 세종은 강행했다. 천민을 중용할 정도로 과학은 세종에게 중요한 사업이었다. 왕립 천문연구소 설립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1438년 흠경각 준공으로 완성됐다. 흠경각은 새로운 물시계인 자격루를 설치한 건물이다.


    느닷없는 파직과 처벌

    세종이 진행했던 천문 프로젝트가 끝나고 4년 뒤 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대호군 장영실이 임금이 타는 가마 제작을 감독했는데, 견실하지 못해 부러졌으므로 의금부에서 국문했다.’(1442년 3월 16일 『세종실록』) 한 달 열흘 뒤 사헌부에서 ‘불경보다 더 큰 죄는 없다’며 처벌을 요청했다. 세종은 조사가 끝나고 보자고 답했다. 이틀 뒤인 4월 27일 의금부에서 구형을 했다. ‘곤장 100대.’ 세종은 20대를 감형하고 처벌을 명했다. 장영실에게 “부서질 리 없다”며 제작을 강행한 대호군 조순생은 처벌하지 않았다.(1442년 4월 27일 『세종실록』) 엿새 뒤 장영실에게 곤장 형이 집행되고 장영실은 파직됐다. 파직 처분은 의금부 구형량에 없던 처분이었다.(1442년 5월 3일 『세종실록』) ‘둘도 없는 공을 세운’ 장영실은 그렇게 안전사고 발생 두 달이 못 돼 역사에서 사라졌다.


    예견된 몰락

    아산 장씨 족보에 따르면 장영실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중국인 집안이다. 세종은 “아비가 본래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족보에 따르면 장영실 아버지 장성휘는 고려 말 서운관 판서를 지냈다. 서운관은 천문 담당 관청이다. 족보에 어머니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실록에는 ‘기생’이라고 돼 있고 따라서 모계 상속에 따라 장영실은 동래 관노가 되었다. 그 노비를 세종이 파격적으로 기용해 노골적으로 편애를 했다.


    실록에는 이 ‘굴러온 돌’에 대한 질투가 은근히 엿보인다. 1437년 완성된 일성정시의 기사에는 제작자 장영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434년 자격루를 완성했을 때 장영실 직급은 호군이었다. 이미 오래전 면천을 한 상황이었으나 실록 사관은 그 기사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장영실은 동래현 관노다.”


    장영실을 처벌한 뒤 세종이 벌인 일은 더 기이하다. ‘명하여, 간의대 동쪽에 집터를 보게 하고 마침내 간의대를 그 북쪽으로 옮기게 했다.’(1442년 12월 26일 『세종실록』) 별궁을 짓기 위해 경회루 옆에 있던 천문대를 후궁 안으로 이전하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랬다.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다.’ 그러니까, 명나라와 다른 역법을 사용하는 사실을 명나라 사신들로부터 은폐하려 한 것이다. 두껍고 무거운 신분제 무게가 조직 내 이방인을 망가뜨렸고, 명에 사대하는 뿌리 깊은 조선 왕실 사고방식이 과학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용한 것이다.


    장영실 실종 이후

    과학은 날로 퇴보하였고 장영실은 완전히 사라져 그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872년 아산 장씨 족보가 세 번째 만들어졌을 때, 이 노비 출신 할아버지가 족보에 등재됐다. 아산 장씨 후손들은 왜 당시 비루한 신분 조상을 족보에 올렸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1984년 아산 장씨 문중은 시조 묘가 있는 아산 인주면 문방리에 장영실 추모비와 제단을 세웠다. 지금 제단은 가묘로 변해 그 혼백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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