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버린 위대한 폐허 60
 
지은이 : 리처드 하퍼(역:김후)
출판사 : 예문아카이브
출판일 : 2018년 12월




  • ‘폐허’라는 독특한 키워드를 통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의 큰 흐름을 설명하는 『세상이 버린 위대한 폐허 60』. 저널리스트인 리처드 하퍼는 유적과 지역 문화를 연구하다가 버려져 있는 장소가 지닌 묘하고 안타까운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했고, 수년간 여행하고 취재하면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경이롭고 신비한 폐허들과 그 속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내 이 책에 담았다. 


    세상이 버린 위대한 폐허 60


    마추픽추 : 잃어버린 잉카의 신성한 도시

    페루가 있는 가파른 산 정상의 한쪽 면에 자리 잡고 마추픽추는 평범하지 않은 토목기술과 함께 경건한 종교적 헌신을 과시하고 있지만, 건설된 지 고작 100년 만에 버려졌다. 페루를 침공했던 스페인인들은 이곳을 찾아내지 못했으나, 그들이 몰고 온 파괴 행위로 이 도시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산봉우리에 세워진 왕궁

    마추픽추는 1450년 무렵에 완성되어 1,000여 명의 주민들이 100년 동안 거주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요새였다. 그러나 대재앙 수준으로 인구가 급감하던 시기에 돌연히 버려졌다. 이곳보다 더 방어에 적합한 자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장소는 생각해내기 힘들다. 우루밤바강이 산의 세 면을 감고 흐르는 데다가 가장 아래쪽 절벽은 올라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산봉우리가 버티고 있다. 그곳에는 줄다리를 통해 들어가는 비밀 입구가 있는데 오직 잉카 병사들만 알고 있었다. 어찌어찌 도착했다고 해도 거의 수직으로 솟은 데다 울창한 밀림으로 덮인 절벽과 마주하게 된다.


    도시의 설계 자체도 가히 천재적이다. 가파른 언덕 경사면을 깎아 계단 형태로 지형을 변형시켰는데 사용가능한 경작지를 넓히면서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추픽추에는 농업지역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심지도 있었다. 여기에는 전문가들이 정교하게 깎고 다듬은 돌로 지은 사원, 왕궁, 작업장, 창고, 주택 같은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돌을 쌓을 때는 곳곳에 조그마한 틈새를 남겼다. 지진이 일어날 경우 석벽이 움직이거나 흔들릴 여유를 줌으로써 파괴적인 힘을 상당 부분 완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산신 숭배 의식

    잉카인들의 삶에서 종교는 일상의 일부였다. 마추픽추는 자신들의 신앙을 물리적으로 표현한 존재였다. 도시 전체가 고스란히 신에게 봉헌된 성소였으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공존하면서 솟아 있는 절벽 꼭대기는 대성당이었다. 이곳이 유명한 돌인 ‘인티와타나(Intiwatana)는 일종의 천문학적 시계나 달력이라고 할 수 있다. 솟아오른 해시계의 바늘이 널찍한 평판에 그림자를 던지는데, 그림자 위치가 정확하게 하지점과 동지점을 표시한다. 또한 동시에 제단의 기능도 했다.


    무인지경

    마추픽추 주변 산악지대의 여행 경로를 계속 관리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유지보수가 필수적이다. 연간 강우량이 1,800밀리미터나 되기 때문에 빈번하게 도로나 산길이 유실된다. 또한 밀림의 성장속도가 매우 빨라 잘 정리된 산길도 계절마다 한 번씩 막힌다.


    1536년 지배자인 스페인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스페인인들이 무력진압으로 시도하자 수많은 잉카인들은 외진 페루의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추적자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도로와 주거지를 필사적으로 파괴했는데, 그중에는 오늘날에 유명해진 마추픽추로 이어지는 도로 잉카 트레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도시는 지금까지도 밀림과 산사태로 들어가는 길이 아예 막혀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시대에도 그 다음의 식민지 시절에도 아무도 스페인인들에게 도시의 위치를 말해주지 않았으며 스페인인 스스로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마추픽추는 거의 4세기 동안 바깥 세계에서는 잃어버린 장소가 되었다.



    디트로이트 : 처절하게 몰락한 미국의 자동차 왕국

    녹슬고 있는 자동차 도시

    2013년 7월 디트로이트는 185억 달러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의 도시 파산을 기록했다. 버려진 디트로이트의 충격적인 모습이 전세계의 신문에 실렸다. 이 도시에 붙은 ‘서부의 파리’라는 별명은 19세기 말에 얻은 것인데, 여기에는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전세계 유수의 도시들과 견줄 만한 멋진 건물들이 디트로이트에 죽 들어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운송업계의 부유한 큰손들은 웅장한 주택들을 지었고 넓은 유럽식 대로들은 현대적이면서도 야심만만한 거대 도시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포드와 크라이슬러, 제너럴모터스가 세계의 ‘빅3’ 자동차 회사가 됐는데, 모두 디트로이트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부의 흐름 속에서 이 도시는 넓어지고 솟아올랐다. 충격적인 아르데코 양식의 마천루들이 점점 더 높이 세워지면서 1920년 디트로이트는 마침내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가 됐다. 정확히 30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지만 이후로는 빛을 잃었다.


    뒷걸음질하기

    1950년대에 몇 개의 큰 회사들이 합병됐다. 이를 통해 바닥에 있는 회사들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지만 거대한 제조공장들은 방치된 상태에 놓이게 됐다. 제조회사들은 돈이 많은 국내시장을 갖고 있었는데도 기술혁신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반면 해외의 제조업자들은 훨씬 더 민첩했고 미래지향적이었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제대군인 훤호법(GI Bill) 덕분에 새로 집을 장만할 수 있는 우대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 도시개발자들은 새로운 교외 지역을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자동차가 수송의 주요 수단이 되면서 저밀도 주택지가 새로운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다. 교외에 위치한 널찍한 주택에 살며 커다란 미국산 자동차에 앉아 손쉽게 출퇴근하는 것이 수백 만 보통 사람들이 맞이했던 전후시대의 현실이었다. 곧이어 더 많은 외국산 자동차들이 미국 시장에 들어오면서 국내 생산은 위축됐다. 산업이 붕괴되면서 실업률도 치솟았다.


    1950년 디트로이트는 인구는 180만 명이었지만 2010년에는 고작 71만 3,777명만이 이곳을 고향으로 삼았다. 60퍼센트가 넘는 감소율을 기록한 것이다.


    몰락하고 있는 디트로이트 심장부

    주민 대탈출의 결과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이뤄지고 있는 도심의 퇴락 현상이다. 이 도시에는 전 지역에 걸쳐 최소 4만 개의 집과 아파트, 상업건물이 비어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거주 인구가 너무 적어서 시에서는 응급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애를 먹고 있으며 몇몇 고립된 주민들에 대해서는 쓰레기 수거 작업이나 공공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디트로이트의 30만 5,000개의 건물 소유주 중에서 절반 이상이 세금을 내지 못했다. 77개의 도시 구획에서는 단 1명의 건물주만이 세금을 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디트로이트에는 세계 어느 곳보다 훨씬 더 다양한 버려진 건물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쳉 : 인공 호수 아래로 강제 침수된 비운의 도시

    희생된 도시

    첸다오호에는 천 개가 넘는 섬이 있지만 더욱 아름다운 것은 호수의 잔물결 아래에 있다. 손이 닿지 않는 깊이 40미터 물속에 고대 도시 시쳉(獅城)이 있다. ‘사자 도시’라는 뜻의 이 이름은 ‘다섯 마리의 사자’라는 의미의 우시(五獅) 산기슭에 있어 붙여졌다. 이 도시는 후한(서기25~200년) 왕조 시절 세워졌는데 빠르게 성장해 저장성 지역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지가 됐다.


    그러던 1959년 중국 정부는 첫 번째 대규모 발전소인 시난강 수력발전소 건설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서 당시 중국의 최대 규모인 높이 105미터, 폭 466.5미터의 괴물 댐을 건설해야만 했다. 이 계획은 상하이 시민들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시쳉의 시민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도시가 인공호수와 완전히 수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곧 25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수문이 닫히자 길이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호수가 생겨나며 이 고대 도시는 아주 조금씩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거의 2,000년 동안 이 도시를 굽어보던 산도 물에 압도됐다.


    깊숙이 잠들다

    반세기 동안 시쳉은 수중 무덤에서 잠들어 있었고 이곳을 떠난 주민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곳을 잊었다. 그러던 2002년 무렵, 몇 명의 호기심 많은 지리학자들이 이곳이 아직 그대로 있는지 궁금해했고 상당한 연구 후에 그들은 마침내 탐사용 음파 탐지기 장비를 이용해 마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


    시쳉은 다이버들에 의해 2008년에 재발견됐다. 그야말로 보물 상자였다. 그들을 가장 먼저 놀라게 하는 것은 도시의 거대한 성벽이었다. 여전히 섬세한 조각들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나무로 만들어진 기둥, 계단, 난간들도 놀라운 정도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탐사 이후 훨씬 더 많은 수의 호기심에 가득 찬 다이버들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모험을 좋아하는 관광객들에게 꼭 봐야 하는 장소로 광고되고 있다.


    위트눔 : 너무 위험해서 지도에서 삭제된 광산 마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마을

    청석면은 한때 모든 광물 중에서 가장 유용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가장 유독한 광물로 알려져 있다. 위트눔은 청석면을 캐는 광산 주변에 세워진 마을이다. 인류는 석면이라는 내화성이 있는 섬유성 결정체를 최소한 4,500년 동안 잘 알고 있었다. 부유한 페르시아인들은 석면으로 만든 옷을 불에 넣어 세탁함으로써 손님들을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


    산업화는 석면의 용도를 몇 배로 증폭시켰다. 19세기 말 석면은 콘크리트, 벽돌, 파이프에 들어갔으며, 벽난로용 시멘트, 파이프 절연재, 천장 절연재, 방화건성벽체, 지붕공사, 심지어 정원용 가구를 만드는 데도 사용됐다. 제2차 대전 중에는 수천 톤의 석면이 각종 선박의 절연 파이프, 보일러, 증기기관, 증기터빈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청석면이라고 불리는 크로시돌라이트는 최고의 내열성능을 가지고 있다. 이 광물은 분무식 코팅제, 파이프 절연재, 시멘트 제품에 널리 사용됐으며, 수백만 개의 군용 방독면을 만드는 데도 활용됐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청석면은 방독면으로 사용될 때 가장 치명적이라는 사실이다.


    부정되는 위험

    석면의 위험성이 알려진 시기는 그 효용성이 알려진 것만큼이나 오래됐다.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 서기 61~114년)는 석면으로 작업을 하던 노예들이 병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석면의 치명적인 위험성은 1924년 현대 의학이 확인했으며 미국 광산국은 이렇게 경고했다. “석면가루는 인체에 노출됐을 때 그 어떤 먼지보다도 위험한 물질임이 밝혀졌다.” 이 광물은 채광도 위험하고 가공도 위험하며 사용도 위험한 것으로 입증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석면은 유용한 데다 풍부해서 실질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었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부를 선사해주기도 했다.


    먼지에서 먼지로

    한편 위트눔에서는 광산이 문을 연 첫해에 석면증 환자 1명이 발생했고 일지감치 1948년부터 의사들은 재앙적인 건강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명확한 안전관리 프로그램도 실행되지 않았고 교육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좋은 보수와 이곳의 분위기에 끌려 가족들과 함께 계속해서 들어왔다.


    위트눔 광산은 1966년 폐쇄됐는데, 건강에 대한 우려보다는 수익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주민이 병으로 시달리게 된 시기는 위트눔을 떠나고 한참 지난 후였다. 보상요구가 빗발치면서 위험의 심각성은 명확해졌다.


    2006년 정부는 마침내 전력 공급을 차단하고 모든 공공서비스도 중단했다. 위트눔은 모든 공식적인 지도와 도로 안내판에서 지워졌다. 경고문이 세워지고 오염지역으로 통하는 도로도 차단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기준으로 완강한 3명의 주민이 남아 있다. 또한 몇몇의 용감한(또는 무모한) 방문객들이 매년 이곳을 찾고 있다.


    오늘날에도 멈추지 않는 죽음

    위트눔을 찾기 어려운 것은 외딴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식적으로 이 마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이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취했던 주치들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많은 도로를 뒤엎었으며 다리들을 끊었다. 도로 안내판을 바꾸거나 제거했다. 만약 이 마을에 접근하게 되면 경고 사인이 켜지면서 건강에 대한 위험성을 크고 명확하게 방송할 것이다.


    현재 청석면의 사용은 세계적으로 금지됐다. 백석면 역시 52개국에서 사용이 금지됐지만 여전히 러시아, 중국, 브라질, 카자흐스탄, 캐나다에서 채광되고 있다. 매년 200만 톤 정도가 생산되는데, 대부분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는 건설 회사들이 인도, 브라질, 태국, 멕시코, 파키스탄, 아랍에미리트 같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방화용 시멘트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



    프리퍄티 : 2만 2,000년이 지나야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

    오후 1시 23분 46초

    프리퍄티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착공되던 1970년에 세워졌다. 이곳은 3킬로미터 떨어진 소비에트 발전소에서 일하는 모범적인 직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건설한 모범적인 사회주의 도시였다. 가로수가 줄을 잇고 있는 널찍한 거리에는 풍부한 시설들이 들어섰다.


    1번 원자로가 1977년 발전을 시작하고 1983년까지 네 개의 원자로가 가동됐으며 각각의 원자로는 1,000메가와트의 전기를 생산했다. 이 단계에서 우크라이나 전체 전기 수요의 10퍼센트를 공급하고 있었다.


    예견된 사고

    폭발의 원인은 인간의 실수, 훈련 부족, 원자로 설계의 결함이 동시에 작용해 낳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기술자들은 외부의 전력이 끊어졌을 때도 원자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를 원했다. 점검 계획은 외부 전력을 차단한 다음 천천히 시동이 덜리는 예비 발전기가 가동돼 냉각수 펌프를 작동할 때까지 증기 터빈의 힘을 이용해 냉각수를 계속해서 주입하는 것이었다. 엔지니어들은 안전 통제 장치를 수동으로 전환한 다음 감속재를 중심부까지 밀어 넣었다.


    바로 이때 순간적으로 전력 생산이 급증하는데, 보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시스템이 자동으로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2,000톤이나 나가는 원자로의 윗부분을 찢어 버렸으며 건물의 지붕을 뚫고 날아갔다. 1초 후 더 큰 폭발이 일어나며 고도의 방사선 물질을 인근 지역에 쏟아냈다. 그런 다음에 곧바로 화재가 발생했다.


    뒤늦은 소개 작전

    소련의 언론들은 이 사고를 이틀 동안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바깥세계에서는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1,000킬로미터 떨어진 스웨덴 원자력발전소에서 과학자들이 측정하고 있던 방사능 수치가 급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문제가 제기됐다.


    프라퍄티 주민들은 사고가 발생하고 36시간이 지나도록 이곳을 떠나지 못했는데, 이미 일부 사람들은 기침과 구토를 하고 있었다. 폭발 현장에서 2명이 사망했고 소화 작업을 하던 헬리콥터가 추락하면서 4명이 숨졌으며 그 직후 32명이 급성 방사능 질병으로 추가로 사망했다. 결국 프리퍄티 주민 5만 명을 포함해 인근 지역은 약 13만 5,000명이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이후 수년 동안 넓은 지역에서 방사능의 장기적인 영향이 명백하게 확인됐다. 가장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였으며 최소한 35만 400명이 소개됐다. 더욱이 방사능 구름은 더욱 넓게 퍼져나갔는데, 영국 북부의 양들과 유럽 최북단 라플란드의 순록들도 방사선에 노출돼 폐기됐다. 전반적으로 7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방사성 낙진에 영향을 받았다.



    플리머스 : 화산재에 파묻힌 카리브해의 낙원

    몬트세랫의 에메랄드

    플리머스는 소 앤틸리스(Lesser Antilles) 제도의 길게 늘어선 일련의 섬들 중 하나로 눈물방울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섬은 1632년 이래 줄곧 영국의 해외 영토였으며, 조지 왕조 양식을 따른 주택들과 빨간색 공중전화 부스에서 모국의 특징적인 영향이 뚜렷하게 들어난다. 울퉁불퉁한 해안선과 녹색 언덕으로 이뤄진 이 섬에 아일랜드인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카리브해의 에메랄드’라는 별명이 붙었다(이 섬의 국가는 영국이지만 최대의 축일은 아일랜드의 성인을 기리는 ‘성 패트릭 데이’다).


    1995년 이 섬은 ‘카리브해의 폼페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화산이 폭발하며 아름다운 열대 우림과 물보라를 피우던 폭포들, 번창하던 수도가 치명적인 재에 파묻혀버렸다.


    야자수 아래서 즐기는 호사

    몬트세랫은 사람들이 카리브해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곳을 찬양한 첫 번째 유럽인이었다. 그는 1493년 11월 11일 이곳에서 잠시 항해를 멈췄을 때 섬에 ‘톱니 모양의 산’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였다.


    1977년 비틀즈의 제작자인 조지 마틴 경이 이곳에 에어 스튜디오를 세웠다. 런던에 있는 것들고 ㅏ똑같은 진보된 녹음 시설이었지만 훨씬 더 이국적인 장소에 설치했던 것이다. 다이어 스트레이츠, 더 폴리스,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롤릴 스톤즈, 에릭 클립턴의 음악들이 열대의 은신처에서 나왔다. 매력적인 스타들이 녹음을 끝내고 카페에 앉아 시원한 카리브 맥주를 홀짝이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사실 몬트세랫의 존재 자체가 전적으로 화산 활동 덕분이었다. 2,500만 년 전 해저에서 새어나온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해수면 위로 솟아났고 응결된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섬이다. 콜럼버스가 이곳을 지나간 뒤 502년이 지난 1995년 드디어 야수가 본성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수피에르 힐즈의 화산에서 솟아나온 마그마가 고여 있던 물을 가열시켰고 거의 순간적으로 이 물이 모두 증발했다. 증기와 물과 재와 바위들이 재앙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이곳으로부터 6킬로미터 떨어진 플리머스는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두꺼운 화산재의 덮개에 질식됐다.


    섬의 3분의 2가 재로 뒤덮였다. 플리머스에서는 12월에 소개 조치가 시행돼 유령 마을이 되었다. 1년 넘게 주기적으로 용암 분출과 화쇄류의 흐름이 반복됐다. 1997년 8월 화산은 더욱 격렬해졌고 가장 맹렬한 여러 번의 분출 활동을 통해 마그마를 마구 토해냈다. 화쇄류가 이미 폐허가 돼버린 플리머스에다 진흙과 재를 12미터 더 높게 쌓아 이곳을 현대의 폼페이로 바꿔놓았다. 오늘날 이 섬의 남쪽 절만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공항은 화쇄류에 의해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말살된 수도

    플리머스는 몬트세랫의 수도이자 4,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가장 큰 도시로 상점이나 서비스 시설이 대부분 이 도시에 집중돼 있었다. 3세기 반의 문명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진흙탕에 빠져 익사했다. 선 전체 인구의 3분의 2인 7,000명 정도가 이곳을 떠났다. 많은 사람이 영국 구축함 리버풀호는 타고 빠져나왔다.


    플리머스는 확실하게 버려졌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이 방문객들을 부르고 있다. 수피에르 언덕의 화산은 화산학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연구실 중 하나다. 이곳에 상주하거나 단기적으로 방문하는 과학자들은 이 황폐화된 섬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돈을 가져다준다. 또한 살아있는 화산은 인근을 지나는 크루즈 선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명소가 되어 연기를 내뿜고 있는 괴물에게 감히 다가갈 수 있는 한 가까이까지 가곤 한다.



    미라벨 공항 : 캐나다의 가장 큰 공항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

    도약하는 몬트리올

    올림픽이 시작될 무렵, 캐나다 몬트리올은 10년간 계속되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항공 승객의 수는 매년 15~20퍼센트씩 증가하고 있었다. 몬트리올 인근 도벌에 위치한 몬트리올 공항은 이용자 숫자를 쫓아가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1960년 몬트리올 공항은 ‘몬트리올 도벌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꾸고 더 큰 터미널을 지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규모였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큰 공항 중 하나로 꼽혔다. 이 공항은 모든 유럽 항공사들이 캐나다로 들어오는 관문이 되어 연간 200만 명 이상의 승객들이 이용했다. 1970년대 초 동부 캐나다는 새로운 대규모의 공항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런던 같은 많은 주요 도시에서 지금도 한창 진행되고 있는 논란이다.


    편리하지만 비좁은 예전의 공항을 업그레이드해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먼 위치에 훨씬 크고 좋은 새로운 시설을 세울 것인가? 몬트리올은 두 번째 안을 선택했는데,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첫 번째 안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이었다. 이 경우 희생되는 것은 미라벨 국제공항이었다.


    크게 생각하기

    1975년 미라벨 공항이 문을 열자 이곳의 성장을 북돋우기 위해 몬트리올로 들어오거나 몬트리올에서 나가는 국제선은 강제로 이 공항을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국내선을 계속 몬트리올도벌 공항을 이용하게 했다. 이러한 결정은 실용적인 필요성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기간에 맞춰 미라벨 공항을 개장해야 했으므로 우선 미라벨 공항에서 국제선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국내선까지 수용하는 것은 몇 년 후에 이뤄져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꺾여버린 공항의 날개

    그러나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외국으로 나가는 허브로 미라벨 공항을 이용하고자 하는 캐나다 승객들은 환승을 위해 다른 공항으로 이동해야만 하는 불편함을 직면했다. 더욱이 그 연결마저 시원치 않아서 불편함은 더욱 가중됐다.


    승객들과 항공사들은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대중들은 보다 편리한 몬트리올도벌 공항을 계속 열어두라는 압력을 가했다. 설상가상으로 1970~1980년대 항속 거리가 긴 비행기들이 개발되자 이 공항의 재급유 사업마저 사라졌다.


    미라벨 공항에 불리하게 작용한 또 다른 요인은 불과 5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토론토가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몬트리올을 앞질렀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 지역에 두 개의 공항을 둘 필요는 없었으며 늘어나는 승객 수는 몬트리올도벌 공항을 업그레이드시켜 대응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업그레이드는 2000년에 실행됐다.


    찾지 않은 화물

    미라벨 공항은 곧 화물 공항이 되었다. 마지막 여객기는 2004년 10월 파리를 향해 이륙했음 이후 여객 청사는 즉시 버려져다. 이 공항의 동굴 같은 공용 공간, 복잡하게 설계된 수화물 처리 지역과 통로들은 이곳을 다른 용도로 전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문을 닫은 이후 여객 청사가 중요한 용도로 쓰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영화 로케이션이었다. 아주 적절하게도 2004년 <터미널>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사실 이 영화의 각본이 쓰일 때 이 건물은 해체 작업 일정이 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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